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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 25일 평화목교회 주일예배 설교
김소리 전도사
베드로후서 3:8-15상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요즘 날씨가 참 덥습니다. 무더운 날씨 속에 잘 지내고 계신지요? 올 여름은 유난히 더 더운 것처럼 느껴집니다. 장마가 역대급으로 길었던 작년과 다르게, 올해는 유난히 짧게 끝나서 유독 더 덥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2년째 계속되는 코로나와 마스크착용에 피로감과 답답함이 더해져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참고로, 작년 장마는 1973년 통계를 시작한 이래 가장 긴 장마기간으로, 6월 24일부터 8월 16일까지 54일이었다고 합니다. 평년 장마기간은 약 31~32일로 한 달 가량이라고 하는데요. 올해는 7월 3일부터 시작되어 지난 19일에 끝나, 평년의 절반을 약간 웃도는 17일 만에 끝이 났다고 합니다. 이러니 올 여름이 더 덥게 느껴질 수밖에요.
어쨌든, 이렇게 날씨도 무더운데다가, 이미 장기화된 코로나가 앞으로도 길어질 것이 확실시 되어 여러모로 참 힘든 요즈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나와 내 주변에서 기쁜 일이나 기쁜 소식이 있기를 기대하곤 합니다. 그 일들을 통해 힘을 얻었으면 해서 말이지요. 상황이 힘들다고 마음까지 마냥 힘들면 살아가기가 너무 힘드니, 기쁜 일로 힘을 얻어 그래도 기쁘고 힘차게 살아가고자 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이런 기대와 바람과는 달리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기쁘게 하고,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는 소식을 기대하고, 그로 인해 위안을 얻고 힘을 내고 싶은데, 그보다는 우리를 화나게 하거나 분노케 하고, 낙심케 하고, 지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소식이 더 많이 들려오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몇 달 전 온 국민을 공분하게 했던 한국토지주택공사 직원들의 무더기 부동산 투기 사건이 있습니다. 4개월 전인 3월에 이슈 됐던 소식이기에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는 요즘의 소식이라기엔 거리가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이 사건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를 시작으로 이와 비슷한 소식들이 계속해서 전해지고 있고, 그로 인해 우리가 여러모로 참 힘들기 때문입니다.
먼저, 한국토지주택공사는 국토교통부 산하 공공기관으로, 국토교통부가 주도하는 신도시 건설 및 주택 보급, 도시 개발, 토지 등 부동산 관련 업무에 참여하고 그 사업을 진행하는 공기업입니다. 그래서 도시의 어느 지역에 무엇이 들어설 것이며, 어느 지역이 어떻게 개발될 것인지, 재개발될 곳이 어디인지, 신도시가 어디에 세워질 것인지 등 부동산과 관련된 정책의 정보들을 정부가 발표하기 전에 미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점을 악용하여 이곳의 수많은 직원들이, 아직 시장에 공개되지 않은 내부정보들을 통해 개발되고 건설될 지역의 땅과 집을 미리 사두거나, 그 정보들을 자신의 가족과 친인척, 지인들에게 알려주어 사게 하거나, 부동산 강의랍시며 학원이나 메신저에서 강의나 방을 만든 후 돈을 받고 그 정보를 파는 등 부정부패와 비리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오를 대로 오른 집값 때문에 집이 없는 사람들의 비율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고, 해마다 집값이 상승하는 비율을 소득이 따라오지 못하는 상황이 고착화된 지 오래되었고, 그래서 내 집 마련하는 것 자체를 포기한다는 말이 나온 지가 10년이 되어가는 상황인데도, 공공기관의 직원들이 버젓이 이런 일을 벌인 것이지요.
한국토지주택공사법에 따르면 LH의 설립목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 1조 “이 법은 한국토지주택공사를 설립하여 토지의 취득ㆍ개발ㆍ비축ㆍ공급, 도시의 개발ㆍ정비, 주택의 건설ㆍ공급ㆍ관리 업무를 수행하게 함으로써 국민주거생활의 향상과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을 도모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LH의 수많은 임직원들이 국민주거생활의 향상과 국민경제의 발전이 아닌, 자신과 자신의 가족. 친인척, 지인들의 주거생활의 향상과 그들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일한 것이지요.
바로 이 점이 많은 국민들이 공분했던 이유입니다.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업무와 정보를 공적으로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사회와 국민들이 처한 상황은 등한시하고 자기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는 데에 이용했다는 점 말이지요.
게다가 이 일로 많은 국민들이 모두다 더욱 분노를 느낀 이유는, 이번 정부가 들어서게 된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2016년에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을 겪었습니다. 국가의 중요 정책을 법적으로 약속된 사람과 기관이 아닌,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주도했다는 점, 그리고 그 정책이 국익과 공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박근혜와 최순실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서였다는 점, 그리고 이 비상식적이고도 위험한 통치행위들을 제지, 충고하고 직언하는 사람이나 기관이 없었다는 점, 혹여 이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나 기관 및 집단이 있다면 대통령이라는 권력을 오남용하여 그 자리에서 쳐내고 생명과 생계를 위협했다는 점이 많은 국민들의 공분을 샀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이게 나라냐”면서 탄핵을 요구하며 정의를 외쳤습니다. 그 결과 그해 겨울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었고, 2017년 봄이 시작된 3월에 헌법재판소는 대통령의 탄핵은 정당하다며 탄핵심판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배경 속에서 그해 5월에, 현재의 정부가 탄생 되었습니다. 촛불을 들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혁명을 일으켰다하여 ‘촛불혁명’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출발한 정부이기 때문에, 또한 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취임사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많은 국민들이 이번 정부에 대해 기대감을 가졌고, 비틀어졌던 것들이 바로 잡히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이전 정부와 같이 부정부패와 비리 사건이나 권력을 사사로이 오남용하는 일은 없거나 극히 드물 것으로 기대하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 일로 이전 정부가 무너지는 것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한, LH 무더기 부동산 투기 및 비리 사건뿐만 아니라, 지금의 정부를 세운 여당의 한 국회의원자녀들이 최대주주로 있는 항공사에서 250억원에 달하는 직원들의 임금을 지급하지 않고 미루고, 그 국회의원은 직원들에게 임금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국회의원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자녀들에게 편법으로 증여했고, 이를 통해 자녀들이 최대주주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또한 이 국회의원은 작년 4월에 있었던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뇌물과 경선투표 조작 등 5개의 공직선거법을 어긴 것으로 기소되었고, 현재 1심에서 징역 1년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은 일도 있습니다.
그리고 LH 직원들의 비리 사건에는 농지법을 위반하거나 편법으로 이용한 것이 주된 방법이었는데요. 그들이 주로 이용한 수법은, 몇 년 안에 개발이 진행될 곳인데 아직 개발이 되지 않아 농업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토지를 싸게 사들인 후, 법에 걸리지 않게끔 눈가림용으로 풀과 나무 등을 심어놓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발표가 되면 용지가 변경되고 땅값이 오르기 때문에 그것을 엄청난 금액으로 팔아 차익을 남기는 수법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농지는 실제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만 살 수 있는데, 이에 걸리지 않기 위해 그런 척 풀과 나무를 심어놓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실제로 농사는커녕 관리도 하지 않다가, 발표가 나면 비싸게 되파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와 결을 같이 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현 정부에서 3년 반 동안 국토교통부 장관으로 재임했던 사람에게서도 발견됐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현 정부 들어, 많은 국민들이 본인의 집을 소유할 수 있기 위한 정책을 펼쳤는데, 그 중에 하나가 1가구당 1주택만 소유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국토부 장관은 두 채의 주택 중 한 채를 팔았는데, 실은 자기 형제에게 판 것에다가 그 형제도 다주택자가 되어 다시 또 다른 형제가 구매를 한 것이 드러났고, 게다가 그나마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은 그 형제가 아닌 장관의 남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장관이 1가구 1주택 정책을 펼쳤지만, 정작 본인조차 이를 지키지 않고 편법으로 2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주택이 있던 곳 역시 농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집 주위의 땅 역시, LH 직원들의 사례와 같이 식물이 심어져는 있으나, 죽어있거나 관리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의도치 않게, 정치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는데요. 정치평론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전 정부에서도 일어났던 비슷한 일들이 현 정부에서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역시 세상과 사회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신의와 성실을 지키며 살 필요는 없어”라고 낙담하며 포기하고 있는 요즘의 현실과 분위기를 말씀드리고자 예를 들었는데, 조금 과하게 소개한 감이 다소 있습니다만, 이것은 일부만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외에도 현 정부의 공정거래 위원장을 역임하고 청와대 정책실장인 사람이 임대료 인상폭을 5%로 제한한 ‘임대차 3법’ 시행 이틀 전에 청담동 아파트 전세값을 8억5000만원에서 9억7000만원으로 14.1%(1억2000만원) 올려 경질된 일도 4달 전에 있었구요.
비슷한 시기에 ‘임대차 3법’(계약갱신청구권·전월세상한제·전월세신고제)을 대표발의한 여당의 국회의원이 법안이 통과되기 한 달 전에 보증금 3억원 월세 100만원이던 것을 보증금 1억원 월세 185만원으로 전환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경우는 임차인이 새로운 사람이기에 법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법에서 정한 전월세 전환율을 많이 뛰어넘었다는 점, 그리고 그 법을 대표발의 해놓고 그랬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또, 지난 3월에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90억원대의 부동산을 매입하며 그 중 40억원을 대출받은 정황이 포착된 소식이 한 달 전에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이런 일들과 소식은, 앞서 말씀드린 요즘의 현실처럼 사회에 영향을 주고 그 분위기를 더욱 심화시킵니다.
“봐라, 이번 정부는 그릇된 것은 바로 잡겠다고, 다시는 이런 일을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약속한 정부인데도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냐, 또한 이 다짐과 약속을 정치인들만 한 것이 아니지 않냐? 국민의 상당수가 평화적인 방법으로 정의를 외치며 촛불집회에 참여하거나 그 목소리에 공감 및 동참하면서 그런 사회를 다같이 꿈꾸며 기대하지 않았냐? 그런데도 그 결과, 지금의 현실을 봐라. 달라졌냐? 안 달라지지 않았냐? 여전히 자신에게 부여된 힘을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급급하고, 남에게는 엄격하지만 나에게는 관대하고, 현재 이익과 욕심을 채우고 있는 사람이든 힘이 없어 채우고 있지 못한 사람이든 간에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이 돼있지 않느냐, 그래서 힘이 없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며 자신도 그런 힘을 가지면 저렇게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어떻게든 그 힘을 가지기 위해 불법과 편법 등 수단방법을 안 가리지 않냐? 그러니 나도 더 이상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는 저 대열에 합류해야겠다. 더 이상 늦으면, 나에겐 저런 기회조차 없다. 신의? 성실? 그게 다 뭐고 무슨 소용이냐? 돈과 부, 그리고 그것을 가져다 줄 힘이 최고지”라는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는 것이 요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경제적, 사회적으로 여러모로 힘든데 앞서 말한 소식들이 자꾸 들리어, 이런 풍조가 더욱 빨리 넓게 퍼지고 심해지고 있기 때문에 더욱 힘든 요즈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역시, 이러한 분위기에서 결코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각과 삶에 깊이 파고들어 우리가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나도 어떻게든 돈, 재산을 불리고 싶다. 그리고 편하게 좀 살고 싶다. 이를 위해서 사회 사람들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래도 조금은 타협하고 살아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사리사욕을 비우고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에 담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것도 좋지만, 상황에 따라 유하게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해. 특히나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너무 그러면, 굶어 죽기 십상이야. 나 혼자라면 모르지만, 가족들이 있자나. 가족들은 무슨 죄야.’ 라며 이미 우리 속에 스며들어서, 그것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기재가 작동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에 오랜 시간 지속적으로 노출되다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약속에 대한 신뢰가 옅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왜 자꾸 이런 일들이 끊이지 않는 거야? 저런 사람들은 왜 끊이지 않는 거지? 하나님은 살아계실까?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다면, 왜 저 악행과 악행을 일삼는 저들을 그대로 놔두시는 걸까?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악에 노출되어있으며 그 유혹을 받고 있는데, 왜 하나님은 그것을 가만히 보고만 계시는 거지? 정말 하나님은 존재하실까? 역사하실까?’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처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에는, 힘 있는 자가 그 힘과 동시에 그 힘을 지닐 수 있었던 삶의 방식, 패권의 방식을 내려놓고 다함께 어울리며 아름답게 공존하며 살아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며 약속하셨다고 하는데, 왜 몇 천 년이 지나도록 바뀌지 않는 거지? 왜 늘 그런 일들이 반복되는 것이지? 그렇다면 세상을 변화시켜 새로운 세상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정말일까? 실현될 가능성이 있을까? 지금의 현실로 봐서는 더 심해지면 심해졌지 전혀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데?’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런 악을 행하던 사람들과 그 악에 분노하며 비판하던 사람들이 점차 무감각해져, 오히려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고, 심지어는 어느새 그들과 동화되어 같은 길을 추구하며 그 길을 걷기도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일컬어 ‘내로남불’이라고도 말합니다. “비정상적인 관계를 맺는 것, 또는 행동에 대해 남이 하면 분노하고 비판하며 불륜이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도 그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일에 대해 전혀 다른 잣대로 바라보며 그것은 낭만적인 로맨스라고 정당화하고 합리화하는 모습 말이지요.”
물론, 오늘 본문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것에 대한 고민을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악과 악한 일을 한 사람에 대해 분노하며 비판하던 사람들이 똑같이 그 길을 걸어가는 모순적인 상황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10절에 ‘주님의 날’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즉, 베드로후서의 집필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반드시 다시 오신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은 반드시 도래한다.”는 종말의 약속을 다시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부분, 하나님의 약속을 함축하는 ‘새 하늘과 새 땅’(13절)의 도래에 대한 신뢰와 그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의 자세를 본문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흐릿하고 가망 없어 보이는 우리의 상황과 현실 속에 그 약속을 상기시키어 신뢰하게 하며 그 약속을 견지하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정신과 자세로 살아가게끔 한다는 점이, 설교의 앞부분들이 비록 본문과는 달리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본문을 통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숙고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집니다.
먼저 베드로후서의 상황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지연됨으로 인해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즉 하나님나라에 대한 약속은 거짓된 것이다. 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는대로 살아도 된다.”라는 주장이 다른 곳이 아닌 교회공동체 안에서 생겨나 영향을 주던 상황입니다.
그 근거가 되는 본문은 1:16-21절로, 요약하면,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의 소식을 전했는데, 이것은 꾸며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위엄,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신 변모산 사건을 직접 보았으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 내가 좋아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이점은 성경의 예언자들도 증언도 뒷받침한다.”는 것입니다.
또 2:12-22절인데요. 20-21절에 “그들은 주님을 따르는 길에 들어섰지만 이내 다시금 돌아섰다”고 말하고 있고, 13-15절과 18-19절은 “그들이 소위 ‘자유’를 언급하며 자신들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꾀지만, 그것은 자유가 아닌 육체의 정욕에 종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3장 전체인데요. “여러분의 기억을 되살리어 여러분의 순수한 마음, 순수한 신앙을 일깨우려고 합니다. ‘재림을 고대하던 조상들, 사도들과 1세대 그리스도인들이 다 잠들었지만,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니 그 약속은 성취되지 않는다.’라고 유혹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인데, 잊지 말아라. 주님의 약속은 이뤄지지 않거나 더딘 것이 아니다. 그저 오래 참으실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가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그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며, 그에 걸맞은 삶, 거룩한 행실과 경건한 삶을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런 점이, 현재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봐라.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살아도 된다. 아니, 왜 그렇게 살지 않느냐? 그것은 스스로의 자유를 제한하는 어리석은 것이다. 세상과 사회가 변할 것이라는 기대? 소망? 다 부질없는 것이다. 그것은 거짓이다. 이뤄질 리가 없다. 그러니 너 혼자 괜히 헛고생하지 말고, 세상이 흘러가는 그 흐름을 맞춰라. 그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너도 그렇게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만 손해 본다. 그런 자유가 있는데 왜 그것을 사용하지 않느냐, 그것은 참 어리석은 것이다”는 우리의 상황과 말이지요.
그리고 악한 길에서 뉘우쳐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그것이 잘못된 마음과 행동이며, 여전히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은 길을 잘못 가고 있음을 알고, 그것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의식을 가져서 그 길을 청산할 것처럼 보였던 사람들이, 그들이 처한 현실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약속이 가망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자, 다시금 예전의 길과 삶의 방식을 선택하여 걸어갔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 역시 그 유혹에 노출되었던 상황이, 인생의 경험과 역사를 통해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많은 사람들이 그 일과 사람을 비판하면서 앞으로는 그런 일을 발생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개혁하고 그 일에 공헌하겠노라 다짐했지만, 막상 자기가 힘을 가진 상황에서 현실을 마주하자 그 힘과 이익, 돈과 부를 선택하며 앞서서 범했던 잘못을 다시 반복하는 길을 걸어가고 있으며, 힘과 돈이 없는 사람 역시 그 분위기에 현혹되는 이 시대의 나와 우리의 모습, 상황이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러한 풍조 속에서 우리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진정 우리는, 이 풍조와 이 길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우리 역시 역사 속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잘못된 길에서 전향했다가 다시금 돌아서는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힘, 돈과 재산, 사리사욕을 채우는 길이 얼마나 잘못됐으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임을 몸소 경험해 깨달아 그 길을 걷지 않겠노라 했지만, 모든 사람이 전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이뤄지지 않으며, 따라서 완전히 돌아서서 내려놓는 것은 내가 손해 보는 것이라는 그 전의 길의 위협과 달콤함, 매력에 압도되어 다시금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현시대의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그 위협에 압도되고 달콤함과 매력에 젖고 빠져들어 그 길을 걸어갈 수밖에는 없는 것일까요?
대체 우리가 이 길을 걷지 않으려면, 혹은 다시금 이 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베드로후서는 본문 3:9절을 제시합니다.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약속을 더디 지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여러분을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즉, “우리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더딘 것 같고, 나아가서는 불가능하며, 가짜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 약속이 완전히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지금 그 약속을 완전히 이루신다면, 심판 받아 멸망될 사람이 많기 때문에,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 길에서 돌아설 기회를 잃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들일지라도 불쌍히 여기셔서 오래 참으시는 것이지. 약속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15절에 이를 한 번 더 반복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뤄지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을 낙심하고 포기하는 사람이 속출하고,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약속, 의로우심이 거짓이라는 것은 결단코 아닙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완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까닭은,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끝없이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경험하고 깨달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며 걸어가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끝없이 참아주심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정으로 그 사랑의 생명의 길을 걸어가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있기 때문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현재 이 생명의 길에 들어섰으며,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이 생명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8절과 15절을 종합하면, 비단 이것은 그리스도인에게만 허락된 것, 즉 그리스도인에게만 오래 참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시는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마치 하나님과 등지고 점점 멀어지는 길을 걸었던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여전히 그리스도의 길과 내 본능의 길에서 갈팡질팡하며 그 달콤함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께서 오래 참아주시는 것처럼 말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된 길에 발을 내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는 까닭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도, 하나님께서 거짓말쟁이어서도 아니라 순전히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뤄질 것이고, 그 증거로 아직도 많이 부족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증언하기도 힘든 나이지만, 그럼에도 지금의 내가 이 정도나마 변화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은 실현되고 있다는 증거로 생각하며, 비록 사회의 분위기는 하나님의 약속과 거리가 멀어보일지라도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계속해서 그리스도 예수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또한, 그 유혹에서 아직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나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나, 모든 사람을 향해 측은히 여기는 마음,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부디 이 땅과 사회에 우리 인류를 위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곳곳에 깊이깊이 전해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기억하며 우리 역시 다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품으며 오래 참아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게 되기를,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생명의 길을 걷는 복을 누리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