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강대춘 홈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雨原
<산에대하여> 9월 정기산행지는 경남 창녕 화왕산-관룡산 연등이다. 친구들이 여러가지 사정, 또 추진하는 산행계획들이 있어 이번 산행에는 4명 만이 참가한다. 서울에서는 전종성, 안홍미, 경주에서는 나와 박광태이다. 산 전문가인 마당바우 박광태에게 서울친구들을 만나게 해 주고 싶었는데 많이 참가하지 못해서 아쉽다. 창녕의 진산 화왕에 오면 화왕만의 등반으로 그치기 힘들다. 화왕산 수준의 산이 옆에 같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관룡산이다. 그래서 우리는 산꾼들의 관행대로 화왕-관룡산을 연등하기로 한다.
경남 창녕에 들어서니 남측으로 큰 산이 우뚝 섰다. 창녕의 진산 화왕산이다.
오늘은 참가 인원이 적다. 종성과 홍미는 100명산 하러 온 것이고, 처음으로 전문 산꾼인 마당바우가 따라나섰다. 나하고 마당바우는 오래된 악우이다. 예전에 나보다 6살 아래인 마당바우한테 나는 산을 배웠던 것이다.
화왕산 산행은 보통 창녕여중 방면에서 자하골로 난 포장 길을 따라 들어간다. 처음부터 된비알이라 진땀을 흘리며 환장고개를 넘어 바로 정상으로 치고 올라가려고 한다. 때문에 힘은 들지만 금방 정상에 다다를 것이다. 주로 화왕산행은 봄에 진달래를 보기 위해서 옥천매표소(창녕여중 반대편)를 기점으로 하는 관룡산의 관룡사에 들렀다가 관룡산 정상을 거쳐 이 산의 정상으로 건너 오는 것이 일반적이다. 나도 늘 화왕-관룡을 같이 올랐는데 오늘도 마찬가지로 화왕을 올랐다가 관룡으로 넘어가려고 한다.
이 길이 창녕여자중학교를 거쳐 도성암 방면으로 오르는 길이다. 이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길이 3갈래로 갈라진다. 좌측부터 1코스, 2코스, 3코스인데, 좌측길 1코스는 도성암을 거쳐서 정상으로 오르고, 2코스는 바로 직직하여 산성 서문으로 올라가는 코스이며, 우측 3코스는 암릉지역을 통해서 배바위로 올라가는 코스인데 바위길이라 로프를 좀 잡아야 한다. 우리는 도성암에 들러지 않고 2코스를 타고 바로 정상으로 오를 것이다. 관룡까지 가려면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정상으로 이어진 정상 능선부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화왕산은 경남 창녕의 진산으로 낙동강과 밀양강이 둘러싸고 있는 명산이다. 옛날 이 산은 화산활동이 활발하여 정상이 고위평탄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이 바로 커다란 분화구였을 것이다. 그리 높은 산은 아니지만 낙동강 하류지역에 솟아 있어 실제보다 우뚝하게 보인다.
이 산은 억새밭과 진달래 군락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상부 고위평탄면의 5만여 평 억새밭이 펼쳐져 있어 3년마다 정월대보름이 되면 정상 일대의 억새밭에서 억새 태우기 축제가 열린다. 또 매년 10월 초에는 화왕산 갈대제(억새축제)가 열린다.
된비알이 세다. 땀 깨나 흘린다.
우리는 좌측 도성암 코스로 가지 않고 곧바로 화왕산성 서문으로 치고 올라간다. 오늘은 단거리를 택한다. 하산 후 라스팅을 해야 하고 서울팀들이 갈 길이 멀기 때문이다. 모두들 땀을 질질 흘린다. 처음부터 시작된 된비알 때문이리라.
이제 정상부의 평전에 다다르고 있다. 이곳이 화왕산성의 서문이다. 우리는 서쪽에서 오른 것이다.
숫컷끼리 한장!
고위평탄면인 평전에 올라서니 창녕 시가지가 한눈에 보인다. 지형으로 봐도 화왕은 창녕의 진산이다. 창녕의 동쪽면을 완전히 막아주고 있다. 여기서는 멀리 가야산, 의상봉, 비계산, 황매산 줄기들이 보인다.
화왕의 여름은 참억새 초원, 겨울에는 설경이 장관을 이룬다. 화산 분화구인 용지에는 창녕 조(曺)씨 득성비(得姓碑)가 있고, 산중에는 보물 4점과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관룡사가 있다. 그 밖에 삼림욕장과 자하골 계곡 아래의 도성암을 비롯해 여러 암자와 정자가 곳곳에 흩어져 있고, 인근에 사적 제65호인 목마산성과 부곡온천, 계성고분군, 우포늪, 영산호국공원 등 문화유적과 볼거리가 많다.
정상을 치러 온 종성과 홍미는 정상인 저 위로 올라갈 것이고, 여기에 여러차례 와 본 나와 마당바우는 반대편 배바우로 갈 것이다. 그리고 화왕산정을 빙 돌아 동문에서 서로 만나기로 했다.
저 멀리가 배바우다.
화왕의 서쪽 사면은 바위가 섞여 있는 암릉지역이다. 저 코스로도 산행로가 있지만 로프를 좀 잡아야 한다.
화왕산은 1983년에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 화왕산군립공원은 창녕군 창녕읍과 고암면의 경계에 있는 화왕산(757m)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근에 만옥정공원 내의 창녕 신라진흥왕척경비(국보 33)와 창녕 교동고분군(사적 80), 창녕 석빙고(보물 310) 등의 명소가 있다.
화왕산은 용암의 분출로 형성된 화산으로, 용지(龍池)를 비롯해 3개의 분화구가 있고, 정상부에는 사적 64호인 화왕산성이 있다. 산성 안에는 5만 6000여 평에 달하는 넓은 초원이 펼쳐지는데, 가을이면 온 들판이 억새로 뒤덮여 황금 물결을 이룬다.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참억새 군락을 보기 위해 화왕산을 찾고 있으며, 10월 초순경에는 화왕산갈대제전위원회에서 주관하는 화왕산갈대제가 정상에서 열린다. 사실 습지에서 자라는 것이 갈대이고 이 곳에는 억새가 자라지만 예전부터 갈대라고 불리웠기에 여전히 갈대제라고 한다.
화왕산 정상에 다다르면 북쪽으로 보이는 사면이다.
화왕산정
종성과 홍미는 산 마루금을 따라 계속 나아가서 저 멀리 보이는 화왕산성의 동문에서 우리와 조우할 것이다.
화왕하면 억새가 아니던가?
화왕산
마루금을 따라 가던 종성과 홍미는 이제 화왕산성을 타고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억새밭을 헤치고 가는 홍미
이제 화왕산성을 밞고 동문으로 내려간다.
우리(나와 마당바우는) 정상 반대편에 있는 것이 배바위로 온다. 몇년전 화왕평전에 억새를 태울 때 저 배바위 근처에서 여러 사람들이 불에 타 죽기도 한 곳이이다. 화왕산 정상은 밋밋한 분지로 되어 있고 동쪽에 관룡산과 영취산이 지척에 있으며 낙동강을 끼고 있는 평야와 멀리 동쪽으로 영남알프스의 산들이 보인다.
저 멀리 화왕산 정상이 보인다. 아마 종성과 홍미는 지금쯤 정상에 있을 것이다.
반대쪽 마루금을 따라 그들은 동문으로 내려올 것이다. 우리는 이쪽 산성을 따라 내려가서 동문으로 갈 것이다.
헤드밴드를 가져오지 않아 손수건을 머리에 맸다.
정상 반대편 봉우리인 배바위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는 마당바우. 어떤 이는 여기가 정상인줄 알고 오르기도 했는데 최근에 이 곳에 정상석이 세워지면서 그런 일이 잦아 들었다. 배바위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기에 관심이 가는 곳이다.
그대로 쪼개진 배바우
바위를 이리저리 탐색해 보는 마당바우. 달래 닉네임이 바우냐? 그는 경주에서는 최고의 클라이머다.
누가 사진을 이렇게 찍었냐? 나도 모르게...........
우리는 이렇게 동문으로 간다. 종성, 홍미와는 반대로 가는 것이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玉泉里)에 있는 가야시대의 석성(石城)인 화왕산성. 우리는 앞에 보이는 동문에서 만나서 점심을 먹으려 한다.
우리가 먼저 동문에 달해 쉬고 있다. 저 위에 홍미와 종성이 오고 있다.
사적 제64호 화왕산성은 면적이 18만 5724m2 로 조선 전기의 기록을 보면 둘레가 1,217보(步:1보는 6尺)이며, 성 내에는 샘이 9, 못이 3, 또 군창(軍倉)이 있었다고 한다.
창녕뿐 아니라 영산(靈山) ·현풍(玄風)까지를 포용하는 성으로서 군사적으로 주요 요충지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실용적 가치를 느끼지 못하다가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왜적이 순식간에 대로를 따라 북상하게 되자 이 성의 군사적 가치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곽재우(郭再祐)장군의 의병 근거지였으며, 그는 이 성을 굳게 지킴으로써 왜군의 경상우도 침입을 막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1596년이나 전쟁이 끝날 무렵인 1598년에 비변사(備邊司)는 이 성의 군사적 가치를 재인식하여 산성수축의 긴급함을 건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맨 나중에 종성이 내려오면서 우리를 찍었다. 우리는 쉬고 있다. 요즘은 늘 피곤하다. 교감하는 일도 그리 쉬운게 아니다.
화왕산성 동문이다.
우리는 서문으로 올라와서 평전을 가로질러 이제 동문에 다다른 것이다. 이 동문으로 나가면 옥천매표소, 관룡산이 나온다.
화왕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있던 성으로 성 안에 창녕 조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삼지(三池)가 있고, 산 정상의 서쪽 아래에는 조선 선조 이후에 축성되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한 목마산성(사적 65)이 있다. 산의 서쪽 사면 말흘리에서 진흥왕의 척경비가 발견되었다. 남쪽 사면에는 옥천사가 있다.
드라마 <허준>을 촬영했던 세트장. 하지만 그 뒤에도 <대장금>등의 인기 드라마가 여기에서 여럿 촬영되었다.
이곳이 화왕에서 관룡산으로 넘어가는 접경지역이다. 관룡산 들머리이기도 하다.
들머리에서 관룡은 그리 멀지 않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고암면에 자리잡은 관룡산은 화왕에 가려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그러나 이산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경 뿐만아니라 역사적으로 예사롭지 않은 곳 임을 알 수 있다. 특히 관룡산 정상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암릉은 설악의 공룡능에 버금가는 천길 낭떠러지 절벽을 안전시설물에 의지하며 종주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설악의 공룡능을 지나는 멋이다.
또한 산행 들머리서 관룡산 관룡사 정상으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암릉과 화왕산으로 가는 길목은 억새가 장관을 이루어 전국의 산악인들에게 가을산행 코스로 인기코스가 되었으며 최근 몇 해 전부터 화왕산 억새산행과 전국에서 유일한 억새평원에서 벌어지는 야간 횃불축제는 최고의 볼거리로 장관을 이룬다. 때문에 화왕은 한국100명산이지만 나는 <강대춘의 200명산>에 이 관룡을 넣었다.
우리는 예전과 다르게 공룡능선을 타지 않고 우측으로 내려 용선대 석불 방면으로 나아간다.
저 능선을 직접 타지 않고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재미도 괜찮다.
바위길로 내려서는 홍미와 나
길이 이런 식이라 재미가 솔솔하다.
용선대 석불이 앞에 보인다. 관룡사에서는 700m. 15분 거리이지만 아름다운 산길이다. 포근한 오솔길이다가 가파른 나무계단이 이어지기도 하고 산사태 지역에선 아찔한 맛도 보여준다. 희한하게도 쉬어갔으면 싶을 때 눈앞에 집채만한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그게 용선대다. 사바와 극락사이의 번뇌의 세상을 용이 이끄는 배를 타고 건넌다는 '반야용선(般若龍船)'에서 따왔다.
편편한 바위 위에 편안한 모습의 부처님이 관룡사를 향해 정좌해 있다. 그렇게 천년의 세월동안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용선에 태워 극락세계로 인도해왔다. 그동안 세월의 무게가 더해져 얼굴이며 몸 전체에 흰 이끼가 덕지덕지 붙었다. 용선대 불상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관룡산 정상 쪽으로 20여m 위쪽에 있는 바위 위에 올라야 한다. 그곳이 바로 촬영하는 이곳이다. 산 아래 옥천계곡과 올망졸망한 능선을 법당으로 삼아 사바세계를 지켜보는 부처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선대의 불상을 두고 이곳 토박이들은 '팥죽부처'라고 부른다. 팔공산 갓바위처럼 한가지 소원은 들어준다며 동짓달이면 소원을 빌기 위한 행렬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관룡에서 바라다 보니 우리가 지나왔던 화왕산성이 보인다. 근데 이건 클로즈업한 것이다.
원래는 이렇게 멀다. 제법 멀리도 왔다.
이제 용선대에 오른다. 딴 곳을 쳐다보는 둘의 관심은 무엇일까?
용선대에 오른 종성, 홍미, 마당바우. 용선대에서는 촬영이 제대로 안된다.
저 앞으로 관룡산 줄기가 보인다.
기껏 찍어야 이렇게 밖에 못한다. 바위 선반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
이 용선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좌상은 보물 제295호로 상높이 188cm, 대좌높이 136cm이다.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한 좌상으로 광배는 없어졌다. 약사전에 봉안된 석불좌상과 달리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상이다. 나발의 머리에 낮은 육계가 있으며 양감이 적당히 표현된 각이 진 얼굴은 단정한 인상을 준다.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썹과 눈, 오똑한 코의 표현 등에서 신라불상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불신(佛身)은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지만 어깨가 좁고 결가부좌한 다리가 경직되게 표현되어 석굴암 본존상에서 보이던 당당함이 많이 감소되었다. 법의(法衣)는 통견으로 평행한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처리되고 있어 조성시기가 다소 내려감을 알 수 있다. 대좌는 3단으로 반구형(半球形)의 상대(上臺)에는 연꽃잎 안에 꽃무늬[花紋]가 있는 중판 연꽃무늬가 앙련(仰蓮)으로 새겨져 있다. 중대(中臺)는 8각이고, 하대(下臺)는 4각형의 받침 위에 복련(覆蓮)의 중판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어서 통일신라 후반 대좌의 특징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9세기로 추정된다.
용선대에서 내려다 보면 저 밑에 천년고찰 관룡사가 보인다.
이제 관룡사로 내려선다.
관룡사는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구룡산(九龍山) 중턱에 있는 절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사찰로서 <사기 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전설에 의하면 원효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드릴 때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 화왕산(火旺山)으로부터 9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은 관룡사, 산 이름은 구룡산이라 했다고 한다. 1401년(태종 1) 대웅전을 창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년(광해군 9) 영운(靈雲)이 재건했다. 1704년(숙종 30) 가을 대홍수로 금당이 유실되었으며 1712년(숙종 38) 대웅전과 다른 당우들을 재건했다. 1749년 다시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사찰 내에는 보물 제212호인 대웅전,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龍船臺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519호인 석불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3층석탑 등의 귀중한 문화재들이 있다.
모든 고찰들이 그렇듯이 자리 잡은 터가 명당터이다. 관룡산 바위능선 바로 아래에 이런 터를 잡고 있으니...........
관룡사 대웅전은 조선시대 목조건물로 보물 제212호이다.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인 다포(多包) 계통의 건물로 정면 중앙칸이 넓어서 좌우로 안정된 구조를 보여준다. 내부의 중앙 뒷줄에 세운 2개의 고주(高柱)에 의지해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했다. 내외이출목으로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공포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다. 1965년 해체복원공사 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상량문(上樑文)이 발견되어 1401년(태종 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재건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다시 중창했음을 알 수 있다.
관룡사 내부
관룡사 외관
밑에서 올려다 본 관룡사
이제 사바세계로 내려가자. 우리는 원래 속인들이 아니었는가? 잠시 명부에 올라와서 즐겼을 뿐이다. 제 주제를 알아야지.
사찰에서 내려가다 보면 예전 밭길에 숨은 보물이 자리한다. 만화 속 주인공들이 새겨진 듯 뭉툭한 코와 과장된 눈망울을 가진 한 쌍의 석장승은 토속신앙이 공존하였던 사찰의 또 다른 주인공들이다. 고려 공민왕 때 개혁정치를 주장한 신돈과 관련된 유적도 있는데 신돈이 출가한 곳으로 알려진 옥천사지와 신돈이 태어난 일미사지가 인근에 있으며, 절 아래 옥천계곡은 여름철 피서지로 인기가 많다.
관룡사를 벗어나려면 엄청나게 걸어야 한다.
요즘 세상 좋다. 스마트폰 속 인터넷으로 창녕콜택시 전번을 알아내어 call했고 30분 뒤에 콜택시가 왔다. 그리고 우리를 반대편 자하골로 데려다 주었다. 이제 내 차를 찾았다.
서울 친구 종성은 이번에 내가 교감으로 승진한 것을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한잔 사겠다고 해서 아무데나 가자고 했더니 안된단다. 제법 괜찮은 곳에 가서 한잔하잔다. 그래서 찾아 온 곳이 대구 들안길이다. 전국의 모든 음식점이 한군데 상존하는 곳이 대구 들안길이다. 이 거리에 고급 음식점이 500여개가 존재한다나..........우리는 그중 한정식 집으로 든다. <남도명가>이다.
ㅋㅋ 이름은 남도명가인데 음식은 경상도식이다. 남도는 전라남도 해남, 강진 지역을 말하는데............
이것은 이 지역이 자랑하는 천연송이이다.
경상도식 야채쌈이다. 피가 되는 페이퍼는 뭐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자! 축하! 한잔이다. 이제 마당바우가 한잔하면 내가 운전해야 한다. 뭐, 여기 대구에서 경주까지야 가벼운 스포츠지.
종성과 홍미를 동대구에 내려주고 우리는 부리나케 경주로 달린다. 경주에 와서 마당바우 박광태와 한잔한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