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떠나는 전적지 답사>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6·25전쟁실
작성일: 2017-12-13 09:12:22
자유·평화 지킨 희생도심 속 살아 숨쉬는 대한민국 안보 명소
1994년 서울 용산에 문 연 전쟁기념관
참전 당시 자료·장비 전시… 국내외서 명소로 꼽아
6·25전쟁실 들어서자 시선 압도하는 ‘장진호전투’ 기록들
제2연평해전 ‘참수리-357정’ 있는 야외 전시장도 인기코스
기사사진과 설명사진=이헌구 기자 |
전쟁기념관은 2010년 관람료를 무료로 전환한 이래 매년 관람객이 꾸준히 증가해 온 대표적인 안보명소다. 또한 우리나라를 찾는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연간 관람객 200만 명 중 외국인은 10%가량으로 추산된다. 6·25 참전국(16개국)과 의료 지원국(5개국)뿐 아니라 중국·일본 등에서 온 관광객들도 많다. 세계적인 여행전문사이트 ‘트립어드바이저’에서 ‘트래블러스 초이스 어워드’ 명소 부분을 선정하기 시작한 2013년부터 전쟁기념관은 4년 연속 3위 안에 올랐다. 2015년에는 주요 관광명소를 제치고 대한민국 명소 1위에 선정되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2016년 아시아 랜드마크 TOP 25’에서 대한민국 명소로는 최초로 ‘경복궁’과 함께 ‘전쟁기념관’이 선정된 바 있다.
전쟁기념관은 전쟁을 주제로 우리 선조들이 목숨 바쳐 참전한 각종 기록과 유물자료를 보존,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1990년 9월 28일 기공식을 한 뒤 1993년 12월에 건립됐다. 개관은 1994년 6월 10일에 이뤄졌다.
과거 육군본부 자리인 3만5000여 평의 드넓은 부지에 세워진 전쟁기념관은 3층 규모로 총 7개의 실내전시실과 어린이박물관 야외전시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실내전시실에는 1만점 안팎의 유물과 자료가 전시돼 있는데, 자세히 둘러보려면 서너 시간 이상은 족히 걸릴 정도로 방대하다.
기사사진과 설명1950년 12월의 함경남도 장진호 전경. 사진=이헌구 기자 사진=이헌구 기자 |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전쟁실, 해외파견실, 국군발전실, 기증실 등 7개 전시실 중 관람객들 발길이 가장 몰리는 곳은 6·25전쟁실이다. 전시실 입구인 2층 좌측에는 6·25전쟁실 Ⅰ관과 Ⅱ관이 있다. Ⅰ관은 북한의 남침과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상황이, Ⅱ관은 북진과 휴전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기록과 유물·자료가 전시돼 있다.
Ⅱ관의 첫 전시실에 들어서면 6·25전쟁 기간 중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월까지 있었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먼저 입구 우측에 전시된 장진호전투에 대한 기록과 유물·자료가 시선을 압도한다.
장진호는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면·중남면·서한면에 걸쳐 있는 한반도에서 가장 거대한 인공호수다. 이곳에서 1950년 11월 북진하던 미 해병대1사단이 중공군 9병단 12개 사단의 공격을 받고 함흥으로 철수작전을 펼친 것을 흔히 ‘장진호전투’라고 부른다.
기사사진과 설명전쟁기념관의 6·25전시장 입구에 세워진 장진호전투 전시물. 사진=이헌구 기자 |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였던 장진호전투는 궁극적으로 흥남철수작전으로 이어졌고, 세계 전쟁사에 한 획을 그었다. 전략상 의미에서 장진호전투는 효율적인 군대의 철수가 목적이었고, 실제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장진호전투와 흥남철수작전이 전쟁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가장 큰 이유는 군대의 성공적인 철수작전 진행뿐만 아니라, 전쟁과 무관한 십만 명에 가까운 민간인 구출작전도 함께 수행됐다는 데 있다. 역설적이지만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위대한 인간 승리를 가져다 준 것이 바로 장진호전투다.
기사사진과 설명전쟁기념관 입구에 세워진 형제의 상. 국군과 북한군으로 맞서 싸웠던 형제가 전쟁터에서 만난 모습이다. 사진=이헌구 기자 |
전쟁사에서 장진호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스탈린그라드전투와 함께 세계 2대 동계전투로 유명하다. 그러나 두 전투의 결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독일의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 소련군에게 포위된 독일 제6군의 항복을 막기 위해 파울루스 사령관을 원수로 승진시켜 항복불가 입장을 강력 지시했으나, 파울루스는 끝내 소련군에 항복했다.
반면 장진호전투에서 미 해병대1사단은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도 사상자와 편제장비를 그대로 유지한 채 중공군의 집중 포위를 돌파했다. 이뿐만 아니라 추격해 오는 중공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해 궁극적으로 승리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 비밀은 6·25전쟁실 Ⅱ관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장진호전투 전시물에 새겨진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이라는 문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사사진과 설명전쟁기념관 우측 야외 전시장에 전시된 각종 무기. 6·25전쟁 당시의 전투기와 전차를 비롯해 각종 전투장비가 망라되어 있다. 사진=이헌구 기자 |
‘후퇴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 장진호 전투
장진호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이 발발 배경이 됐다.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 장군은 1950년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1월 1일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1군단을 좌측, 미 제7사단을 중앙, 미 해병1사단을 우측으로 하여 중국 국경선까지 진격하라는 공격명령을 하달했다.
당시 미 해병1사단은 동부전선을 담당하고 있던 제1선 부대였다. 북진을 거듭하던 해병1사단은 서부전선 부대와의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 북쪽까지 진출했다. 그런데 그해 11월부터 유독 혹독한 한파가 몰아쳤다. 무려 영하 40도에 이르는 강추위는 차량과 전차의 연료를 얼어붙게 만들었고, 총조차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다. 물·식량 역시 얼어붙었고,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은 북한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참전 결정을 내렸다. 무려 12만 명 규모의 제9병단(12개 사단 병력)이 전쟁에 투입됐다. 11월 27일, 미 해병1사단이 주둔하고 있던 유담리 베이스캠프를 공격하기 시작한 중공군은 매일 밤 뿔피리를 불어대며 공세를 펼쳤다. 미 해병1사단은 모든 전투병사와 비전투 병사들을 동원해 진지를 방어했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역부족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미 해병1사단의 소식은 전 세계에 타전돼 자유진영을 안타깝게 했다. 반면 중국 당국은 승리를 확신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이때 사단장 스미스는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꾸어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훈시로 전 장병에 명령했다. 이에 따라 12월 6일, 철수작전이 시작됐다. 해병1사단 전 장병은 탈출로를 막아대는 중공군을 차례로 격파하며 흥남을 향해 전진했다.
중공군은 4개 사단을 추가로 투입해 미 해병1사단의 철수작전을 악착같이 저지했다. 중국은 미 해병1사단을 섬멸하여 미국인들에게 충격을 주기 위해 연일 전황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미국 언론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맞불을 놨다. 한마디로 장진호전투는 세계인이 생중계로 그 과정을 지켜본 드라마틱한 싸움이었다.
장진호전투의 환경은 미군이 여태껏 겪은 역사상 최악의 지옥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옥과 같은 혹한은 중공군도 마찬가지였다. 보급을 원시적인 수단에만 의존했던 중공군은 혹한의 산속에서 고립돼 추위와 굶주림으로 전투력을 상실하곤 했다. 중공군이 압도적 병력으로 포위망을 형성하고도 미 해병1사단을 격멸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였다.
결론적으로 미 해병대의 의지는 중공군을 압도했다. 미 해병1사단은 사투를 거듭하며 12월 11일 흥남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비록 4000명 가까운 전사상자 피해를 입었지만, 중공군 9병단의 피해는 전사자만도 2만5000명으로 추산될 정도로 더 심각했다. 거의 궤멸 수준이어서 중공군 9병단은 이후 전선에 투입되지 못하고 4개월 동안 부대정비에만 매달려야 했다.
항공기로의 철수를 거부하고 육로를 택한 미 해병1사단의 분투는 막대한 장비와 보급품의 유기를 막았다. 무엇보다 북진 중이던 미 10군단과 국군1군단 등 아군 여타부대들이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확보해 주었다.
특히 10만의 피란민이 동반 철수에 성공한 흥남철수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장진호전투는 중공군의 함흥 진출을 2주간이나 지연시켰다. 이로 인해 유엔군은 흥남철수작전을 통해 흥남 부두의 피란민 20만여 명을 남쪽으로 탈출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장진호전투에 대한 미국의 평가는 결코 곱지 않았다.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보도했다. 또한 미군의 전사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기도 했다.
장진호전투는 미 해병대 3대 전투이자 6·25전쟁 3대 전투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오늘날 성공한 작전으로 재평가되기까지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되기까지 당시 참전용사와 관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다. 특히 해마다 장진호전투 기간인 11월과 12월 사이에는 전쟁기념관에서 사진전 등 다양한 행사를 열며 장진호전투의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 전쟁기념관이 북한 땅인 장진호전투 현장을 대신해 상징적인 역할을 맡아온 것이다.
대한민국의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6월 28일 미국을 방문해 찾은 미 해병대 장진호전투 기념비에서 연설을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연설에서 부모가 흥남철수작전 시 피란민이었고, 장진호전투의 결과로 배를 타고 피란할 수 있어 오늘날 자신이 있었다며 감사의 뜻을 전한 바 있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이 연설문 속에 바로 장진호전투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전쟁기념관은 실내전시실 외에도 사방에 볼거리가 즐비하다. 중앙 전시실 입구 앞으로 대형 6·25전쟁 조형물을 비롯해 유엔참전용사 기념비, 전사자명비, 형제의 상, 평화의 시계탑 등 각종 시설물이 몰려 있다.
또한 기념관 우측에는 야외전시장이 있는데, 6·25전쟁 당시 사용했던 대형 장비와 세계 각국의 항공기, 장갑차 등 160여 점이 전시돼 있어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히 제2연평해전 당시 북한해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다 침몰한 참수리-357정을 전시한 안보전시관은 야외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이 꼭 들르는 단골코스다.
전쟁기념관은 전쟁의 교훈을 통해 전쟁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곳이다. 12월의 어느 하루, 전쟁기념관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그곳에서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는 고대 로마 전략가의 명언처럼 전쟁을 통해 자유와 평화의 소중함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