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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 질서 재편의 중심축
조선족 ‘半한국인화’ 등 소수민족 문제 대두
중국, ‘동북공정’ 추진으로 韓·滿 단절 노려
최근 중국의 역사왜곡 문제로 우리 사회의 관심사가 된 동북3성(길림성·요녕성·흑룡강성), 이른바 ‘만주’는 동아시아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리고 만주는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게 될 것인가.
만주라는 명칭은 1636년 청(淸) 태종이 황제가 되면서 군신들의 권유로 후금국을 만주로 개칭한 것을 계기로 순치제(順治帝) 이후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만주의 어의에 관해서는 범어인 만주사리(曼珠師利, Man-chu-shih-li)에서 나왔다는 설, 숙신(肅愼, Shu-chen)의 전음(轉音)인 주신(珠申, Chu-shen)에서 나왔다는 설, 만절(滿節)에서 바뀌어 만주가 형성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또한 원래 건주여진족(建州女眞族)의 가장 존귀한 칭호였던 만주(滿住)를 청 태조 누르하치가 계승해 사용했다는 설과 ‘건주’(建州)와 같은 소리였는데 이를 다르게 썼을 뿐이라는 설도 있다.
요동 → 만주 → 동북지구로 지명 변천
어쨌든 만주라는 명칭은 청 태조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 정권을 세우면서 자신을 만주 ‘칸’(汗)이라고 불렀고 1635년 청 태종이 여진인을 만주인(滿洲人)으로 개칭한 후 점차 부족 명칭에서 지명으로 바뀌어 전해 내려왔다.
청 초에는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지방을 가리켰지만, 청말민국초(淸末民國初)에는 구체적으로 ‘동삼성’(東三省, 봉천성·길림성·흑룡강성)을 뜻하는 지명이 되었다. 이후 ‘만주국’이 수립되면서 보편적 지명으로 사용되다 중국공산당의 조직 명칭(中共滿洲省委員會, 東西南北滿軍區 등)이 말해주듯 중화민국 시대까지도 중국인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면서 만주라는 명칭은 사라지고 대신 ‘중국 동북지구’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만주라는 명칭이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뿐만 아니라 ‘만주는 중국의 온전한 영토가 아니다’라는 주변의 여러 견해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만주라는 지명이 청조부터 사용되었다면 청조 이전 이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은 무엇이었을까. 이 지역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명칭에 근접한 것으로는 요동(遼東)을 들 수 있다. 요동의 지역개념은 전국시대 연(燕)이 요동군(遼東郡)과 요서군(遼西郡)을 설치하면서 비롯됐다.
과거 초원이나 삼림으로 뒤덮여 있던 요동(만주) 지역은 농경기술이 낮았고 위도가 높았기 때문에 농경이 곤란했고 주거환경 역시 열악했다. 따라서 요동은 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농경을 주업으로 하던 한족(漢族)에게 매력적인 삶의 터전으로 비치기보다 ‘미개한 이민족의 생활공간’ 정도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요동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한족의 통치권 밖에 방치될 수밖에 없었고 자연히 목축이나 삼림업에 종사하는 민족의 차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요동의 많은 유목민족은 한족 정권의 간섭을 크게 받지 않았고, 때로는 강대한 힘을 키워 나갈 수 있었다.
요동에서는 진(秦) 이전 시기에 숙신(肅愼), 진·한(秦漢) 시기에는 부여·고구려·옥저·읍루·오환·선비족, 위진남북조 시기에는 공손씨·물길·선비·해·거란·실위, 수·당(隋唐) 시기에는 돌궐·말갈족, 송·원(宋元) 시기에는 거란족·여진족·몽골족, 청대에는 만주족이 생활했다.
요동을 생활 터전으로 삼았던 민족 가운데 우리 민족은 고구려와 발해, 선비족은 전연(前燕)과 후연(後燕), 거란족은 요(遼), 여진족은 금(金)을 건국했다. 몽골족은 원(元), 만주족은 청을 건국했다.
특히 고구려의 건국은 동아시아에서 진·한 중심의 중국적 세계 질서의 구축을 지연시키거나 방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독자적인 정치·문화 영역을 싹틔우고 보존할 수 있도록 방파제 역할을 해 주었다.
고구려의 멸망은 중국문화가 요동 및 한반도·일본으로 순조롭게 전파되도록 함으로써 수·당 제국의 완성을 앞당겨 주었다. 송과 요·금의 건국은 한족문화권과 요동을 발판으로 한 유목문화권 사이의 우열(優劣)관계에 변화를 초래했고 유목문화를 중원(中原)에까지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금에 의한 북송(北宋)의 멸망은 유목민족이 한족문화권을 절반 이상 차지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요동을 기반으로 한 유목민족이 더 이상 한족 왕조의 속국이 아니며 한족과는 견줄 수 없는 미개한 민족이 아닐 뿐더러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할 수 있는 힘마저 지니고 있음을 만천하에 드러낸 상징적 사건이었다.
만주족의 등장과 청의 건국은 농경문화와 유목문화의 융합을 가져와 양 세력의 대결을 약화시켜 동아시아에 상대적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요동에서 일어난 유목민족들의 관내(關內, 중국 山海關 이남 지역) 진출과 정복은 다른 지역에서 야기된 변화보다 동아시아 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 빈도도 잦았다. 이러한 점에서 요동(만주)은 ‘동아시아 변동의 시발점’ 혹은 ‘진원지’ 역할을 했다.
淸朝, 만주 사회의 한족화 추진
<!--img2--><!--img2end-->청 왕조를 수립한 만주족은 만주를 ‘조상의 성지’라고 하여 봉금(封禁)지역으로 선포하고 이 지역에의 이민족의 유입을 금지했다. 이로 인해 만주는 동아시아에서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무주공산’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부동항(不凍港)을 얻기 위해 남진정책을 표방했던 제정 러시아의 세력 확장으로 이어졌다.
러시아는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으로 곤궁에 처한 청조를 협박해 아이훈(愛琿)조약과 북경조약을 맺고 각각 흑룡강 이북의 땅(60여 만㎢)과 우수리강(烏蘇里江) 동쪽의 연해주(약 40만㎢)를 빼앗았다. 이 시기 중국의 대규모 영토 상실은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회한으로 남아 있다.
한편 청조는 제정 러시아의 남침 저지, 관내 지역의 사회 모순 해소, 재정 궁핍의 타개를 위해 1860년대 이후 봉금 정책을 완화하고 한족의 만주 이민을 장려했다. 그 결과 한족의 이민이 급증했고 한족의 관습과 문화, 경영 방식 등도 만주에 전파되면서 만주족의 한족화(漢族化)를 자극했다.
선진적인 농경 기술과 상업 능력을 지닌 한족은 토착 만주족보다 우월한 경제적 지위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만주족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만주 사회의 주도권은 만주족 수중에서 한족 이민자로 넘어가게 되었다. 만주 사회의 한족화는 이민족의 생활 공간이었던 ‘변지’(邊地)를 한족의 문화권인 ‘내지’(內地)로 승격시켜 주었다. 변지에서 내지로의 변화는 만주의 ‘중국화’ 혹은 만주의 ‘내적 식민지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만주의 중국화’가 곧바로 ‘불가침의 영토’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영토는 그것을 지켜낼 힘이 있을 때만 주권을 보장받을 수 있다. 근대 시기 약육강식의 국제정세 속에서 러시아는 원동(遠東)으로, 일본은 대륙으로 진출을 추진했다. 여기에 맞서 청조는 대륙세력인 러시아와 해양세력인 일본의 침략을 저지하려고 발버둥쳤다. 이 때 만주는 침략과 방어의 관문 역할을 했다.
일본은 중국을 장악하기 위해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국’의 출현은 만주를 둘러싼 중국·소련·일본 사이의 각축을 일시에 잠재운 반면 중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들의 기존 질서를 흔들어 놓았고, 결국 동아시아 사회를 중일전쟁 및 태평양전쟁으로 몰아넣는 촉매로 작용했다.
소련군의 대일 선전포고와 만주 점령은 일제의 패망을 앞당겼다. 그 뒤를 이은 소련군의 북한 진주, 중국군의 한국전쟁 참여는 모두 만주를 매개로 이뤄졌고, 이것은 남북 분단 및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고착을 야기했다. 동아시아 기존 질서의 변동은 만주에서 촉발되었고 그 결과 생겨난 동아시아의 신질서 역시 만주를 매개로 출현했던 것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면 근·현대 만주는 ‘동아시아의 모순 해소를 위한 돌파구’였다. 만주는 한족의 이민을 받아들임으로써 중국의 과잉인구 및 경지 부족 문제를 완화해 주었고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이어 주는 접점 역할을 했다. 또한 만주는 러시아의 동방정책을 실현할 수 있는 최적지였다.
일본으로서는 만주는 대륙 진출의 교두보로서 제국주의 침략을 수행하는 데 중요한 요충지였다. 한편 만주는 조선의 항일 분자에게는 정치적 망명지이자 조국 해방을 위한 기지였다. 만주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도망쳐온 이슬람족, 소련에서 탄압받다 도망쳐온 백계(白系) 러시아인들에게도 생활 근거지였으며 ‘구원의 공간’이었다.
이처럼 만주는 동아시아(부분적으로는 유라시아)의 여러 문제들을 해소해 주는 ‘돌파구’였고 새로운 삶의 ‘안식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각 민족국가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만주는 물리적 충돌의 ‘각축장’으로 바뀌었고, 이어 동아시아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이 때문에 만주는 중국인에게 예민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지역일 수밖에 없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은 만주가 더 이상 ‘동아시아 변동의 진원지’로 되는 것을 사전에 막으려는 중국의 ‘만주전략’인 셈이다.
만주는 한반도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만주(요동)는 고조선·고구려·발해의 고토(故土)이자 우리 조상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발해가 멸망한 이후 한국 왕조의 통치권역이 만주까지 확장된 적이 없고 만주에 한민족의 왕조가 건설된 적도 없다. 그렇다고 만주가 지정학적·문화적으로 한반도와 무관한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정학적으로 만주는 한반도와 대륙을 이어 주는 가교 혹은 대륙 진출의 관문이자 교두보이기도 했다. 때로 만주는 대륙세력과 반도(혹은 해양)세력 사이의 충돌을 완화해 주는 완충 지대 역할을 했다. 반면 선비족의 모용씨가 고구려를, 거란족·여진족·몽골족이 고려를, 만주족이 조선을 침략한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만주는 한반도에 끊임없는 전운을 몰고 오는 ‘화근(禍根)의 온상’이자 ‘시련의 원천’이었다.
한반도에는 ‘시련의 원천’
<!--img3-->img3L<!--img3end-->문화적으로 만주는 대륙의 선진 문화를 한반도로 전파해 주는 매개지역으로서 한반도의 문화 수준을 높여 주는 문화의 전도사 기능도 했다. 만주가 한민족의 역사 범주로 다시 편입되기 시작한 것은 발해 멸망 이후 1,000년이 흐른 1900년대부터였다.
조선말 조선인들의 만주 이주를 계기로 만주는 우리 역사의 범주로 편입되었던 것이다. 조선 왕조 시기 조선인의 월경 및 이민은 청조의 만주 개간 및 재정 확보에 도움을 주었고 조선의 사회 모순을 완화해 주었다. 반면 그것은 조(朝)·청(淸) 간의 외교 문제를 야기했고 양국 간의 국경선 확정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일본의 조선 강점 이전까지 조선인의 만주 월경과 이주는 조선과 청조 사이의 문제였고, 이주 조선인과 중국인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고 조선인 이주민을 대륙 침략을 위한 첨병으로 활용하면서 조선인 이민을 둘러싼 조·중 두 민족의 관계는 매우 복잡해졌다. 일본 식민당국은 조선인의 발길이 닿는 곳이라면 어디든 ‘조선인 보호’를 명목으로 만주 침략을 시도했다. 그 결과 조선인 이민자는 중국인에게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앞잡이’로 비치기 시작했고, 중국인에게 미움과 경멸,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일본인 역시 괴뢰 ‘만주국’을 수립한 뒤 조선인 이민자의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그들을 하찮고 귀찮은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 시기 만주에 거주하던 조선인은 일본 본토·조선·만주국을 아우르는 일본 제국의 모순 해소를 위한 도구로 이용되었다. 만주 거주 조선인은 비록 ‘일본 신민’으로서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치외법권을 누리기도 했지만, 중·일 양 민족의 틈바구니에 끼여 서러운 삶을 꾸려 나갔다.
만주는 항일 근거지였고, 일부 조선인에게는 꿈을 실현시켜 준 안식처였지만, 대다수의 만주 거주 조선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워 주고 있었다. 만주에서 일부 조선인이 중국인과 더불어 항일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인에게 빌붙어 살고 있다는 재만(在滿) 조선인 내면의 자괴감을 덜어줄 수 있던 유일한 위안거리이자 자랑거리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재만 조선인을 증오했던 중국인들, 특히 국민당 계열 사람들 중에는 조선인이나 조선마을을 습격해 살해·폭행·강간·약탈 등을 자행한 경우가 많았다. 이 와중에 1944년 7월 당시 230만명이었던 재만 조선인 가운데 80여 만명이 귀국했다. 중국공산당이 대륙을 석권한 뒤 중국에 잔류한 조선인은 중국 소수민족의 일원인 조선족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전쟁에 참여해 북한 정권의 존속에 일익을 담당했고,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하는 부정적 역할도 했다.
조선족, 중국의 골칫거리
그들은 조선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중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의식을 공유하면서 민족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 때문에 중국 조선족은 반(反)우파투쟁(1958년)과 문화대혁명 때 대중화주의에 기초한 민족단결과 한족화를 강요당하면서 갖가지 고초를 겪었다. 연변에서만 2,000여 명이 사망했고 3,000여 명이 불구자가 되었으며, 수만 명이 북한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비록 조선족은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남한과는 무관한 존재였지만 북한과 중국 사이의 혈맹 관계를 돈독히 해 주는 윤활유 역할을 했다. 조선족은 한·중 수교를 계기로 합법이든 불법이든 수십만 명 가량이 남한에 체류하게 되었다. 그들은 남한의 사회상이나 문화를 중국의 조선족 사회에 전파시켜 조선족과 남한을 이어주고 있다.
최근 조선족은 남한의 노동시장에서 일정 비중을 차지하면서 남한 사람과의 동등한 대우를 요구하고 있고, 국적회복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조선족은 문화적·경제적으로 한반도와 만주를 연계해 주는 인적 매개체 역할을 하면서 ‘반한국인’으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족의 ‘반한국인화’(半韓國人化) 혹은 남한과의 밀착 상황은 조선족을 ‘확고부동한 중화민족’으로 만들어 새로운 소수민족 문제(조선족 문제)의 파생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중국정부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게다가 한반도의 급격한 정세변화(남북통일)라도 생기면 코리안드림을 꿈꾸던 대규모 조선족은 한반도로 들어갈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한 대규모 북한사람들(지도부를 포함해)도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서 만주로 도피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만주와 한반도의 역사적 관련성을 단절시켜 조선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 동북지구의 사회 안정을 도모하려는 중국 정부를 경악시킬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국의 ‘동북공정’은 만주와 한반도를 단절시켜 사회 안정을 꾀하려는 중국정부의 고뇌의 산물로 보인다. 이것은 오늘날 중국에서 만주라는 명칭 대신 ‘중국 동북지구’라는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만주가 ‘중국의 확고부동한 동북지구’라는 점을 대외에 과시하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조선족의 ‘한국인화’와 한반도의 정세변화로 인해 불거질 수 있는 ‘조선족 문제’를 떠올리면 만주는 여전히 ‘동아시아 변화의 시발점’이라는 역사적 위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만주는 한민족이 대륙으로 웅비할 수 있는 ‘기회의 땅’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조선족은 그것을 실현시켜 줄 수 있는 지렛대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조선족을 ‘가난한 중국인’으로 박대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소중한 한민족’으로 포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족을 진정한 한민족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동북공정’은 사상누각으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 동북3성은 중국의 寶庫
한반도 4배 면적에 광물·천연가스·목재 풍부
<!--img4-->img4R<!--img4end-->‘동북삼성’ 혹은 ‘만주’는 현재 중국에서 ‘동북지구’로 불리는 요녕성(遼寧省)·길림성(吉林省)·흑룡강성(黑龍江省)을 가리킨다. 이들 3성의 인구는 2002년말 기준 1억715만명으로 남북한 인구의 약 1.5배에 해당한다. 중국동포라고 불리는 조선족의 인구는 1990년 기준으로 192만3,000여 명이다. 이들 3성의 면적은 80.17만㎢로 한반도 넓이의 약 4배에 달한다. 1999년 기준 동북삼성에서 생산되는 대두가 중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31.1%이며 옥수수 30.1%, 밀가루는 13.2%에 이른다.
3성은 개방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최대 중공업지대였지만, 최근 산동반도 인근이 새로운 중공업지대로 부상하면서 그 비중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3성의 농임업·지하자원의 산출량은 중국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3성의 총생산량이 중국 전체 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기준으로 약 11%다.
요녕성은 과수 총면적 3위, 과일 생산량은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과일을 생산한다. 또한 철광·붕소·마그네사이트·금강석·스테아타이트·옥석 등이 풍부해 광물 매장량이 중국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요하의 유전은 중국 3대 석유가스 유전으로,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중국에서 각각 15%와 10%를 차지한다.
어업자원도 매우 풍부하고 해수 양식 면적은 전국 2위 규모다. 길림성은 중국 6대 임야지역 중 하나다. 석유 매장량은 중국 6위이고 광물 매장량은 5위권에 들며, 금 매장량은 13위다. 흑룡강성은 경작과 임지 면적은 중국에서 1위이고, 목초지 면적은 7위다. 개발 가능 토지는 4위, 농경지 후보 농지는 2위다. 또한 흑룡강성의 산림 면적과 산림 비축량, 목재 생산량은 중국에서 가장 많으며, 중국의 중요한 국유 산림 지역 및 최대 목재 생산지다.
출처 : [기타] http://cafe.naver.com/cultcounsel
발췌 : (네이버 지식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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