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은
동방 단군의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단학회가 설립되던 당시
한국사 연구의 주류는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한 일본 어용사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요 자료를 독점하고 연구성과를 일본어로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대 말부터 전문적 역사교육을 받은 국학 연구자들 중심으로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한국역사와 한국문화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모아졌다.
발기인으로
고유섭·백낙준·이상백·최현배 등 24명이 모여 진단학회를 만들었다.
진단학회는 회원들의 연구성과를 수록한 <진단학보>를 간행하고
강연회와 간담회를 개최했다.
<진단학보>는 당시 해외 각 학회와 학술잡지를 교환할 정도로 성장했다.
1940년 탄압으로 학회가 해체되었으나
해방 뒤 사단법인으로 재건되었고 <진단학보>도 다시 간행되었다.
학회 주관으로 1965년 <한국사> 7권 등을 출판했다.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과 두계 학술상을 운영하고 있다.
학회의 이름인 '진단'(震檀)은
동방 단군(檀君)의 나라, 즉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다.
진단학회가 설립되던 당시
한국사 연구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은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대전제로 하는 식민주의 사관에 입각한 일본인들의 연구였다.
이들은 주요 자료를 독점하고 연구성과를 일본어로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대말부터 전문적 역사교육을 받고
1920년대 후반부터 연구와 저술활동을 시작한 국학 연구자들은
일본인들의 시각과 서술방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한국학자들에 의해 한국어로 이루어지는 한국역사·한국문화 연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학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진단학회 설립 당시의 발기인은
고유섭(高裕燮)·김두헌(金斗憲)·김상기(金庠基)·김윤경(金允經)·김태준(金台俊)·문일평(文一平)·
박문규(朴文圭)·백낙준(白樂濬)·손진태(孫晉泰)·신석호(申奭鎬)·이병기(李秉岐)·이병도(李丙燾)·
이상백(李相佰)·이선근(李瑄根)·이윤재(李允宰)·이은상(李殷相)·이희승(李熙昇)·조윤제(趙潤濟)·
최현배(崔鉉培) 등 24명으로서
당시 국학(國學)의 명사들이 많이 참가했다.
찬조회원으로는
김성수(金性洙)·김연수(金秊洙)·이광수(李光洙)·이극로(李克魯)·이능화(李能和)·송진우(宋鎭禹)·
유억겸(兪億兼)·현상윤(玄相允)·조만식(曹晩植)·윤치호(尹致昊) 등이 참여했다.
진단학회는 회의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주요사업으로
회원들의 연구업적을 수록한 〈진단학보 震檀學報〉를 간행하고
강연회와 간담회를 개최했다.
특히 1934년 11월 28일 창간된 〈진단학보〉는
당시 해외 각 학회와 학술잡지를 교환할 정도로 성장했다.
1940년 일제의 탄압에 의해 자진해산이라는 형식으로 학회가 해체되었다.
1945년 사단법인으로 진단학회가 재건되면서
〈진단학보〉도 다시 간행했다.
학회의 주관으로 1965년 〈한국사〉 7권,
2000년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 시리즈 〈동국이상국집〉 등을 출판했다.
1972년 기구 개편과 회칙 수정을 통해 평의원회를 설치하고
간사진을 구성했다.
한국고전연구 심포지엄과 두계학술상(斗溪學術賞)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