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10장 주석
열두 제자를 부르심 (마태복음 10:1-4)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Ⅰ. 그리스도께서 그의 사도 혹은 전권대사로 임명하셨던 자는 누구였던가? 그들은 그의 제자들이었다(1절). 그는 그들을 제자들, 즉 그의 즉각적인 추종자나 영속적인 수행자로 부르셨다. 그 때에 그는 그들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그 약속이 성취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대개 점차적으로 영예와 은혜를 수여한다는 사실이다. 영예와 은혜의 빛은 아침의 빛과 같이 "더욱 더 빛난다." 그 동안 쭉 그리스도는 이 열두 제자들을, 1. 배척의 상태에서 지키셨다. 그는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셨지만, 처음부터 그들 속에 있었던 것을 아셨지만(요 6:70), 그는 그의 교회에 본보기를 제시하기 위하여 이 방법을 취하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역(직분)은 위대한 신뢰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맡기 전에 잠시동안 연단을 받는 것이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하여금 "먼저 시험하도록 하라"(딤전 3:10). 그러므로 갑자기 어떤 사람에게 손을 얹어서는 안 되며(역주:안수해서는 안 되며) 먼저 그를 후보자나 수습생(시험 중인 사람), 후견생(불란서 교에서 쓰는 용어)으로 관찰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의 죄가 앞서면 다른 사람이 따르기 때문이다(딤전 5:22). 2. 준비의 상태에서 지키셨다. 그 동안 쭉 그는 제자들을 이 위대한 역사에 필요한 자격을 갖추도록 준비시키고 계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일을 위해 의도하시고 부르시는 자들을 그는 먼저 그것을 위해 어느 정도 준비시키시며 자격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이다. 그는 제자들을, (1) "자신과 더불어 있게 함으로써" 준비하셨다. 교역의 일을 위한 최고의 준비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숙이며 친교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리스도를 섬기려"하는 자는 먼저 "그와 함께 있어야만" 한다(요 12:26).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러 가기 전에 "그에게" 뿐만 아니라 " 그 속에" 계시된 그리스도를 가졌었다(갈 1:16). 신앙의 생생한 행동과 또한 기도와 명상의 빈번한 연습에 의하여 그러한 그리스도와의 친교는 유지되고 보존되어야만 하며, 이것은 교역의 일에 필수적인 자격이기도 하다. (2) "그들을 가르치심"으로써 준비시키셨다. 그들은 학자나 학생으로서 그와 함께 있었으며 또한 그는 그들이 공중 설교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익 이외에는 그들을 개인적으로 은밀히 가르쳤다. 그는 그들에게 성경을 펴셨으며, 그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이해력을 여셨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그들에게 주어졌으며, 또한 그들에게 그것들은 "분명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설교자가 되려고 하는 자는 먼저 배우는 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줄 수 있도록 받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어야만" 한다(딤후 2:2). 복음 진리는 그들이 복음 사역자로 임명되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위탁되어야만 한다.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을 가르칠 "권위"를 주는 것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미련한 자편에 기별하는 것이다"(잠 26:6).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내어보내기에 앞서 "그들을 가르치셨다"(마 5:2). 또한 이후에 그들의 사명을 확대시켰을 때 그는 그들에게 더 충분한 교훈을 주셨다(행 1:3). Ⅱ.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부여했던 사명은 무엇이었던가? 1. 그는 "그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셨다"(1절). 그는 이전에 그들로 하여금 자신을 따르도록 부르셨다. 지금 그는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고 계시며, 그들을 더욱 친근하게 끌어 들이며, 그들이 지금까지 관찰했던 거리고 그들을 유지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을 낮추는 자의"는 이와 같이 "높여질"것이다. 율법 아래 있는 제사장들은 백성보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접근한다"고 말해졌다. 동일한 것이 복음 사역자에 대해 말해질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나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이는 그것이 영예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간" 자들에게서 거룩케 될 것임을 기억하면서 그들을 경외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았을 때 다 함께 한가지로 그에게로 "나아왔다"는 사실이다(마 5:1). 그러나 그들은 "임명되었으므로" 그는 "그들을 부르신"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르치는 것보다 더 배우려고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매우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 때문에 가르침을 받을 기회를 찾아야만 한다.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고" 생각하기 전에 분명한 "부르심을 기대해야"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이 영예를 그 자신이 취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 그는 사람을 순종케 할 "능력"(xevousi,an), 즉 "권세"를 그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주셨다." 또한 그 권세의 확인을 위해 마귀를 순종케 할 능력도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정당한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능력은 제한 없이 그에게 주어지며, 또한 종속적인 능력도 그에게 주어진다. 모세가 그의 영예의 어떤 것을 여호수아에게 준 것처럼 그는 그의 사역자들에게 주었다. 그리스도는 그가 채용했던 자들에게 그의 능력을 분배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그가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셨던 똑 같은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게 하셨던 것은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사용하셨던 능력의 완전성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증거라는 사실에 유의하라. 그는 그들에게 "불결한 영들"과 "각종 모든 병"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의 목적은 "마귀를 정복하고 세상을 치유하는"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설교자들은 칭찬할 만한 모든 외부적인 장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냄을 받았다. 그들은 부귀나 학식, 영예의 칭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매우 초라한 모습을 하였다. 따라서 그것은 필수적으로 서기관들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가져야만 했다. (1) 그는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주셨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능력은 마귀와 그의 나라에 대해 직접적으로 평균화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더러운 귀신"인 마귀는 교리적인 오류(계 16:13)와 실제적인 훼방(벧후 2:10)으로 함께 역사 한다. 또한 교역자는 이 두 경우에 있어서 마귀를 대적해야 할 임무를 지니고 있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에서 마귀를 내어쫓을 능력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영적인 왕국"과 마귀와 모든 역사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은 "나타내신 바 되었다." (2)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모든 각종 병을 고치는" 능력을 주셨다. 그는 그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의 확증을 위해 이적을 행하는 권세를 주셨는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유용한 이적을 행하였으며, 이로써 그것이 신실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받을 만한 것"임을 입증하였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목적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것이다. 모세의 이적들은 대부분 파괴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적을 행하는 것 같이 꾸몄던 마호멧도 그 목적이 겉치레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으며 또한 그의 사도들에게 행하도록 분부하셨던 이적들은 모두가 교훈을 위한 것이었으며, 또한 그가 세상의 위대한 교사요 지배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구속자가 되심을 입증하고 있다. 어떤 강조점이 치료 불가능하게 여겨진 자들도 예외 없이 또한 의사의 비난 없이 "각색 병"과 "모든 질병"에 대한 그들의 능력의 범위에 두어져 있는가를 살려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의 은혜에는 모든 상처를 위한 고약과 질병을 위한 치료약이 있다는 사실이다. 매우 악성적이고 만성적인 영적 질병이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는 그것을 치료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도 소망이 없거나 그 틈이 바다같이 넓어서 치유될 수 없다고 말하지 않도록 하라. Ⅲ. 위임받았던 사람들의 수와 이름. 그들은 사도, 즉 사자(使者)로 임명받았다. 천사와 사도는 동일한 일─"임무를 가지고 보내어진"사람, 즉 대사를 의미하고 있다. 신실한 모든 사역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파송을 받았지만, 그에 의해 최초로 또한 즉각적으로 보내어진 자는 특별히 "사도," 즉 그의 나라에서 주요한 지위를 가진 사역자로 불리워진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직무의 초창기에 불과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사람에게 사도직을 주셨던" 것은 그가 "높은 곳에 올라가셨을" 때였다(엡 4:11). 그리스도 자신이 사도로 불리우신 것(히 3:1)은 그가 "아버지에게서 보냄을 받으셨으며" 또한 그와 같이 그들을 보내셨기 때문이었다(요 20:21).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불리워졌다. 1. 그 수효는 이스라엘의 지파의 수나 그 지파의 족장이었던 야곱의 아들과 연관이 있는 12이었다. 복음 교회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어야만 한다. 유대인은 먼저 복음 교회에로 초대되어야 한다. 사도는 그리스도에게 씨를 낳게 하는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육신에 의한 이스라엘은 그들의 불신앙 때문에 거절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열 둘은 다른 이스라엘의 아버지로 임명되고 있다. 이 열 둘은 그들의 교훈에 의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였다(눅 22:30). 이 열 둘은 교회의 면류관을 만들었던 열두 별들이었다(계 12:1). 새 예루살렘의 열두 기초들은 아론의 흉패에 있는 열두 보석들과 떡 상에 있는 열두 떡덩이, 엘림에 있는 열두 우물에 의해 상징되었다. 이 사람은 왕의 왕(king of kings)과 인류의 몸 사이를 문의하기 위해 명부에서 뽑혔던 유명한 배심원(또한 그것을 큰 배심원을 만들기 위해 바울은 이에 첨가되었다)이었다. 또한 이 장(章)에서 그들은 "모든 심판이 위임되었던"자에 의해 주어진 책임을 가지고 있다. 2. 그들의 이름은 여기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것은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이 더 기뻐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지상의 큰 자들의 높고 강한 이름들은 "먼지 속에 묻혀 있지만" 그들의 이름은 "하늘에 쓰여진 것"(눅 10:20)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1) 이 열두 사도들 중의 어떤 사도는 우리들이 성경에서 그들 이름 이상으로 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바돌로매나 가나안인 시몬과 같은 사도들이다. 어쨌든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신실한 종들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모든 좋은 사역자들은 유명한 것 같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행동은 훌륭한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이다. (2) 그들은 둘씩 짝지어(by couples) 불리워지고 있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들은 "둘씩 짝지어" 보내어졌고, 또한 "두 사람이 한 사람 보다 더 낫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봉사적이 될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와 영혼들에 대해 봉사적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잊어버린 것을 다른 사람은 기억할 것이며, 또한 "두 증인의 입에서부터 모든 말은 견고케 되는"것이다. 그들 중의 세 쌍(雙)은 형제였는데, 곧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다른 야고보와 레위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정과 친교는 친척들 사이에서 유지되어야만 하며, 종교에 대해 봉사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출생에 의한 형제가 은혜에 의한 형제가 되고 두 유대가 서로를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3) 베드로가 맨 처음에 명명된 것은 그가 맨 처음 소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혹은 그가 그들 가운데서 가장 앞선 사람이었거나 매사에 그 자신이 그 밖의 사도의 대변자가 되었거나 또는 그가 할례의 사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밖의 사도들을 다스릴 힘을 주었거나, 또한 이 거룩한 대학에서 그에게 주어졌거나 그의 의해 전에 요구되었던 어떤 우선권의 표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4) 이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는 여기에서 도마와 연결되어 있다(3절). 그러나 두 가지 일에 있어서 마가와 누가의 사건에서 비롯된 다양성이 있다(막 3:18; 눅 6:15). 여기에서 마태는 처음에 놓여지고 있다. 이 순서에 의하면 마태는 도마보다 앞서 임명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마태 자신의 목록에 의하면 도마가 먼저 두어져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다른 사람을 더욱 앞세워 존경하는 것은 매우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마가나 누가 복음에서는 그가 단지 마태라고 불리워지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세리 마태, 즉 세관의 관리, 세무사로 불리워지고 있으며, 그는 수치스러운 직업에서부터 사도로 불리워졌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쪼개어진 바위를" 바라보는 것이나 또한 종종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부르시기 전에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겸손하게 되며 신적 은혜가 더욱 영화스럽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도 마태는 세리 마태였다. (5) 시몬은 갈릴리의 가나에서 유래된 가나안인(人) 또는 가나인(人)으로 불리워지는데, 아마도 그는 이곳 태생이었던 것 같다. 혹은 젤롯당 시몬이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말이 열심당을 뜻한다고 본다. (6) 가롯 유다는 언제나 "배반했다"는 검은 오점과 함께 맨 나중에 명명되고 있다. 이것은 맨 처음부터 그리스도는 그가 마귀를 소유하였고 배신자가 되어 비참한 자가 될 것을 아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서 그를 뽑은 것은 그의 교회에 놀람이나 실망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어쨌든 사악한 추문은 가장 좋은 사회 단체에서 깨뜨려져야 한다. 우리의 은혜의 잔치에 이러한 오점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밀 속에 가라지가, 양속에 이리가 있었다. 그러나 외식가들이 탈을 벗고 옷을 베낄 때 발견과 분리의 날은 온 것이다. 사도직이나 사도들 중의 남은 자도 그의 사악이 감춰지고 일어나지 않았던 동안 열두 제자 중 하나민 유다 때문에 일찍이 나빴던 일은 없었다.
일반적 교훈 (마태복음 10:5-15)
여기에는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실 때 분부하셨던 교훈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임이 그들에게 계속된 설교에서 주어졌든지, 또는 그것의 몇 항목이 여러 번에 걸쳐 암시되었든지 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을 명하셨다." 야곱이 그의 아들을 축복한 것은 "명하셨다"고 불리워진다. 또한 그리스도는 이것으로서 축복을 명하셨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보냈던 대상. 이 전권대사들은 가야할 장소를 지시 받았다. 1.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人)에게 가라고 하시지 않았다. 그들은 어떠한 유혹을 당하든지 간에 이스라엘 땅에서부터 "이방인의 길로"나 어떤 길로도 가서는 안 된다.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을 거절하기까지는 그들에게 주어진 복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앗수르의 왕이 사마리아에 이주시켰던 잡종 민족의 후손인 사마리아인(人)들의 지방은 유대와 갈릴리 사이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사마리아인(人)들의 "길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성읍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人)들에게 나타나시기를 꺼려하셨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그들에게 전파해서는 안 된다. 만일 복음이 어떤 장소에서 숨겨진다면,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그 장소에서 자신을 숨기시는 것이다. 이러한 억제는 그들의 맨 처음 위임에서만 두어졌으며, 이후에는 "모든 나라에"가서 그들을 가르치도록 명령받았던 것이다. 2. 그들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자신의 사역을 전유하였다(마 15:24). 왜냐하면 그는 "할례자의 사역자"(롬 15:8)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종자와 대변인에 불과하였던 사도들은 그들에게 제한되어야만 한다. 구원의 첫 제공은 유대인에게 향해져야 한다(행 11:2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집"에 대해 특별하고도 다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조상들을 인하여 사랑을 입었다"(롬 11:28). 그는 그들을 "잃어버린 양"과 같이 동정하셨다. 목자이신 그는 곁길로 나가 데려오지 않으면 끝없이 방황하게 될 그들을 죄와 허물의 샛길에서 모으셨다(렘 2:6 을 보라). 이방인들도 역시 잃어버린 양과 같았다(벧전 2:25). 그리스도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일에 정진시키기 위해 그들이 보내어진 자들에 대해 이러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들은 이스라엘 집에로 보내심을 받았으며(그들 자신이 후에 이 수에 속하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집을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도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Ⅱ. 그가 제자들에게 명하셨던 설교의 임무. 그는 그들을 임무 없이 보내지는 않으셨다. 아니, "가서 전파하라"(7절)고 하셨다. 그들은 순회하는 설교자였다. 그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복음의 시초에 "천국이 가까워졌느니라"고 말하면서 선포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 밖의 것을 말해서는 안 되며, 이것만이 그들의 본문이 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이 주제로 확대시켜야 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하늘로부터 오신 주인이신 메시야의 왕국이 지금 성경을 따라 세워진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하라. 이때로부터 사람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고 그것들을 내버려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나라의 특권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 것이다.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였다"(막 6:12)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하늘 나라"의 접근에 관한 이 교훈의 적절한 용법과 적용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래 갈망하였던 메시야에 대해 즉시 더 많이 듣기는 기대해야만 하며, 또한 그의 교훈을 받고 그를 믿으며 그의 멍에에 맡길 준비를 해야만 한다. 이것에 대한 설교는 떠오르는 태양의 접근을 나타내는 새벽빛과 같았다. 이것은 임박한 파멸을 선포하였던 요나의 설교와 얼마나 다른가?(요 3:4). 이것은 가까이 있는 구원,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가까이 있는"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난다"(시 85:9, 10). 즉 "가까이 있는 천국"이다. 이것은 왕의 직접적인 임재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것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의 육적인 임재가 옮겨질 때 사람의 마음속에 세워질 영적인 왕국을 의미한다. 이제 이것은 세례 요한과 그리스도가 전에 전파하였던 것과 똑 같은 것이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람들은 여러 번 반복하여 강조된 진리를 가질 필요가 있으며 또 그것들이 새로운 감동으로 전파되고 경청된다면 그것들은 마치 우리를 새롭게 하는 것처럼 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복음에 있어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이후에 참으로 성령이 부어지고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이 "천국은 도래하였고," 지금은 임박한 것으로 언급되었다. "천국"은 우리의 전파의 주제가 되어야만 한다. 이제 천국은 도래하였으므로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에게 임하였다고 말해야만 하며 또한 그 계율과 특권을 그들 앞에 두어야만 한다. 또한 아직 도래해야할 영광의 나라가 있는데, 우리는 이 나라가 가까이 와있다고 말해야만 하며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은 열심히 고려하도록 경각 시켜야만 한다. Ⅲ. 그는 그들에게 그들의 교리를 확증하기 위하여 이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셨다(8절). 그가 전에 전파하셨던 동일한 교훈을 전파하려고 제자들을 파송하셨을 때 결코 거짓으로는 할 수 없는 동일한 신적 표적들에 의하여 그것을 확인할 수 있도록 능력을 부여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와 있는 지금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제 이적을 부르는 것은 건물이 세워져 있을 때 기초를 다시 놓으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이 행하였던 이적들에 의해 요점이 설정되었고 그리스도의 교훈이 충분히 입증되었으므로 표적을 더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서 그들은, 1.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능력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가서 산을 옮겨라"거나 "하늘로부터 불을 끌어내라"는 명령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치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그들은 사랑과 선하심이 그들이 전파하러 왔던 복음의 정신과 순수성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그들이 세우려고 고용된 왕국이라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는 공적인 축복으로서 널리 보냄을 받았다. 이것으로 보아 분명한 것은 그들은 선하시고 선을 행하시며 "모든 사역에 대해 그의 자비하심이 편만해 있는" 하나님의 종이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들이 전파하였던 교훈의 의도는 병든 영혼을 고치며 "죄 가운데 죽었던"자를 일으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마 "죽은 자를 일으키신" 사실이 언급된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전에 그가 늘 소생시킨 자에 대한 기사를 읽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영적인 생명에로" 많은 사람을 일으킨 도구였기 때문이다. 2. "거저 선을 행하도록" 명령받고 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모든 질병들을 고치는 권세를 가졌던 자들은 그들 자신들을 부요하게 할 기회를 가졌다. 여하튼 누가 이렇게 쉽고도 확실한 치료들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은 이적을 행하는 권세를 이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 그들은 더욱 은혜뿐만 아니라 값없는 은혜로 세워진 복음 왕국의 본질과 양상을 입증하기 위해 "거저"(gratis) 치유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gratia gratis data)(롬 3:24) "돈 없이 값없이" 약을 사라(사 55:1). 그 이유는 "너희가 거저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병든 자를 고치는 권세는 아무 돈도 드리지 않고 산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것 때문에 어떤 세속적인 유익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박수인 시몬은 성령의 은사들에 의해 돈을 얻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그것 때문에 돈을 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행 8:18).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값없이 하신다는 사실에 대한 고려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값없이 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Ⅳ. 이 전도 여행에서 그들을 위해 마련되어야 하는 준비. 그들은 전권의 임무를 가져야 하는 대사를 보내는데 있어서 생각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것에 대하여, 1. 그들은 자신들이 이 일을 위해 준비를 해서는 안 된다(9, 10절). "금이나 은을 가지지 말라." 한편 그들이 자신들의 행위에 의하여 지위를 높이지 않는 것처럼 그들이 이에 대해 자신들이 소유한 것에 어떠한 것도 소비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은 현재의 사명에 제한된 것이었으며 또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1) "인간 지혜의 행위를 따라" 행동할 것을 가르치시려고 했다. 그들은 지금 단기간의 여행을 할 따름이며 곧 그들의 주인, 즉 그들의 사령관에게 다시 돌아갔으며 따라서 왜 그들은 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무거운 짐을 져야만 할 것인가? (2) "신적 섭리에 의존하여" 행동할 것을 가르치시려고 했다. 그들은 "목숨을 위해 걱정하지 말고"(마 6:25 등) 생활할 것을 가르침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을 수행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를 섬기는 데 있어서 "간편한 음식을 휴대"해야 할 대부분의 이유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심할 여기 없이 그리스도는 그를 위해 일하는 자들을 결코 궁핍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고용하신 자들은 특별한 보호 아래 두어지며 또한 특별한 준비가 마련된다. 그리스도께서 고용한 종들은 "나누어 줄 수 있는 충분한 양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의무에 대해 충성하거나 우리의 일을 잘 수행하려고 진력하는 동안 우리는 그 밖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다. 여호와 이레(여호와는 준비하신다) 주님으로 하여금 그가 적합하다고 생각하시는 대로 우리와 우리의 것을 위해 마련하시도록 하자. 2. 그들은 그들이 보내어진 자들(그들을 받아들이는 자)이 필요한 것을 "그들을 위해 준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10절).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들은 엘리야가 했던 것처럼 이적적으로 양식을 공급받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은 전하러 가는 자들에게 마음을 기울이며 친절을 베풀며 그들을 위해 준비하도록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이다. "제단에서 섬기는 자"들은 제단에 의해 부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인하여 편안하게 살 수 있다는 기대는 가질 수 있는 것이다(고전 9:13, 14). 그들이 자신들이 행한 일로 말미암아 생계를 유지해야한다는 것은 옳은 사실이다. 사역자들은 노동자요 일군이며 또한 그렇게 되어야만 하며 또한 그러한 자들은 먹을 양식을 벌기 위하여 그 밖의 다른 노동을 하지 않도록 "저 먹을 것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스도는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하나님을 불신하게 하려고 하시지 않은 것처럼 이러한 생활 문제로 마을 사람들을 불신하도록 하시지 않았다. 만일 너희가 그들에게 전파하며 그들 가운데서 선을 행하기를 추구한다면 정녕 그들은 너희가 필요로 하는 만큼 충분하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공할 것이다. 또한 만일 그들이 그렇게 행한다면 결코 진미(珍味)를 원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후에 여러분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적절한 때에 진행될 것이다.
Ⅴ. 그들이 어떤 장소를 물색하는데 있어서 유념해야 할 처신(11-15절). 그들은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갔으며, 초대되지 않고 기대하지 않은 곳,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멀리 갔다. 그들이 태어난 고향은 그들에게 낯설은 곳이었다. 그들은 어떤 규칙에 의해 가야만 했는가? 그들은 어떤 길을 취해야만 하는가? 그리스도는 그들을 완전히 교육시키지 않고는 보내시려고 하지 않았다. 여기에 그것들이 있다. 1. 그들은 여기에서 "자신들에게 낯선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지도할 것에 대해 명령을 받고 있다. (1) "낯선 성이나 촌"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너희가 마을에 들어가면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으라." [1] 각 장소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복음을 받고 그것을 전파하는 자를 영접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추측되고 있다. 비록 그것이 보편적인 타락과 배교의 때였다고 했을지라도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악의 때와 장소에 있어서 우리는 너그럽게 그들 자신을 구별하는 사람이 있으며, 또한 그들의 이웃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소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시내를 거스러 헤엄치는 사람이 있으며 겨 가운데 있는 밀과 같은 사람이 있다. 네로의 집에도 성도는 있었다. 누가 합당하며, 그들의 안목에서 볼 때 누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또한 누가 그들이 가진 빛과 지식을 좋게 개선하는가를 탐문하라. 최고인 자는 복음 제의의 은혜의 공로로부터 먼 법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도와 그들의 메시지에 대해 다른 사람들보다 호의적인 환영을 하며 이러한 진주를 발로 짓밟지 않는 사람도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좋은 것에 대한 이전의 성벽은 사람들을 다루는데 있어서 교역자들에게 지시와 격려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그들에게 합당한 것처럼 이미 잘 기울여지는 자들에게 유익한 말씀의 최고 소망이 있다. 또한 이곳 저곳에 이와 같은 것이 있다. [2] 그들은 이러한 자를 찾아야만 한다. 가장 좋은 여인숙을 찾아서는 안 된다. 공공적인 집은 돈을 가지거나(9절). 어떤 것도 받으려고 기대하지 않는(8절) 그들에게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잘 환대할 자들과 더불어 개인적인 집에서 적응할 것을 찾아내어야만 하며, 또한 그들의 기도와 설교에 대해 선지자의 보상, 사도의 보상 이외에는 아무 것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을 환영하는 자는 그 비용을 아까워하거나 이 세상에서 그것에 의해 얻으려고 약속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부자인 사람을 찾아서는 안 되며, 합당한 자를 찾아야 한다. 가장 훌륭한 신사를 찾아서는 안 되며, 가장 좋은 사람을 찾아야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든지 그곳의 좋은 사람에 대해 탐문해야 하며 그들과 친숙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취할 때 우리는 그의 백성을 우리의 백성으로 취하며 그것과 똑같이 즐거워 할 것이다. 바울은 그의 모든 여행을 통하여 거기에 형제가 있다면 찾았다(행 28:14). 만일 그들이 합당한 자를 찾았다면 그들을 발견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암시되고 있다. 이웃보다 더 나았던 자는 주시 될 것이며, 또한 어떤 사람은 그들에게 정직하고 착실하며 좋은 사람이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오른 손의 고약과 같이 그 자체를 드러내며 그 향기로 집을 채우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선견자의 집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고 있었다(삼상 9:18). [3] 그들이 합당하다고 본 자들의 집에서 그들은 계속적으로 기거해야만 한다. 이것은 그들의 각 성읍에서 단시일 머물렀음과 그들이 거처를 바꿀 필요가 없었음을 암시하고 있지만 그들이 맨 처음 거처했던 곳에 떠날 때까지 머물러 있을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종종 그들의 방면을 바꾸는 좋은 의도가 없는 것으로 올바르게 추측되고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이 거처하는 곳을 가장 좋은 곳으로 여기며 또한 모든 불쾌와 불편 때문에 자리를 이동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2) 낯선 집에서, 그들이 합당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의 집을 발견했다면, 그들은 집에 들어갈 때 인사를 드려야만 한다. "그러한 예의에 있어서 너의 겸손의 표로 사람을 앞질러 행하라. 네 자신을 집으로 초대하는 것을 업신여기거나 초대받는 것에 대해 거북하여 생각하지 말라. 가족들에게," [1] "보다 더 대화를 이끌어 내거나 또는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의 메시지를 소개하기 위하여 인사하라"(공통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서서히 교화에 좋은 교제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2] "가족들에게 너희를 환영하는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인사하라. 너희는 그 인사가 스스러움이나 냉정함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주시하게 될 것이며 혹은 준비된 답례로 받아들여지는 지를 주시하게 될 것이다. 너희의 인사를 친절하게 받지 않으려는 자는 너희의 메시지를 친절하게 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작은 일에 대해서 불충성하는 자는 큰 일에도 불충성하기 때문이다(눅 16:10)." [3] "가족들에게 그들의 좋은 의견을 넌지시 말하도록 하기 위해 인사하라. 너희가 진지할지라도 침울하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하여 가족들에게 인사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종교는 우리들에게 정중하고 예의바를 것과 우리와 관계된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아들 자신의 권위를 힙입어 나갔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그들의 집으로 들어갔을 때 그것을 "명령하지 않고" 인사하였다. 왜냐하면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는 것"이 복음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몬 8, 9절). 영혼은 먼저 "사람의 줄"로 그리스도에게 이끌려지며 "사랑의 띠"에 의해 그에게 보존되는 것이다(호 11:4).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먼저복음을 전하였을 때 그는 인사를 받았던 것이다(행 10:25 참조).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이 받고자 한 것을 받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정도 경건하게 가족들에게 인사드렸을 때 그들은 거슬러 그 가족에 관해 판단해야만 하며 이에 따라 진행시켜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선한 사람들과 교역자들에게 어떻게 환대하는가를 살피기 위해 하나님의 눈은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일 "그 집이 이에 합당하면 너희 빈 평안이 거기 임하기를 빌라. 만일 합당치 아니하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13절). 그들이 "가장 합당한 자"(11절)를 찾은 후에 그들이 합당치 못한 자들을 우연히 만나는 것이 가능했던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일반적인 소식이나 의견에 경청하는 것은 지혜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잘 분별하여 판단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 "현명한 자의 지혜"는 스스로 그 자신의 "길이 깨닫는 것"이다. 이제 이 규칙이 의도하는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사도들을 만족케 하기 위하여. 일반적인 인사는 "평안할지어다"였다. 그들이 이것을 사용했을 때는 그것이 복음으로 바꾸어졌다. 그들이 원하였던 것은 "하나님의 평화," 하늘나라의 평화였다. 그들이 이러한 축복을 모든 사람에게 한결같이 선포하는 것을 마음으로 꺼리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합당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 같은 망설임을 없애도록 한 말이다. 그리스도는 이 복음적 기도도(이제 그것은 그와 같이 되었다) 복음적 제의가 모든 사람들에게 무한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모든 사람을 위해 베풀어야만 하며 또 그것의 결과는 마음과 모든 사람의 참된 성격을 아시는 하나님께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그 집이 합당하다면 그것은 "너희가 축복의 유익을 획득할 것이다." 만일 합당하지 않다면, 아무런 손상이 없다면 너희는 그 유익을 잃지 않을 것이다. 다윗이 그의 배은망덕한 원수를 위해 기도했던 것처럼 "그것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시 35:13).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모든 사람에 대해" 자비롭게 판단하거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 또는 "모든 사람에게 대해" 정중하게 행동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분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효과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그것을 하나님께 남겨 두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분깃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에게 명령하기 위하여. "만일 너희의 인사 때문에 그들이 실로 합당하다는 것이 나타난다면, 그들로 하여금 너희의 사귐에 대해 관심을 더욱 가지게 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너희의 평화가 그들에게 임하도록 하라. 그들에게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평안을 전파하라.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만일 그들이 그것을 무리하게 너희들에게 가져간다면, 또한 너희를 거스려 문을 닫아버린다면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 너희가 말했던 것을 취소하고 그들에게서 너희의 등을 돌리라. 이것을 멸시함으로써 그들은 스스로 너희의 남은 은혜에 합당치 못하며 가로막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큰 축복은 사람이 시련 가운데 있을 때나 행동하는 경우에 거의 무시되거나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여겨짐으로 말미암아 종종 상실된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함으로써 에서는 그의 장자권을 상실했으며(창 25:34), 사울은 그의 나라를 잃은 것이다(삼상 13:13, 14). 2.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을 거절하였던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라는 방법에 대해 명령을 받고 있다. 이 경우는 "그들을 영접도 아니하고 말을 듣지도 아니하는 자들"(14절)에 대한 언급이다. 사도들은 지금 그들이 전파할 이러한 교훈을 가졌으며,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으므로 의심할 여지없이 그들은 보편적으로 환대를 받으며 또한 환영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전에 그들을 업신여기며 그들과 그들의 메시지를 멸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최상의, 가장 능력 있는 복음 전파자는 그들을 경청하지도 않고 어떤 존경의 표식도 하지 않을 사람을 만나게 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즐거운 소리"에 귀를 막으며 "매력적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를 영접하지 않을 것이며 너희의 말을 받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살펴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과 복음 사역자에 대한 멸시는 흔히 함께 병행하며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그리스도에 대한 멸시로 해석되며 이에 준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 경우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대해 살펴 볼 수 있다. (1)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사실에 대해 사도들에게 주어진 명령. 그들은 "그 집이나 성에서 떠나야만"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복음은 그것을 저버리는 자에게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떠날 때 "발의 먼지를 떨어 버려야"한다. [1] 그들의 악함을 증오하기 때문에. 그것은 매우 가증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는 땅은 더러운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것들을 더러운 것으로 "떨어 버려야만"하는 것이다. 사도들은 그들과 더불어 교제나 친교를 가져서는 안 된다. 심지어는 그 성의 먼지까지도 떨어 버려야만 하는 것이다. "배도자들의 행위는 내게 붙잡지 아니할" 것이다(시 101:3). 선지자는 "벧엘"에서 "먹거나 마시지"아니하였다(왕상 13:9). [2] 그들에게 대한 분노의 경고로서. 그것은 그들이 먼지처럼 비천하고 사악하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떨쳐버리실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사도들의 떨쳐버린 발의 먼지는 그들에 대한 증인이 될 것이며, 복음이 그들에게 전파되었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막 6:11). 야고보서 5장 3절과 비교하라. 이것이 실천된 것을 보라(행 13:51; 18:6).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과 그의 복음을 멸시하는 자는 "가볍게 여겨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2) 이러한 "고의적인 불복자"에게 닥쳐올 운명(15절). "심판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성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1] 앞으로 다가오는 심판의 날이 있으며 그때에는 복음을 거절하였던 모든 자들이 확실히 그것을 받아야 하는 자로 불러냄을 받을 것이다. 그들이 지금 아무리 그것을 희롱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구원할 교훈을 듣지 않으려는 자는 그들을 파멸시킬 선고를 듣게 될 것이다. 그들의 심판은 "그 날"까지 연기되는 것이다. [2] 그날에 있어서 형벌에는 상이한 차등이 있다. 지옥의 모든 고통은 "견딜 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그러할 것이다. 어떤 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지옥 속으로 빠져들며 더욱 매맞게 되는 것이다. [3]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 대한 정죄는 그 날에 소돔이나 고모라에 대한 정죄보다 더욱 심하고 무거울 것이다. 소돔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는다고 말해진다(유 7). 그러나 그 "형벌"은 큰 구원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극심하게 도래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는 매우 사악하였으며(창 13:13), 더구나 불법이 가득 찼으며 또한 그들에게 파송된 천사들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능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창 19:4, 5). 또한 그들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14절). 그러나 그것도 그리스도의 사역자와 그 말씀을 경청하지 않는 자들보다 오히려 더 참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더욱 맹렬할 것이며, 그들 자신에 대한 그들의 반성은 더욱 통렬할 것이다. "아들들아, 기억하라!"는 "영원한 생명"에로 주어졌으나 오히려 사망을 택한 자들의 구에 매우 두렵게 들려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 선지자들을 이스라엘에게 보내셨을 때 그들의 불법은 그 사건에 대해 소돔의 불법보다 더욱 가증스러운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겔 16:48, 49). 하물며 그가 지금 우대하신 선지자, 곧 그의 아들을 보내셨을 때야 오죽하겠는가!
열두 제자의 파송에 붙인 설교 (마태복음 10:16-42)
이 모든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받는 고난과 연관이 되어 있으며 그들은 여기에서 기대할 것과 준비할 것을 가르침 받고 있다. 그들은 또한 어떻게 그것을 견디며 또한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일을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있다. 설교의 이 부분은 그들의 현재 위임보다 더욱 더 앞을 내다보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동안 어떤 큰 어려움이나 박해를 직면하였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으며, 또한 그들이 그것들을 잘 참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직면하게 될 고난에 대해 미리 경고를 받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그들의 사명은 확대되며 "지금 가까이 있었던" 하늘나라가 실제적으로 세워질 것이다. 그들은 그때에 어떤것에 대해서도 꿈꾸지 않을 것이며 외적인 과시와 능력에 대해 꿈꾸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보다 더 큰 고난을 기대해야만 한다고 하셨다. 또한 그들이 왕이 될 것을 기대했을 때 죄인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띠를 띠고 있을 때 갑옷을 벗어버린 것처럼 이에 준하여 준비하고 자만하지 않도록 이후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근심에 대하여 말해 주는 것이 좋다. 여기에는 Ⅰ. 어려움에 대한 예언과, Ⅱ. 그것과 관련된 조언과 위로의 명령이 혼합되어 있다. Ⅰ. 여기에는 어려움에 대한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은 그들이 일할 때 이 어려움을 직면해야만 하였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고난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고난을 예견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수행하신 것처럼 그들로 하여금 수행하도록 하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미리 말씀하신 것은 어려움들이 그들에게 놀라움이 되지 않고 또한 그들의 신앙에 충격을 주지 않기 위함이며 예언이 성취되므로 그들이 그들 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함인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그들이 고난받아야 할 것과 누구에게서 고난받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1. "그들은 어떻게 고난을 받을 것인가?" 확실히 어려운 일들을 당할 것이다. 왜냐하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기"(16절) 때문이다. 초라하고 구원의 여망이 없으며 보호되지 않는 양의 무리가 사나운 이리 가운데서 두렵고 찢기울 것 이외에 무엇을 더 바랄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악한 사람은 이리들과 같으며 그들의 성품은 삼키고 파멸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백성과 특히 그의 사역자들은 그들과는 반대되는 성품과 성벽을 가진 양과 같으며 흔히 그들에게 쉬운 먹이가 된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린 자들에게 많은 위험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몰인정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큰 심판날에 그들이 그의 오른편에 앉게 될, 말하자면 그의 양을 위해 예비된 영광이 봉사와 마찬가지로 고난에 대한 충분한 보상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들은 소름끼치는 "이리 가운데 있는 양"과 같다. 그러나 위로를 주시는 그리스도는 그들을 앞서 보내고 있다. 그리스도가 위로를 주시는 분이 되신 것은 그가 그들을 보호하시며 증명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어려운 경우를 알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들에게 특별히 그들이 기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다. (1) 그들은 미움받게 될 것을 기대해야만 한다(22절).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남은 모든 자의 뿌리이며, 그 뿌리는 쓰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자를 세상은 미워한다는 사실이다. 마치 왕실이 축복하는 자를 서민이 미워하는 것처럼. "만일 세상이 연고 없이 그리스도를 미워하였다면"(요 15:25), 그것은 그의 형상을 가졌고 그의 사업을 봉사한 자들을 미워한 것이므로 놀라지 말라. 우리는 메스꺼운 것을 싫어하며 또한 그들은 "만물의 찌끼같이 여겨지는" 것이다(고전 4:13). 우리는 유해한 것을 싫어하며 또한 그들은 "나라를 괴롭게 하는자"(왕상 18:17)와 그들의 이웃에게 고통을 주는 자(계 11:10)로 간주되는 것이다. 미움을 받고 악의 의 대상이 되는 것은 쓰라린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이름을 인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어떤 구실로든지 미움받는 자의 참된 이유를 말할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미움받는 자들에 대한 위로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좋은 이유 때문이며 그들은 그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참예하며 그것을 자신이 떠맡아 줄 좋은 친구를 가지고 있다. (2) 그들은 죄인으로 인식되고 고발되리라는 기대를 가져야만 한다. 그들의 그칠 줄 모르는 악의는 저항할 수 없는 악의이며 또한 그들은 "너희를 공회에 넘겨주기 위하여"(17, 18), 공공적인 평화를 보살피는 총독이나 공의석에 넘겨주기 위하여 시도할 뿐만 아니라 설복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많은 재난이 종종 법과 공의라는 미명 아래 선한 사람에게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재판하는 곳에 악, 즉 핍박하는 악이 있다"(전 3:16). 그들은 공회에서의 높은 통치자에게서 뿐만 아니라 통치자나 왕, 최고의 직권자에게서 당할 고통을 내다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행해진 이와 같은 험악한 항의 아래 그들에게 이끌리는 것은 두렵고도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왜냐하면 "왕의 분노는 사자의 노호와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이것이 "사도들의 행동"에서 성취되었음을 찾아 볼 수 있다. (3) 그들은 죽음에 넘겨질 것을 각오해야 한다(21절). "그들이 자들을 죽는 데" 즉 내어 줄 것이다. 당당하고 경건하게 죽도록 할 것이며, 그때는 죽음이 가장 무서운 "두려움의 왕"으로 나타나게 되리라. 원수들의 악의가 이것을 가할 만큼 높이 격노할 것이다. 그들은 "성도들의 피"에 굶주려 있다. 성도들의 믿음과 인내는 이것을 기대하는 만큼 견고하게 서 있다. "내 목숨을 내 자신에 대해 귀중하게 여기지 말라." 그리스도의 지혜는 그것을 인정하고 있으며, 순교자의 피를 어떻게 "진리의 표"와 "교회의 씨"로 만드는가를 알고 있다. "자기들의 목숨을" 사랑하지 않고 죽는데 내어 준 이러한 거룩한 군대에 의하여 사탄은 정복되었고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관심은 두드러지게 진척되었다(계 11:11). 그들은 원수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죄인으로 죽는 데 버려졌으나, 실제로는 희생 제물로서 죽음에 처하여진 것이다(빌 2:17; 딤후 4:6). 번제물로서, 하나님의 영예에 대한 인식의 제물로서 또한 그의 진리와 변호 안에서 제물로서 죽는 데 처하여진 것이었다. (4) 그들은 이러한 고난들 가운데서 가장 밉살스럽고 굴욕적인 이름들과 인물들로 낙인 찍혀질 것을 기대해야 한다. 박해자들은 자기들의 유혹함과 잔인함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박해받는 자들에게 곰 가죽을 씌워 먼저 변장시키지 않는다면 그들은 이 세상에서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저들에게 붙인 모든 악한 이물들 중 최고의 악명이 여기에 진술되어 있다. 그들은 저들을 바알세불(마귀들의 왕 이름)이라고 불렀다(25절). 그들은 저들을 흑암의 나라의 세력의 장본인으로 나타내고 있다. 모든 사람은 마귀를 미워한다고 생각하므로 그들은 저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에게 유해한 자들로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어떻게 기만되고 있는가를 보고 놀라워하라. [1] 사탄의 불구대천의 원수가 사탄의 친구로 표현되고 있다. 마귀의 나라를 멸망시킨 사도들을 마귀라고 불렀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들이 알지 못한 일"과 그들이 증오하고 직접적으로 반대하는 일로 비난을 받는다. [2] 사탄의 철저한 심복이 그의 원수로 생각될 것이며, 또한 그렇다고 결코 그들이 사탄을 대적하여 싸운다고 할 때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그의 일을 행할 수는 없다. 종종 마귀에게 가장 가까이 접근해 있는 자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마귀의 아버지로 만드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옷으로 치장한 자들은 그들 자신의 마음속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숨겨진 것은 밝히 드러날 때(여기에 뒤따라 나오는 것처럼, 26절)가 온다는 사실은 다행한 일이다. (5) 이러한 고난은 여기에서 검과 불화에 의해 표시되고 있다(34, 35절). "내가 화평(일시적인 평화와 외적인 번영)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부귀와 능력을 그의 모든 추종자들에게 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스도는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온 것은 그들에게 화평을 주려고 함이 아니다. 그들을 하늘에 있는 화평에 대해 확신할 수는 있으나 땅 위에 있는 화평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평 시키려 함이며 그 화평은 우리의 양심에 있어서의 화평이요 형제와 더불어의 화평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복음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는 자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모름지기 복음의 목적을 오해하는 자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어려움을 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세상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면 자연히 보편적인 화평이 뒤따르지만 그를 거절하는 자가 많이 있고 또한 앞으로 있는 동안(그러한 자들은 "이 세상의 자녀"들 뿐만 아니라 "뱀의 후손"이다)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그들의 불화의 열매를 감수할 각오를 지녀야만 한다. [1] "화평"을 구하지 말고 "검"을 구하라.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을 거스려 싸우며 이 검이 행한 "정복하는 일"(계 6:4; 19:21)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하기 위하여 "말씀의 검"을 주려고 오셨다. 또한 세상이 "말씀의 검"으로 마음을 찌르며(행 7:54) 그리스도의 증인의 증거에 의해 고통을 받는(계 11:10) 제자들과 더불어 싸우며 "박해의 검"을 주시려고 오셨으며 또한 이 검이 행한 잔인한 일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말씀의 검을 주려고" 오셨다. 그리스도는 이 검을 꺼낼 경우를 제시하며 또한 이 검을 보낸다고 말해질 수 있는 복음을 보내셨다. 그는 그의 교회로 하여금 그의 백상의 은혜들의 시련과 칭찬을 위해 고통받는 상태로 들어갈 것과 그들의 원수들의 죄의 "분량을 채우도록" 명령하고 있다. [2] "화평"이 아닌 "불화"를 구하라(35절). "내가 온 것은 불화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복음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잘못이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해진 일들을 믿고" 또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을" 때 믿는 자들의 신앙은 믿지 않는 자들을 정죄하며 따라서 그들은 믿는 자들에 대항하여 적개심을 가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최고로 난폭하고 무자비한 반목은 종교의 차이에서 생긴 자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들이 당해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시며 이러한 것은 어려운 말씀이었다. 만일 그들이 이러한 것들을 참을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것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의 일을 할 때 직면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말해 줌으로써 우리들을 공평하고 신실하게 취급하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그는 우리들도 앉아서 먼저 비용을 계산함으로써 우리 자신들을 정대하게 대하기를 바란다. 2.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누구에게서 또한 누구에 의해서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될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정녕 지옥을 열어버려야 한다. 또 큰 구원에 대해 아무런 분깃도 없는 절망적이고 자포자기적인 영들 즉 마귀도 이러한 악의에 찬 원수가 "사람들을 향한 선한 뜻"이며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본체인 교훈을 이용할 수 있기 전에 정체가 드러나야 한다. 아니, 생각이나 할 수 있으랴? 이 모든 불행이 그들에게 구원을 전파하려고 왔던 복음 전파자에게 일어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지만 의로운 자는 그의 영혼을 구한다"(잠 29:10). 그러므로 하늘은 땅을 매우 반대한다. 왜냐하면 땅은 지옥의 세력 아래 있기 때문이다(엡 2:2).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이러한 어려운 일들을 당하는 것은, (1) 사람들로부터이다(17절). "사람들을 삼가라. 너희는 너희와 더불어 동일한 본성을 가진 자들에 대하여서도 너희를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이러한 것은 그러한 성품의 비행과 타락으로써(home homini lupus─즉 사람은 사람에게 대해 이리이다) 사람처럼 교활하고 책략적이며 짐승처럼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전적으로 인간성으로 불리운 것을 빼앗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박해하는 격노와 적개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야수나 마귀로 바꾸게 된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사람의 소양을 가진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고전 15:32). 가장 친한 친구를 조심해야 할 때가 도래한다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들이 같은 피로 이루어졌고 "뼈 중의 뼈"인 자들에게서 생겨난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들의 근심을 더욱 심화시키는 것이다. 박해자들은 이러한 점에서 짐승보다 더욱 악하며, 그들은 그들 자신의 종류를 먹이로 삼는 것이다. Saevis inter se convenit ursis ─즉 야만적인 곰들도 그들 가운데서는 일치한다. 우리가 보호와 동정을 기대할 수 있는 자가 "우리를 치려고 일어나는 것"은 매우 비참한 일이다. "사람," 그 이상은 아니다. 단순한 "사람"이다. "사람," 성도가 아니다.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 "이 세상 사람"(시 17:14)이다. 성도는 "사람들" 이상이며, "사람들에게서 구별된다." 그러므로 "그들에 의해 미움을 받는다." 사람의 본성은 만일 그것이 성화되지 않는다면 사탄에게 버금가는 세상에서 가장 최악의 성품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종속적이고 의존적이며 죽어야하는 피조물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지만 단지 "인생뿐인 것이다"(시 9:20). "너는 어떠한 자이기에 죽을 사람을 두려워하느냐?"(사 51:12) "사람들을 삼가라." 하몬드(Hammond)박사도 그와 같이 말하고 있다. 너희가 친숙한 사람들, 즉 그리스도를 버린 유대인 산헤드린의 사람들을 삼가라(벧전 2:4). (2)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종교를 과시하는 신앙 고백자들로부터이다. "그들은 그들의 회당," 즉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들의 교회 훈련을 수행하는 장소에서 "너희를 채찍질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을 채찍질하는 것이 그들 종교의 한 과제로 여겼던 것이다. 바울은 "회당에서 다섯 번 매맞았다"(고후 11:24). 유대인들은 모세에 대한 열심이라는 명목 아래 그리스도와 기독교에 대해 매우 혹독한 박해를 가하였으며, 그러한 불법 행위를 그들 종교의 점수에 가산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야심적인 박해자들로부터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며, 그들은 제자들을 "그들의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추방하여 그들을 죽였으며, 또한 "그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하며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노라"(사 55:5; 슥 11:4, 5)고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회당은 박해를 신성케 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그 박해는 의심할 여지없이 회당을 모독하고 속되게 할 것이다. (3) 위대한 사람들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로부터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초대의 힘을 발휘하여 그들을 채찍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더 이상 할 수 없을 때는 그리스도에게 행하였던 것처럼 로마의 힘에 넘겨주었던 것이다(요 18:30). "너희들은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 갈 것이다"(18절). 그들은 더욱 힘을 가지고 있으므로 더욱 큰 불행을 야기시킬 수 있다. "총독들과 임금들"은 그들의 능력을 그리스도에게서 받으며(잠 8:15), 또한 그의 종이 되고 그의 교회의 보호자와 양부가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은 종종 그들의 능력을 그를 대적하는데 사용하고, 그를 대적하고 그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다. "지상의 임금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적하였다(시 2:1, 3; 행 4:25, 26). (4) 모든 사람들로부터이다(22절). "너희는 모든 사람," 즉 모든 사악한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보편성이다. 왜냐하면 "모든 세상은 사악함"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로운 대의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지지하는 사람은 매우 적기 때문에 우리는 그 친구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다 치우쳤으며," 그러므로 '내 백성을 삼켰다"(시 14:3). 하나님께로부터의 배교가 행하는 것만큼 성도들에 대한 적개심이 행해지는 것이다. 어떤때는 그것이 다른 어떤 때보다 더욱 일반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모든 불순종의 자녀"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이 독소의 어떤 것이 있다. "세상은 너희를 미워한다." 왜냐하면 "온 땅은 짐승을 이상히 여기기" 때문이다(계 13:3).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 이므로 진리를 미워하는 것이다. (5) 그들 자신의 모든 친척들로부터이다. "장차 형제가 형제를 죽는데 내어 줄 것이다"(21절). 이 때문에 "사람(man)이 그 자신의 아버지와 불화하게 될 것이다." 아니다. 보다 더 연약하고 나약한 성(性)을 가진 여자들도 역시 박해자가 되며 박해를 받게 될 것이다. "박해하는 딸이 믿는 어머니를 대적할 것이며,"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이러한 처지에서는 본래적인 애정이나 자식으로서의 의무가 그 분쟁을 그치게 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그때에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한다고 할지라도" 놀라지 말라. 매우 종종 사랑의 냉정함은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35절). 일반적으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36절). 그의 친구들이 되려는 자들은 기독교를 신봉하기 때문에 특히 핍박을 받을 때 이것을 의지하기 때문에 그에 대하여 몹시 성을 낼 것이며 또한 그를 거스려 그의 핍박자들과 제휴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가장 강력한 친족적 사랑과 의무의 유대는 종종 그리스도와 그의 교훈에 대한 적의로 말미암아 깨뜨려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은 참 종교를 거스리는 편견이었고 거짓된 것에 대한 열심이었으며 모든 관심과 최고의 성스러움, 매력적인 것과 애정이 이러한 몰록(Molochs)들에게 드려져 왔다.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는" 자들은 이러한 "맨 것을 끊으며 그 결박을 벗어버린다"(시 2:2, 3). 그리스도의 배우자는 그 "어미의 아들들"의 분노로부터 어려운 일을 겪는다(아 1:6). 이러한 자들로부터의 고난은 더욱 비참하다. 그 어느 것도 이것보다 더 짜를 수 없다. "그가 곧 너로다. 나의 동류, 나의 동무이다"(시 55:12, 13). 또한 이러한 자들의 적의는 대개 도무지 화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노엽게 한 형제와 화목하기가 견고한 성을 취하기 보다 어려우니라"(잠 18:19). 고대와 현대의 순교사(殉敎史)는 이러한 실례들로 가득 차 있다. 이상의 모든 것을 종합해 보건데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자는 핍박을 받아야만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환난을 거쳐야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 것임을 기대해야만 한다." Ⅱ. 이러한 고난의 예고와 더불어 우리는 여기에서 고통의 때를 위한 권고와 위로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도 그들을 실로 위험스러운 곳으로 보내고 있으며 또한 그것을 기대하고 계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시험을 잘 견딜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함으로 무장시켜 보내신다.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그가 말씀하신 것을 종합해 보자. 1. 몇 가지 일들에게 권고와 지시하는 방법으로. (1)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워라"(16절). "너희는 그렇게 해도 좋다"(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허락하는 것으로 취한다). "너희가 비둘기처럼 남을 해치지 않는다면 너희가 좋아하는 만큼 용의주도해도 좋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모든 때에 유용한, 특히 고난의 때에 유용한 그의 길을 아는 신중한 사람의 지혜를 우리에게 추천하는 교훈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므로, 즉 너희는 이리 가운데 양과 같이 노출되어 있으므로 뱀과 같이 지혜로워라. 교활하게 다른 사람들을 속이는 여우와 같이 지혜롭지는 말아라. 오히려 그 자신만을 방어하며 또한 자신의 안전을 위해 자리를 옮기는 뱀과 같이 지혜로워라."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뱀"과 같이 미움을 받고 박해를 받으며, 또한 그들의 파멸은 기정화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뱀"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들이 일상적으로 그러하듯이 이 세상에서 어려움 가운데 많이 노출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들과 사역자들은 불필요하게 그들 자신들을 노출시켜서는 안 되며, 그들 자신의 보호를 위해 공정하고도 정당한 수단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지혜의 모본을 보여 주셨다(마 21:24, 25; 22:17, 18, 19; 요 8:6, 7). 그는 그의 때가 오기까지 여러 번 그의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셨다. 바울의 지혜를 본보기로 살펴 보라(행 23:6, 7). 그리스도를 인하여 우리는 목숨과 그 모든 위로에 대해 냉담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것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머리가 깨어지지 않도록 안전케 하는 것이나 "술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는"(시 58:4, 5) 것이나 또한 "바위틈에 피하는 것"은 "뱀"의 지혜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뱀같이 지혜로울 수"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머리 위로 고통을 끌어들이지 않도록 "지혜로워야"한다. 악한 날에 침묵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것을 도울 수 있다면 "범죄하지 않도록 지혜로워야"한다. (2) "너희는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유순하라. 그리고 온유하라. 또한 침착하라. 손상에 대해 무엇이든지 하지 말며 악의에 대해 무엇이든지 참으라. 비둘기처럼 증오하지 말라. 이것은 언제나 전자와 병행해야만 한다." 그들은 "이리 가운데로 보내심을 받고" 있으며, 그러므로 "뱀과 같이 지혜로워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양과 같이 보냄을 맏고" 있으며, 그러므로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한다. 우리는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하여, 오히려 그 밖의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행하지 않기 위하여 "지혜로워야" 한다. 우리는 하나를 주고 되돌려 받는 "뱀"의 간교함보다는 20번의 손상을 참을 수 있는 "비둘기"의 순결을 사용해야만 한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말과 행동에서, 특별히 그들이 처하여 있는 원수들과의 관계에서 결백하고 무해 하는데 대해 계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육식(肉食)을 하는 새들로 포위되어 있을 때 그들을 성나게 하거나 또는 그들에 의해 성을 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비둘기 같은" 성령을 필요로 한다. 다윗은 매의 날개보다는 멀리 날아가서 휴식을 얻기 위하여 "비둘기의 날개"를 갈망하였다. "성령은 비둘기와 같이 그리스도에게 임하였다." 또한 모든 신자들은 전쟁이 아닌, 사랑을 위해 마련된 "비둘기 같은" 영 즉 "그리스도의 영"에 참예하는 것이다. (3) "사람들을 삼가라"(17절). "언제나 조심하라. 그리고 위험스러운 무리를 피하라. 너희가 말하고 행한 것을 유의하라. 어떤 사람의 신임에 대하여 너무 동떨어진 추측을 하지 말라. 가장 그럴듯한 주장에 대해 방심하지 말라. 친구를 믿지 말라. 아니, 네 품 속에 있는 아내를 믿지 말라"(미 7: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유의하는 것은 은혜스러운 자들에게 합당하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사람들을 삼가라"는 가르침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곤고하기 때문에 우리는 신뢰해야 할 사람을 알지 못한다. 일찍이 우리 주님이 그의 제자들 중의 하나에 의하여 입맞춤으로 배반을 당하였으므로 우리는 "사람들," 즉 "거짓 형제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4)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치 말라"(19절). "너희는 총독들 앞에 끌려갈 때에 버젓하게 행동하라. 그러나 어떻게 빠져나갈까를 궁리함으로 고민하지 말라. 지혜롭게 생각하고, 근심하거나 당황, 또는 불안한 생각을 하지 말라. 이러한 "염려"는 "하나님께 맡겨 버려라." 마치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염려하지 않는 것처럼─ad captandam benevol entiam─즉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훌륭한 말을 하려고 노력하지 말라. 그릇된 변명을 겉치레할 뿐인 이상한 표현이나 화려한 꾸밈을 하지 말라. 좋은 금은 그것을 도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치 그 스스로 말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은 것과 같이 이 일에 열심하는 것은 너희의 변명이 자신 없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너희는 가야하는 근거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verbaque praevisam rem non invita swquentur─즉 적절한 표현이 쉽사리 생기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무엇을 말할까 미리 염려하지" 않았던 3인의 전사(戰士, 다니엘의 세 친구)보다 총독이나 왕 앞에 더 잘 말하였던 사람은 없다.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단 3:16; 시 119:46)을 보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어떻게 잘 "말할"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잘 "행할" 것인가를 더 유의해야 하며, 또한 어떻게 그들의 정직을 "변호"할 것인가 보다는 어떻게 그것을 "유지"할 것인가를 더 유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Non magna loquimur, sed vivimus─즉 자만한 말 이 아닌, 우리의 생활은 최상의 변증을 이룬다. (5)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23절). "이와 같이 너희와 너희의 교훈을 거절하는지의 여부를 시험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네 자신의 안전을 위해 피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임박한 위험이 닥쳐올 경우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섭리로 "그들에게 도피의 문을 개방할" 때 도망함으로써 그 자신들을 안전케 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피하는 자는 다시 싸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군병들이 그들의 군기를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의 지역을 포기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의무"의 길에서 나가지 않으면서도 "위험"의 길에서 나갈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위하여 피난처를 마련하신 그의 돌보심을 보라. 그와 같이 명하셨으므로 핍박은 동시에 모든 각처에서 휘몰아치지 않는 것이다. "어느 한 성"이 그들에게 뜨거울 때 "다른 성"은 보다 차갑게 또는 "적은 성역"으로 보존된다. 곧 이것은 사용되고 멸시되지 않은 은혜이다. 그러나 언제나 이러한 단서가 붙는다. 즉 죄스럽고 부당한 수단이 피신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때에 그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개방하시는 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특별한 경우에 "지혜"와 정직이 "교훈하기에 유익한" 모든 것들의 적용에 있어서, 즉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역사에 있어서 이 규율에 대한 많은 실예 들을 발견할 수 있다. (6) "저희를 두려워 말라"(26절). 왜냐하면 "그들은 단지 몸만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28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그들의 수많은 원수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들의 의무와 관심사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평화를 교란시키는 혼돈의 덫을 가져온다. 즉 우리가 죄로 빠져 들어가도록 혼란시키는 덫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심스럽게 주시되고 추구되고 기도되어야만 한다. 때가 악하고 원수가 격동하며 사건들이 위협적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비록 땅이 옮겨진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선하신 하나님, 선한 이유, "은혜로 말미암은 선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므로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곧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시험에 이를 때 고문과 고통, 토굴과 돛배(옛날 노예나 죄수들에게 젖게 한 배), 도끼들과 교수대, 불과 장작더미는 용감한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 특히 두 서넛의 쇠약한 걸음에 의해 피할 수 있는 것이 명백할 때 뒷걸음질치게 하는 두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이 시험에 대해 우리를 무장하기 위하여 여기에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고 있다. [1] 원수들의 제한된 능력으로부터 이끌어낸 이 두려움에 대한 좋은 이유. 그들은 "몸을 죽일 수 있다." 이것은 그들의 격노가 최고도에 이르렀을 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행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더 나갈 수 없다. 그들은 "영혼을 죽이거나" 해할 수 없다. 영혼은 사람이다. 이로 보건데 영혼은(어떤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죽음에 처하여지거나 또는 사고나 인식을 박탈당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경우에는 몸을 죽이는 것이 영혼도 죽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영혼은 하나님과 그의 사랑에서 끊어질 때에 죽게 된다. 하나님과 그의 사랑은 영혼의 생명이며 또한 그의 진노의 그릇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능력보다 더 벗어나 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를 분리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분리시키지는 못한다. 도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그에게 사랑 받는 것을 못하게 할 수도 없는 것이다(롬 8:35, 37). 따라서 만일 우리가 우리의 보석들처럼 자신의 영혼에 대해여 관심을 가지게 된다면 그것들을 빼앗아 갈 능력이 없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죽게 될 몸을 죽일 수 있느냐, 하나님을 즐겁게 할 "영혼"은 죽일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은 장농(cabinet)을 부실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방인은 폭군을 다음과 같이 비웃었다. Tunde capsam Anaxarchi, Anaxachum non laedis─즉 너희는 아낙사쿠스의 처지를 욕할 수 있으나 그 자신을 해칠 수는 없다. 값비싼 보석은 만져지지 않는다. 세네가(Seneca)는 죽음 그 자체는 현명하고 선한 사람에게 참으로 어떤 재해를 입힐 수 없기 때문에 너희는 그를 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Si maximum illud ultra quod nihil habent iratae leges, aut saevissimi domini minantur, in quo imperium suum fortuna consumit, aequo placidoque animo accipimus, et scimus morten malum non esse ob hoc, ne injuriam quidem─ 즉 만일 우리가 손상을 입히는 법과 무자비한 폭군이 전혀 고통을 입히지 않고 또한 운명이 그 지배를 종결지우는 최후의 극단을 태연하고 침착하게 직면한다면 우리는 죽음이 악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최소한의 상해도 야기시키지 않기 때문이다(Seneca, De Constantia). [2] 그것에 대한 좋은 처방. 그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유의하라. 첫째, "지옥"은 "영혼의 몸"의 파멸이다. 그것은 전인(全人)의 파멸인 것이다. 만일 영혼을 잃는다면 몸도 역시 잃게 된다. 그들은 함께 범죄 하였다. 몸은 죄로 이끄는 영혼의 시험자였다. 그들은 영원히 함께 고통을 받아야만 한다. 둘째, 이 파멸은 하나님의 능력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는 "멸하실 수 있으시다." 그것은 그의 "힘의 영광"에서 비롯되는 파멸이다(살후 1:9). 그는 그것으로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실 것이다." 판결을 내리는 그의 권위뿐만 아니라 그 판결을 수행하는 그의 능력을 알게 하실 것이다(롬 9:22). 셋째,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훌륭한 성도들에 의해서도 "경외를 받으셔야만 한다." "주님의 두려움을 알므로써 우리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를 경외하도록 설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두려움에 따라 그의 진노가 된다면 그의 진노에 따라 그의 두려움이 될 것이다." 특별히 그 이유는 "아무도 그의 노(anger)의 능력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시 90:11). 순진한 아담도 위협에 두려워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성스러운 두려움을 억제할 필요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브라함(그때는 이미 죽었었다)의 하나님은 이삭(아직 살아 있었다)의 경외하는 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다(창 31:42, 53). 넷째, 하나님과 영혼을 지배하시는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에 대항하는 최고의 제해물(除害物)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불찬성의 얼굴을 대함 보다는 세상의 모든 사람의 찡그린 얼굴을 대함이 보다 나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그 자체에 있어서 가장 옳은 것과 같이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하다(행 4:19). "장차 죽게 될 사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들을 지은 자인 여호와를 잊는 자이다"(사 51:12, 13; 느 4:14). (7)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할 것이다"(27절). "어떠한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전하고 선포하여 너희의 임무를 수행하라. 그것은 너희의 임무이다. 원수들의 의도는 너희를 파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분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어떻게 되든 간에 그것을 전파하라." "내가 말한 것을 너희는 말하라."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사도들이 우리들에게 나누어 준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받았던 것과 똑같다는 사실이다(히 2:3).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던 바를 말하였는데─즉 "그것이 모든 것이었으며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 대사들은 그들의 교훈을 은밀하게, "어두운 데서," 귀로, 구석에서, 비유로 받았다. "그리스도는 많은 것들을 공개적으로 말씀하셨으며," 그가 공중 앞에서 설교하셨던 것과 틀리게 "은밀히 설교하신 일은 전혀 없다"(요 18:20). 그러나 그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하나니 나라에 속한 일들"에 관하여 특별히 교훈 하셨을 때는 귀(ear) 속으로 속삭이셨다(행 1:3). 왜냐하면 그때에 그는 "그 자신을 결코 드러내어 나타내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명을 "빛 가운데서" 그리고 "지붕 위에서" 수행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교리는 모든 사람에게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잠 1:20, 21; 8:2, 3). 그러므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방인들이 교회로 받아들여질 것에 대한 첫 번째 암시는 "지붕 위에서" 행해졌다(행 10:9).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숨겨져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모든 뜻은 계시되어야만 한다"(행 20:27). 많은 무리들에게 그것은 분명히 그리고 완전히 전해져야만 한다. 2. 위로와 격려의 방법에 의해. 여기에서는 그 목적에 대해 많이 언급되어 있다. 또한 거의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역과 어떤 능력의 협조 없는 현재의 연약함을 통하여 맞붙어 싸워야 했던 많은 어려움을 고려하면서 그들은 가까스로 이러한 취급의 전망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그들은 왜 즐거워해야 하는가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1) 여기에는 그들의 현재 사명에 대해 특유한 단어가 기록되어 있다(23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그들은 "인자," 곧 메시야의 "나라'가 "가까이 이르렀다"고 전파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옵시며"하고 기도하였다. 이제 그들은 이와 같이 기도하고 전파하면서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그리스도의 승귀와 성령의 부으심으로 나라가 임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위로가 되었으니, 곧 [1] 그들이 말했던 것은 잘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자가 오고 계시다"고 말했는데, 이제는 "보라 그가 오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사자의 말을 확증하실 것이다"(사 44:26). [2] 그것은 빨리 잘 되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일하는 시간은 짧을 것이며 곧 끝날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고용인도 자기의 시간을 가지는 법이다. 일과 전쟁은 잠시 동안에 만료된다. [3] 또한 위로가 되는 것은 그때에 그들은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기 때문이다. "인자가 올 때에 그들은 위로부터 보다 큰 능력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지금 그들은 위임자와 특사로 파송되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그들의 사명은 확대될 것이며 또한 그들은 전권대사로서 세상으로 파송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2) 여기에는 그들의 일반적인 사역과 연관된 많은 어휘들이 있으며 또한 그들이 그 가운데서 직면해야하는 고통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들은 좋은 말들이며 위로를 주는 말들이다." [1] 그들의 고난은 "그들과 이방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려"함이다(18절). 유대인 공의회가 너희를 죽게 하려고 로마 관원들에게 넘겨 줄때에 이로 말미암아 어느 한 재판석에서 다른 재판석으로 분주하게 재촉을 받는 것은 너희의 증거를 보다 공공연하게 나타내는 데 도움을 주게 될 것이며, 유대인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주게 될 것이다. 아니, 너희는 그들에게 증거를 나타낼 수 있을 것이며 또한 너희가 당하는 바로 그 고난들에 의해 그들에게 증거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행하는"(doing) 사역과 "고난받는"(suffering) 사역에 있어서 그의 증인(사 43:10)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순교자─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의 진리가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며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를 위한 증인이 됨으로써 그들은 그와 그의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에게 증인이 되는 것이다. 순교자들은 고난을 받음으로써 그들이 고백한 복음 진리를 증거하며 동시에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의 적의에 대해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에 대해 증거가 되며,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는 큰 심판날에 명백하게 나타낼 것이다. 판결의 이유는 "너희가 이러한 자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이다. 만일 그들이 고난이 증거가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즐겁게 견디어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그 증거는 그러한 것들이 오기 전에는 끝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계 11:7).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그들은 자신들이 인내해야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2] 어떠한 경우에도, 특히 그들이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증거하기 위하여 소환을 당해야만 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즉각적인 도우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에 무슨 말할 것을 너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세상의 어리석은 자들 가운데서" 선택함을 받은 무식하고 무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특히 위대한 사람들 앞에 불리웠을 때 그들 자신들의 능력을 공정하게 불신하였을 것이다. 모세가 바로에게로 보냄을 받았을 때 그는 불평하기를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고 하였다(출 4:10). 예레미야가 열방의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을 때 그는 한사코 "나는 아이라"(렘 1:6, 10)고 거절하였다. 이제 이러한 제안에 답하여, 첫째, 그들은 여기에서 "그들이 무슨 말을 해야할 것인가"가 이전의 어떤 때가 아닌 바로 "그 때에"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있다. 그들은 "즉석에서" 말할 것이며 비록 그것에 대해 잘 연구하지는 않았지만 유창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를 위해 말씀하도록 불러내실 때에 우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도록 그를 의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우리가 극도의 불리한 입장과 실망 가운데서 애쓸 때에라도 그를 신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둘째, 그들은 여기에서 성령이 그들을 위하여 그들의 간구를 끌어올리실 것이라는 보장을 받고 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자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10:20). 그들은 그들 혼자만이 이러한 경우에 방치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책임을 지신다. 그의 지혜의 성령이 그들 "속에서" 말씀하시는데 이는 종종 그의 섭리가 그들을 위하여 놀랍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이 둘(성령, 섭리)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핍박자들의 양심 속에도 나타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그 목적으로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실 뿐 아니라 그들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강단에서 그들을 도우셨던 동일한 성령이 법정에서 그들을 도우셨다. 이러한 예언자를 가진 그들은 순조롭게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그가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 4:12)고 말씀하신다. [3]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22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는 것은 매우 위로가 된다. 첫째, 이러한 고생은 "끝"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들은 오랫동안 지속될는지 모른다. 그러나 항상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이것으로 그 자신을 위로하셨으며, 이것은 그의 추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간다"(눅 22:37). Dabit Deus his quoque finem─즉 또한 하나님은 이것들을 종결 지우실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고난받는 시기에 대한 신앙적인 기대는 이러한 가운데서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데 큰 유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을 것이다"(욥 3:17). 하나님은 "장래에 소망을 주실"것이다(렘 29:11). 고통은 마치 "고용의 날과 같이" 지루하게 보일지 모르나 하나님께 감사드릴 것은 그것들은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그것들이 계속되는 동안 견딜 수 있다. 그것들은 "영원한"것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들은 "참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있는 것들이다. 왜냐하면 고난 자들은 영원한 팔 안에서 그것들을 견디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주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셋째, 구원은 "끝까지 견딘" 모든 자들이 영원한 보상이 될 것이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길이 진수렁이 될지라도 가정의 즐거움은 모든 것을 위하여 바로잡을 것이다. 영광의 면류관에 대한 신앙적인 유의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고난받는 성도들의 강심제와 음식물이 되어왔다(고후 4:16, 17, 18; 히 10:34). 이것은 "참는 데" 있어서 우리에게 격려가 되며 "끝까지 견디는 데" 있어서 약속이 된다. "잠시 동안만" 견디는 자나 "시험 때에 넘어지는" 자는 헛되게 달음질할 자들이며 그들이 획득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러나 견디어낸 자는 분명히 상급을 얻을 수 있으며 또한 그들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무리 하찮은 취급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들의 주인이 전에 받았던(24, 25절) 취급 이상의 것은 아니다. "제자는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다." 우리는 그들이 가장 비천한 의무, 곧 남의 발을 씻는 것도 사양치 말아야 될 이유로서 이것을 그들에게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요 13:16). 여기에서 그것은 왜 그들이 어려운 고난에 넘어지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로 주어져 있다. 그들은 이 말씀에 대해 회상하게 된다(요 15:20). "하인이 그 주인보다 더 낫지 못하다"는 격언적인 표현이다. 따라서 그로 하여금 "더욱 나으려는" 기대를 가지도록 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선생," 우리를 가르치시는 "선생"이시며 우리는 그에 대해 배우는 그의 제자들이다. 그는 집의 "주인" (oivkodespo,thj)이시며 그의 가족인 교회에서 독재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다. 둘째, 우리의 주인이시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으로부터 매우 딱딱한 대우를 받으셨다. 세상은 그를 "바알세불"(파리의 왕, 귀신들 중의 우두머리)이라고 불렀고 그가 이 바알세불과 동맹을 맺었다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모욕한 자들의 사악함이나 그 자신이 이러한 모욕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인내가 더욱 기이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영광의 하나님이셨던 그리스도는 파리들의 왕으로 낙인이 찍혀졌으며, 이스라엘의 왕은 에그론의 왕으로, 빛과 생명의 임금은 사망과 흑암의 능력을 가진 임금으로 오명을 써야만 했던 것이다. 사탄의 가장 큰 적수요 파괴자인 그리스도는 그의 동맹자로 중상을 당해야만 하지만 아직도 그는 "죄인들의 이러한 반박을 견디시는"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가 세상에서 당하신 학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똑 같은 것을 당하리라는 기대와 그것에 대해 준비할 것을 고무시켜 주며 또한 그것을 끝까지 인내할 것을 당부해 준다. 그리스도를 미워한 자가 그를 인하여 그의 제자들을 미워한다고 해도 이를 이상히 여기지 말라. 또한 머지 않아 "그와 함께 영광 가운데 있게" 될 자가 지금 "그와 함께 고난을 당한다고 해서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는 "쓴 잔"으로 시작하셨으니 그를 위해 기꺼히 맹세를 하자. 그가 십자가에서 참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이를 용이하게 하셨다. [5]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26절). 우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대한 복음의 계시로, "너는 그것을 전파하라(27절). 왜냐하면 그것은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신비로서 사람들의 자녀에게 숨겨진 진리들은 모든 나라들에 그들 고유의 언어로서 모두 알려지게 될 것이다"(행 2:11). "땅의 끝은 이 구원을 보아야만 한다." 그것은 확실히 행해질 사역이라는 사실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자들에게 큰 용기가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척시키실 경작지이다. 둘째, 바알세불이라고 불리운 그리스도의 고난받는 종의 결백성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들의 참된 성격은 지금 거짓된 색깔로 불공평하게 감추어지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들의 무죄성과 탁월성이 지금 "감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드러나게 될 것이다. 때로 그것은 이 세상에서 꽤 많이 행해지기도 하는데 그때는 성도의 의로움이 결과적인 사건에 의해 "빛과 같이 빛나는" 때이다. 그러나 그들의 영광이 모든 세상과 또한 천사들과 사람들, 지금 그들을 "조롱거리로 만드는"(고전 4:9) 모든 사람들에게 드러나는 것은 큰 심판날일 것이다(고전 4:9). 그들의 모든 비난은 사라져 버릴 것이며 지금 "감추어진" 그들의 은혜와 봉사는 "드러나게 될 것이다"(고전 4:5).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의인이 해와 같이 빛나게 될" 마지막 날에는 "육신"과 마찬가지로 "이름"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온갖 중상과 비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위로가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그의 진리를 신실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적합한 시기에 그들의 정직함을 나타내는 것은 그에게 맡겨두도록 하자. [6] 하나님의 섭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성도들의 고난에 있어서 그들과 관련되어 있다(29-31절). 특히 모든 피조물과 그들의 행동 또한 가장 적은 것에까지도 미치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원리의 교리와 우리의 첫 원리들에 의지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자연의 빛은 이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모든 사람, 특히 신앙으로 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그는 그들에게 온화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들에게 위로를 준다. 여기에서 살펴 볼 것은, 첫째, 모든 피조물들, 특히 "참새"와 같이 작은 피조물들에게 미치는 섭리의 일반적인 범위(29절)이다. 이러한 작은 동물들은 매우 보잘 것 없는 것이므로 그들 중 어느 하나도 가치 있게 여겨지지 않는다. 이 참새들은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아니, 여러분은 다섯 마리를 두 앗사리온에 살수 있을 것이다. 눅 12:6). 그러나 그들은 신적인 돌보심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1. 그들은 음식을 위해 "땅에" 내려앉아 곡식알을 쪼아먹는 것이 아니라 "너희 천부"께서 그의 섭리에 의해 그들을 위하여 그 곡식을 땅에 놓아두시는 것이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2장 6절에 보면 이것은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않았다"고 표현되어 있다. "그는 그것들을 먹이신다"(마 6:26). 참새들을 먹이시는 자는 성도들을 굶주리게 하시지 않을 것이다. 2. 그것들은 하나님의 지시 없이는 자연적인 죽음이나 난폭한 죽임에 의해 "땅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피조물 중에서 가장 적은 일부분일지라도 그들의 죽음은 신적 섭리에 의해 이른다고 한다면 하물며 그의 제자들의 죽음이랴! 높이 날아다니던 새가 죽을 때는 "땅에 떨어진다는" 사실에 유의하라. 죽음은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땅으로 떨어지게 한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여기에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는데 사용되었던 "두 마리의 참새"(눅 14:4-6)를 암시하고 있다고 한다. 가장자리에 있는 두 마리의 새는 "참새"라고 불리운다. 그들 중 하나는 죽임을 당해 "땅에 떨어지고" 또 다른 하나는 날아가도록 내버려진다. 두 마리가 죽임을 당한 것은 우연한 일처럼 보여졌다. 고용된 사람은 그들이 좋아한 것을 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그것을 계획하고 결정하였다. 그런데 참새들도 그들이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이라면 이러한 보살핌의 눈을 가지신 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너희에게는 더욱 더 보살피는 눈을 가지실 것이다. 만일 참새가 "너희 천부의 허락 없이" 죽지 않는다면 사람, 곧 기독자나 사역자나 친구나 내 어린아이는 정녕코 그의 허락 없이 죽지 않을 것이다. 새들은 섭리의 지시에 의하지 않고서는 새잡이군의 그물에 걸리거나 화살에 맞아 죽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시장에 팔리게 되지도 않을 것이다. 간교한 새잡이군과 같은 너희의 원수는 너희에게 "덫을 놓고" 몰래 너희를 향해 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너희를 사로잡거나 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너희의 원수는 "위에서 주어진 것"이 없으면 너희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활과 덫을 깨뜨릴 수 있으시며(시 38:12-5; 64:4, 7), 또한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새와 같이 도망하게"하신다(시 124:7).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31절).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모든 두려움을 잔잔케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의 교리 속에 충분히 있다는 사실이다.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모든 사람들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다른 피조물들은 사람을 위해 지은 바 되었으며 "그 발아래 두어졌기" 때문이다(시 8:6-8).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한 마리의 참새보다 더 가치 없는 것으로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탁월한 자인 그들이야 오죽 더 하겠느냐. 둘째, 섭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들에 대해 특히 그들의 고난에 있어서 취하는 특별한 인식(30절).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 심지어 가장 적게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격언적인 표현이다. 이것은 의심스러운 탐문의 사실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정신(Etenal Mind)의 무한한 영광에 대해 경시하거나 무한한 휴식에 대해 동요함이 없이 그 자체를 모든 사건에로 확대시키는 하나님의 섭리적인 돌보심을 계속적으로 믿으면서 살 것을 격려하기 위한 표현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의 머리털을 세신다면 그는 더욱 더 그들의 머리를 세실 것이며 또한 그들의 생활과 그들의 위로, 그들의 영혼에 대해 염려하실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자신이 염려하는 것보다 더욱 더 그들에 대해 염려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돈과 재물, 그리고 가축을 세는 데 열심인 자는, 떨어지고 잃어버릴 그들의 머리털을 세는 데는 결코 유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머리털을 세시며" 그들의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을 것이다"(눅 21:18). 그 적은 것 하나라도 그들에게 상처를 입히지는 못할 것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의 성도들은 매우 귀중하다. 또한 그들의 삶과 죽음도! [7] 그는 머지 않아 승리의 날에, 지금 곤고한 때에 그를 인정한 사람들을 인정할 것이며 또한 그때에도 그를 부인한 자들이 그에 의하여 내어버림과 거절함을 받게 될 것이다(32, 33절).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에 유의하라. 첫째,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또한 만일 우리가 그것을 행한다면 그것은 이후에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광과 행복이 될 것이다. 1. 우리가 그를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에로 부르심을 받아 그를 위해 고난을 받을 때 그리스도를 믿고 그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우리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를 위한 시중, 그에게서부터의 기대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의 진실성이 입증되고, 그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며, 다른 사람들이 감화를 받게 된다. 2. 이 고백이 우리로 하여금 비난과 고통을 당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의인의 부활 시에" 이것에 대해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듣게 된다는 것은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영예와 행복이 될 것이다(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 즉 "그는 비록 세상의 보잘 것 없는 벌레에 불과하지만 나는 그를 시인하리라. 이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했고 나로 말미암아 사랑을 받았던 나의 것 중 하나요. 나의 친구, 나의 사랑하는 자 중 하나이다. 내 피로 산 사람이요, 내 영의 제작품이다. 나는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하리라. 그때에 그것은 그를 취하여 최상의 봉사를 할 것이다. 나는 그를 위하여 좋은 말을 해줄 것이다. 그때에 그는 내 아버지 앞에서 그의 판결을 받기 위하여 나타날 것이다. 나는 그에게 나타나겠으며 그를 내 아버지 앞에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예롭게 하는 자들을 그는 이와 같이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그를 "사람들 앞에서" 영예롭게 하실 것이다. 그것은 "보잘 것 없는"일이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의 "아버지 앞에서" 영예롭게 할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일이다. 둘째,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거절하는 것은 위험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행하는 자는 "큰 심판 날에 그에 의하여 거절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그들은 그를 매우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은 자들을 그의 종들로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느니라"(7:23). 사람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그에게 드릴 수 있던 최고 선의 일이었던 기독교의 초창기에 있어서 이러한 신앙 고백은 후에 이것에 수반되는 세속적인 유익을 가진 것에 비한다면 하나의 진실성에 대한 보다 더 큰 시련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8] 그들의 제자 직분의 기초는 마치 고난들을 그들에게 대해 매우 가볍고 쉽게 하려고 한 것처럼 이러한 기질과 성벽에 두어졌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그의 추종자로 삼으신 것은 고난을 위해 준비하는 조건에서였다(37-39절). 그는 맨 처음에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들이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지 않으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다. 사람들은 신앙 고백을 할 때 거기에 필수적으로 수반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이 예측하였던 난관들에 대해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그러한 피곤과 고생에 순복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 고백의 특권과 유익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기독자의 신앙 고백에 있어서 그들은 이러한 것이 지니는 위엄과 행복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러한 가치를 그리스도에 대한 관계에 두지 않고 다른 어떠한 관심보다도 앞에 두기 때문이다. 계약의 조건을 지키려하지 않는 자들은 거래에서 유익을 기대할 수 없는 법이다. 이와 같이 하여 계약 조건은 설정되는 것이다. 만일 종교가 "어떤"(any)일에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모든"(every) 일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 진리를 믿는 자는 모두가 곧 그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자신들의 임무와 행복으로 삼는 자는 그 밖의 모든 것을 그것에 순복 하도록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의 기독자가 아닌 자는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유의할 것은,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위해 버리거나 잃거나 고난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손해보는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님을 알면 용기가 솟아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이 값비싼 진주를 잃는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위해 제공한 것은 매우 가치가 있다는 신념이 우리로 하여금 위로를 받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앞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는 가장 친근하고 소중한 친척들, 곧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앞에서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 이 친척들 사이에는 시기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며 따라서 이 친척들은 우리를 매우 사랑하는 사람들로 열거되어 있다. 자식은 그들의 부모를 사랑해야 하며, 또한 부모는 그들의 자식을 사랑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보다 그들을 더 사랑한다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 우리는 그가 말씀하셨던(21, 35, 36절) 우리의 친척들을 증오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 버림받아서도 안 되며, 마찬가지로 그들을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져서도 안 된다. 기독자는 모름지기 "그 부모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내가 그를 보지 못하였다"(신 33:9)고 말한 레위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우리의 안락과 평안에 앞서 그를 높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합당치 않다. 여기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것은, 1.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할 것"을 각오해야 하며, 2. "십자가를 지고" 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그가 하셨던 것처럼 인내해야 하며, 3. 우리가 십자가를 지고 갈 때 그것을 참는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큰 용기가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신실하게 그를 따른다면 그가 당하신 고난을 통해 그의 영광 가운데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이다. 셋째, 목숨보다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39절).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다."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써 목숨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자는 영원한 사망 가운데서 그것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 즉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 보다는 목숨을 버리려는 자는 그의 말할 수 없는 이익, 즉 영원한 생명으로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장차 오는 생명을 위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이 세상의 목숨에 대해서는 냉담한 것이다. [9] 그리스도 자신은 그들의 주장(이유)을 진심으로 지적함으로써 그 자신을 그들의 모든 친구에게 친구로 나타내며 또한 여하한 때에라도 그들에게 주어져야난 했던 모든 친절을 도로 갚으려고 하셨다(40-42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첫째, 대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거절하려고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들을 영접하고 환대하며,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를 인하여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려고 하는 몇몇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에 암시되어 있다. 최악의 시기에도 은혜의 선택에 의하여 남은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수고를 "헛되게"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는 친절하게든지 불친절하게든지 그의 신실한 사역자에게 행한 것을 그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하며 또한 그들이 "취급받은 것"을 그 자신이 취급 받으신 것으로 여기신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 전권대사에게 주어진 영예와 멸시는 그를 보낸 이에게 대한 영예와 멸시를 나타낸다. 사역자들은 "그리스도를 위한 사도들"이다. 그리스도는 그에게 대한 존경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여전히 환영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백성과 사역자들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다. 또한 그는 세상 끝 날까지 "항상 그들과 함께"있으시다. 아니, 그 영예는 보다 높이 올라가나니,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그것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간주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도 역시 그렇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를 환대함으로써 그들은 "모르는 천사"가 아닌 그리스도, 곧 하나님 자신을 환대하는 것이다(마 25:37).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았나이까? 셋째,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행해진 친절이 결코 적지는 않지만 만일 그렇게 행한 경우가 있거나 그 이상의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이 비록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에 불과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받아들여질 것이다(42절). 그들은 "소자들"이며, 보잘 것 없고 연약하며, 종종 원기회복이 필요하며, 적은 것에도 기뻐하는 자들이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냉수 한 그릇"도 그들에게는 매우 큰 호의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보여진 친절함은 선물의 값에 의하지 않고 주는 자의 사랑과 애정에 의해 그리스도의 책에 가치 있는 것으로 기록된다. 이에 비추어 과부의 적은 돈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을(pass current) 뿐만 아니라 높이 평가되었다(눅 21:3, 4). 따라서 은혜가 참으로 풍성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선한 일에 풍성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그리스도께서 장차 받으실 그의 제자들에게 대한 친절은 그리스도를 목표로, 또한 그를 인하여 행해져야만 한다. 선지자는 "선지자의 이름으로" 영접되어야 하며, "의인"은 "의인"의 이름으로, "소자"는 "제자의 이름으로" 영접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학식이나 재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며, 또한 그들이 우리의 친척이나 이웃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의로우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선지자요 제자들이며 따라서 그리스도의 심부름을 위해 파송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사역자에게 행해진 친절 위에 가치를 두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대한 신앙적인 존경이다. 우리가 맨 처음 이 일에서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그는 이 일에 관심을 두시지 않으신다. Ut tivi debeam diquid pro eo quod praestas, debes non tantum mihi praestare, sed tanquam mihi─즉 네가 제출한 어떤 봉사를 위하여 나로 하여금 너에게 대한 의무를 느끼기를 원한다면 너는 그 봉사를 수행할 뿐만 아니라 네가 그것을 나를 위해 한다는 사실을 나로 하여금 확신케 하도록 해야 한다(Seneca). 다섯째, 그리스도의 백성과 사역자들에게 보여진 친절함은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풍성하고 적절하게 보상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매우 엄청나다. 만일 그것이 주님에게 행해진다면 그는 그들에게 이자를 붙어 다시 지불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불의치 아니하사 사랑의 수고를 잊어버리시지 않기" 때문이다(히 6:10). 1. 그들은 "상을 받을 것이며" 결단코 그것을 "잃지 않을"것이다. 그는 "그들이 상을 받을 만하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 임금도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을 자격이 없다.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로서 "상을 받게 될"것이다. 또한 그들은 종종 사람들 가운데서 선행을 하는 경우에서와 같이 "결단코 그 상을 잃지 않을"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보상해야하는 자들은 거짓되거나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의인의 부활시 까지는 그 상이 늦춰질 수 있으며 또한 완전한 보상도 연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은 결코 "잃어버리지 않을"것이며 또한 연기됨으로써 잃어버리는 바가 되지 않을 것이다. 2. 이것은 "선지자의 상"이며 "의인의 상"이다. 다시 말하면, (1) 하나님께서 선지자와 의인에게 주시는 상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축복은 그들의 친구에게도 미칠 것이다. (2)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지자와의 인을 통하여 주신 상이다. 그들의 기도에 응하여(창 20:7) 주시는 상이다.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할 것이라"고 하셨으니, 그것이 곧 선지자의 상이다. 또한 그들의 사역에 의해 주시는 상이다. 그가 말씀의 전파자에게 친절한 자들에게 말씀의 교훈과 위로를 주실 때에 그는 "선지자의 상"을 보내시는 것이다. 선지자의 상은 하늘에 속한 일들에서의 영적인 축복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들의 가치를 안다면 그것들을 좋은 보상으로 여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