원래는 선종으로 추증되었으나 광해군 9년 선조로 변경되었다. 그 사유로 든 것이 종계변무였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의 부친이 이자춘이 아닌 고려말의 권신이자 이성계의 정적인 이인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은 공로다. 얼핏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전근대 왕조국가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왕가의 정통성을 바로잡는 일로 태조 3년부터 200여년 간 추진된 외교 정책이었다. 여기에 광해군이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하고자 반대를 무릅쓰고 조를 붙인 것도 있다. 일단 조를 붙일 때 실록 보면 선조의 공을 종계변무와 정응태의 무고를 해결한 공로로 돌리고 있다.
지금까지도 임란 당시 수도를 버리고 피난한 것이 즐겨 까인다. 물론 이는 다시 생각해보면 최선까진 아니라도 차선에는 드는 판단. 왕조국가이자 상당히 중앙집권화된 행정부를 운용한 국가에서 왕이 사로잡힌다는 건 말 그대로 국가의 멸망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계속 밀리는 전황에 패닉에 빠져 나라를 버리고 명으로 도망치려 한 것도 모자라 명에서 그것을 가로막자 세자에게 양위하고 자신만이라도 도망치려 했던 것은 당대에도, 이후에도 두고두고 까인다. 참고로 이 사태는 명나라측에서 압록강의 배들을 다 치워버리고 속방의 왕으로써 대접해주지 않겠다고 하자 수그러들었다.
나중에는 신하들의 하야 요구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졌다(평시라면 반역 수준이다). 선조 25년 6월 18일 기사를 보면 요동으로 피하려는 선조에게 서인인 정철과 남인인 류성룡이 양위를 요구하러 갔다가 서로 눈치만 보다가 나왔을 정도다. 남이순, 송희록 등의 유생들 또한 동궁에게 양위하라 며 상소를 올리며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당장 왕의 피난과 임해군 등 일부 왕자들의 만행이 항전중인 백성들의 사기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도 두말할 필요도 없다.
위험을 주장한 황윤길보다 안전할 것이란 낙관론을 주장한 김성일을 신뢰했다는 에피소드 때문에 전쟁 대비가 미흡하여 피해를 자초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쟁 이전부터 침략징후를 감지해서 축성 및 전력증강 작업을 시작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방위태세 정비에 대한 부정적인 분위기가 사회 전체적으로 팽배해 있다는 걸 생각하면 국방에 신경을 쓰려는 의지는 있었으나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쳤다고 할 수 있다(징비록 등에 나타난다).
실제로 경상감사 김수의 경우 도가 지나쳐 전쟁준비가 심하다고 원성이 잦다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 비해 성과가 꽝이었다.
| 비변사가, 왜적은 수전에 강하지만 육지에 오르면 불리하다는 것으로 오로지 육지의 방어에 힘쓰기를 청하니, 이에 호남·영남의 큰 읍성을 증축하고 수리하게 하였다. 그런데 경상 감사 김수(金睟)는 더욱 힘을 다해 봉행하여 축성을 제일 많이 하였다. 영천(永川)·청도(淸道)·삼가(三嘉)·대구(大丘)·성주(星州)·부산(釜山)·동래(東萊)·진주(晋州)·안동(安東)·상주(尙州)·좌우 병영(左右兵營)에 모두 성곽을 증축하고 참호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크게 하여 많은 사람을 수용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서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고 평지를 취하여 쌓았는데 높이가 겨우 2∼3장에 불과했으며, 참호도 겨우 모양만 갖추었을 뿐, 백성들에게 노고만 끼쳐 원망이 일어나게 하였는데, 식자들은 결단코 방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선조수정실록 24년 7월 1일 기사) |
덕분에 임란 초기 일본군에 붙은 부역자들, 통칭 '순왜' 도 다수 나타났다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항은 선조가 의주에 피난가 있던 시절 내린 교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중략) 내 즉위한 지 25년이 되었으나 비록 인덕이 백성에 미치지 못하고 은택을 베풀지 못하고, 세상물정에 밝지 못하여 국정에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본심인 즉 근년에 북방 국경의 많은 변고가 있었음에 비추어 군정이 해이함을 알고 성지를 높이고 호를 깊이 파고 병갑을 굳게 해서 外寇를 막는다고 하여, 중외에 명령하여 감독을 엄히 하였더니, 실지로는 성이 높아지니 국세가 날로 약해지고, 성지의 호가 깊어질수록 백성의 원망도 깊어져서 끝내 와해가 되어 이 지경에 이르고, (중략) (출처 : 정만록. 이호응 역주) |
| 선조수정실록 25년 8월 1일(무자) 기사 (중략) 다만 살피건대 근래 변방에 흔단이 많고 군정(軍政)이 피폐하고 해이해졌으므로 중외에 신칙하여 엄중하게 방비를 더하도록 하였는데, 성을 높이 쌓을수록 국가의 형세는 날마다 낮아지고 못을 깊게 팔수록 백성의 원망이 더욱 깊어지는 것은 정말 헤아리지 못하였다.(중략) |
전쟁준비에 골몰했던 시기가 왜관에서 왜인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이후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래에도 거론되는 전시를 대비한 인재 채용이나 김수가 전쟁준비 심하게 한다고 욕 들어먹은 시점은 보다시피 임란 1년 전이다. 못해도 1년은 준비했단 이야기. 이곳 엔하위키의 임진왜란 항목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실제로 의병이 가장 많았던 곳인 경상도는 동시에 순왜가 가장 많았던 곳이라는 일면 또한 지닌다.
예외적으로 전통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온 함경도의 경우 지방관들이 도망치자 백성들이 지방관을 붙잡아 왜군에게 갖다줬고 왕자들이 행패 부리자 왕자들을 붙잡아 왜군에게 넘겨주는, 다른 지역과는 차이나는 모습을 보인다. 그때문인지 함경도 의병장인 정문부는 함경북도 평사였고 그 병력도 정규군이었다.
이후 정유재란 때 왜군이 진격해오자 보여준 태도는 그다지. 피신하려 하다가 신하들이 피신하지 말자 하니 니들은 지 가족들 다 도망치게 해놓고 왜 왕실은 피신하면 안돼냐 고 했다. 이런 왕을 끝까지 받들어 모신 신하들이 용하다
정치적 수완 등은 상당했던 점을 볼 때 전쟁이라는 극단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임란 중반 이후 나타나는 병적인 의심과 질투심도 없었거나 적었을지 모르니 지금과 평가가 달라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어쨌든 선조는 국가적 위기였던 임진왜란 당시 나라와 백성들을 짊어진 최고 책임자였던 이상 자신이 취한 행동에 대한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과도한 정쟁 유발도 그렇고 오죽하면 과거 선조 항목에다가 선탈린이란 말까지 쓰였을까... 이에 대해 스탈린은 최소한 나라 버리고 도망가려 하진 않았다고 반박하기도 하지만 대신 그는 당시 NKVD가 찾아올 때까지 술독에 박혀 현실도피중이었던 점에선 쌤쌤(...)
개막장이었던 임해군과 순화군을 너무나 관대하게 감싸주어서 이 왕자들이 백성들에게 숱한 민폐를 끼치고 다녀도 제어하지 못했다.
워낙 삽질을 많이한 임금이여서 같이 삽질을 한 손자인 능양군과 함께 인터넷상에서는 하성군으로 격하되면서 까인다. 그래도 이명복이라는 본명으로 까이는 어떤 후손보다야...
반대로 의심병이 많았지만 의외로 인재들을 잘 등용하고 좋은 인재는 가까이 두어 총애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름난 문신들이 선조시절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심지어 송강 정철도 글재주 하나만으로 선조의 사랑을 받았고 이항복, 이덕형, 권율, 류성룡 등 당시 임란때 활약한 문신들 모두 선조가 아끼던 인재들이었다.
이순신의 임란 전 파격적일 정도의 승진도 선조가 밀어붙여 나온 결과. 물론 임란 전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능한 장수들을 중요 거점에 배치시키는 작업의 일환이었지만 재능있는 사람에게 적합한 직책을 주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는 하나의 반증이 될 수 있다. 단지 비슷한 시기에 원균을 더 중요한 곳으로 배치했다는게 이런 장점을 다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