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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희(手搏戱)
맨손으로 승부를 가리는 무예 수박(手搏)을 놀이로 삼은 것. 수박은 수박(手拍), 권법(拳法), 슈벽, 수벽치기, 수벽타(手癖打)로도 불렀다.
(유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에 따르면 수박의 기원은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내용이 중국의 것이어서 우리나라의 수박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성립되고 행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채호(申采浩)는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서 신수두 단전(壇前)의 경기회(競技會)에서 뽑힌 선배[先人, 仙人]들이 수박, 격검(擊劍) 같은 각종 기예를 익혔다고 하였는데, 이 설은 아직 문헌으로 뒷받침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구려 무용총과 안악 제3호분의 벽화에 그려진 두 사람이 겨루는 장면을 볼 때, 당시에 수박희를 놀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 무용총 안악 제3호분 벽화
수박 및 수박희란 명칭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사(高麗史)』 「두경승전(杜景升傳)」에 수박하는 자가 경승을 불러 대오(隊伍)를 삼으려 했다고 하고, 「이의민전(李義旼傳)」에는 이의민이 수박을 잘해서 의종(毅宗)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며, 「최충헌전(崔忠獻傳)」에는 수박에서 이긴 군사에게 교위(校尉), 대정(隊正) 자리를 상으로 주었다고 하였다. 또 「정중부전(鄭仲夫傳)」에는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서 무신들에게 오병(五兵)의 수박희를 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말의 충혜왕(忠惠王)은 수박희를 즐겨 관람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전기에도 고려 수박의 전통은 그대로 계승된다.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종실록(世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에는 수박희로 시험하여 군사를 뽑았다거나, 왕이 수박 잘하는 사람을 별도로 뽑아서 연회 때 하게 했다는 수박과 관련된 기록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수박희가 15세기에 이미 민간의 세시풍속으로 정착되었다는 사실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충청도 은진현(恩津縣)과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의 경계 지역인 작지(鵲旨)에서 매년 7월 15일 근방의 두 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수박희로 승부를 겨루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중국 권법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수박은 새롭게 체계화되는데, 자세한 내용은 『무예도보통지』 제4권 「권법편」에 실려 있다. 『재물보(才物譜)』나 『해동죽지(海東竹枝)』에 따르면, 18세기 이후 전통 수박은 다시 발기술 위주의 탁견(托肩)과 손기술 위주의 슈벽[수벽치기, 手癖打]으로 분화, 발전한다. 최근 택견 인간문화재 송덕기, 신한승의 제자들에 계승되고 있으며, 손기술을 위주로 한다는 점에서 손발과 몸을 모두 사용하는 수박과 구별된다. 『재물보』에서 당시의 슈벽이 수박과 다르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내용)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두 사람이 하던 수박은 일정한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데, 전반부에서는 각기 정해진 세(勢)의 변화를 시범하다가 후반부에 이르면 마주 서서 겨루기를 연출한다. 제4권의 권법보(拳法譜)에서는 세의 변화를 그림과 함께 설명하였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① 두 사람이 각각 왼손과 오른손을 허리에 끼고 나란히 섰다가 먼저 탐마세를 취하고, 오른손으로 왼어깨를 쳐 열면서 즉시 요란주세를 취한다. 왼손으로 오른어깨를 쳐 열고 ② 앞으로 전진해 현각허이세를 취한다. 오른발로 오른손을 차고 왼발로 왼손을 차고 오른발로 오른손을 차고는 바로 순란주세를 취한다. 왼쪽으로 한 번 돌고 왼손으로 오른발을 한 번 치고 ③ 그대로 칠성권세를 취한다. 좌우로 씻고 고사평세를 취한다. 오른손과 왼발을 앞으로 한 번 찌르고 ④ 바로 도삽세를 취한다. 두 손을 높이 든 채 돌아보며 몸을 돌려 뒤를 향해 일삽보세를 취한다. 오른손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⑤ 그대로 요단편세를 취한다. 한 걸음 뛰어 오른손으로 오른쪽 둔부를 치고 그대로 복호세를 취한다. 나아가 앉았다가 오른쪽으로 돌면서 일어나 다시 현각허이세를 취한다.
⑥ 그대로 하삽세를 취하고 왼쪽으로 한 번 돌면서 오른손과 왼발을 한 번 치고 바로 당두포세를 취한다. 왼손으로 앞을 막고 오른손으로 이마를 가리며 ⑦ 그대로 기고세를 취한다. 좌우를 씻고 다시 중사평세를 취한다. 오른손과 왼발을 뒤로 한 번 찌르고, 그대로 도삽세를 취한다. 앞을 돌아보고 ⑧ 몸을 돌려 도기룡세를 취한다. 왼손과 오른손을 열면서 요단편세를 취한다. 앞으로 전진하면서 그대로 매복세를 취한다. 일자로 나아가 앉았다가 일어서면서 현각허이세를 취한다. 그대로 하삽세, 당두포세를 취하고, 다시 기고세, 고사평세, 도삽세를 취하고, 바로 일삽보세, 요단편세를 취한다.
⑨ 바로 오화전신세를 취하고, 오른손과 오른발을 오른쪽으로 돌려 ⑩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서 안시측신세와 과호세를 취한다. 두 손을 열고 닫으며 좌우로 서로 탐색하다가 ⑪ 갑이 현각허이세를 취하여 좌로 차고 우로 차며 앞으로 몰고 나가면, 을이 구류세를 취하여 좌우 손으로 막으며 물러나 안시측신세, 과호세를 취한다. 서로 돌아선다. 을이 현각허이세를 취하여 진격하면 갑이 다시 구류세를 취하여 물러난다. 두 사람이 바로 안시측신세, 과호세를 취한다. 서로 돌아선다.
⑫ 갑이 나아가 복호세를 취하면, 을이 금사세를 취하고 뛰어넘어 즉시 복호세를 취한다. 갑 또한 금나세를 취하고 뛰어넘어 ⑬ 두 사람이 바로 포가세를 취한다. 두 손으로 오른발등을 치고 다시 점주세를 취한다. ⑭ 갑이 오른손으로 을의 왼어깨를 잡으면, 을은 오른손으로 갑의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로부터 들어가 목을 꼬아 갑의 왼어깨를 잡고, 각기 등뒤로 왼손을 건다. 갑이 을을 업어서 빗겨 들어 거꾸로 던지면, 을은 물레가 돌듯 순식간에 땅에 내려서고, 을이 다시 갑을 들어 앞의 예와 같이 하고 끝낸다.
수벽치기
'수벽치기' 라는 명칭은 1921년에 저술된 『해동죽지』에 나타납니다.
『해동죽지 海東竹枝』는 1921년 당시 70세이던 최영년님이 우리나라 4천년 동안의 역사와 세시풍속 등을 칠언절구 혹은 칠언율시로 읊은 것을 그의 제자가 1925년에 출판한 책입니다.
이 책 <수벽타>조에는 "옛 풍속에 수술이 있는데, 옛날 검기로부터 나왔다. 상대하여 막고 서로 치는데 양손이 오고 감에 만일 한 손이라도 법칙을 잃으면 곧 타도 당한다. 이름을 '수벽치기'라고 한다"는 기록이 있어 '수벽타'를 한글로 '수벽치기'라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수벽치기'라는 용어를 한자로 빌려 표기하면서 '수벽'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수벽'이라는 한자와 '치기'를 의미하는 '타'를 빌려서'수벽타' 라고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수벽은 『재물보』에 기록된 '슈벽' 이라는 용어와 동일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만영 이 1798년 편찬한 『재물보』에 '슈벽' 마땅히 이 글자를 써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수벽과 슈벽은 동일한 발음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이는 명칭이 수박>슈벽>수벽치기로 변화했음을 말해줍니다.
'수박'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부터 나타납니다.
『고려사』를 보면 의종이 보현원에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구나 하면서 오병수박희를 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수벽치기'와 '슈벽' , '수박'이 동일한 표기임을 볼 때, '수벽치기'는 그 기원을 고려시대 '수박'으로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들어서 사용된 수박이라는 용어는 우리말을 한자로 차지한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 초기인 태종 10년과 세종 13년 기록에는 '수박'이라는 용어가 , 그 밖의 기록에는 '수박'이라는 두 가지 한자표기가 동시에 나타납니다.
1527년 최세진이 지은 한자교과서『훈몽자회에는 '수'는 '슈'로, '박'은 '빅'으로 발음이 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박이 빅으로 소리가 났으며, 수박은 우리말에 가깝게 한자로 표기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이는 조선 초기에 '수박'이라는 용어가 이미 우리말화 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되는데, 수박은 우리말 발음에 가까운 것이고, 수박은 문헌에 내려오던 것을 계속 사용한데서 두 가지 표기가 나타난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조선 초기의 '수박 이라는 한자어는 한자어를 빌어서 사용한 것이 아닌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사용된 것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명칭의 유사성 외에 '수박'이라고 하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던 무예가 현재 전승되는 '수벽치기'와 움직임에 있어 어떤 연관을 갖는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현재 '수벽치기'의 동작들이 옛날부터 전승된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고려시대 수박의 모습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지금의 '수벽치기'와 움직임이 동일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 점은 수벽치기만의 문제가 아닌 전승되어 온 모든 무예들이 갖는 한계점입니다.
어떤 무예도 당시에 정말로 그 기술이 존재했다는 증거를 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현재 전승되고 있는 '수벽치기' 에 남아 있는 용어를 통해 역사가 오래된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수벽치기' 에서는 손끝을 가리키는 용어로 '고드기' 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고드기'는 '손끝'이라고 하는데, 엄지와 새끼손가락을 안쪽으로 세게 구부림으로써 둘째 · 셋째 · 넷째 손가락의 힘을 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 세 손가락의 힘이 합처져 가운데 손가락에 모이며 칼끝에 비유되는데, 현재 남아 있는 옛 문헌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단어입니다. 물론 옛문헌에서 발견할 수 없는 단어를 가지고 어떻게 옛날부터 내려오던 것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을 문제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드기'라는 단어는 현재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사전류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어 사전류에는'고드기'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단어들이 보입니다. '고드름'과 '고드러지다'가 그것인데 '고드름'은 '낙슷물이 흘러내리다가 길고 뾰죡하게 얼어붙은 얼음'을 말합니다.
고드름의 17세기 문헌 표기는 '곳어름'입니다. 곳어름은 '곳다' , '곧다'의 어근 '곳/곧(直)'에 얼음이 합성된 말로 발음이 변하여 고드름이 되었습니다.
제주 사투리 '곳아죽다'에서 '곳다'와 추워서 손이 곱다는 표현에 나타나는 '곱다' 의 어근과 '곳-'과 '곱-'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로 보입니다.
이는 '고드러지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드러지다'는 마르거나 굳어서 빳빳하게 된 모양을 뜻하는데, 곧게 언모양으로 생각됩니다. 즉, 손을 빳빳하게 만드는 '고드기'의 모습과도 통합니다.
'고드기' 도 '곳게 얼다' 라는 말에서 명사화 접미사'-기'가 붙어 '곳(곧)얼기'가 되고 어떤 소리가 가까이 있는 다른 소리를 닮아 그것과 같거나 비슷한 소리로 바뀌는 동화현상에 의해 '고드기' 로 변한 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현재 전해지는 수벽치기가 조선 초기인 15세기경부터 전해졌다는 하나의 실마리가 되리라 생각됩니다.
15세기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고드기'의 존재는 수박이라는 용어가 두 가지 표기로 나타나는 조선 초기와 시기적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관련성을 더욱 추정해 볼 수 있고. 이는 현재 전수되고 있는 수벽치기가 적어도 조선초기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문헌에 나타나는 수벽치기의 역사
『고려사』에 수박희로 보이고 『조선왕조실록』과『동국여지승람』에는 '수박手拍'·'수박手搏' 으로 『재물보』에는 '슈벽' ,『해동죽지』에는 '수벽타'와 '수벽치기'로 기록되어 있어 그 전승이 오래되었음을 짐작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수벽치기와 수박이 언급한 그대로 서로 연관된다면, 현재 전승되는 수벽치기는 고려시대부터 그 역사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수박희도나 백제금동대향로의 무예 표현상, 그리고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 발견된 병사상 등을 넓은 의미에 있어서 맨손 무예를 총칭하는 '수박'의 전신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자로 표기되어 있지 않아 '수박'을 표현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으므로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수박과 맨손무예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수박'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 맨손무예 전반을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우리나라 각 지역에 맨손무예가 있었음은 황해도와 경남의 거창지방에서는'까기' 라 하여 손바닥으로 치고 발로 차는 놀이가 있었고,평안도에서는 '날파름' 전주에서는 '챕이' , 김해와 양산,밀양 등지에서는 '잽이'라고 하여 손으로 치거나 발로 차고 상대를 잡아 넘어뜨리는 체기(體技)가 있었다는 구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이 구전은 조선 말기에 각 지역에 독특한 맨손무예가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이런 점을 고려시대로 옮겨다 놓고 생각해 보면, 당시에도 각 지역에 독특한 맨손무예가 존재했으리라고 유추할 수 있습니다.
현재의 생각으로 당시의 사정을 말하는 것이 위험을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지금과 같이 교통이 발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 간의 교류가 지금보다 활발하지 못했던 시기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고려시대 각 지역에 독특한 무예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수박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고려시대 무인들의 출생지를 보면, 이의먼(경주),두경승(전주 만경),임견미(평택),변안렬(심양) 등의 태어난 곳이 서로 각기 다른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출신지역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다른 형태의 무예를 배웠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출생지보다는 성장한 곳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만 이들이 모두 개경에서 성장했다면 같은 형태의 맨손무예를 배웠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고려시대 수박에 능한 자로 이의민과 두경승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의민은 성인이 되어서 형 두 명과 함께 경주 시골구석을 횡행하여 고을 사람들의 우환거리가 되었으므로 안렬사, 김자양이 잡아다가 고문을 했는데, 두 형은 옥중에서 죽었으나 이의민은 죽지 않자 장하게 여기고 경군으로 뽑아 넣었다고 합니다. 경군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경주에서 계속 생활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렴사가 체포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우환거리가 되었을 정도로 탁월한 수박기술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이의민은 성장한 곳인 경주에서 수박을 배웠던 것입니다.
반면에 두경승은 성장지가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만 공학군에 편입되어 있었는데, 수박하는 사람이 그가 용력(勇力)이 있다는 것을 듣고 대오로 삼고자 하자, 그의 외삼촌 혹은 장인으로 추정되는 상장군 문유보가 '수박이란 천한 기예이니 장사가 할 일이 아니다' 라고 하자, 그 후부터 두경승이 수박하는 곳에 가지 않았다고 하는 것으로 볼 때 , 수박을 배울 때에는 개경(開京)에서 생활했을 가능성을 먼저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출생지인 전주 만경에서부터 수박희를 익히며 성장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여하든, 두 경우 모두 이의민과는 전혀 다른 지역에서 성장하였을 것임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이의민과 두경승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수박을 익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서로의 성장환경이 다른 경우도 그들이 배운 맨손기예를 모두 수박이라고 칭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고려시대 수박이 맨손무예 전반을 가리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수박이 맨손무예 전반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이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점도 그런 생각을 갖게 합니다.
수박은 무인들뿐만 아니라 문인이나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수박이 무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있었음은 『고려사』형률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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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로써 돈과 재물을 내기한 자는 각각 장材 1백대 이며,
그 유숙시킨 주인 및 내기돈을 대고, 모여서 도박을 시킨 자도
또한 장 1백대이며, 음식을 걸고 활쏘기를익히는 무예자武藝者는
비록 돈과 물건을 걸어도 죄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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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률은 당唐잡율 14, '박희도재물(搏戱賭財物)'조를 모법母法으로 하고, 해당조문의 소의에서 일부 채록하였습니다.
당률을 모방하긴 했지만 고려 내에서 수박희를 이용한 도박이 널리 행해겼기 때문에 채용된 것이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박희 즉 수박으로 내기한 자나 머물게 해준 자 또는 내기 돈을 댄 자도 모두 장 1백 대에 처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만큼 내기가 성행했음을 말해주는 것이고, 일반인들에게도 수박이 보편적으로 전파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에 수박은 맨손무예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을 해보면, 수박이 맨손무예 전체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단어였을지라도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무예였을 가능성도 살필 수 있습니다.
의종이 병사들로 하여금 수박희를 겨루게 했다거나, 수박으로 내기를 하는 자들에 대한 처별 조항이 고려율에 있다는 것은 '수박'이라고 하는 맨손무예 시합이 자주 이루어졌음을 뜻하며, 이는 수박이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힌 무예였음을 말해줍니다.
시합이라는 것은 먼저 규칙이 있어야 하고, 그 규칙은 시합하는 이들이 동의할 수 있는 합의점을 지녀야 합니다. 시합을 서로 할 수 없을 정도의 이질적인 무예였다면 시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점은 내기도박을 할 정도로 시합이 성행했다는 데서 좀 더 확실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규칙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면, 내기도박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이는 수박이 고려시대나 조선전기에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맨손무예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긴 하였지만, 이와 더불어 움직임 자체는 시합이 가능할 정도로 체계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헌 기록의 수벽치기
문헌상 수박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고려사』입니다.
수박과 관련되어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례는 의종 24년 8월 기록에 나타나는 '오병수박희'입니다.
‘(의종 24년 8월) 정축일에 왕이 보현원(普賢院)으로 가는 길에 오문五門 앞에 다다라서 시신들을 불러 놓고 술을 마셨다. 왕은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좌우 신하들을 돌아보면서 "훌륭하구나! 이곳은 군사 기술을 연습할 만하다"고 하면서 무신들에게 명령하여 오병수박희五兵手搏減를 하게 하였다.’
1170년인 의종 24년에 의종이 무신들로 하여금 '오병수박희'를 하게 하였다고 하는데, 이 오병수박희는 무신란의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물론 '수박'이라는 용어 자체는 중국의 사서인 한서<예문지>에 『수박육편이라는 책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국내보다 중국에서 먼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수박이 우리 고유의 맨손무예를 가리키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의문이 생깁니다.
『한서』는 후한 반고(32~92)가 82년 무렵에 완성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기록에서 수박이라는 용어가 보이는 고려의종대(l146~l170)보다 대략 1000년 정도 앞서 나타나고 있어. '수박'이라는 용어를 고려에서 수입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마치 중국의 수박 기술 자체를 수입해 온 것으로 곡해할 수 있는 우려를 지니고 있어 주의를 요합니다.
고려에서는 유능한 송나라 사람들을 귀화시켜 고려에 봉사하도록 하곤 했는데, 선종 대에는 '병수' 기예를 가진 진량을 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고려가 수박이라는 용어를 수입해 사용했고, 그 기술도 중국에서 가져온 것이라면, '병수'라고 굳이 다른 명칭으로 사용할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고려의 수박과 송나라의 '병수'가 서로 구분이 가는 기예였기에 다른 용어를 사용해 구분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즉, 고려에 독자적인 맨손무예가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에 맨손무예가 존재했던 것임을 알려주는 사례로는 1102년 고려 숙종鳶宗의 행렬이 우타천 들판에 이르렀을 때,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는 송종소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11월 초하루 임오에 왕이 우타천 들판에 이르자 웬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났다. 왕이 시위 군사들에게 명령하여이를 쫓게 하였더니, 견룡牽龍 교위校財 송종소宋宗紹가 호랑이를 손으로 때려 죽였다. 이에 왕이 송종소에게 옷 한벌을 내려주었다.’
숙종이 우타천에 행차했을 때, 호랑이가 나타나자 송종소가 '박살지搏殺之'했다는 것입니다.
송종소가 호랑이를 '박살지' 했다는 것은 맨손을 사용했음을 말해줍니다.
임금의 안전이나 혹은 맹수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자고 할 때 보편적으로 무기를 사용했을 터인데, 그럼에도 송종소가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때려 죽였다는 것은 그만큼 맨손 사용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런 예는 고려 전기부터 전래의 맨손 무예가 존재했던 것임을 말해줍니다.
고려 전기에 고려에 맨손무예가 존재했음은 고려 2대왕인 혜종(912~945)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왕규王規는 광주원군凌州院君을 왕위에 세우려고 어느 날 밤에 왕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그 당黨을 침전에 잠입시켜서 대역大逆을 감행하려 하였다. 이때 혜종이 잠을 깨거 일권-拳으로 때려눕히고, 시증들을 불러서 끌어내게하고는 다시 묻지 않았다.’
왕규가 광주원군을 왕위에 세우려고 어느 날 밤 왕이 깊이 잠든 틈을 타서 자객을 침전에 잠입시켜 임금을 살해하려 했는데, 이때 혜종이 한 주먹에 때려눕혔다는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임금을 살해하려고 임금의 침실까지 침입할 정도의 자객이라면 무예 실력이 상당한 위치에 올라있었을 것이며, 무기 또한 소지하고 침입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혜종이 한 주먹에 쓰러뜨렀다는 것은 그의 맨손무예 솜씨가 매우 뛰어났으며, 고려에 맨손무예가 존재했음을 말해줍니다.
혜종이 뛰어난 무인이었음은 중국사서『책부원귀」에 혜종이 용력이 뛰어나 능히 쇠를 구부릴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외에 김영부의 예를 통해서도 맨손무예의 존재를 알 수 있습니다.
김영부는 반무신란의 성격을 지닌 '김보당金甫當의 난'으로 유명한 김보당의 아버지입니다.
인종 4년(1126)에 이자겸이 난을 일으켰는데, 김영부는 난이 일어났음을 듣고 분기하여 손으로 여러 사람을 치면서 문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적이 무리를 지어 에워싸고 헤치려 하였는데, 김영부가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적들이 그 의로움을 장하게 여겨서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이자겸의 난에 참여한 무리들은 분명 무기를 들고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잔뜩 긴장하고 흥분상태에 있을 무리들을 김영부가 손으로 쳤다는것은 그 스스로가 맨손무예에 뛰어났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김영부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문반가문인 영광 김씨 집안의 사람입니다.
이는 무인들뿐만 아니라, 문인들도 맨손무예에 능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따라서 송종소나 혜종, 김영부의 사례에서 고려 초부터 지속적으로 독자적인 맨손무예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맨손무예는 '병수'라고 불리는 송나라의 맨손무예와는 다른 것임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즉 고려의 수박과 송나라의 맨손무예는 서로 구분이 가는 무예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 봤을 때 의종 채위시기(1146~1170)에 쓰인 '오병수박희'의 '수박'은 고려의 독자적인 맨손무예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으로 봐도 그리 큰 무리는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오병수박희는 맨손무예를 가리키는 수박과 오병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어, 오병의 실체가 무엇인지 의견이 분분한 상태입니다.
이 사건은 『고려사』 정중부 전을 보면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날 왕이 보현원으로 가려고 오문五門 앞까지 와서
시신侍臣들을 불러 술을 마시었는데 술자리가 한창일 때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장하구나! 여기가 바로 군사를 훈련할 수 있는 곳이로군!"이라고 하면서
오병수박희를 시켰다. 이것은 왕이 무관들의 불평을 짐작하고 이런 일로 후하게
상품을 주어 그들을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뢰韓賴는 무관이 왕의 총애를 받을까
염려하면서 시기심을 품었다. 대장군 이소응李紹應은 무인이기는 하나 얼굴이 수척하고
힘도 약하였는데. 한 사람과 수박희手搏戱를 하여 이기지 못하고 달아나니 한뢰가
갑자기 앞으로 나서며 이소응의 뺨을 후려갈겼으므로 섬돌 아래로 떨어졌다.’
오병에 대해 다섯가지 병장기가 아닌가 하는 견해도 있는데, 한뢰가 달아나는 이소응의 뺨을 때렸다는 것으로 볼 때, 당시 이소응은 맨손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따라서 오병은 병장기를 가리키는 용어는 아닌 듯합니다.
이외에 오병수박희가 5명씩 행하는 5대 5대항 경기라는 견해, 혹은 부서별 대항 경기라는 견해도 있으나 오병수박희는 1명의 병사가 연속해서 5명의 병사를 이기면 포상을 내리는 경기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이소응이 한 사람과 더불어 수박희를 하였다는 것을 볼 때, 1 대 1방식이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고, 한뢰가 이소응을 무시하고 뺨을 때릴 수 있었던 것도 대장군의 직책에 있으면서도 맨손으로 한 사람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점은 조선 전기 수박희 기록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노상왕老上王이 모화루로 피서하니, 상왕上王과 임금이 나아가 문안하였다.
미리 장사壯士를 뽑아 모화루 아래에 수박희手溥纖를 시키고 관람하였는데,
해연海桁이라는 중이 힘이 세어 여러 사람에 뛰어나니, 명하여 머리를 길러 환속하게 하고
목면 1필을 하사하였다. 진무鎭撫 김윤수金允壽가 8인을 이기니. 또한 상을 주었다.’
해연이라는 승려가 힘이 세어 여러 사람을 이기니 환속하게 한다거나, 진무 김윤수가 8인을 이기니 상을 내렸다는 기록을 통해서 수박은 정해진 사람을 연속 이기는 것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같은 시기 기록을 통해서 좀 더 엿볼 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노상왕의 탄생일이므로.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노상왕에게 청하여,
경복궁에 행차하였다가 경회루에 나아가니, 미리 수박手溥을 잘하는
차 50여 명을 뽑았다가, 누樓 아래에서 승부를 겨루는 것을 관람하게 하니,
갑사甲士 최증기差停奇가 6사람을 이겼으므로, 정포正布 3필을 하사하고,
한유韓宥는 4사람을 이기매, 정포 2필을 하사하였다.’
최중기가 여섯 사람을 이기거나, 한유는 네 사람을 이긴다는 기록 등을 통해 연속으로 몇 사람을 이기는 이에게 포상을 내렀음을 말해줍니다. 연속으로 상대를 이기는 것이 당시 수박희의 경기 모습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풍속이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고려한다면, 이런 경기 방식은 조선 전기에 나타난 것이라기보다는 그 이전인 고려시기부터 내려오던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런 점은 씨름의 경기방식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씨름에서도 한 사람이 연속으로 경기를 해서, 더 이상 상대자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 판막음이라 하여 경기를 종료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특유한 경기방식이 아니었나 여겨지는데, 오병수박희도 이 방식과 유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가장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수박은 고려 후기에도 행해졌는데, 고려 28대왕 충혜왕이 상춘정이나 화비궁*마암에서 수박희를 구경했다는 기록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수박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는데,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은 태종 10년 기록으로 병조兵曺와 의흥부羲興府에서 수박희手拍戱로 사람을 시험하여 세 사람을 이긴 자를 방패군防牌軍에 보충하였다는 것입니다.
태종 11년에도 갑사 선발에 기사와 보사에 능하지 못한 자 중 수박희를 시험하여 3명 이상 이긴 자를 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종 16년 7월에는 태종이 대소 신료들과 함께 수박희를 하게하고 이를 구경하기도 했으며, 같은 달 18일에는 세자 종친들과 잔치를 벌이는 가운데 수박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세종 때는 해연海衍이라는 중이 힘이 세어 여러 사람보다 뛰어나니, 머리를 길러 환속하게 하고 목면木棉 1필을 하사하기도 했고, 진무 김윤수가 8인을 이기니 상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수박희는 고려시기나 조선 전기를 통해 무인으로 출세하기 위해 중요시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은 이의민이 수박을 잘하여 의종毅宗이 그를 아껴 대정隊正에서 별장別將으로 승진시켰다거나, 또는 최충헌이 손님을 초청하여 중방重房의 힘센 자들로 하여금 수박을 시켜 이긴 사람에게는 즉시 교위校尉나 대정隊正의 벼슬을 상으로 주었다는 고려시대의 기록들과 윤인부는 수박을 잘한 까닭에 쌀·콩 각각 5석을 받기도 하고, 사직司直에서 호군으로 승진하기도 했습니다.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서신을 보내, 여러 고을에 거주하는 사람들 가운데 혹시 달리기를 잘하거나, 힘이 있거나, 수박을 잘 하거나, 한 가지 재주라도 취할 만한 것이 있는 자는 양인과 천인임을 논하지 말고, 관에서 양식을 주어서 사람을 임명하는데 지체시키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는 조선시대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수박이 무인으로써 출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세조 13년 기록의 경우에는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 수박 능력이 뛰어나다면,
양천에 상관없이 뽑았다는 것은 수박이 무인의 출세도구로써 뿐만 아니라, 신분을 뛰어넘기 위한 도구로서 중요한 기예였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수박도
수박도는 역사에 기록된 우리나라의 무술명이 아닌, 황기(黃琦, 1915~2002.7.14)가 만든 무술이름이다.
황기는 “택견을 보고 무예계에 뛰어들었다가 무예도보통지를 근거로 수박도를 복원하기에 이르렀다”고 술회하고 있다.
황기는 1945년 10월 무렵 서울 용산(龍山)에 당수도 무덕관(唐手道武德館)을 설립하고, 1953년 대한당수도협회를 창설하였다. 수박도를 당수도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55년 서울역 근처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하고,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설립한 뒤 한중친선국제당수도연무대회를 열었다.
1959년 국군 태권도 시범단이 태권도협회(대한태권도협회)를 결성하자 이듬해 독자적으로 대한당수도협회를 대한수박도회(大韓手搏道會)로 고치고, 5·16군사정변 이후 국내 무도계의 통폐합을 거부한 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3년 미국에서 수박도를 전수하기 시작해 11년 만인 1974년 미국연맹을 탄생시켰는데, 2002년 현재 미국에만도 500여 개에 달하는 수박도 도장이 있고, 미국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에서는 수박도를 무예의 정규과목으로 채택해 가르치고 있다.
그 밖에 영국·프랑스·이탈리아·필리핀 등 전세계 25개국에 10만여 명의 수련생이 있다. 1973년 필리핀 대통령으로부터 다마루상을 받았고, 1989년에는 미국의 《블랙 벨트 매거진 Black Belt Magazine》이 올해의 무도인으로 선정, 명예전당에 헌액되었다. 미국에서는 '위대한 마스터'로 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