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씨의 유래와 본관(崔氏의 由來와 本貫)
1. 최씨(崔氏)의 원조(元祖)
최씨(崔氏)의 원조(元祖)는 사로국(新羅) 육촌(六村) 중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의
촌장(村長)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로 되어있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신라 유리왕(儒理王) 9년(AD. 32년)에
6부(六部)의 6촌장(六村長)에게 6성(六姓 : 최崔, 손孫, 이李, 정鄭, 배裵, 설薛)을 사성(賜姓)한 것으로 되어있다.
최씨는 우리나라 성씨(姓氏) 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氏族)중 하나인 최씨는 역사상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거족(名門巨族)이라 할 수 있다.
역사상 선현(先賢)들이 이룩한 찬란한 업적에서 더듬어 볼 수 있는 최씨 특유의 기개(氣慨), 강기(剛氣),
신념(信念), 절조(節操)등으로 ‘최고집’혹은 ‘최씨 앉은 자리에는 풀도 안난다’'죽은 최가 한 사람이 산
김가 셋을 당한다'등 많은 애칭을 낳기도 하였다.
2. 최씨본관별선계(崔氏本貫別先系)
1. 여러 문헌(文獻)에 따르면 최(崔)씨는 387본(本)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거의 지명(地名)이고 실제조사에서
시조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43본(本)이다.
2. 고운 최치원을 중심으로 윗대에서 분파된 본관은 4개로 개성, 삭녕, 동주, 전주가 있다.
3. 고운 최치원의 후대에서는 함양, 청주, 영흥, 충주, 용강, 수원, 부안, 강릉, 강화, 화순, 통천,
양천, 원주, 해주, 진주, 탐진, 전주 등으로 분파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4.거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의 후손으로, 경주 최씨를 원조로 하는 후예임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동성동본과의 결혼은 하지 않고 있다.
[참고]
《경주최씨상계세보(慶州崔氏上系世譜)》에 따르면 경주최씨 시조인 고운 최치원은 소벌도리의 24세손이다.
본관(本貫)
시대의 흐름에 따라 성씨(姓氏)가 점차적으로 확대되면서 같은 성씨라 하더라도 계통(系統)이 달라
그 근본을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웠으므로 동족여부(同族與否)를 가리기 위해 필연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 본관(本貫)이다.
본관(本貫) |
시조(始祖) |
시대(時代) |
선계(先系) |
간성(杆城) |
漢良(한량) |
조선 명종조 |
강릉 |
강릉(江陵) |
必達(필달) |
고려 태조조 |
경주 |
강진(康津) |
澤(택) |
조선 단종조 |
탐진 |
강화(江華) |
益厚(익후) |
고려명종조 |
경주 |
개령(開寧) |
淵(연) |
조선세종조 |
청주 |
개성(開城) |
佑達(우달) |
신라조말 |
개성 |
경성(鏡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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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慶州) |
致遠(치원) |
신라진성여왕조 |
경주 |
계림(鷄林) |
允順(윤순) |
고려태조조 |
경주 |
고부(古阜) |
陟(척) |
조선단종조 |
경주 |
곡강(曲江) |
湖(호) |
고려조 |
전주 |
공주(公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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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廣州) |
得寶(득보) |
조선조초 |
경주 |
괴산(槐山) |
世珍(세진) |
조선연산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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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羅州) |
井元(정원) |
조선세종조 |
탐진 |
낭주(郎州) |
昕(흔) |
신라신덕왕조 |
낭주 |
동주(東州) |
俊邕(준옹) |
고려태조조 |
동주 |
등주(登州) |
基烈(기열) |
고려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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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주(溟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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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茂朱) |
北(북) |
조선영조조 |
경주 |
부안(扶安) |
昌一(창일) |
고려말청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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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녕(朔寧) |
天老(천노) |
고려조경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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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원(祥原) |
凝(응) |
고려태조조 |
개성 |
상주(尙州) |
春元(춘원) |
조선선조조 |
경주 |
수성(隋城) |
永奎(영규) |
고려충렬왕조 |
경주김씨 |
수원(水原) |
靖(정) |
고려희종왕조 |
경주 |
승령(僧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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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牙山) |
禮立(예립) |
고려숙종조 |
해주 |
양주(楊州) |
億(억) |
고려공민왕조 |
경주 |
양천(陽川) |
遠(원) |
고려공민왕조 |
전주 |
여수(麗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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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풍(延豊) |
之崗(지강) |
고려조말 |
경주 |
영암(靈巖) |
洪儀(홍의) |
고려성종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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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永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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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명종조 |
전주 |
영천(永川) |
漢(한) |
고려명종조 |
전주 |
영흥(永興) |
之美(지미) |
조선태조조 |
경주 |
완산(完山) |
秀岡(수강) |
고려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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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강(龍崗) |
枝茂(지무) |
고려우왕조 |
청주 |
용궁(龍宮) |
玄(현) |
고려충숙왕조 |
해주 |
용주(龍州) |
光(광) |
고려원종조 |
대녕 |
우봉(牛峰) |
元浩(원호) |
고려명종조 |
경주 |
원주(原州) |
峙(치) |
고려우왕조 |
경주 |
월성(月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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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全義) |
守慶(수경) |
조선숙종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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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全州) |
純爵(순작) |
고려문종조 |
경주 |
직산(稷山) |
弘宰(홍재) |
고려인종조 |
경주 |
창원(昌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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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녕(川寧) |
興(흥) |
조선성종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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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靑松) |
京(경) |
조선조 |
해주 |
청주(淸州) |
奇遇(기우) |
고려인종조 |
경주 |
초계(草溪) |
龍宮(용궁) |
고려충렬왕조 |
전주 |
충원(忠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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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忠州) |
陞(승) |
신라진성여왕조 |
청하 |
탐진(耽津) |
哲(철) |
고려인종조 |
탐진 |
통천(通川) |
景賢(경현) |
고려정종조 |
경주 |
하동(河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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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漢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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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海州) |
溫(온) |
고려목종조 |
해주 |
화순(和順) |
世基(세기) |
고려조 |
경주 |
황주(黃州) |
南赫(남혁) |
조선성종조 |
전주 |
회령(會寧) |
愼(신) |
조선숙종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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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해(興海) |
湖(호) |
고려조 |
전주 |
3. 성씨와 본관과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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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성(氏姓) 또는 토성(土姓)이라 할 때 ‘씨’와 ‘토’는 그 성의 출자지인 본관을 의미한다.
성과 본관은 이처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우리의 성씨체계 가운데 한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이 본관제도이다.
성이 같아도 본관이 다르면 이족(異族)이고, 반드시 성과 본관이 같아야만 동족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원칙론이지, 실제로는 예외가 많아 상당히 복잡하다. 씨족의 연원을 같이하면서도
성 또는 본관을 서로 달리하는 성씨가 많은가 하면, 반대로 이족이면서도 성과 본관을 같이하는 경우가 많다.
편의상 성과 본관을 조합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8 개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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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의 동성동본 동족의 동성이본 동족의 이성동본 동족의 이성이본 이족의 동성동본 이족의 동성이본 이족의 이성동본 이족의 이성이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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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분화과정에서 성만으로는 동족을 구별할 수가 없으므로, 조상의 출신지 또는 씨족의 거주지를 성 앞에
붙여서 사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이 곧 신분의 표시이기도 하였으므로 주로 지배층에 사용되었다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성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신분질서의 유지와 효과적인 세금 징수나 조역의 필요상 일반주민에게까지도
호적에 본관을 기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호적제도가 정비된 고려시대부터는 성이 없는 천민층도 본관을 호적에 기입했던 것이다.
성의 분화와 같이 본관도 후대에 내려올수록 분관·분적이 늘어 시조의 발상지 외에 봉군지(封君地)
·사관지(賜貫地) 또는 그 후손의 일파가 이주한 곳이 새 본관이 되었다.
우리의 본관체계가 최초로 확정된 시기는 고려 초이며, 그때부터 15세기 초까지 본관의
구체적인 모습이 담긴 기본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 성씨조이다.
성씨체계가 확립된 고려 초기부터 15세기 지리지가 편찬될 때까지 모든 성은 본관별로 구분되어 있었다.
즉, 주·부·군·현·진·촌 및 향· 소· 부곡· 처· 장· 역· 수 등 시조의 출신지나 주민의 거주지별로 각기 본관이
구분되어 있었는데, 조선 초기 신분제도의 재편성과 행정구획의 개편에 따라 현 이상의 군현을 본관으로
한 것만 남고, 진·촌·향·소·부곡 등 임내와 특수지역을 본관으로 한 것은 그 구역의
직촌화와 함께 대부분 소멸되었다.
조선시대 양반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존의 대성과 명문들의 본관은 우월시되고 무명의 벽관은 희성·
벽성과함께 천시되는 관념이 만연되어 갔다. 그래서 기성 사족이 된 본관은 그 성씨가 계속
증가해 간 반면, 관인이나 현조를 내지 못한 본관은 그 본관을 바꾸는 추세에 있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에는 본관 수가 수십이 넘던 성 가운데 조(曺)는 창녕조씨, 한(韓)은 청주한씨,
심(沈)은 청송심씨, 문(文)은 남평문씨 하는 식으로 본관의 개변이 많았다.
우리의 성씨는 16세기부터 성을 바꾸는 행위는 극히 드문 반면 본관을 개변하는 경우는 많았다.
왜냐하면, 성보다는 본관에 따라 성씨의 우열과 가격(家格)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지방의 행정실무를 장악하고 있던 군현 향리의 사족화에 따라 본관의 개변이 자행되었고,
왜란·호란 후 모화사상의 영향을 받아 주(朱)씨는 신안(新安), 공씨는 곡부(曲阜),
천씨는 영양(穎陽)으로 바꾸는 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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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유익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