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도 모르는] <5> '일제강점기' 전차와 교통사고 이야기
1916년 추석, 부산 사람들 전차 습격…안하무인 일본인 운전사를 두들겨 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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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광복동 거리를 운행하던 전차의 모습. 부산박물관 제공 |
# 1916년 9월13일
- 거리에서 놀던 한국인 일행
- 앞 안보고 운행 전차에 깔려
- 1명 사망하고 4명 중상 참사
- 분노한 군중 日 운전사 난타
- 전차 유리창 깨뜨리고 전복
# 1917년 3월8일
- 사고당시 부산 오던 日 황족
- 기다리게한 '괘씸죄' 물어
- 주모자에 징역 2년 등 선고
- 운전사엔 고작 벌금 200원
- 어처구니 없는 황당 판결
■ 화려했던 부산 전차 개통식
1915년 10월 31일 오후 2시, 부산 동래 온천장 앞 광장에서는 성대한 전차 개통식이 열렸다.
이미 오전 11시부터 이벤트가 진행됐다.
화려하게 장식된 전차에 귀빈들을 태워 부산, 초량, 부산진 등으로부터 행사장까지 운행했다.
이렇게 개통식에 참여한 손님이 400명에 달했다.
개통식에서는 조선와사전기회사 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각계 인사의 축하가 이어졌다.
연회에서는 맛있는 음식이 풍성하게 차려졌고, 기생들의 공연이 펼쳐졌다.
부산 전차의 앞길은 이날의 개통식처럼 화려하고 눈부실 것으로 모두가 생각했다.
■ 전깃불 잡아먹고 달리는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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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부민캠퍼스에 전시된 옛 전차. 1950년대 미국 원조로 도입한 이 전차는 1968년 운행이 중단됐으며 이듬해 동아대에 기증됐다. 유승훈 박사 제공 |
전차는 전기를 에너지로 하여 노면에 깔린 레일 위를 달리는
교통수단이다.
19세기 미국에서 운행한 후 여러 나라에 도입됐다.
우리나라에서도 1899년 서울에서 처음 노면 전차가 개통됐다.
부산에서는 개항 이후 일본인 전관거류지가 설치되고, 관광지를
찾는 일본인이 많아지자 철도를 부설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당시는 증기기관을 동력으로 하고, 궤도 간격이 협소한 경편철도였다.
1910년 조선와사전기회사가 이 사업을 추진했던 부산경편궤도회사를
인수하면서 사업의 성격이 변했다.
조선와사전기회사는 선로 부설공사를 해 노선을 확장하고, 증기철도를 점차 전차로 바꾼다.
이렇게 개량공사를 마친 뒤 화려한 개통식을 열었다.
우마차나 인력거를 탔던 부산 사람은 전차를 처음 보자 그 위용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전차를 '전깃불 잡아먹고 달리는 괴물'이라고 여겼다.
■ 부산 사람들 전차를 공격하다
근대화 과정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다.
시간 단축과 생활 편리의 이면에는 고통과 불행이 뒤따랐다.
부산에 등장한 전기 괴물이 대형 사고를 일으킨 때는 1916년 9월 13일이었다.
당일은 추석 다음 날로 부산에는 삼삼오오 거리를 거닐며 놀던 사람이 많았다.
평화롭고 즐거운 명절 분위기였다.
이때 영가대 정류소에서 출발한 남행 제1호 전차가 동남구 정류소로 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인 전차 운전사는 차내에 있던 부산 경찰서의 순사와 잡담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앞을 보지 않았다. 전방 주시를 게을리한 것이다.
불행하게도 때마침 김춘근 일행 5명이 전차 선로를 건너고 있었다.
전차는 그대로 이 일행을 덮쳐 참혹한 교통사고를 냈다.
김춘실은 목이 잘려 숨졌고, 김춘근 등 4명은 무릎과 어깨에 중상을 입었다.
주변에는 많은 인파가 있었던 터라 이 소식은 순식간에 군중에게 퍼져나갔다.
분노한 수백 명의 군중은 전차에 돌을 던지고, 운전사를 끌어내 난타하였다.
더욱 드세진 군중은 제1호 전차를 전복시켰으며, 영가대에서 오던 제7호 전차마저 유리창을 깨뜨리고
전복시켰다.
이 난리는 부산수비대가 출동한 뒤에 진정되었으며, 현장에서 30여 명이 체포됐다.
■ 불친절의 대명사, 일본인 운전사
부산 전차의 운행은 일본인의 교통 편의가 목적이었다.
전차 운행 이후로도 여전히 걷거나 우마차를 이용하는 조선 사람이 많았다.
동래 온천장은 관부연락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한 일본인이 자주 찾는 명소였다.
일본인 관광객을 온천장까지 수송하기 위해 전차가 꼭 필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전차를 운행하는 운전사도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므로 차내에서는 부산 사람에 대한 차별이 벌어졌다.
운전사들은 정류소에 도착할 때 일어로 정류소 이름을 외쳤다.
일어를 모르는 사람들은 내릴 정류소를 놓치거나 몇 정류소를 더 가기 일쑤였다.
내려달라는 말도 무시하는 막무가내 운전사들 때문에 사고도 발생했다.
1925년 5월 18일 여학생 이금숙은 영주동 정류소에서 내려달라고 간청했으나 일본인 운전사는
들은 체도 안 했다.
급한 마음에 이금숙은 차에서 그냥 뛰어내리다 머리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다.
이런 안하무인의 불친절한 태도를 조선와사전기회사에 말해도 전혀 고쳐지지 않았다.
부산을 찾는 외지인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동래 온천장을 가기 위해 부산 전차를 탔던 차상찬은 1929년 8월 '별건곤'이란 잡지에 기행문을 남겼다.
그는 좁고 불결한 동래전차와 불친절한 운전사의 말씨는 범어사 부처라도 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일갈했다.
특히 일본어로 지껄이며 부인을 희롱하는 운전사에 분노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영업하는 자가 손님에게 하는 태도가 아니요, 형무소 간수가 죄수에게 하는 태도다."
■ 피고인 39명 전원에 유죄 선고
전차 전복 사건의 공판은 6개월이 지난 1917년 3월 8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이날 법정은 대만원이었다.
공판을 주관한 사람은 하시모토(橋本) 재판장을 위시하여 검사, 변호사 모두 일본인이었다.
반면 힘없는 조선인은 피고인과 방청객으로 앉아있을 뿐이었다.
이날의 구형과 뒤이은 판결은 예정된 일이었다.
박일득을 비롯한 주모자들은 징역 2년, 선동자는 징역 1년, 사건을 도와준 조력자는 징역 6개월에 처했다.
미성년자만이 집행유예를 받았다.
그런데 대형 사건을 일으킨 일본인 운전사는 벌금 200원을 선고받았을 뿐이다.
주객이 전도된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분노한 피고인들은 고등법원에 상고했으나 법원은 기각했다.
이렇게 일제가 피고인들을 강력하게 처벌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전차 전복 사건이 벌어지던 그 날, 일제 황족인 칸인노미야(閑院宮)가 열차를 타고 부산역으로 오던 중이었다.
이 소요로 인해 칸인노미야가 탑승한 열차가 30분간 지체되었다.
사실 일제는 전차 전복 사고보다 일제의 실력자인 칸인노미야를 기다리게 한 일에 분개했다.
■ 교통근대화의 대가, 참혹한 인명 사고
여러 문제점은 있었지만, 부산 전차가 교통수단의 혁신을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자동화된 교통수단은 빠른 속력으로 무장했고, 부산 근대의 시공간을 축소했다.
그러나 교통의 근대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명 살상을 피할 수 없었다.
특히 어린이와 노인의 인명 피해가 컸다.
주로 전차 레일을 건너거나 레일 주변에서 놀다가 전차에 깔리는 사고를 당했다.
전차의 최고 속력은 시속 40㎞였지만 여러 장애물로 인해 고작 시속 20㎞에 그쳤다고 한다.
느린 속력임에도 사고 결과는 참혹했다.
전차 바퀴에 깔려 끔찍하게 죽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일제 강점기에 일어난 전차 사고는 불안정한 근대를 상징하는 것이다.
◇ 수많은 사고와 운행 중단에 '우산·양산 역할뿐' 조롱받아
1920년대 부산 전차는 수많은 사고의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찻간이 비좁고 누추한 것은 사소한 문제였다.
정전으로 전차가 멈추는 일이 빈번했으며, 전차의 차축이 부러지는 사고도 일어났다.
비가 오는 날 차축이 부러져 승객들이 한 시간 동안 기다리는 일도 있었다.
게다가 전차가 궤도를 이탈하는 탈선 사고도 벌어졌다.
전차가 탈선해 길을 막아서서 통행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다.
부산 전차가 교통수단으로 제대로 역할을 못 하자
"부산 전차는 더우면 양산, 비 오면 우산 삼아 탈 전차"라는 노래가 유행했다.
요금 징수에서도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이 심했으며, 기계 고장으로 인한 비용을 요금에 추가하기도 했다.
당시 차량 흐름도 엉망이었다.
레일이 단선이기 때문에 맞은편에서 전차가 오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부산역에서 경남도청까지 보통 도보로 30분 걸리는 데
어떤 때는 전차로 50분 이상이 소요되기도 했다.
1930년대에 이르면 이런 문제점이 조금씩 해결된다.
궤도를 개량하고 복선화를 추진하였으며, 차체를 개조하고 새로운 차량을 제작했기 때문이다.
유승훈 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