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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조백대사의 무정설법
이 제5장의 글은 ‘신축년 공부기工夫記’ 중에 ‘조백대사와 혜충국사의 무정설법無情說法’(2021. 8. 24.) 편을 일부 보완하고 수정한 것이다.
화엄경은 유정과 무정으로 나누고, 유정은 불성이 있어서 성불하고, 무정은 불성이 없어서 성불하지 못한다는 두 가지 견해가 없다. 그래서 혜충국사의 무정설법이란 말은 불가佛家에 널리 회자되지만, 조백대사의 무정설법이라는 말은 전혀 없다. 화엄경에서 무정설법은 상수常數이기 때문에 구태여 무정설법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래 혜충국사의 무정설법과 대응하여 여기에서 조백대사의 무정설법이라 소제목을 쓴다. 그리고 조백대사는 유정과 대응하는 말로 무정보다 비정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정여무정情與無情보다 정여비정情與非情이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초목은 무정보다 비정이 훨씬 더 좋다. 무無자와 비非자는 상통한다.
논문: “시설施設한 법문의 이사理事가 다르다고 한 것은, 예컨대 화불의 권교 중에 설하기를, ‘유정은 불성이 있고, 무정은 불성이 없으며, 일체 초목은 성도하여 법륜 등을 굴릴 수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예를 들면 화엄경은 곧 정여비정情與非情을 초월하는 실교와 같고, 바로 저 화불의 권종權宗이 범부를 준거한 화교化教와 같지 않다. 비유하면 공덕림보살 등 십림보살十林菩薩이 좇아온 국토와 같으니, 국토도 또한 혜慧라 일컫고, 일체 경계를 모두 혜체慧體라 일컫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유정도 없고, 무정도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두 가지 견해가 없기 때문이며, 일진一眞 지경계智境界는 성불하는 이도 없고, 성불하지 않은 이도 없기 때문이다.”(第八 所施法門理事別者 如化佛權教中說 有情有佛性 無情無佛性 一切草木 不能成道轉法輪等 如華嚴經即是越情實教 即不如彼化佛權宗約凡化教 如功德林菩薩等十林菩薩所從來國 國亦名慧 一切境界總名慧體 何以然者 無有情 無無情故 所以然者 無二見故 爲一眞智境界 無成佛者 無不成者故)
나의 견해: 이 글은 화엄론 회석 편에 있다. 화엄경 전체를 십문十門으로 나누고, 셋째 교의의 차별을 밝히는 문(明教義差別) 중에 여덟째 시설한 법문의 이사가 다름을 밝히는 문(明所施法門理事別)에 상당한 글 전문이다. 먼저 화신불이 설한 삼승의 권교와 법신불이 설한 일승 화엄경은 유정과 무정의 성불론成佛論에 명백한 차별이 있음을 밝혔다. 첫째, 무정은 성불할 수 없다. 둘째, 무정도 성불할 수 있다. 셋째, 일체 경계를 혜체慧體로 보는 화엄의 분상에는 유정도 없고 무정도 없으며, 또한 중생도 없고 부처도 없다. 두 견해가 없는 진지경계眞智境界는 성불하는 이도 없고, 성불하지 않은 이도 없다.
이 자리에서 돈오점수가 옳고, 돈오돈수가 옳다고 시비를 붙일 수 있겠는가? 선문이 교문보다 더 높다는 주장은 삼승 권교에 한정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일승 실교법문을 선문으로 삼고, 삼승 권교법문을 교문으로 한정하며, 선문이 교문보다 더 높다고 주장한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화엄교문은 선문보다 10층 위에 있고, 또한 불가설 불찰미진수 층의 위에 있다. 비교할 수 없다.
논문: “무릇 유정이나 무정이란, 이는 업業을 의탁한 교설이고, 대저 성불을 논하는 것은 업에 예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업에 예속하지 않는 것이면 곧 유정이 아니고 무정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정식을 벗어난 법에 성불하거나 성불하지 못함이 있다고 계탁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저기 유정과 여기 무정이란 업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니, 부처의 해탈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자기를 정업情業으로 계량計量하여 이처럼 소량小量으로 만들려 하는가? 유정과 비정 성불과 불성불不成佛은 경에서 설한 바와 같다.”(夫有情無情者 此是依業說 夫論成佛者 非屬業故 若非屬業者 即非有情 非無情故 何得於出情法上 計言有成佛不成佛耶 彼有情此無情者是業收 非佛解脫故 豈將自己情業之計 作如是小量 情與非情成與不成 如經所說)
나의 견해: 명리에 장남 선생의 병약설病藥說이 있다. 병이 있으면 그에 상응하는 약이 있다는 설이다. 동안상찰同安常察스님의 십현시十玄詩에도, “용궁의 만장滿藏은 약방문이다.”(龍宮滿藏醫方義)라는 명문이 있다. 중생의 업장이 8만4천 가지나 되기 때문에 그 처방전으로 8만4천 법문이 있다. 병이 없으면 약이 필요 없다. 정식의 유무로 유정 무정을 논하는데, 정식을 벗어난 일승의 해탈경계는 유정은 성불하고 무정은 성불하지 못한다는 시비를 붙일 곳이 없다.
절에 들어가서 스님이 되면 처음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공부하고, 다음 강원에 들어가 치문緇門을 배운다. 치문 제1장이 위산영우스님의 경책警策이고, 그 첫머리에 “대저 업으로 받은 이 몸은 형루形累를 면할 수 없다.”(夫業繫受身 未免形累)라고 시작한다. 업業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 의업意業의 삼업三業이 있고, 또 선업善業과 악업惡業이 있다. 이 유정세간과 무정세간은 일체 중생의 신구의身口意 선악의 삼업으로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업業을 의탁한 교설이라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정각세간은 어떠한가? “대저 성불을 논하는 것은 업에 예속하지 않는다.” 신구의 선악의 삼업을 정식이라 한다. “어찌 정식을 벗어난 법에 성불하거나 성불하지 못함이 있다고 계탁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계탁하는 것이 바로 정식이기 때문이다. “저기 유정과 여기 무정이란 업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유정은 성불하고 무정은 불성이 없다는 등류는 정식의 분별일 뿐이다. 부처의 해탈과 전혀 상관이 없다. “어찌 자기를 정업情業으로 계량計量하여 이처럼 소량小量으로 만들려 하는가?”(豈將自己情業之計 作如是小量) 내가 이 문장을 이전에 “어찌 자기 정업情業의 계량計量을 이처럼 소량小量으로 만들려 하는가?”라고 번역했다. 위와 같이 수정한다. 자기는 본래성불本來成佛이다. 이를 정식의 삼업으로 불성의 유무를 힐난하니, 어찌 부처가 중생으로 전변한 것이 아니랴. 장將자는 자기自己 두 글자를 도치시킨 것이다.
논문: “이 제법의 공상空相은 불생불멸하고, 불구부정하며, 세간의 만상이 상주하고, 제법이 법위에 상주한다. 이와 같은 도가 유정과 비정이 되겠는가? 이와 같이 화엄경 중의 대의는 본래 범부나 성인, 유정이나 비정이 없다. 전진법체全眞法體는 일불一佛의 지경계智境界가 되며, 다시는 다른 일이 없다. 범부의 정량을 가지고 망령되게 짐작하지 말라. 만일 정계情計를 남겨두는 이는 유정은 성불한다고 보고 무정은 성불하지 않는다고 볼 것이다. 이는 자신의 업에 집착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아는 이는 끝내 성불하지 못한다.”(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世間相常住 諸法住法位 如是之道 爲有情及非情耶 如此華嚴經中大意 本無凡聖 情與非情 全眞法體 爲一佛智境界 更無餘事 莫將凡夫情量 妄作斟量 若存情計者 見有情成佛 見無情不成佛 此爲自身業執 如是解者 終不成佛)
나의 견해: 반야심경과 법화경을 인용하고 나서 화엄경의 대의를 개진했다. 근래 생명공학이 급속도로 발전하여 사람의 체세포를 떼어내어 배양하면 사람이 되고, 개의 세포를 배양하면 개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80권 화엄경 중에 한 구절이나 한 용어를 명백하게 통달하면 화엄의 전체 대의를 알 수 있다. 위 문장 중에 전진법체全眞法體나 불지경계佛智境界를 명백히 알면 또한 그러하다. 전진법체가 불교의 상용어는 아니다. 당송팔대가 중에 으뜸인 퇴지 한문공이 쓴 글이 모두 사자성어가 되는 것처럼, 80권 화엄경을 회석會釋한 조백대사의 글이면 또한 불교용어의 사자성어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화엄경은 이 근본 법계의 문이고, 일체 제불이 본래 큰집에 머무시며, 일체 불자가 구경에 돌아갈 곳이고, 화신의 권승은 모두 그 밖에 있다. 만일 법계문法界門에 들어간 이가 있다면 한꺼번에 전진全眞에 들어갈 것이다.”(此華嚴經 是本法界門 一切諸佛 本住大宅 一切佛子 究竟所歸 化身權乘 總居其外 若有入者 一入全眞) 수궁가에 보면, “삼산三山은 반락청천외半落靑天外요.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는 이태백이 노던데요.”라는 구절이 있다.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면 이미 7언 절구도 평상어가 된다. 일입전진一入全眞은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또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와 동의어가 되며, 이미 뜻을 알고 나면 굳이 그 뜻을 펼쳐놓을 필요가 없다.
“전진법체全眞法體는 일불一佛의 지경계智境界가 되며,” 이 때문에 “이와 같이 화엄경 중의 대의는 본래 범부나 성인, 유정이나 비정이 없다.” “범부의 정량을 가지고 망령되게 짐작하지 말라.” 이는 상문上文의 “어찌 자기를 정업情業으로 계량計量하여 이처럼 소량小量으로 만들려 하는가?”라는 구절을 거듭 강조한 것이다. “유정은 성불한다고 보고 무정은 성불하지 않는다고 보면,” 이는 정업의 계량일 뿐이며, 이 때문에 “이는 끝내 성불하지 못한다.” 무시무시한 말씀이다. 방촌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다. 호리유차毫釐有差이면 천지현격天地懸隔이다.
“제불이 성도하고 한 왜소한 중생의 몸 안에서 한량없는 중생을 교화하지만, 그 왜소한 중생은 알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한다. 다만 범부와 성인이 동체가 되어 전이轉移하는 형상이 없으며, 섬진纖塵의 안에서 나와 남이 동체가 된다.”(諸佛成道 在一小衆生身中 化無量衆 其彼小衆生不知不覺 只爲凡聖同體 無移轉相 纖塵之內 自他同體) 왜소한 몸 안에서도 일체 제불이 팔상성도八相成道하시는데, 하물며 팔척장신八尺長身의 내 몸 안에서야 다시 말할 것이 있겠느냐. 내 몸이 곧 불국정토이다. 정토를 더럽힌다면 어찌 모든 부처님께 부끄럽지 않으랴.
논문: “무릇 이성理性이 비정非情에 변만遍滿한 것이라 유정의 성불과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는 여전히 법공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며, 실혜實慧를 의지하지 못하여 여전히 세간의 제상이 본래 상주함을 알 수 없다. 다만 정식을 따라 전변하며 생멸하는 형상만 보고, 망령되게 짐작하여 비정은 오로지 그 이성이 변만하기 때문이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성불이 어찌 이성 밖에 따로 부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이성이 곧 부처라면, 이 이성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본래 다른 형상이 없거늘, 어찌 망견을 좇아서 유정과 비정을 세우랴.”(夫言理性遍非情者 而不同有情成佛者 此由未見法空 不依實慧 未了得世間諸相本來常住 但見隨情識變生滅之相 而妄斟酌 言非情但有其理遍故 只如成佛 豈可理外別有佛耶 若理即是佛者 於此理中 情與非情 本無異相 豈從妄見立情非情耶)
나의 견해: 이 문단의 주제어는 것 자者가 두 개이다. 놈 자者를 위에서 것이라 번역하여 것 자라 말한 것이다. 불교는 놈 자를 천하게 여기지 않고, 상놈의 상常은 더구나 여래법신如來法身의 사덕 상락아정常樂我淨 중에 으뜸이라 최고로 존귀하다. 부처라 존귀한 것이 아니고, 중생이라 비천한 것이 아니다.
위 글의 핵심은 두루 미치다, 또는 널리 퍼져있다는 뜻을 가진 변遍 자에 있다. 국어사전에 두루하다는 형용사는 없지만, 불가에서는 통상 두루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또 세간은 편이라 독음하는데, 불가는 변이라 읽는다. 비로자나를 광명변조光明遍照라 하는 것과 같다. 가득할 만 자를 추가하여 변만遍滿이라 번역했다.
뜻이 통하지 않는 것은 문장이 어려워서가 아니고 단어가 어렵기 때문이다. 마하지관에 이르기를, “이 실성이 바로 이성이다.”(摩訶止觀卷五上, 則以實性卽爲理性.)라고 한다. 일단 이성을 실성이라 정의하고, 실성의 뜻을 구명해보자. 실성은 원성실성圓成實性 또는 진여실성眞如實性이라 한다. 바로 진여이다. 법상종에 삼성설三性說이 있는데, 셋째 원성실성은 또 제일의상 진실상이라 하며, 의타기성의 진실한 체가 바로 일체 법에 변만하고, 불생불멸하며, 체성이 진실한 것이니, 이 때문에 원성실성이라 한다.
“이성이 비정에 변만遍滿한 것이라 유정의 성불과는 동일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이는 권승 법상종의 견해이다. 의타기성의 진실한 체가 바로 일체 법에 변만하고, 불생불멸한다. “의타기성의 진실한 체”를 이성에 대비하고, “일체 법”을 비정에 대응한다. 유정 곧 중생심은 이성과 감정(육식의 작용)의 결합체라면, 육식을 청정하게 하여 성불할 수 있는데, 비정은 육식의 작용은 전혀 없고, 이성 달리 말하면 실성이나 법성만 100% 두루 충만하며, 이 때문에 유정의 성불과 동일하지 않다는 견해를 갖게 되는 것이다. 이 견해를 통박한 것이 그 아래 글이다. 법상종은 일체 사물의 본질과 상태의 차이점을 성상격별性相隔別의 입장에서 삼성설을 세운 것이고, 화엄종은 성상원융性相圓融의 입장에서 삼성을 논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법공은 위에서 말한 제법공상諸法空相이다. “실혜實慧를 의지하지 못하여 여전히 세간의 제상이 본래 상주함을 알 수 없다.”(不依實慧 未了得世間諸相本來常住) 세간의 제상이 본래 상주한다는 말은 법화경의 “이 법이 법위法位에 머물러 세간의 제상이 상주한다.”(是法住法位 世間相常住)라는 구절과 같다. 이는 진실혜眞實慧로 알 수 있는 경지이고, 범부의 정식으로는 알 수 없다.
이 법은 세간법이고, 법위는 진여의 정위正位이다. 세간의 제법이 법위에 상주한다. 상주는 불변하여 여여如如한 경계이다. 세간의 제법이 바로 여여하기 때문에 상주할 수 있다. 이 상주하는 상리常理를 어기기 때문에 삼계가 무상하다고 말하지만, 만일 무상의 실체를 알고 나면 곧 무상이 상주가 되는 것이다.
본문 중에 이理를 이성이라 번역했는데, 이성을 실성으로 환치하고 읽으면 그 뜻이 명백해진다. 환치하면 다음과 같다. “그러나 성불이 어찌 실성 밖에 따로 부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만일 실법성이 곧 부처라면, 이 실법성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본래 다른 형상이 없거늘, 어찌 망견을 좇아서 유정과 비정을 세우랴.” 어째서 이理를 실성이 번역하지 않고 이성이라 했는가? 근본을 중시하기 때문이고, 작자의 견해를 존중하기 때문이다. 위 글에서 이성과 법신 불성 법성 과성 등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성의 뜻을 알고 나면 실성으로 대체하여 해석할 필요가 없다.
논문: “가령 부처는 비정이면 응당 성불할 수 없고, 만일 대각을 성취한 이가 있다면, 이 두 가지 견해를 의탁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법화경은 권승權乘을 회통하여 일실제一實諦로 돌아갔다. 경에 이르기를, ‘갖가지 성상性相의 뜻은 나와 시방의 부처님이 곧 이 일을 알 수 있고, 성문과 벽지불 불퇴제보살不退諸菩薩 이와 같은 등 삼승의 권학權學은 다 함께 알 수 없다.’라고 한다. 광설廣說은 저 경과 같다.”(如佛是非情 應不得成佛 若有成大菩提者 不依此二見 是故法華經 會權歸一實 經云種種性相義 我及十方佛 乃能知是事 聲聞辟支佛 不退諸菩薩 如是等三乘權學 總皆不能了 廣如彼經)
나의 견해: 두 가지 견해는 무엇인가? 가령 유정이면 성불할 수 있고, 비정이면 성불할 수 없다는 상단이변常斷二邊을 말한다. 상견과 단견을 여의어야 대각을 성취할 수 있다.
성상性相을 양면으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성여상동性與相同이고, 둘은 성상유별性相有別이다. 제법실상諸法實相이 바로 제법실성諸法實性과 같으니, 이는 전자에 상당하고, 성체상식性體相識은 후자에 상당한다. 갖가지 성상이란 제법실성이나 제법실상을 말한다. 또 삼라만상의 성상 상호관계로 법성종과 법상종으로 분파되었다. 그 종초지말從初至末을 다 말하자면 끝이 없다.
논문: “예컨대 화엄경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 없고, 정여비정情與非情이 모두 일체지지경계一切智智境界이며, 일체 산하와 수목은 모두 불보살의 몸을 나투고 설법할 수 있으며, 불체佛體와 동일하여 능동능별能同能別하고 자재무애自在無礙하다. 제불이 세계 중에 주지하고 안립安立하며 자재로 장엄하는데, 그 경계가 동일하지 않고 장엄도 각기 다르다. 그 묘찰국토妙刹國士의 장엄에 낱낱 경계 중 섬진纖塵의 안에서 불신이 출현하고, 찰해가 중중하며, 불신이 무진하고, 불신의 모공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경계도 중중하고, 불신도 무진하며, 서로 사무치게 들어가는데, 능동능별하고 전동전이全同全異하며, 정토와 예토도 무장무애하니, 이와 같은 정여비정을 논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지금 시설한 교문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如華嚴經中 無有情與非情 俱爲智智境界 一切山河樹木 皆能現佛菩薩身及說法 與佛體同 能同能別自在無礙 佛於世界中住持安立自在莊嚴 境界差殊 莊嚴各異 於其妙刹國土莊嚴 一一境中 纖塵之內 佛身出現 刹海重重 佛身無盡 佛身毛孔亦復如是 境界重重 佛身無盡 互相徹入 能同能別 全同全異 淨穢國土 無障無礙 不論如是情與非情 是故今言所施教門別)
나의 견해: 화엄경에 일체지지경계一切智智境界라는 용어가 세 번 나오고, 화엄론에는 위 논문과 같이 지지경계智智境界가 딱 한 번만 나온다. 다음과 같다. “광대한 지혜의 힘으로 일체지지 경계를 알고,”(以廣大智慧力 了知一切智智境界) “일념경一念頃에 무공용지로 일체지지 경계에 들어가며,”(於一念頃以無功用智 入一切智智境界) “일체지지 경계 중에 안주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能令安住一切智智境界中故) 일체지지는 일체지 중에 최고 수승한 지혜이고, 지혜 중에 지혜이며, 구경실제究竟實際의 실지實智라 말할 수 있다. 일체 산하와 수목이 이하는 모두 일체지지의 경계이다.
범어梵語 sarvajna를 살바야薩婆若라 음사하고 일체지一切智라 번역하며, sarvathā-jnāna를 일체종지一切種智라 번역하며, sarvajna-jnāna를 살바야나薩婆若那라 음사하고 일체지지一切智智라 번역했다. sarvathā를 살박타薩縛他라 음사하고 일체처一切處라 번역하므로, sarvathā-jnāna를 살박타나薩縛他那라 음사하고 일체처지一切處智라 번역할 수도 있을 터인데, 확인하지는 못했다. 위 셋은 모두 불지佛智를 말한다. 일체지를 평등지로 보고, 일체종지나 일체지지를 차별지로 보기도 한다.
이 문단은 무정법문의 진수이다. “화엄경 중에는 유정과 비정이란 분별이 없고 차별이 없다.” 어째서 그러한가? “유정과 비정이 모두 일체지지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지지경계이기 때문에 “일체 산하와 수목은 모두 불보살의 몸을 나툴 수 있고, 설법할 수도 있다.” 유정과 비정은 “불체와 동일하지만, 능동能同과 능별能別에 자재自在하고 무애無礙하다.” 유정과 비정은 불체와 전혀 차별이 없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동일하고, 또 어떤 때는 차별이 있는데, 이 동별에 자재무애하다. 이상은 유정과 비정의 부사의한 경계이다. 아래는 지정각세간의 부사의한 경계이다. 제불의 경계도 또한 “능동능별하고 전동전이全同全異하며, 정토와 예토도 무장무애하다.”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서있는 이 땅이 중생의 눈으로 보면 예토이지만, 불안으로 보면 그대로 정토이다. 이 때문에 “이와 같은 정여비정을 논하지 않으며, 이 때문에 지금 시설한 교문이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나의 몸은 어떠한가? 여래출현품에 이르기를, “낱낱 꽃술에 사자좌가 있고, 낱낱 사자좌 위에 모두 여래께서 결가부좌하고 계시느니라. 그 불신佛身의 수가 일체중생의 수와 더불어 동등하며, 모두 최상最上의 공덕과 최묘最妙한 장엄을 갖추었으니, 근본 원력으로부터 생기生起한 것이니라.”(一一華蘂有師子座 一一座上皆有如來結跏趺坐 其佛身數正與一切衆生數等 皆具上妙功德莊嚴 從本願力之所生起)라고 한다.
내가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앉아 있다. 너도 또한 그러하고, 다른 이도 또한 그러하다. 바로 삼매에 들어가서 지안智眼으로 볼지니라. 이 나의 불신에 공양을 올리는 것이 항하사 미진수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보다 더 수승하다. 이것이 또한 “능동能同과 능별能別에 자재自在하고 무애無礙하다.”라는 것이 아니랴. 불안으로 보면 중생경계와 제불경계에 조금도 차별이 없다. “마음과 부처 그리고 중생이여, 이 셋에 차별이 없도다.”(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논문: “또 권교 중에는 제행諸行이 앞에 있고, 불과는 십지 이후에 있는데, 이 일승교 중에는 불과의 근본지를 먼저 증득하고, 차별지를 써서 서로 자량資量이 되며, 인과의 행상行相이 일시에 돈철頓徹하여 전제前際도 없고 후제後際도 없다. 하나가 이루어지면 일체가 이루어지고, 하나가 무너지면 일체가 무너지니, 여교餘教에서 일지一地에 일지를 닦는 것과는 동일하지 않다. 이성이 가지런하고, 때가 가지런하며, 인행因行이 가지런하고, 지혜가 가지런하다. 이 때문에 정혜를 닦고 지혜로 이를 관하라. 정견情見으로 알지를 말지니라.”(又權教之中 諸行爲先 佛果在十地之後 此教之中 佛果根本智爲先證 以差別智而互爲資 因果行相 一時頓徹 無前無後際 一成一切成 一壞一切壞 不同餘教 一地修一地 以爲性齊時齊行齊智齊故 以修定慧 用智觀之 莫將情解)
나의 견해: 삼승 권교와 일승 화엄은 견도위見道位와 가행위加行位가 다르다. 권교의 불과는 십지 이후에 있으니, 십주 십행 십회향 십지 40위를 가행위로 삼고 십지 이후에 견도한다. 그러나 화엄경은 십주초위 초발심주에 견도하고, 십행 십회향 십지 십일지를 가행위로 삼는다. 십신만심 초발심주에 이르러 선정의 관력觀力으로 법신과 계합하니, 불과가 십주초위에 먼저 드러나고, 여래의 근본 보광명지가 먼저 드러나기 때문에 시종과 본말이 모두 연촉延促 곧 장단長短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무시무종無始無終하고 무성무괴無成無壞한다.
일념에 발심하면 몰록 능소가 없고, 삼세의 실성을 알면 그 실성에 고금이 끊어지며, 삼세가 일념이고, 일념이 삼세 내지 십세이며, 자기 마음이 본래 부처인 줄을 자각하면 정각을 이룰 것도 없고 보리를 증득할 일도 없다. 그래서 이성이 가지런하고, 때가 가지런하며, 인행因行이 가지런하고, 지혜가 가지런하다고 말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정혜를 닦고 지혜로 이를 관하라.
2023년 1월 16일 74세 길상묘덕 씀
첫댓글 일부를 보완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