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온조를 백제 시조라 하면서도, 일설에는 비류를 시조로 보는 이견도 다음과
같이 소개해 놓았다. “시조 비류왕의 아버지는 우태(優台)로 북부여 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이었고, 어머니는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
소서노였다. 애초 우태에게 시집가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 아들이 비류이고 둘째는 온조라 했다.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혼자 살았다.
뒤에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자 전한 건소 2년(B.C37) 봄 2월에 남쪽으로 도망쳐 졸본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高句麗라 하고, 소서노를 왕비로 삼았다. 주몽은 그녀가 자신의 창업을 크게 도와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각별히 총애하고 후히 대접했으며, 비류와
온조 대하기를 자기 자식처럼 했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禮氏)에게서 낳은 아들 유류(孺留)가 오자 주몽은 그를 태자로
삼아 왕위를 계승시키려 했다. 이에 비류는 동생 온조에게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왔을 때 우리 어머니께서 전 재산을
바쳐 대왕의 창업을 도와 그 공로로 말하자면 이루 말로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대왕이 세상을 떠나시고 나라가
유류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가 부질없이 이곳에 머물면서 할 일 없이 답답하게 지낼 수만은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의 터를 잡고 따로 도읍을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말했다. 드디어 비류는 아우와 더불어 무리를 거느리고 패(浿)·대(帶)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았다고 한다.
▲ 한성백제박물관에 전시된 소서노가 비류·온조와 함께 남하하는 모형도 ©
편집부 | | 북사(北史)와 당서(唐書)에도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의가 돈독했다. (그는) 처음에 대방고지(帶方故地)에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가
자기 딸을 아내로 주어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했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공손도는 서기 200년대
인물이므로 중국기록은 논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기록이다. 즉 비류와 온조는 고주몽의 아들이 아니라 북부여 왕인 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의 아들이라는 말인데, 필자는 이것이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백제 왕족의 성씨가 고씨가 아니라 부여(夫餘)씨 또는
해씨(解氏)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일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었다면, 소서노가 왕후로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장자라 하더라도 유리에게 왕위가 쉽게 넘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동부여에서 유리가 오자마자 태자로 쉽게 책봉된 이유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친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시조는 비류’라는 이설의 가계도
©
편집부 | | 소서노에 대한 <고구리사초략>의 이상한 기록 그런데
<추모경>과 <고구리사초략>에는 소서노·비류·온조에 대해 위 <삼국사기 백제국본기>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전혀 다른 기록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 <추모경>에는 “연타발의 딸 소서노는 구태와 정분이 나서 좋아하다가 딸
아이를 낳았다. 구태가 졸본의 명문가로서 비록 미려하기는 하나 용맹함이 없어 소서노의 애정이 점차 식어버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소서노가
개가(改嫁)하고자 사람을 시켜 구태에게는 자살하라 권유하고는 주몽에게 지아비가 죽었다고 했으니 이때 나이 17세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 <고구리사초략>에는 “추모대제 2년(B.C36) 을유 4월, 소서노 황후가 아들
비류를 낳았다. 사람됨은 다정하나 나약했다. 5년(B.C33) 무자 정월, 소황후가 아들 온조를 낳았다. 사람됨이 뛰어나게 듬직하고 지혜로웠다.
임금께서 ‘이 아이가 진정 내 아들이오. 비류는 당신을 닮아 온순하고, 이 아이는 나를 닮아 호탕하고 쾌활해 보이지 않소.’라고 말했더니,
소황후는 웃으며 ‘둘 다 당신의 자식인데, 어찌 진짜와 가짜가 따로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라는 비류와 온조가 고주몽의 친자식이라는 기록이
있다. * 이어 “17년(B.C21) 경오 8월, 동부여 금와 왕과 유화부인의 소생인 해소(解素)가 예후와 유리(類利)를 보내주었다.
19년(B.C19) 임인 정월, 유리를 동궁으로 삼았다. 4월, 임금이 서도에서 붕어해 동궁이 즉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19년 4월에 유리가 부여에서 어머니와 함께 오자 기뻐하며 태자로 삼고, 9월에 주몽이 40세의 나이에 사인도 없이
갑자기 죽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구리사초략>에서 찬자가 주몽에 대해 평하기를 “동명은 세상에 다시는 없을
뛰어난 군주였다. 나이 40세 이전에 동쪽 땅을 석권해 700년이나 가는 나라의 기초를 만들었으니 가히 성인이라 할 만하다. (중략) 그러나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있었으니 초기에 후비(后妃) 관련제도를 완비하지 못해 이것이 후에 폐단이 있었다. 나라를 창업함이 급하였기에, 자기의
수명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라고 하여 뭔가 정치적 암투로 인해 주몽이 갑자기 붕어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추모경>에는 “공신들의 딸이 서로 후궁이 되기를 바라며 다투니 추모대제는 공신 18명을 택해 모두 딸들을 바치게 했다. 모두
숫처녀들인지라 이들에게 힘을 기울이다가 정기와 근력이 크게 손상되었으며 하물며 병까지 옮아 스스로의 몸도 지탱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어
지나치게 여색을 밝히다가 몸이 망가져 일찍 붕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태백일사
고구리국본기>에서는 유리가 태자로 정해지자 소서노가 두 아들과 함께 고구리를 떠나 남하해 백제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추모경>에서는 죽음을 목전에 둔 추모대제가 소서노 황후를 불러 유리 태자와 부부의 정을 맺으라하면서 두 사람의 손을 잡아주고는
붕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두 소서노 어하라 존영. (좌)김산호 화백 작품, (우)한재규 화백 작품 ©
편집부 | | 비류와 온조는 고구리 유리명왕의 신하였나?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에 따르면, 추모대제의 뒤를 이어 등극한 유리는 연호를 광명(光明)으로 바꾸고, 어머니 예후를 태후로 올리고 계모 소서노를 선황의 유언에
따라 그대로 황후로 삼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2년(B.C18) 가을 7월 다물후 송양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겨울
10월 백제 시조 온조가 왕이 되었다. 3년 겨울 10월 왕비 송씨가 죽었다.”라고 왕비가 1년 만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씨가 왕후가 된지 1년 만에 죽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오류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유리왕과 송왕후 사이에
태어난 무휼(대무신왕)이 유리명왕 33년(14)인 11살 때 태자로 책봉되었다고 대무신왕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죽은 귀신이 잉태해서
아들을 낳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온조의 백제 건국에 대해 <고구리사초략>에서는 “3년(B.C17) 갑진
정월, 순노와 절노는 비류가 미추홀(彌鄒忽)에서 다스리게 하고, 관노와 계루는 온조가 우양(牛壤)에서 다스리게 했으며,
연노・황룡・행인・구다・비리는 임금이 소황후와 함께 다스리기로 해서 소황후의 마음을 위안했다. 7월 한남왕(汗南王) 온조가 입조해
위나성(尉那城)으로 도읍을 옮기겠다고 청해 윤허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비류와 온조가 유리명왕의 제후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또한 “10년(B.C10) 신해 정월, 비류를 태보(영의정)로 삼았다. 20년(1) 신유 5월, 비류가 37살에 죽었다.
임금은 애도의 뜻으로 음식을 줄여 소황후를 위로했고, 진공주를 비류의 아들 양인에게 처로 주었다.”라는 기록에서 광명대제가 비류를 불러들여
국정의 최고책임자로 등용했는데 10년 만에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미추홀에 나라를 세운 비류가 온조의 나라로
와서는 물이 짠 곳에 나라를 세운 것을 후회하고는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류가 세운 나라에 대해 <고구리사초략>에는
“대무신제 14년(41) 신축 겨울 11월, 엄표수가 크게 불어나 미추홀이 수해로 초토화 되어, 백성들을 서하(西河)로 옮겼다. 엄표 왕 호력을
용산공으로 삼았다. 애초에 추모대제께서 비류를 엄표 패자(淹淲沛者)로 하여 그 읍을 다스리게 했고, 광명제 초엔 봉왕되었다. 비류는 만공주와
혼인해 양인을 낳았고, 양인은 진공주와 혼인해 호력을 낳았다. 3대 67년 만에 나라가 통째로 고구리에게 거두어들여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하에 대해서는 http://www.skyedaily.com/news/news_view.html?ID=17887
참조)광명대제 47년(28) 무자 10월, 임금과 소서노 황후가 두곡 이궁에서 붕어했다. 상은 춘추 68세였고, 소황후는 춘추
83세였다. 둘 다 태후릉 경내에 장사했다. 찬자는 “광명(光明)은 엄하고 굳세어 너그럽진 않았으나 지켜 이룸에 충실했고, 인재 발탁을 권장해
천하를 40년간 다스렸다. 군사는 날래고 양식은 풍족했으니 현명했다 할 만하다. 협보(陜父)・해명(解明)・소(召)후 관련 처결은 모두 흠결이
있었다.”라고 평했다.소서노와 비류·온조에 대해서는 이렇듯 사서마다 기록이 달라 어떤 기록이 맞는 기록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비류와 온조가 고주몽의 친아들인지 아니면 구태의 아들이었다가 주몽의 양아들로 되었는지 확정할 수 없으며, 또 소서노가 추모대제에 이어 아들
유리(광명대제)에게도 계속해서 황후였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이 점은 우리 고대사에 있어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아 보인다.
http://greatcorea.kr/sub_read.html?uid=660§ion=sc3§ion2= 백제의 하남 위례성은
서울시 송파구에 없었다. (4부) 백제의 시국처 대방은
낙랑의 서쪽 (3부) 400년 한사군은
미천태왕이 정벌한 낙랑국의 둔갑 (2부) 식민지 한사군의 핵심
낙랑군은 허구 그 자체 (1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