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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을 얻는 삶 스크랩 웨일즈 부흥운동`의 영적충만 가득 - 영국 모리아 교회
하나로세계로 추천 0 조회 17 07.11.01 11:1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영적 부흥기가 있는가 하면 영적 침체기가 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을 통해 발견한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도 영적 부흥기와 침체기를 겪었으며 개인적으로는 선지자 엘리야에게서 그것을 발견한다.

영적 침체에 빠져 있던 18세기 영국은 웨슬리와 같은 위대한 인물로 말미암아 새로운 부흥기를 맞게 됐으나 세월이 흐르자 또 다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20세기초 영국을 부흥시킨 강력한 성령운동이 웨일스 지방에서 일어났으니 그것이 바로 1904년의 웨일스 부흥운동이다. 이 부흥운동은 당시 유명한 영적 지도자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또 대도시의 규모가 큰 교회에서 시작된 운동도 아니다.

1904년 웨일스 부흥운동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이반 로버츠(1878∼1951)라는 무명의 청년에 의해 시작됐다. 그 진원지 역시 웨일스의 한적한 시골(로)에 있던 모리아 교회라는 작은 교회였다. 웨일스 부흥운동은 영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된 강력한 성령운동이었다.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1907년에 일어난 이 땅의 부흥운동 역시 바로 웨일스 부흥운동에 자극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초기 사역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웨일스 부흥운동의 주역 이반 로버츠는 웨일스 지방글레모건에서 광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생활이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14형제 중 아홉째로 태어나 교구학교에서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12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광산에서 힘든 일을 했으며 한때는 대장장이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4년 칼뱅파 감리교회 목회 후보자로 선발되어 뉴캐슬 에믈린에 있는 대학예비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그러나 이반은 빈한한 생활 속에서도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삶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싶다’는 강한 영적 욕망을 가지고 자라났다.

그는 웨일스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11년전부터 남달리 기도에 전념하고 밤을 지새우며 성경을 연구하는 등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다고 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그는 하나님께서 한 시대를 위하여 준비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로버츠는 기도와 말씀으로 준비한 이 기간에 자주 시대적인 환상을 보고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한다. 마침내 1904년에 이르러 웨일스 도처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이러한 영적 분위기는 하루아침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로버츠를 비롯한 일단의 기도용사들이 영적 침체에서 벗어나기를 오랫동안 기도해왔기 때문이었다. 로버츠는 즉각 고향으로 돌아가 모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기도집회를 시작했다. 그해 10월 30일 그는 기도중에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자 그 다음날 지체 없이 고향 교회로 돌아간 것이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기념일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성령에 사로잡힌 로버츠는 모리아 교회 담임목사 다니엘 존스에게 자신이 체험한 비전을 얘기하고 설교할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무명의 전도자를 좀처럼 교회는 쉽게 받아 주지 않았다. 가까스로 설교의 기회를 얻은 로버츠는 “성령님께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나가도 좋습니다”라고 담대히 도전했다. 그 결과 그의 첫 집회는 남아있던 17명으로 시작됐다고 한다.

그러나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 같은 성령의 강력한 역사로 17명 모두 회개하고 성령충만함을 받게 된다.그중에는 로버츠의 동생과 세 자매도 포함돼 있었다. 부흥의 불길이 웨일스의 모리아 교회에 떨어졌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첫 집회 이후 30일만에 3만7000명이 주께 나아가 회개하고 놀랍게도 5개월만에 웨일스 전역에서 10만여명이 교회를 찾게 됐다.

이러한 놀라운 사건으로 사람들은 이반 로버츠를 ‘웨일즈의 죤 웨슬리’라고 불렀다. 보잘것 없던 한 소년광부를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크게 들어 쓰신 것이다. 특히 그의 성령집회에는 탄광에서 일하는 광부들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대거 참석했는데 그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훔쳐온 연장을 돌려주거나 함부로 다룬 당나귀를 껴안고 사과하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웨일스의 부흥운동은 그 지방의 사회정화운동을 가져와 술집과 당구장이 텅텅 비고 형무소 죄수들에게까지 전도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무엇보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처럼 뜨겁고도 강력한 웨일스 부흥운동은 영국 전역과 미국 캐나다 인도 중국 뿐 아니라 한국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니 그것이 바로 ‘1907년의 대부흥운동’이라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의 저명한 목사 존스턴 박사가 직접 웨일스를 방문하여 로버츠의 부흥회를 목격했을 뿐 아니라 이반 로버츠 목사에게 부흥의 비결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후 그는 중국에 가서 여러 곳에서 웨일스의 부흥운동을 증거하다가 1906년 9월 서울에 오게 된다. 그 무렵 마침 장로회연합회가 개최되었는데 존스톤은 그곳에서 웨일스 부흥운동을 간증하였다. 그때 그곳에 모인 선교사들과 목사들이 큰 감동과 도전을 받고 한국 교회의 부흥운동을 갈망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한국 교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길선주(당시 장로) 목사도 큰 은혜를 받게 되는데 이것이 1907년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와 영적 대각성운동의 시발점이다. 참으로 시공을 초월한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다.

2007년은 한국교회 성령 10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1907년 대부흥운동을 기점으로 하는 성령 100주년이다. 1907년의 장대현사건은 1904년 웨일스 사건이 가져온 성령의 연쇄폭발이다. 성령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 교회는 다시 한번 이 시대에 제2의 웨일스 모리아교회 부흥운동과 제2의 장대현교회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심한 영적 침체와 현실적 분열을 겪고 있다. 국민은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다. 이러한 때에 이 민족이 살 길을 한국 교회가 열어야 하며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제2의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필자가 웨일스 부흥운동의 진원지인 모리아 교회를 찾았을 때는 교회 출입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수소문 끝에 교회를 관리하는 다이프리그 그리피즈 장로를 만나 교회를 돌아보게 됐다. 정원에는 이반 로버츠 목사의 흉상이 새겨진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뒤뜰에는 세상을 떠난 성도들의 무덤이 보존돼 있었다. 그 중에는 이반 로버츠와 함께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그의 동생과 누이들,그리고 부모까지 한자리에 영면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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