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순>
씨알이라는 그 말 자체가 스스로 하는 생명이라고 보니까, 자연 생명이라는거 평화적이지 않습니까?
물론 자연생명세계속에서도 먹고먹히는 먹이사슬관계가 있지만...그러나 생명이 자기자신을 키워나가는 과정은 어...자연스러운거고 평화스러운 거거든요.
특히 씨앗이 어...싹터서 자라나는 나무가 되고 꽃이 되고 열매가 되는 그 과정은 굉장히 자발적인거고 평화적인거죠.
스스로 하는것 자체가 이제 자발적이고 평화적인거라고 보는데 그 스스로 하는 원리의 그러니까 폭력과 그 억압을 거부하는거죠.
그리고 나의 스스로함 뿐만아니라 다른 모든사람들의 자발적주체성과 추구함을 존중하고 지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다른사람을 향해서도 강제를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거죠.
함석헌의 비폭력평화주의는 거대한 영국군대를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이겨낸 간디와 약자를 위해서는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싸울 수 있는 기독교복음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함석헌의 비폭력평화사상은 전두환정권의 폭압이 극점으로 치달을때 일부운동권과 재야지식인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비폭력평화주의야말로 미리이겨놓고 싸우는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김성수 박사>
80년대 6월항쟁도 그게 군부 전두환독재체제를 결국은 무혈혁명으로 쫓아낸거 아닌가요.
그러니까 총을들어서 전두환을 쫓아낸것이 아니고 화이트칼라들이 비폭력평화주의를 외치면서 데모를 하니까 결국은 전두환이가 더 있고 싶어도 정권을 내줄 수 밖에 없었던 거거든요.
그러니깐은 그 80년 6월 항쟁을 기점으로 오늘 한국에 이런 민주화가 된것이 다 비폭력평화주의죠.
1987년 독재정권의 종식을 알리는 6.29선언이 나온바로 그날 함석헌은 병원에 입원한다.
여든(80)이 훨씬넘은 나이와 병든몸이 되서야 함석헌은 비로소 가족의 품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전까지 가족에게 그는 그저 엄격하기만 한 아버지였다.
<함은선>
이제 편찮으실 동안에 그게 다 없어지더라구요.
병원에 입원해 계실때에 인제 보살펴드리고 이렇게 얘기를 하면 대화도 되고 말도 잘 하시고...그떄는 그게 다 없어졌는데 그전에는 접근하기가 좀 어렵고 아버지라도 예...다정다감하고 그러시지를 않으셨더군요.
자녀들한테...
시대의 부름에 온 몸으로 답해야 했던 함석헌.
그의 뒤에는 가족의 희생이 따라다녔다.
한국전쟁직전 월남한 함석헌은 북에 두고온 노모와 아들딸을 끝내 만날 수 없었다.
함석헌을 따라 월남한 다른 가족들은 모진 생활고를 견뎌야 했다.
그의 아내(황득순 여사)가 닭을 키우고 행상을 해 가며 남편과 자식들의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장ㅁㅁ 교수>
그런데 이분은 옛날 예언자들이 옛날 교사들이 그랬듯이 가르치는 그거만 하게 된 거에요 팔자가...
그 이남엔 내려 왔을때는 유명인사가 되어가지고 자꾸 여기저기서 강연을 청하고 설교를 청했으니까.
그걸 준비하고 하다가 보면 언제 뭐 직장마련하고 그럴 형편도 안됐겠지만 생각도 없고, 그래 거...인제 예언자적인 삶이 있으니까.
자긴 그거를 했으니까.
수입은 없는 거에요.
마지막 가는 길조차 지키지 못한 아내의 무덤 앞에서 함석헌이 느낀것은 말그대로 회한이었다.
<기록>
아내는 누가 지어줬는지 모르나 문자그대로 순례순이다.
그저 순종에 한 일생, 열 여섯의 소녀로 시집살이를 시작했고 우리집안 어른들이 본례 통 말이 없는 집안이기도 하지마는 스물에 가까운 큰 자족에 밤낮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에 맏며느리로서 불평한번 없이 섬김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순종봉사를 해쓴데 나는 그에 대해서 성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치지 않고 그를 치셨습니다.
나의 가장 큰 잘못은 그를 내 믿음의 친구로 생각하지 못한점 입니다.
그가 가족에게 소홀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가족이기주의로 인한 욕심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는 평생 어떤차별도 없이 함께 일하고 함께 생활하는 씨알들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함석헌에게 세상의 모든 씨알은 그의 가족이고 형제였다.
<ㅁㅁㅁ교수>
가족문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참의미로서 말씀하려 한 거죠.
가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혈통관계인데 혈통관계로서는 이거는 인간이 인간노릇을 못하고 씨알이 씨알노릇을 못하기 때문에 이걸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게 가정아닌 가정이죠.
이 소유도 함선생님은 그 뭐 남을 도와줄것이 없도록 살아라.
그렇게 말씀하신일이 있어요.
남을 도와준다고 하는 정도로 뭐 부를 소유하고 하는 자체가 그거는 씨알의 정신하고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참되게 그거는 뭐 내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자식 내 아들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그런 그...정신 뭐 이런거가 인류가 극복을 해야지 이세상이 옳게 되는거 아니냐.
함석헌이 세상을 떠난지 15년.
남아있는것은그가 평소 아끼던 작은 온실 하나뿐이다.
그가 말년에 인촌언론상을 수상하면서 받은 상금은 모두 사회재단에 기증했고 이 온실도 곧 오산학교에 기증할 예정이다.
평생을 검소한 농부로 살아왔다는 둘째아들 함무용씨.
그 역시 아버지의 책에서 나온 인세모두를 함석헌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
늘 자신이 살아온 날짜를 달력에 기록하며 하루하루의 소중함을 생각했다는 함석헌.
마지막까지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려고 한 그는 6개월간의 긴 투병끝에 88살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씨알의 소리를 통해 독재정권에 대항한 비폭력평화주의자이자 억압받던 민중의 스스로함과 깨어있음을 일깨운 사상가이자 행동하는 양심 함석헌.
여든여덟(88)의 삶동안 그는 스스로 깨어있는 씨알이고자 했다.
시대가 변하고 함석헌의 정신은 세월속에 묻혔지만 그의 사상은 하나의 씨알이 되어 새로운 부활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