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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삼 년의 공생애 동안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관원들에게 체포되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흩어져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고하신 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제자들은 다시 모였고, 예수님이 행하셨던 하나님 나라 사역을 계속해서 감당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는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이면 함께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가 받은 구원을 서로 축하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부활의 신앙을 다시금 확인하곤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단순한 교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오늘도 살아계신다고 하는 이 믿음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또한 우리의 삶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을 믿는 그 믿음이 우리에게 말씀 따라 순종하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를 주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부활의 아침에 있었던 일들 가운데, 누가복음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오늘 상고하려고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그 밖에 몇 여인들이,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 무덤에 찾아갔는데, 예수님의 시신은 보이지 않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서 근심할 때, 눈부신 옷을 입은 두 남자가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살아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의 그 말씀을 기억하고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들에게 알렸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이 넌센스처럼 들렸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까지 달려가서 구부려 들여다보니 무덤은 비어 있고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이어집니다. 그날 예루살렘에 머물며 여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그날 오후에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를 향하여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엠마오가 오늘날 정확히 어느 곳인지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하지는 않지만, 예루살렘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인데, 성경에서는 그 거리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이십오리쯤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번역은 이십오리라 했는데, 원문은 60스타디온, 약11킬로미터에 해당하는 거리입니다. 11킬로미터면 대략 세 시간 정도 걸으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인데, 그들이 엠마오에 도착하였을 때 날이 어두워졌다고 하니까, 그들이 이 길을 걷기 시작한 때는 해가 기울어가는 오후 세시쯤 되었을 것입니다.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면서, 해지기 전에 서둘러야 한다는 마음에, 그들은 서둘러 길을 걸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이들 두 제자에게는 실망과 좌절, 그리고 허무가 뒤엉킨 길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고, 병든 자, 귀신들린 자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님! 그런 예수님의 말씀과 삶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라고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사흘 전에 예수님은 유대인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로마군인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곧 그들의 희망이 무너진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며 가슴에 품었던 구원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고, 그들은 실망과 좌절과 슬픔 가운데 엠마오라고 하는 시골 마을로 서둘러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엠마오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자가 길을 가고 있을 때, 낯선 사람 하나가 그들과 함께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15절에 보면, 예수님이 다가와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셨지만 제자들은 그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님인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다 준 그 실망과 슬픔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분별력을 잃어버렸습니다. 3년이나 따랐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함께 걸으시던 그분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이 걸으면서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느냐?” 그들은 슬픈 표정을 지은 채 걸음을 멈추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도 우리처럼 예루살렘에서 온 것 같은데,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신들이 주고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신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그를 넘겨주어서 사형선고를 받게 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고서 그분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는데, 그 기대가 무너지고 이토록 허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벌써 사흘이 되었는데, 몇몇 여자들이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주의 천사들이 나타나 예수가 살아나셨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몇 사람이 무덤으로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대로 무덤은 비어 있었고 예수님의 시신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야기가 끝나자, 말없이 듣고 계시던 예수님이, 2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러면서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 나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메시아에 대하여 기록된 말씀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시내산 계약의 조건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축복과 구원을 받지만, 율법을 불순종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죄를 속죄받기 위하여 철저한 회개와 함께 동물을 잡아 희생제물을 바치도록 일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죄를 범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와 같은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듯이, 이 메시야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으며 간고를 많이 겪고 질고를 아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감당하시고 고난을 당하는 것이 메시아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메시아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시고 그를 영광스럽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은 엠마오에 도착하였고, 날은 이미 저물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계속해서 길을 가시려 하였지만, 제자들은 ‘저녁이 되고 날이 저물었으니 우리와 함께 머무시라’고 강권하자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마을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들이 함께 앉아 음식을 먹을 때, 예수께서 떡을 들어서 축사하시고, 떼어서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바로 그 때 제자들은 눈이 밝아졌습니다. 그들은 이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비로소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사라지셨습니다. 신비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들이 깨닫는 순간 예수님은 사라지고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주님은 지금 눈 앞에 보이지 않지만, 그는 부활하셨고,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 때 또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길에서 그 분이 말씀하시고 메시아가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을 성경을 풀어 가르쳐 주실 때, 자신들의 속에서 마음이 뜨겁게 불타올랐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밤길을 걸어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제자들이 모여 있었고, ‘주님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사람도 길에서 겪은 일과 주님과 함께 앉아 주님께서 떡을 떼어 주실 때에 비로소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참으로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이 엠마오 길의 이야기를 한 폭의 그림처럼 정말 아름답게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엠마오 길은 어떤 길입니까? 기울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서쪽으로 걸어가는 그 길은 실망과 좌절의 길이었습니다.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허무하게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들의 희망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 것입니다. 실망과 허무, 그리고 슬픔 속에서 엠마오 길을 걸어갈 때, 예수님은 찾아오셔서 말 없이 그 길을 함께 걸어주셨습니다. 여러분, 지금 혹시 꿈꾸기가 힘들고 희망이 사라져 슬픔 가운데 인생길을 걷고 계십니까? 바로 지금 여러분의 옆에 예수님은 다가오셔서 함께 걸어가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말 없이 찾아와 이 길을 함께 걸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길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주시고,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의 슬픔, 우리의 실망과 두려움을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사실, 제자들이 지금 하는 이야기는 예수님이 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당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기에 누구보다 더 잘 아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의 이야기를 끊지 않으셨습니다. 마치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처럼 끝까지 귀 기울여 들어주셨습니다. 가슴 속의 이야기를 다 풀어놓기까지, 잠잠히 기다리시며 들어주셨습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 왜 그토록 실망하고 슬퍼하느냐’고 물어 주시고, 말없이 끝까지 들어 주셨습니다. 다 듣고 난 후에 예수님은 성경을 풀어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그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실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반응이 흥미롭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못 느꼈는데, 엠마오에 도착하고 예수님과 함께 식탁을 나누고, 비로소 이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된 후에 그들은 “그 때, 그 길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가 들을 때 우리 마음이 뜨꺼웠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 말씀을 듣던 그때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지 못했을까요? 실망이 크고 마음이 상하였을 때는, 무슨 말을 들어도 좀처럼 마음에 감동이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믿음이 회복된 후에 돌아보면, 실망과 좌절로 인하여 힘들어 하던 그 때, 주님이 함께 하셨고, 주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었던 것을 깨닫게 되곤 합니다.
여러분, 이 제자들이 잘 한 것은, 예수님을 강권하여 집으로 모신 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예수님을 강권하여 집으로 초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무너진 희망으로 인하여, 실패한 인생으로 인하여, 여전히 슬픔과 좌절 속에 살아갔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강권하여 자신의 집과 자신의 삶 가운데 모셨기 때문에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이어지고 있습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그들은 마음의 위로를 받고 엠마오에서 그 여생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보내었더라’가 아니라, 33절을 보면, 그들은 ‘곧 그때로’, 깨닫는 순간, 이미 어두운 밤이었지만, 그들은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달려갔습니다. 지금까지 예루살렘은 그들에게 실망과 좌절과 슬픔의 도시였지만, 그래서 도망치듯 서둘러 그곳을 빠져 나온 그들이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할 사역의 현장이 된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제자들은 왜 그렇게 절망하고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였습니까? 부활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에 달려간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고, 천사가 나타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고 말해주었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지만,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들에게 십자가는 곧 패배요 절망이었습니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을 믿지 못하였기에 제자들의 두 눈은 가려져 있었고, 그래서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의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부활의 빛 아래서 세상을 보고 또한 오늘을 보게 됩니다.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단언하였습니다. 그 길이 힘들고 미래가 안 보인다 할지라도 조금도 의심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구속하기 위한 희생의 제물로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오늘 실망과 좌절과 슬픔이 뒤엉킨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은 우리들과 함께 걸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오십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주님과 더불어 더 깊은 대화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 때 우리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질 것입니다. 그분을 여러분의 삶의 자리로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함께 떡을 떼며 살아갈 떼, 부활의 확신과 함께 삶의 소망을 새롭게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다시금 길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떠나온 실망과 두려움의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희망과 용기를 회복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구원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