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종탑 밑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햇빛 아래 보슬보슬 내리는 호랑이 장가비를 보며 그 비가 너무도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져서 비가 그치고 밤이 되도록 그 종탑 밑에서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한번도 느끼지 못했던 포근함, 남들이 말하는 부모의 포근함이 이런 것이었을까! 지금은 그때 쓰러진 아버지를 보고도 외면 했던 저 자신이 너무 부끄럽고 아버지께 무릎 꿇고 죄송한 마음이 그지 없습니다.
혹독한 가난과 증오 속으로 결국 아버지는 저의 장래를 위해서 그 계모와 결별하기로 결정하고 무작정 저를 데리고 나왔고 그때부터 정말 가혹한 가난 속에서 한 곳에서 6개월 이상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 저리 이사 다니며 저의 사춘기와 학생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마땅한 기술이 없었으므로 5평도 채 되지 않는 월셋방에 비밀 댄스 교습소를 차리고 겨우겨우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댄스 교습은 풍기문란이라 하여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1년에 몇 번씩 경찰서에서 몇 주 구류를 살고 나오고 또 이사 가고, 또 단속반에 걸려서 유치장에 가는 생활이 수없이 반복되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정체 불명의 여자들과의 싸움. 학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들의 가장 싫은 질문이 아버지의 직업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저에게는 가정이라는 의미는 없었습니다. 계속적으로 쌓여가는 증오와 아버지에 대한 미움은, 저를 결혼해서도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삐뚤어진 저의 마음을 치유해 주지는 못했으며 '혹시 내일 또 형사들이 아버지를 잡으러 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하루도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왜 나는 이런 아버지를 만났을까? 왜 나는 저렇게 매일 숨어 다니는 아버지를 만났을까?' 하는 불평 만이 저의 자아를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이미 불량학생과 술과 담배는 유일한 저의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한달 이상 집에 돌아오지 않아서 저를 버리고 간 줄 알고 그렇게 원망하던 아버지를 울면서 찾아헤매던 기억, 결국 아버지가 삼청 교육대에 갔다 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에 대해서 얼마나 증오했는지, 때로는 가정이 행복한 아이가 얼마나 미웠는지 모릅니다. 가능하면 저보다 행복한 아이를 조금이라도 슬픔을 주기 위해 참으로 몹쓸 짓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가난함과 사랑 받지 못함을 도둑질로 대신하여 만족함을 얻었습니다. 남의 물건을 훔칠 때 느끼는 묘한 쾌감과 만족함은 이미 허물어져 버린 양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럴수록 깊어 가는 우울함이 얼마나 저에게 해로운 것인지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가끔씩 만나는 호랑이 장가비만이 짜증나고 한없이 소심해 있는 저에게 따뜻함과 포근함을 주기도 했었습니다. 고2 때 갑자기 대학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것은 집과 가장 멀어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 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는 내신이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험만 잘 치르면 되었으므로 무작정 공부를 시작했고 등록금이 없는 저는 장학생으로 갈 수 있는 지방대학교를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저보다 행복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어설픈 복수심으로 낮에는 학교에서, 밤부터 새벽 2시까지 림스치킨 가게에서 일하며 저녁은 손님들이 먹다 남은 음식으로 주로 대신하면서 정신 없이 지내며 대학원까지 마치고 석사장교 시험에 응시했지만 실패하고 바로 일반병으로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군 제대 후 사회 생활을 하면서 제가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마시고 싶은 것을 가리지 않고 마음대로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리라고 생각하며 저의 미래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치유될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미움과 서러움은 저의 육신과 마음을 학대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로 다시 태어나기 아버지학교를 알기 전까지는 참으로 불균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겪었던 그 상처로 인하여 제가 가정에서 너무 엄격하고 아내의 아주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며 자녀의 탄생에도 그리 기뻐하지 않았고 교회와 사회에 나가면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가정에서는 오직 저의 의견만이 중요하고 온통 아내에게 상처만 주는 행동과 말뿐이었습니다.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고 성관계도 그저 필요할 때 성적 충족으로만 여기며 지냈습니다. 의지는 있었으나 치유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아버지학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학교 안산 3기가 개설된다는 것을 알고 그저 교회에 적응한다는 생각으로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준비된 작업이었습니다. 1주차 후 아버지에 대한 편지는 그토록 미워하고 증오했던 아버지를 용서 하게 되고, 눈물로 편지를 쓰면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고 제 자신의 아버지와의 관계가 사랑과 용서로 회복되지 않으면 우리 자녀에게 또 하나의 아픈 기억을 물려주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미워하는 아버지가 아니라 보호하고 사랑해야 하는 아버지를 발견하게 되고 저 또한 아내와 자녀에게 사랑 받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내와 자녀에게 허깅과 축복을 할 때 발바닥까지 찡한 감동으로 또 한번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쁨과 감사와 회복을 알리는 눈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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