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미모자를 그렸나》 펴낸 아나운서 출신 소설가 손미나
한 편의 로드 무비를 보는 듯한 소설
천수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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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잔,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는 영혼이다. 투우사의 칼에 찔리는 한이 있더라도 정면으로 끝없이 달려드는 소설을 쓸 것이다.”
소설가 김탁환이 손미나씨의 소설을 읽고 건넨 말이다. 우리에게 손미나씨는 ‘아나운서 출신의 여행작가’로 인식되어있는 터라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라는 소설 한 권을 들고 돌아온 그가 낯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김탁환 작가의 말대로 그는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는 영혼’이었을지 모른다. 그에게 붙는 ‘갑자기’ ‘돌연’ ‘변신’이라는 수식어는 철저히 타인의 시선일 뿐, 그는 늘 이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왔다고 말한다.
그동안 그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 《태양의 여행자》 《다시 가슴이 뜨거워져라》 등 여행서를 펴냈고, 《엄마에게 가는 길》 《연필 하나》 등 번역서도 냈다. 그는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2년째 살고 있다. 그가 스페인 바로셀로나로 유학을 갔을 때도 ‘돌연’ ‘갑자기’라는 표현을 썼지만 실상 그는 충동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고, 조용히 준비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시작보다 중요한 것은 끝이라고 생각해요. 한층 더 성숙한 인간으로 나아가기 위해 고민했는데, 제 대답은 ‘생각하기’였어요. 인생을 생각해보고 주변의 것들을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나 자신을 깊이 있게 뚫어보고 그런 과정을 자연스럽게 옮기다 보면 소설이 되겠구나 했지요. 내 가슴 안에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게 있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로 1년 반을 지냈어요. 첫 장을 써내려가기까지요. 어찌 보면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어요.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끊임없이 나 자신과 대화를 했죠. 제 머릿속에, 영혼에 박힌 기억들을 더듬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그 아이를 찾아가는 시간이었어요.”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이하 ‘미모자’)는 대필 작가(고스트라이터)로 일하는 장미와 의사인 로베르, 배우 테오와 화가 최정희라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추리 형식으로 교차된다. 이들의 삶이 파리와 런던, 프로방스 등을 배경으로 영화처럼 펼쳐진다.
“운명과 인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우주의 본질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어떤 장르의 소설을 쓰든 ‘사랑’은 늘 중심에 놓일 거예요. 잡힐 듯 말 듯 잡히지 않는 게 우리 인생이지요. 누구에게나 현실은 언제나 불안정하고, 불완전하고, 미완성입니다. 그래도 미래를 꿈꾸고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사는 게 사람이잖아요. 대필 작가라는 직업은 그런 사실을 드러내기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단다. 그는 세계적인 제약회사들이 극비리에 아프리카인들을 대상으로 임상실험을 하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의와 박애정신에 대해 고뇌하는 의사의 모습을 로베르를 통해 그리고 있다. 화가 최정희와 아버지의 갈등은 욕망이 어떻게 가족관계를 단절시키는지를 보여주고, 가난한 배우 테오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통해 인간이 운명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그린다. 그는 소설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갈지, 사회 정의를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물음을 던진다.
“박학다식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테오에 대해 이상적인 인물이라고 하는 독자가 많더군요.”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쓴 일기장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데, 가끔 열어볼 때마다 웃음이 난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사회나 세계 평화, 국제 정세에 관심이 많았어요. 교육문제를 비판해놓은 내용이 많더군요. 소설을 쓰면서 아주 작은 사물들에까지 관심을 기울이게 됐고, 그 과정에서 제가 성장했다는 게 느껴져요. 빨리 파리로 돌아가 다음 소설을 쓰고 싶어요.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은 저에게 신비로운 경험이었어요.”
남프랑스의 여러 마을 다니며 소설 구상
소설의 배경이 된 프로방스의 봄레미모자 마을에 미모자꽃이 피면 사방이 온통 꽃이라 꽃을 밟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프랑스에서 매년 ‘꽃이 아름다운 도시’로 선정되는 곳이다. 노란 미모자꽃은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워 누구든 한 번만 보면 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미모자꽃이 핀 풍경을 그린 그림은 두 쌍의 연인들이 사랑을 키워가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장미가 잃어버린 가방을 찾기 위해 찾아가는 남프랑스의 여러 마을은 소설 속 주인공만큼이나 개성 있는 곳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 중 파리나 런던 남아공은 가본 곳이고, 보니외와 봄레미모자는 우연히 알게 된 도시예요. 봄레미모자는 영화 〈초콜릿〉에 등장하는 도시처럼 중세 분위기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18세기 낡은 건물에 살면서 오후에는 박물관・미술관에 가거나 때때로 자전거를 타고, 식재료를 사다 먹을 걸 간단히 장만해놓고 하루 종일 글을 구상하거나 산책을 하던 그는 갑자기 보니외라는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12월 어느 날이었는데 ‘1년 반이 지났는데 이렇게 글을 쓰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나는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가’ ‘난 왜 소설을 쓰고 싶어 하는가’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을 때였지요.”
소설 속 배경이 된 보니외와는 그렇게 만났다.
“보니외는 아티스트들이 많이 머무는 도시로 유명한데, 라벤더가 필 때는 도시 전체가 보라색으로 푹 싸인답니다. 겨울에는 텅 비는 도시지요. 언젠가 다시 가서 여름 한철 그곳에 머물고 싶어요.”
《나는 모나리자를 훔쳤다》를 쓴 아르헨티나 작가 마르틴 카파로스는 “모든 소설은 여행과 같고, 모든 여행은 한 편의 소설이다”라고 했다. 기자 출신 작가인 마르틴 카파로스는 그가 바로셀로나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면서 알게 됐는데, 아르헨티나 여행기를 쓰기 위해 아르헨티나에 머물 때 축구장에서 우연히 재회했다고 한다. “당신의 삶이 흥미롭다”며 마르틴 카파로스가 인터뷰를 청해 그는 현지 언론에 실리고 방송에도 출연했다고 한다.
그의 소설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에는 ‘로드 무비 픽션’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의 소설을 읽다 보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어 왜 그런 부제가 붙었는지 알게 된다. 그는 조만간 파리로 돌아갈 계획이다. 그곳에서 그는 파리에 관한 책을 쓰면서 한국문화원에서 진행하는 한국문화 알리기 행사에도 참여한다. 누구나 한번 가면 사랑에 빠진다는 파리에서 그가 또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지켜보는 즐거움에 빠져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