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2. 주일예배설교
누가복음 22장 31~38절
십자가는 자신감이 아닙니다.
■ 증기기관의 발견으로 촉발된 1차 산업혁명 이후, 전기의 2차 산업혁명, 전자의 3차 산업혁명, 플랫폼의 4차 산업혁명은 우리의 삶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산업혁명이 진화될 때마다 삶의 변화는 혁명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한계에 대한 도전이 갱신되면서 성장에 대한 부정성은 더 이상 용납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성과를 이루어 내다보니, “할 수 있다!”는 것이 최상의 가치가 된 긍정의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성공하라는 것이 남아 있는 유일한 규율입니다. 그러므로 성공을 위해서 가장 강조되는 것이 바로 긍정의 정신입니다.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실패나 패배는 극도의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가 양산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입니다. 그러니 성과를 지향하는 사회는 ‘피로사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과를 내기 위해 타자를 짓누르는 성과사회는 결국 자아도 짓누르는 아이러니가 일어납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입니다. 참으로 옳지 않은 결과를 낳는 사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서 한국교회는 무엇을 했을까요? 어떤 스탠스(입장)을 취해야 했을까요? 안타깝게도, 부정성을 용인하지 않는 성과주의에 동조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한술 더 뜨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초라해서 외면당하는 십자가는 없고, 화려하고 비싼 십자가를 선호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사라지고, 십자가를 이용한 성전 장사꾼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이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본질, 십자가의 본래 의미를 묵상하고 이에 깨달은 바를 반성하고 실천하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십자가의 본질, 십자가의 본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계신 중에 생긴 사건이고 메시지입니다. 이 설명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가신 이유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였습니다.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드디어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목적은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짊어지기’셨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9장에 예루살렘 입성이 보고된 이후, 잡히시기 이전인 20장에서부터 오늘 본문인 22장의 모든 메시지는 종말과 환란, 고난과 마지막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는 다 십자가의 본질과 그 의미와 연관/연결된 메시지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선택한 본문에는 두 개의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소위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 대한 예언’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소위 ‘검 둘’ 사건입니다. 보기에는 이 두 사건은 연관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십자가의 본질과 그 의미를 설명하는 사건입니다. 19장에서부터 22장 전체가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 두 사건을 하나씩 만나 보겠습니다.
■ 먼저 소위 ‘베드로의 세 번 부인에 대한 예언’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사이에 일어난 ‘누가 크냐’는 논쟁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가 큰 자라는 답을 주심으로 논쟁을 종결시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에 결정적인 말씀이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논쟁은 더 이상 진행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논쟁을 마무리하시자마자, 시몬 베드로를 호명하시고는 기겁(氣怯)할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31절과 32절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무슨 뜻인가요? 분명 시몬 베드로에게 부탁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부탁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앞에 설명하신 것이 베드로를 기겁하게 한 것입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입니다. 이 말은 ‘주님을 떠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또는 ‘주님을 배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이 의미를 알아챈 베드로는 바로 반박하였습니다. 33절입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것은 ‘주님을 떠난다’, ‘주님을 배신한다’는 말씀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섭섭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기를 쓰고 반박한 것입니다. “각오하였나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 반박/반발에 오히려 더 센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34절입니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오늘 세 번 부인 할 것이라는 이 말씀에 베드로의 반박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두고 보세요!’일까요? ‘두렵다!’일까요?
베드로의 반발은 더 이상 없고, 이제 예수님은 베드로를 포함해 모든 제자를 향하셨습니다. 두 번째 사건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35절과 36절입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것은 언제 일을 물으신 것일까요? 오래전, 제자들에게 각 마을을 다니며 전도하라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대와 배낭과 여벌의 신발 없이 빈 몸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유인즉, 철저히 주님만 의지하고, 전적으로 주님의 능력과 공급하심을 경험하라는 차원이었습니다. 이를 철저히 경험했기에 제자들은 “없었나이다.”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지난번과 전혀 다른 지시를 내리십니다.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지난번에는 필요 없다고 하신 것을 이번에는 겉옷을 팔아서라도 준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37절과 38절의 대화를 이어가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사야 53장 12절의 예언의 말씀을 가지고 오셔서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예언이고, 이 예언이 지금 이루어져 가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은 귓등으로 흘리며, 아까 하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사라”는 말씀에만 꽂혀서는,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태도에 포기하신 듯한 대꾸를 하셨습니다. “족하다. 됐다.”
■ 우리는 이 두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무엇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그것은 십자가의 본질과 그 의미에 대해서입니다.
1. 베드로는 예수님의 길, 십자가의 길을 참 쉽게 생각했습니다. 용기를 갖고 담대함으로 가면 되는 길인 줄로 생각했습니다. 3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누가 들어도, 멋지고 훌륭한 결심입니다. 사실 이래야 맞지요.
그런데 베드로가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 31절의 사탄의 집요한 방해와 공작, 그리고 32절의 베드로를 위한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왜 사탄의 집요한 방해와 공작이 제자들에게 있는 것일까요? 십자가가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이라도 이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도록 방해 공작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고자 하시는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간절한 기도를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결코 믿음만은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사실을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귓등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길, 예수님이 짊어지셔야 하는 짊, 바로 십자가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죽음인지를 놓쳤던 것입니다. ‘짊어지면 되지 뭐.’ 정도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대들었던 것입니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절)
참으로 자신감이 십자가가 아닙니다. 완벽함도 십자가가 아닙니다. 부족한 것이 없는 것도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오해받고 무시받는 고난입니다. 그리고 냉혹한 죽음입니다. 그렇기에 성과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든 이들에게는 이해가 쉽지 않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렇기에 교회가 성과주의와 성공주의에 매몰되는 순간, 십자가 없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과 똑같아지는 것입니다.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이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을 십자가와 전혀 상관없이 이해하였습니다. 특히 겉옷을 팔아서 검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에 관심이 컸습니다. 큰 싸움을 한판 할 것으로 이해했고, 이 싸움은 예수님이 계시니 당연히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당당히 검이 둘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더욱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들은 예수님의 37절 말씀을 귓등으로 들은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승리주의와 정복주의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무시당함의 십자가, 하찮은 취급을 받는 십자가는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습니다. 십자가는 오해받고 무시받는 하늘길인데, 제자들은 승리와 정복의 비단길로 생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교회가 비단길을 생각하고, 비단길을 가려고 한다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승리와 정복을 꿈꾸며 검을 앞세운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 십자가의 본질, 십자가의 본래 의미는 분명합니다. 고난이고 죽음입니다. 영광은 죽은 다음의 일입니다. 그것도 작위적인 것이 아니라 선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생활을 원한다면, 성과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들어 더럽혀진 교회의 세마포를 주님의 보혈로 빨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 진정한 신앙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승리주의와 정복주의에 취해있는 교회를 주님이 지시하신 좁은 문과 좁은 길로 안내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이 사명에 맞는 처신에 앞장서 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예수님의 자랑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