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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앵자봉(670.2m) 속리산 천황봉에서 백두대간을 벗어난 한남금북정맥은 칠장산(492m)에서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으로 나뉜다. 한남정맥은 김포 문수산(376m)까지
이어지는데, 용인 못미처 문수봉(403m)에 이르면 북동으로 가지 하나를 분가시키는데, 이 가지가 ‘앵자지맥’이다. 앵자봉은 천진암성지로 천주교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산이다. 앵자봉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되기 시작되었고, 지금은 앵자봉 일원이 천주교 성역 순례길로 지정되어 있다.
신유박해와 병인양요 때 가톨릭 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들었던 산으로, 천진암은 한국 최초로 가톨릭이 전파된 곳이기도 하다. 천진암에서 들어가는
앵자봉 일원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성역 순례길로 지정되어 있으며, 100년 계획으로 국내 최대 규모의 성전이 건립되고 있어 가톨릭교인들에게는 알려진
산이다.
★세번째 헬기장에서 해협산방향으로~~(이정표를 꼭 보세요)
♣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 천진암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창립주역 이벽 선조께서 1770년 15세 때부터 1784년까지 약 15년간 학업과 수도에 전념하던 독서처가 있었고, 1777년부터는 여기서 이승훈, 정약전, 정약종, 권상학, 김원성, 이총억, 등 젊은 선비들과 함께 천학을 연구 실천하였으며, 때로는 권철신 같은 당시 저명한 원로 학자도 참석하는 천주교 교리연구 강학회가 개최되어, 학문적 수준에 있어 천학을 종교적 신앙차원으로 발전, 승화시켜, 천주공경 기도와 음력주일 제정, 실천 등 천주교 신앙 실천의 도장이 있던 곳이다. 젊은 선비들이 이벽 성조를 웃어른으로 삼고 모여들자, 이벽 성조께서는 문하생들에게 성교요지를 지어 받아써서 배우게 하였고, 당시 젊은 선비들은 천학총림, 즉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이루었으며,1783년에는 처음 개종한 선비들과 힘을 합하여 대표자로 이승훈 진사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하여, 1784년 봄 2월에 영세하고 오게 하였으니, 천진암은 바로 천주교 신앙운동의 국내 최초 본거지였다. 이렇게 젊은 선비들 중심으로 결성된 천진암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이승훈 진사가 북경에서 영세 귀국한 1784년 초여름부터 자리를 서울로 옮겨, 수표동 이벽성조의 자택을 집회소로 삼아, 본격적인 전도활동에 힘썼으며, 1785년 봄에는 명례방 김범우 통역관의 집으로 장소를 옮겨, 더욱 더 천주교를 발전시켜, 1785년 을사년의 국내 첫 박해를 격으면서 1885년 말까지 100년간에 잔혹한 박해를 이겨내면서 오늘의 한국천주교회로 발전하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처럼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의 움이트고 싹이 돋은 한국 천주교회 신앙의 고향이며, 전 세계에 유례가 없이, 한국천주교회만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천주교 발상지이다. 이 성지의 천진암 옛 터에는 이벽, 이승훈, 권일신, 권철신, 정약종, 5위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묘소가 모셔져있고, 조선교구 설립자 정하상, 유진길 성인의 묘소와,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가족들인, 이부만(이벽 성조 부친), 이석(이벽 성조 동생), 경주이씨(이벽 성조 누님), 정지해(정약용 선생 조부), 정재원(정약용 선생 부친), 정약전(정약용 선생 형님), 등의 묘소도 가까운 남쪽 등너머 성역 내에 모셔져 있다. 또한 이 성지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과 이벽성조를 기념하는 천진암 기념비와 함께, 천진암 강학당 기념표석, 이벽성조 독서처 기념표석이 세워져 있다. 특히 이 성지 천진암에는 한국천주교 발상지의 고유한 특성에 필수적인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과 한국천주교천진암전시관이 있으며, 한민족100년계획천진암대성당이건립되고 있다. 더욱이 100년계획 천진암대성당 건립 현장에는 축성된 통돌 100톤의 천진암대성당제대석과, 통돌 30톤의 교황 요한바오로2세 강복문 머릿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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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행을신청합니다
안종길
감사합니다
산행 신처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