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 변조은으로 호주 한인 사회에 더 잘 알려져 있는
존 브라운 목사는 1960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돼
경남 일대 농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10년 넘게 했다.
현재 88세인 변조은 목사는 아직도 유창한 한국어로 그때를 얘기한다.
진행자: 지금 시드니 한국 문화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 ‘호주 매씨 가족의 한국 소풍기’와 관련해서
지난 2주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해 왔습니다. 처음 이 전시를 세상에 내놓은
경기대학교 소성 박물관 배대호 학예팀장과 1910년부터 -1978년까지 매켄지 가족이
한국에서 한 많은 일들에 대해 살펴봤고요. 이어서는 한국전쟁 중 부산에서
일신기독병원을 설립한 헬렌, 캐서린 맥킨지 자매의 제자,
멜번의 한인 동포 김영옥 선생님과 함께 맥킨지 자매의 은퇴 후의 삶에 대해서 들어봤습니다.
오늘은 호주의 원로 목사인 존 브라운, 한국명 변조은 목사님과 함께
1960년대 호주 장로교 선교사들의 한국 선교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호주 한인 사회에서는 시드니 연합교회의 설립자로 변조은 목사님이 잘 알려져 계신데요.
1960년-1972년까지 한국에서 사역을 한 변조은 목사님은 지금 연세가 88세신데도,
여전히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계십니다. 나혜인 프로듀서가 연결했습니다.
존 브라운(한국명 변조은) 목사
1960-1972년 한국 파송 선교사로 활동
마산, 진주, 부산. 통영 등 주로 경남 일대에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사역
호주에서 돼지와 젖양을 싣고 가,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급
1974년, 호주 최초의 한인 교회인 시드니 연합교회 설립
나혜인 피디: 호주 한인 사회에서는 한국 명 변조은이라는 성함으로 더 잘 알려진
존 브라운 원로 목사님 함께 합니다.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변조은 목사: 안녕하십니까?
나혜인 피디: 정말 오랜만에 목소리를 듣습니다.
많은 분들이 시드니의 첫 한인 교회 시드니한인연합교회의 설립자로
우리 변조은 목사님을 아직도 기억하고 계실 텐데요.
목사님께서는 이미 오래전에 은퇴하셨고 지금 연세가 많으셔서 많은 분들께
목사님의 건강을 염려하실 텐데요. 어떠신지요. 건강하신지요?
변조은 목사: 네. 기억력은 안 좋지만 그 외에는 다 괜찮습니다.
나혜인 피디: 네. 다시 한번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가 지난 2주 에 걸쳐 현재 시드니 한국 문화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전시 ‘호주 매 씨 가족의
한국 소풍기’와 관련해서 호주 맥켄지 가족의 이야기를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오늘 목사님을 이렇게 오랜만에 모시게 된 것도 이 전시가 계기가 된 건데요.
변조은 목사님께서 멜번 대학에 재학 중이셨던 1950년 대 때부터…
한국에서 사역을 하던 헬렌, 캐서린 매켄지 자매의 이야기를 들으셨죠?
변조은 목사: 네.한국에 가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알고 있어서
한국에는 우리가 1960년 그러니까 그네들이 이미 7년 전에 앞에 가셨죠.
물론 거기서 태어났지만 그래서 그네들이 그 병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었고.
6 25 전쟁 그때부터 시작해서 그 병원을 세웠다는 것을 이미 호주 장로교에서 다 알고 있었죠.
나혜인 피디: 변조은 목사님께서도 1960년에 직접 한국에 선교를 가셨는데요.
당시의 한국 상황 어땠습니까? 기억에 나시는 게 있으신가요?
변조은 목사: 한국 상황… 뭐 그때 전쟁은 이미 끝났고,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모두 가난하게 살고 있었고, 어렵게 살고 있었어요.
우리가 처음에 한국에 갈 때 서울 종로 5가에서 살았어요.
근데 그 근처에서 아직도 전쟁의 피해, 우리가 얼마든지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깨진 건물을 아직도 다 고치지 못했고 전쟁의 피해를 얼마든지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나혜인 피디: 그때 당시 한국에 가셨을 때 가축을 가지고 가셨다고요?
변조은 목사: 네. 65년에 가져갔었습니다.
호주에 왔다가 갈 때 그 젖 짜는 양을 가지고 돌아갔었습니다.
또 돼지… 그것을 왜 가져갔느냐 하면 이미 5년 동안 내가 거제도나
경남 일대를 다 돌아다녀 보니까 돼지나 염소 종류가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가장 최고 품을 가져갔었습니다. 가져간 것은 돼지를 가져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져간 그 돼지가 큰 돼지였고 그때 한국에서 기르던 돼지보다
훨씬 더 빨리 커서 그것을 우리가 교배시켜서 말이죠.
새끼를 농민들에게 좀 주면 그네들이 같은 양식을 먹이는데도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가져갔었습니다. 그래서 번식시켜 가지고 농민들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 다음에 젖 짜는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특히 농가에 돌아보니까
건강이 안 좋고 좀 어렵게 사는 젊은이들이 있어서 말이죠.
젖 짜는 양의 양유를 마시면 건강이 상당히 좋은 것일 거라고 생각했어서
가져가서 번식시켜 가지고 농민들에게 돌려줬습니다. 그리해서 그네들이 젖 짜서
아픈 사람들에게 환자들에게 먹임으로 오히려 큰 영향을 받게 됐습니다.
나혜인 피디: 그때 당시 한국에 가셔서 헬렌 매켄지, 캐서린 매케지 자매와도 만나셨는지 궁금합니다.
변조은 목사: 그럼요. 네 그럼요. 우리 딸, 큰 딸은 일신 병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 원래 도착한 지 한 몇 개월 만에 우리 큰 딸이 거기서 났었어요.
네 그래서 우리 아내가 거기에 입원해서 아기가 났었고,
헬렌 매켄지하고 캐스 매켄지하고 우리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그네들이 병원에서 했지만 우리는 농민들에게 농민들을 상대해서 일을 했습니다.
나혜인 피디: 어떤 분들이셨나요?
변조은 목사: 첫째는 그네들이 한국에서 났기 때문에 말이죠.
한국 사람을 친구로 생각했고 많이 사랑했고 둘째는 그네들이 둘째 없는 기술자들이었습니다.
하나는 의사이고 하나는 간호사입니다. 그래서 그네들이 병원을 세워가지고
훌륭한 산부인과 의사를 기르며 한편으로 한국에서 그런 제도가 없는데,
그 간호사를 산부인과 간호사를 많이 길렀습니다. 아주 훌륭한 기술자이면서
한국 사람을 사랑해서 상당한 선교사들이 되었습니다.
나혜인 피디: 매켄지 자매의 아버지가 제임스 매켄지 선교사시죠.
1910년에 한국에 가셨는데, 호주 장로교가 한국에 파견한 17번째 선교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특히 호주는 1899년 한국에 파송한 첫 번째 선교사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가 순교하고
당시에 한국 선교에 큰 힘을 쏟고 있었다고 하는데요. 보통은 순교를 하시면
그 지역은 좀 피하지 않으실까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호주 장로교에서 특별히 한국에 더 노력을 한 이유가 이유가 있었을까요?
변조은 목사: 한국의 선교사로 처음 파송하게 된 동기는 그때 한국에 대해서
별로 뭐 아는 것이 없었고, 단 일본 사람들에게서 압제를 당하고 있고,
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서 섬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서 갔었죠.
그러니까 그들이 해석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을 불러서 한국에 가게 된 거죠.
나혜인 피디: 네. 처음에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님이 순교하셨어도
계속 한국에 선교사를 보낸 건 어떤 이유에서인가요?
변조은 목사: 시작한 일이니까요.
시작한 것을 그만두는 것보다 아직 할 일이 많아서 말이죠.
네 또 일본 사람들에게서 압제를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좀…도와준다는 것보다
그건 물론 도와주는 것이지만 그래도 하느님께서 가라고 하시니까 간 거죠.
하나님께서 가라고 했다고 생각해서 간 거죠.
나혜인 피디: 그 후로 얼마나 많은 호주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었나요?
그리고 한국에서 호주 선교사들이 어떤 부분에 영향을 미쳤습니까?
변조은 목사: 그네들이 한국에 가게 된 것은 물론 헨리 데이비스 목사님하고
그 누나가 같이 갔었죠. 그네들이 간 것은 그때 한국에 대해서 별로 몰랐습니다.
실은… 그러나 일본 사람들에게서 좀 탄압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가서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어서 그래서 갔는데요.
그때 아주 미미한 시작으로부터 시작했지만 점점 가장 유능한 분들이 한국에 가게 됐습니다.
선교사들 가운데서도. 한국에 간 사람들이 가장 유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보고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첫째는 경남 일대를 맡아서 말이지 돌아가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한 거죠. 갖가지 여러 가지로 했어요.
농민들 가운데서 살면서 그리고 병원을 하면서 그리고 학교를 하면서
그때 현대 학교는 없어서 시작했죠. 마산, 부산, 진주에서 하고 통영하고 각 처에 세워서
교육 사업도 했고 그다음에 모금을 전달을 여러 뭐라고 전달했죠.
교회도 세웠고 병원을 세웠고 학교를 세웠습니다.
나혜인 피디: 특히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사실 전쟁 중에 한국을 다시 찾아 평생을 헌신한 매켄지 자매와 변조은 목사님을 포함한
다른 호주 선교사들의 이야기는 인류애에 대한 큰 울림을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변조은 목사님, 오늘 목소리를 반가워하시는 많은 청취자 여러분들이 계실테데요.
우리 한인 사회에 전하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변조은 목사: 한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말이죠.
또 그 후에 지금까지 거의 매년 다녀왔거든 그러니까 한국은 제 고향과 똑같은 곳입니다.
한국 사람은 우리 친척인 것 같고 우리가 한국 아이를 입양했고
우리 둘째 딸은 한국 아이거든요. 우리가 입양한 아이 그러니까 우리는 한국과의
관련을 잊을 수가 없고 늘 우리 고향인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나혜인 피디: 네. 호주의 원로 목사 존 브라운, 한국명 변조은 목사님과 함께 했습니다.
함께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변조은 목사: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