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변호인이 개봉됐다.
변호인은 부림사건을 모티브로 했단다..
그럼 부림사건은 뭐냐??
부산의 학림사건이라해서 부림사건이다..
아...그럼 학림사건은 뭐냐??
이정도는 알고 영화를 봐야하지 않을까??
시대적 배경과 역사의 흐름을 알고 영화를 보면,
영화의 맛을 더 살리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갖고..
역사의 시간을 박정희 저격 전으로 돌려본다..
...................... 1979년.....혜광고2학년때......................................
1979년 가발을 만들던 YH무역 사장이 회사의 공금을 들고 미국으로 튀었다..
이 공장은 폐업을 할수밖에...
YH무역 여공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대책을 강구해보지만 아무런 성과를 내지못했고
마지막으로 찾아간곳이 야당 신민당사였다.
당시 신민당의 총재는 김영삼..
김영삼은 여공들을 위해 진짜 잘 싸웠다..
3당 합당하기 전의 김영삼.
암튼 이 사건은 야당과 민주화세력의 공동전선을 형성하는계기가 되었고
박정희와 공화당은 김영삼을 국회에서 제명한다.
민주화 요구시위와 김영삼 제명에 대한 반발은 곧 부마항쟁으로 이어졌다.
부마항쟁을 대하는 박정희와 차지철..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쏘라고 발포명령을 내리겠다."
-박정희-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00만~200만 희생시키는 것 쯤 별 문제겠습니까?"
-차지철-
"신민당이 됐건 학생이 됐건,
탱크로 밀어서 캄보디아처럼
2,3백만 죽이면 조용해집니다."
-차지철-
그리고 10월 26일..
박정희와 차지철은 김재규의 총에 맞아 숨진다.
이 사건수사를 총지휘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12월 12일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정권을 장악한다.
................................1980년....혜광고3학년때...................................
독재자 박정희의 죽음과 서울의 봄..
대학생들의 민주화 열망...
그리고 전두환 사퇴와 비상계엄령 해제를 외치던 군중.
서울역에 10만명의 학생이 모였다..
"솔직히 처음 예상보다 너무나 많은 수의 인원이 군집했다.
이 많은 인원 수를 통제할 방법은 사실상 전무하다.
이대로 계속 청와대까지 진군하다간 사분오열되어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볼 지 모른다.
일단 각 학교로 해산 뒤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 다시 진군하자"
당시 서울대 총학생회장이던 심재철(현 새누리당의원) 발언..
"지금 이 상태에서 해산을 명하는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모든게 끝난다.
이 많은 인원이 현재 여기서 복귀한다면신군부는 어떤 보복행위를 할 지 모른다.
결단코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걸 끝내야 한다."
당시 서울대 단과대 학생회장이던 유시민의 주장..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회군....
학생들의 총궐기에 움찔했던 전두환일당은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했고,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학생대표들을 연행했다.
연행된 학생대표들로 인해 시위가 추춤했지만 광주에서만은 시위가 계속되었고,
5월 18일 공수부대가 전남대에서 학생들을 진압하면서
그 처절했던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되었다.
광주를 진압한 전두환은 체육관선거에서 단일후보로 나와 99.9%의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
...............................1981년.....대학1학년때.............................................
전두환이 대통령이되자 학생운동은 더 격화되었고..
영화 '변호인'의 송우석이라는 인물이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
부림사건 소개
부림사건이란 한마디로 말해 실체가 없는 사건이다.
실질적인 조직이었던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다.
단지 각자의 다양한 삶 속에서 민주화를 위해 일하고 있는 도중에
당국에 의해 구속돼 단일사건으로 묶여지는 과정에서
'부림사건'이란 이름이 붙게됐을 뿐이다.
'부림'이란 용어도
최초 1960년대 '동백림사건'
그리고 80년 12월의 '무림사건',
81년 5월의 '학림사건' 등
'림'자 돌림에 맞춰 부산지역이라 해서
당시 공안당국 임의대로 '부'자를 붙여 '부림사건'으로 불렀다고 하니
이 사건의 조작성이 사건 이름 자체에서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신군부 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7월부터
공안당국이 사회과학 독서모임을 하고 있던
학생과 교사, 회사원 등 22명을 영장도 없이 불법 연행해 감금하고
짧게는 20일부터 길게는 63일 동안 각종 고문을 통해
허위자백을 받아 공산주의자로 조작 기소한 사건이 바로 부림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부산지검 공안 책임자로 있던 검사 최병국이 지휘했으며
고영주, 장창호 등의 검사가 함께 참여했고
판사 중 한명으로는
피의자들의 국가보안법 혐의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려 좌천된 것으로 유명한
서석구 판사가 있다.(황우여는 학림사건 배석판사)
변론은 당시
부산지역 유명 인권변호사였던 김광일 변호사를 위시하여 무료 변호인단이 구성되었는데
김광일 변호사는 당시 공안 검사였던 최병국의 협박
(변호할 시에 공범으로 함께 기소하겠다)으로 인해
실제 변호인단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대신 친구이자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이흥록 변호사를 중심으로
변호인단이 꾸려지게 된다.
이때 변호 인력이 부족했던 김광일과 이흥록은
노무현에게 변론을 부탁하게 되는데
당시 참여했던 변호인단은 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 등 총 5인이었다.
이를 통해 노무현이 세무 회계 전문 변호사에서 인권변호사로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
부림사건이 일어났던 81년의 정치상황은
'사생아'적 태생의 5공화국이 자신의 부당한 통치기반을 확보하기 위해
민주화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들어간 시기였다.
81년 3월 대전의 '한울회사건(판사 이회창)1',
8월의 '전국민주학생연맹(전민학련)사건',
충남 금산의 '아람회사건(판사 이인제)',
9월 '전국민주노동연맹(전민노련)사건',
10월 공주의 '금강회사건' 등
전국 각 지역별로 이루어진 민주세력에 대한 탄압은
예외 없이 국가보안법을 적용, 용공으로 몰아붙였다.
이른바 '국보시대'가 시작됨으로써 공안사건이 양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구체적인 '사건'이 일어난 뒤 이를 수사한 것이 아니라,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사건을 만들다 보니
부림사건에는
애초부터 부산지역 각계 각층의 민주화운동세력이 대부분 포함되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부림사건 관련자들은 곧 부산지역 청년운동을 대표하는 사람들로 볼 수 있다.
이상록(33,부산대졸,선반공), 고호석(32,교사), 송세경(36,회사원),
설동일(32,농협근무), 송병곤(30,부산대졸,공원), 노재열(30,부산대4년),
김희욱(39,교사), 이상경(30,부산대1년)씨 등 8명이 9월7일 1차로 구속됐다.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들과 선후배 관계인
김재규(39,상업), 최준영(35,설비사무사), 주정민(30,부산대졸),
이진걸(29,부산대4년), 장상훈(30,부산대졸), 전중근(31,공원),
박욱영(31,부산공전졸), 윤연희(30,교사)씨 등 8명이 10월15일 2차로 구속되고,
도피중이던 이호철(30,부산대졸)씨와 설경혜(29,교사),
정귀순(28,부산대3년)씨 3명이 82년 4월 구속됨으로써
모두 19명이 부림사건으로 구속기소됐다.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용공조작 사건으로 꼽히는 이 사건은
2000년대 이후 사법부에서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아
재심 판결을 받았으나 이후 기각되어
2006년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근거로 다시 재항고했고
2009년 계엄법, 집시법 혐의에 대한 대법원 재심에서 일부 무죄를 선고 받아
부림사건 연루자들은 28년 만에 명예를 회복받을 수 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2013년 3월 부산지법은
'신군부 용공조작 부림사건 혐의 전체(국보법 위반 혐의 포함)'에 대한 재심'을 결정해
재판을 진행해서 무죄 확정 판결을 내렸다..
(두산백과, 위키피디아, 시사상식사전, 부산민주운동사, 한겨레-일요특별기획 : 1988.12.25 외 각종 기사자료 참조)
한여름의 뜻하지 않은 연행
30~60일간의 불법 감금 후의 구속,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후에야
우리 16명의 피의자 가족들은 뚜렷한 이유와 내용을 모른 채
제한된 접견에만 만족할 수 밖에 없었고,
조서를 들먹이며 우리의 가족이 빨갱이짓을 했다는 수사관들의 외침속에
반신반의하며 사실을 알고자 애태우고만 있었다.
드디어 모든것이 공정하게 밝혀지는 공판이 다가왔고
우리 가족들로서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임하게 되었다.
우선 피의자 1인당 4장의 방청권 발부로 방청이 제한되었다.
수사관들이 말하는 빨간줄로 칭칭 묶을 만큼 엄청난 죄인들의 공판이라면
크게 보도되어 많은 사람이 와서 보고 교훈삼아야 할것인데
왜 방청을 제한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심리를 하는 검사들의 태도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법 앞에 공정한 태도로 임해야 할텐데도
언성을 높여 소리를 치고 반말을 하며 눈을 치켜뜨고
공소사실의 부인에 대해 화를 내는 것이었다.
단순히 현실을 올바로 파악하고 인식하기 위해 책을 구입
(대부분은 일반 시중서점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구입)하여
소지하거나 읽은 것을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보고
책을 소지하거나 읽은 것 만으로도 죄가 된다는 것이며
우연한 선후배의 만남이나 졸업축하파티, 망년회
심지어는 이사간 친구 집에 놀러간 것까지도
사회의 불안을 야기시키는 집회로 규정하고
전공분야 외의 공부를 한것과
혼자 책을 읽지 않고 같이 모여 공부한 것 그 자체가
수상하다는 식의 공소사실 또한 기막힌 것이었다.
어떻든 모든 것을 동원하여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부합되도록 억지씀이 역력했고
조사당시 고문한 사실에 대해서는 발설하지 못하도록 했다.
변호사의 반대심리 중 고문사실에 대해 진술할 때는
검사는 눈을 감고 졸고 있었고
인권적 차원에서도 용납할 수 없는 처사들이
저희 가족들의 마음을 어둡게만 했다.
결국 공산주의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현실임을!
그렇지 않고서야
그 무서운 통닭구이와 비명, 자포자기가 왜 필요했겠는가?
또 방청권과 윽박지름, 엄청나고 기막힌 공소사실은 무엇이고?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물을 닦으며 조용히 생각해본다.
( 부림사건 관련 부산양심수인 가족일동 - 호소문 발췌)
부림사건의 주요 인물들
최병국 | 부림사건 주임 검사
이후 김영삼 정부 대검 공안부장 및 중수부장으로 재직하며
한보사태 수사를 지휘하기도 했다.
전주지검장으로 재직하다 99년 대전 법조비리에 연루된 사실이 드러나
사표를 제출하고 울산 남구에서 국회의원 당선 및
한나라당에서 3선을 한 전 국회의원이다.
부림사건에 대해
지금도 당시의 결정에 소신있게 처리했다고 생각한다
"고 회고하기도 했다.
고영주 | 부림사건 수사 검사
삼민투위사건, 민중교육사건, 한총련사건 등
굵직한 공안사건들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현재까지도 부림사건 및 관련 변호인들을 모두 공산주의자라 주장(월간조선 2006년 12월호)하는 등 참여정부 당시 핍박을 받았다며 노무현의 복수라고 연설.(동영상 :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
참여정부 당시 대검찰청 감찰부장, 서울남부지검장을 역임하다
현재 변호사로 재직하며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라는 보수단체의 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서석구 | 부림사건 주임 판사
1차 구속된 이호 등에게 국가보안법 관련 무죄를 선고했다 좌천되었고
최근 TV조선 등의 종편 단골 패널로 참여중
노무현 | 담당 변호인
당시 부산상고라는 출신 덕분에 세무회계쪽으로 부산서 다섯손가락안에 드는 변호사.
부산상고 동창회 회장을 역임할 정도로 기득권층에 속했다.
실제로 부산일보 사장을 지낸 김지태씨의 (주)삼화나,
조선견직 등 부산의 대표 향토기업 상속세 등 1백억원대 이상의 사건을 맡아
승률 90% 이상을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며 이후
송기인 신부의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은 물론 대통령직에까지 오르게 된다.
김광일 | 당시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
유신때부터 부산지역 원조 인권변호사이자 부산 학생운동의 실제 자금줄이었으나
부림사건 당시 최병국 의 공범 협박으로 실제 변호는 맡지 못하고
자신에게 변호사시보 교육을 받은 노무현을 추천하게 된다.
훗날 노무현과 정치입문을 함께 하는 등 협력하지만
노무현이 3당야합의 YS와 결별하게 되면서 둘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이후 김광일은 문민정부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2002년 대선 당시엔 노무현 대통령후보를 비방하는 성명을 내기도 하고 이후 탄핵안 가결을 환영하기도 했다. 2010년 별세.
이흥록 | 당시 부산지역 인권변호사
1978년 창립된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지내고
재정적 도움을 주며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기틀을 만든 인물 중 하나.
부산양협은 79년 '부마민중항쟁'의 배후로 지목되는 등
당시 부산지역 민주화운동의 최대 조직으로 '부림사건'의 표적이었다.
부림사건이 터지자
당시 김광일을 대신해 변호인단(이흥록, 장두경, 박재봉, 정차두, 노무현)의 중심에 섰었다 .
참여정부 대통령 지명 국가인권위원을 지냈고
현재 변호사와 김치건강법 알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부림사건의 피해자들
81년 9월 7일 발표 1차 구속자 8명 (7월4일~8월14일에 걸쳐 불법연행 후 고문)
설동일 (26세, 서울대 농대, 언양농협 근무 - 이후 부산민주항쟁기념관장 역임),
송병곤 (24세, 부산대 법대졸, 공장근무 : 이후 법무법인 '부산' 사무장)
노재열 (24세, 부산대 공대 4년휴학 : 이후 민노총 간부 역임),
고호석 (26세, 부산대 문리대졸, 당시 부산 대동고 영어교사)
이상록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 이후 8년간의 정신병 투병 후 97년 사망)
송세경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 아우성 구성애씨의 남편,
이후 김광일 변호사 사무장으로 활동하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총무이사 역임)
김희욱 (32세, 부산 대연여중 교사)
이상경 (부산대 문리대 1년퇴학)
81년 10월 15일 발표 2차 구속자 8명 (9월11일~30일에 걸쳐 불법 연행 후 고문)
장상훈 (24세, 부산대 약대졸 )
김재규 (33세, 부산대 상대졸, 당시 탁구장 운영 : 현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이사장 역임)
최준영 (29세, 서울대 공대졸, 설비사무사)
주정민 (24세, 부산대 법대졸)
이진걸 (23세, 부산대)
전중근 (25세, 공장근무)
박욱영 (25세, 부산공전졸)
윤연희 (24세, 교사)
82년 4월 이후 3차 구속자 3명 (도피중 체포)
이호철 (24세, 부산대졸 : 이후 배재여행사 경영, 전 참여정부 청와대 민정수석),
설경혜 (23세, 교사 : 1차 구속된 설동일의 동생, 이후 계속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정귀순 (22세, 부산대졸 : 현 '이주민과 함께' 대표로 이주노동자 인권운동가로 활동)
대학시위 중 구속자 4명
김진모 (부산대 4년), 최병철 (부산대 4년), 유장현 (부산대 4년),
김영 (23, 부산대, 당시 탈영군인 - 소설집 '완전한 만남'의 김하기 작가)
( 부산지방검찰청 공소장 1981.10.21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구속자 석방요구 청원서 ,
각종 신문기사 참조)
부림사건 피해자 증언
연행된 후 사방이 새빨간 칠이 된 밀폐된 적은 방에 격리되어
한달 넘어 수사를 받고는 9월7일에 비로소 구속영장이 떨어졌습니다.
그 조사받는 과정을 말씀드리면
처음 구속된 후 곧 대여섯명의 수사관이 무조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때리며
본인의 사상은 공산주의라는 것을 억지 시인케 하고는
그 포지경위, 행동강령, 당면목표 등을 쓰라고 강요하였습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필진술)
대공분실에 끌려가 통닭구이, 몽둥이로 맞는 고문을 당했다.
당시 최병국 검사가 대공분실로 찾아와 수사를 지휘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검사가 관련자들에게 3년에서 10년의 중형을 구형한 것으로 보면
사건 조작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당시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면 최소한 반성과 용서를 구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부산 민주운동사)
숙직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어요.
갑자기 몇 명이 나타나 눈을 가리고 어디론가 데려갔습니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부산 중구 중앙동 부두길 근처에 '내외문화사' 간판을 달고 있던
부산경찰청 대공분실이었습니다.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라는 한 마디에
"역시 두목이라 간이 크군"이란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5~6명에 둘러싸여 정신없이 맞고 구토했지만 '신고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검찰에 송치되기까지 만 36일간
"그만 죽여 달라"고 할 만큼 끔찍한 고문과 폭행·협박이 반복됐습니다.
고문 과정에서 엄지 발톱이 빠지기도 했지만 저는 정도가 심한 편이 아니었어요.
팔과 다리 사이에 곡괭이를 넣어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 무차별 구타하는
일명 '통닭구이'고문을 당한 사람도 있습니다.
칠성판에 누운 채 전기고문을 당하기도 했죠.
가죽장갑을 끼고 들어와 가슴을 툭툭 치며
'이렇게 50대쯤 때리면 폐가 삭아서 몇 달 안에 죽는다'고 협박하더니
'근처 바다에 돌 매달아 던지면 아무도 모른다'는 말도 했어요.
이런 사람이 어떤 반성이나 사과도 없이 시의원 후보로 출마하다니...
( 국제신문 기사 인터뷰 )
며칠간 거꾸로 메달리고 몽둥이로 맞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악몽같은 시간이 흐르자
저로서는 도저히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에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결국 공산주의자로 몰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리자고 몇번 결심했으나
텅 빈 방안에서 한발짝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만큼 멍들고 터진 육신으로는
죽을 힘마저 없어 난타하는 수사관들에게 빨리 죽여달라고 눈물로 호소했으나
그 댓가는 모진 고문과 싸늘한 냉소,
그리고 '두고두고 골병을 들여 죽이겠다'는 소름끼치는 협박 밖에 없었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필진술 )
노무현 변호사님은 우리와 재판을 시작하고부터는 우리와 한 편이었어요.
거의 공범 수준이 돼가지고 변론을 한 거지요.
그러다보면 우리는 비교적 차분한데
노변호사님이 검사의 공소사실, 질문 이런 거에 대하여,
또는 판사의 언급에 대하여
‘어떻게 그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이러면서 감정적으로 격앙이 되면서 막 큰 소리를 내기도 하고
그래서 판사한테 제지를 당하기도 하고 그랬거든요.
정말 한 번씩은 막 이렇게 열변을 토하다가 자기감정을 삭이지 못해서
고개를 푸욱 숙이고 잠시 말을 이어가지 못하는 그런 장면들도 있었어요.
( 노무현 사료관 - 고호석씨 진술 [ 동영상 보기 ])
81년 9월 21일 나를 연행한 수사관은 내가 취조실에 입실하자마자
먼저 이유없는 구타와 가공할 위협을 행사한 후
그날 계엄법, 집시법, 범인도피 등에 관한 조서를 받아내었습니다.
그는 이미 정해진 조사 및 각색의 계획에 따라
나의 말은 아랑곳 없이 소위 '통닭구이"라는 고문으로
나의 정신과 육체에 고통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떠한 고통에도 견딜 수 있으리라는 나의 의지와는 달리
그들의 의사에 무조건 따를 것을 나의 육체적 자기 방위 본능은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필진술 )
부림사건을 통해서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게 되는데요.
쭉 저희들 이야기를 들어보고는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보건대 여러분의 그간의 활동이나 운동은
민주화 운동이고 구국운동이고 정당하다고 봐진다.
국가보안법, 반공법으로 사상범으로 조작하려고 했던 모양인데
단호하게 싸우고 또 우리 변호사들도 열심히 여러분의 싸움을 도와서 지원하겠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중략)..
(고문사실을 듣고) 비분강개를 하고 그랬죠.
그래서 우리 재판에서도 법정에서도 아주 변론하면서도 그러고
신문하면서도 하여튼 검찰에 대한 공격도 하고 막 그랬습니다.
(재판 결과에 대해서) 아. 뭐 분노하셨죠.
참 전국적으로 그런 일이 생겼다고 아까 말씀드렸고
하여튼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 적개심 이런게 그때 싹텄을 겁니다.
( 노무현 사료관 - 김재규씨 인터뷰 )
법정에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봤습니다.
제가 24살인가 그랬고 그 당시 저보다 12살이 많으신 띠동갑입니다.
그래서 서른여섯 변호사였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주 젊다' 라는 느낌을 받았었고요.
그리고 아주 소탈한 변호사...
법정에서 제가 받았던 느낌은 두번째가 그랬고 세번째는 당시에는 말이 좀 어눌하셨습니다.
그래가지고 말을 저렇게 어눌하게 하셔서 어떻게 변호사를 하시지 (생각했습니다).
( '참여정부 5년의 기록' 제4부 내가 만난 노무현 )
노무현 변호사는 부산에서 다섯 손가락 안의 변호사로 잘 살았다.
그러나 나에게 조차 반말하지 않았다.
늘 호철씨라고 불렀고, 겸손하고 샤프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사람이 여공들을 보곤 차를 두고 버스 타고 다녔고,
문변호사와 일하면서 부터는 일반사건이 아닌 노동사건만 맡겠다고 했다.
나는 부림사건으로 10.26 이후에도 긴급조치로 계속 수감되었다.
23명이 공범이라면서 얼굴도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체크무늬 양복을 입고 변론을 했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변호를 맡아준 다섯분 변호사에게 인사할 때
노무현 변호사에게 갔더니 밥 먹으러 가자고 했다.
꼬리곰탕을 사주더니 목욕을 가자고 했다.
같이 목욕하고, 술 먹고, 하도 잘 해주기에 "우리에게 왜 이럽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는 "세상에는 맛있는 것 좋은 것 많다. 취직도 하고, 나라 걱정만 하지 말라"고 하더라,
독특하다는 느낌이었다.
금서(금지서적)가 나오면 노무현 변호사에게 가져다 주었다.
고갈비(고등어구이)를 먹으면서 토론했다.
노무현 변호사는 우리를 변론하면서
학생들이 수년 동안 읽었던 책을 다 읽었더라(노천재),
토론, 대화가 무르익어 갔다. ( 노무현의 숨결 이호철 강연 발췌 )
송병곤 (당시 24세, 부산대 법대졸, 공장근무)
태어나서부터 이제까지 맞아왔던 것을 다 합해도 모자랄 만큼 맞았고
심지어는 몸뚱이에 손발이 묶인채 다라매여져 난타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항상 심문조서의 속에는 사회주의 운운이 들어가지 않으면 몽둥이와 경찰봉이 날아왔고
서서이 약해져갔던 저의 약한 의지는
평소 저의 생각에 사회주의 운운의 붉은색을 입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첫째 육체적 고문은 없었으니까요....
몽둥이, 몽둥이, 몽둥이, 협박, 협박, 협박 속에서 60여일을 구속영장 없이 갇혀지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요구하는 어떠한 것이라도,
심지어는 북한 김일성과의 연합정부 수립 운운이라는 것까지도
몽둥이가 두려워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얘기들을 모두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필진술)
그때는 김광일 변호사님이나 이흥록 변호사님이 훨씬 더 유명했었습니다.
그 시국사건이나 이런걸로... 그래서 그 두분 변호사님이 오시지 않을까 했는데
노변호사님이 오신게 좀 상당히 의외였고요.
그 다음에는 변호사님이 우리들 생각이나 이런걸 이야기를 하면
좀 쉽게 수긍한다고나 할까 그런 인상을 받았죠. ( 송병곤 인터뷰 )
이상록 (당시 27세, 부산대 법대졸, 선반공)
더 이상의 말이 없이 다시 눈에 반창고를 붙이우고 손발을 묶인 채 몽둥이질과 발길질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그날은 밤까지 몽둥이 질이 계속되었습니다. 별반 물어보는 것도 없었습니다. 한시간 간격으로 매질이었습니다. 한번 매질이 시작되면 이제 곧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의식을 잃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 다음날도 똑같은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부터 정부장이라는 담당수사관이 배치가 되고 수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수사방향과 목적은 이미 이틀간의 매질 속에서 짐작이 갔습니다. 이틀동안 거듭해서 묻는 말이라곤 "너의 사상이 공산주의가 아니냐?", "너희들의 목적이 사회주의 국가건설이 아니냐?"는 두가지가 대강이었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필진술 )
송세경 (당시 30세, 서울대 농대졸, 회사원)
81년 7월 31일 오전 9시경 직장에 출근하던 중
부산시경 앞 버스정류소에서 정체불명의 괴한 3명에게 연행되어
시내 중앙동 모처에 있는 세평 남짓한 독방에 연행되었습니다....(중략)....
곡괭이자루, 경찰봉 등을 가져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유사하게 폭행을 가했으며,
이에 항의하자 반항한다며 더욱 심하게 구타하여 실신할 정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야만적 고문행위를 8월 중순까지 거의 매일에 걸쳐서
사회주의 국가건설을 기도했다는 것을 말하도록 강요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피고인의 온몸은 검붉게 멍이 들고
심한 고통으로 앉지도 눕지도 못할 정도였으며,
손을 움직여 글을 쓰는데도 심한 고통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옆방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고호석, 이상경, 설동일 등의 처절한 비병소리는
아직도 귀에 생생하며 그 공포는 이루 필설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필진술 )
김희욱 (당시 32세, 대연여중 교사)
4명의 사람이 몽둥이 2개와 끈을 갖고 들어오더니
이규홍이란 수사관의 지휘하에 무조건 욕을 하며 면상을 갈기더니
벽에 기대게 한 후 몽둥이로 허리에서 종아리 부분을 개패듯 난타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바닥에 엎드리게 한 후 발바닥, 발가락을 세운 후
손등, 손바닥을 수없이 난타하고는 "통닭구이"하고 외치더니
끈으로 손, 발을 묶고는 손과 종아리 사이로 굵고 긴 몽둥이를 가로질러 넣고는
매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는 손, 발, 온몸을 때리고 문지르고 나더니
"너의 사상이 무엇이냐?" 하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못하니까 또 때리며 몇번 욕을 하면서 되풀이 해서 물었습니다.
그래도 대답 못하니까 "사회주의야? 공산주의야?" 하면서 힌트를 주더군요.
너무 엄청난 얘기라서 정신 없이 있으니까
아직 멀었다고 하면서 계속 더 심하게 고문을 했습니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자필진술 )
부림사건에 대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
노무현의 '운명이다', '돈 잘 버는 변호사와 부림사건' 발췌
1981년 9월 전두환 정권이 소위 '부림사건'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부림사건은 내가 재야운동에 뛰어들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리고 내 삶에서 가장 큰 전환점이기도 했다.
그 일 이전에 부산에서는 79년 부마항쟁이 있었다.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가 영장도 없이 구금되고
수많은 학생들이 붙잡혀 고문당하고 감옥으로 끌려갔다.
그런데 당시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변호사가 그런 일을 당해도
그저 소문으로만 들어 넘겼을 뿐 관심조차 가지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은 집권 첫 해인 80년에 이미 대부분의 저항 세력을 제거했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학생운동권을 최종적으로 정리했는데
그것이 바로 '부림사건'이었다. 그
것은 비슷한 시기 서울에서 일어난 무림, 학림사건과 마찬가지로
저항의 기미가 있는 자들에 대한 일종의 예비검속이었다.
'부림사건'엔 사실 '사건'이 없다.
무슨 저항의 움직임이 구체적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억지로 엮어 낸 조작사건이었다.
79년에 이흥록 변호사가 양서조합을 만들었는데
그 회원들이 대부분 잡혀들어갔던 것이 전부다.
공안당국은 반국가단체를 만들어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혐의로
이호철, 장상훈, 송병곤, 김재규, 노재열, 이상록, 고호석, 송세경, 설동일 등
부산지역 지식인과 교사, 대학생 22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이들이 실제로 한 일은
사회과학 책을 읽는 독서 모임을 하면서 자기들끼리 정부를 비판한 것이 전부였다.
개업식 축하 모임, 돌잔치, 송년회를 한 것이 범죄 사실로 둔갑했고,
계엄법과 국가보안법, 집시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었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 사건에 손대게 되었다.
당시 부산에서 지속적으로 인권운동을 한 변호사는 이홍록, 김광일 두 분밖에 없었다.
그런데 검사가 김광일 변호사까지도 사건에 엮어 넣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변호를 맡을 수가 없었다.
손이 모자란다는 하소연을 듣고만 있을 수 없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변호를 맡게 된것이다.
그때만 해도 난 사건의 내용이나 성격을 파악하기는 커녕
시국에 대한 최소한의 인식도 가지고 있질 못했다.
그럼에도 선뜻 변론에 나선 것은
무엇이든 두려워하지 않고 피하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막상 사건의 내용을 파악해보니 이건 너무나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책들,
이를테면 '전환시대의 논리'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우상과 이성'같은 책을 읽었다는 게 죄가 되었다.
돌 잔치에 모인 몇 사람이 정부를 비판하는 몇 마디가 정권 전복의 기도로 둔갑했다.
탁구장에서 탁구 치며 한 얘기,
여름철 계곡에서 놀며 한 얘기,
두 사람이 다방에서 한 얘기까지 모두 불법 집회요 계엄포고령 위반이 됐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구치소로 피고인 접견을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상상치도 못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얼마나 고문을 받았는지 초췌한 몰골을 한 청년들은,
변호사인 내가 정보기관의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그들은 모두 영장 없이 체포되었고
짧게는 20일, 길게는 두달 넘게 불법 구금되어 있으면서
몽둥이찜질과 물고문을 당했다.
그들이 그렇게 학대 받는 동안 가족들은 딸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얼마나 맞았는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있었다.
한 젊은이는 62일 동안 불법구금되어 있었다.
그 어머니는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최루탄이 얼굴에 박힌 시신으로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던 김주열을 생각하면서
아들의 시신이라도 찾겠다고 영도다리 아래부터 동래산성 풀밭까지,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헤매고 다녔다.
변사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아들이 아닌지 가슴을 졸이며 뛰어갔다.
그 청년의 이름은 송병곤이었다.
집으로 연락조차 못했던 그 학생을 내가 처음 접견했을 때
그는 경찰의 치료를 받아 고문으로 인한 상처 흔적을 거의 지운 후라고 했다.
그런데도 온 몸과 다리에는 시퍼런 멍자국이 남아있었다.
얼마나 고문을 당하고 충격을 받았는지
처음엔 변호사인 나조차 믿으려 하질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한창 피어나야 할 젊은 나이에 그 처참한 모습이란... 눈 앞이 캄캄해졌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상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그 모습에 기가 꽉 막혔다.
머릿속이 마구 헝클어졌다.
사실과 법리를 따지기도 전에 걷잡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이것만은 세상에 꼭 폭로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먹고 변론을 시작했다.
통닭구이 등의 고문과 무수한 매질,
접견은 커녕 집으로 연락 조차 없었던 일,
아들을 찾아 나선 그 어머니의 처참했던 심경 등을 낱낱이 적어 법정에서 따져 물었다.
방청석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입장이 곤란해진 판사는 벌레 씹은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했고
검사는 얼굴이 빨개져 법정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한편으론 겁도 났지만 나 또한 워낙 흥분되어 있었기 때문에
앞 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변론을 끝내고 나올 때까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음 날 검사가 나를 좀 보자고 해서 갔더니
고문당한 그 학생을 자기 방에 불러다 놓고 있었다.
검사가 하는 말이 "어제 당신이 이학생의 발톱이 빠졌다고 했지?"
"야, 너 양말 벗어봐."
그 학생이 양말을 벗자 발톱이 새카맣게 죽어 반쯤 떠 있는데
금새라도 빠질 것 처럼 보였다.
검사가 하는 말,
"어디가 빠졌어? 실체적으로 진실을 밝히는데 협조해야 할 변호사가
법정에서 거짓말을 해! 이래도 되겠소?"
워낙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법정에서 발톱이 빠졌다고 얘기했는지
죽어있다고 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발톱이 빠진 것과 죽어있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
중요한 건 그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했다는 사실인데.
내가 그렇게 되따져 묻자 검사는 협박조로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전두환 장군이 대통령이 된 이후 어떻게 권력을 유지해 나가는지 알기나 하시오?
지금 부산에서 변호사 한두 명이 죽었다고 해서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 될 줄 아시오?"
나는 오기가 나서 법정에서 검사와 삿대질을 해 가며 싸웠다.
그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부장검사는 후일 국회의원이 되었다.
검사의 그 협박은 오히려 나의 투지에 불을 붙여 놓았다.
그 일 이후 나는 감정적으로 굉장히 격앙된 상태에서 그 일을 진행했다.
대단히 정열적으로 그 사건에 매달렸다.
법정에서도 사사건건 싸웠다.
검사가 조금이라도 피고인을 몰아붙이기라도 하면 즉시 항의를 했고
검사와 삿대질을 해 가며 팽팽하게 맞섰다.
내가 변론했던 청년들은 그 모진 고통을 받고서도 형형한 눈빛을 잃지 않았다.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학교 성적이 우수하고 부모님에게 효성이 지극한 청년들이었다.
변호사인 내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재판장은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5년, 7년씩 마구잡이 유죄 선고를 내렸다.
"그놈들 말하는 거 좀 보시오. 완전히 빨갱이들 아닙디까."
판사실에서 내게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었으니,
애초에 공정한 재판은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후 시국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나는 대단히 공격적인 변론 태도를 갖게 되었다.
덕분에 부산에서 아주 위험한 인물로 찍히고
87년 2월 박종철군 추모 시위 때
검찰이 김광일 변호사도 제쳐놓고 내게만 영장을 청구한 걸 보면
당시 검찰이 나를 얼마나 눈 속의 가시로 생각했을지 짐작이 된다.
'부림사건'은 내게 있어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때까지 나는 독재와 고문에 대해서만 분개해 왔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부림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학생들은 나에게
독점자본에 의한 노동착취와 빈부 격차의 모순 같은 문제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읽다 붙잡혀 온 그 책들을 읽길 권했다.
바쁜데다 경황이 없어 책이 잘 읽히질 않았다.
나 또한 짧은 식견으로 토론을 하며 오히려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하기도 했다.
학생들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땐 잘 이해도 못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사에 관해서도 차츰 눈을뜨게 되었다.
훗날 그들이 석방되어 나올 때쯤에는 나도 꽤 많은 책을 읽고 있었으나,
그보다는 그들의 순수한 열정과 성실함이 나를 운동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그때 만난 사람들 중에 이호철이란 젊은 친구가 있었다.
그는 동일한 사건으로 좀 뒤에 체포됐는데
부산지법 서석구 판사의 소신에 의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결국 서석구 판사는 진주로 좌천된 후 사표를 냈고
지금은 대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물론 이호철 그 친구도 검찰의 항고로 끝내 유죄 판결을 받았다.
부림사건 당시 행해졌던 고문들
01 | 수도공사 |
속칭 '수도공사'라고 불리던 물고문은 부림사건은 물론 80년대 시국사건의 피의자들이 대부분 당했던 고문 방법. 칠성판 위에 누운채로 얼굴에 수건을 씌운채 겨자를 섞은 물을 주전자로 끝도 없이 붓거나 욕조에 물을 받아 담그는 방법이 주를 이뤘다. 이후 87년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물고문으로 사망하기에 이른다.
02 | 통닭구이 |
부림사건은 물론 80년대 시국사건의 피의자들이 대부분 당했던 고문 방법.
끈으로 손, 발을 묶고 손과 종아리 사이로 굵고 긴 몽둥이를 가로질러 넣고는 책상사이에 걸쳐놓고 난타하는 고문.
03 | 전기고문 |
전기고문은 고문을 받던 칠성판 위에 누운채 그대로 시행됐다. 당시 피의자였던 고호석씨 등은 전기고문으로 인해 발톱이 빠지는 고통을 받기도 했다.
04 | 경찰봉 난타 |
당시 피의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감금된 상태에서 몇날 몇일이고 반복적으로 경찰봉, 곡괭이자루 등으로 마구잡이 난타당하였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부림사건
1982년 3월 : 부림사건 관련 1심 재판 최고 징역 5~7년 선고
1982년 6월 26일 : 부림사건 항소심 16명(1~2차 구속자) 최고 징역 10년 구형
부산지법 제1형사항소부(재판장 안상돈 부장판사)는 26일 부림사건 1차 기소자인 이상록 피고인(26,부산)에게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하는 등 16명의 피고인(14명 구속, 2명 불구속)에게 최고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에서 최하 징역 1년, 자격정지 1년형을 각각 선고했다.
1982년 7월 6일 : 부림사건 1심 3명(3차 구속자) 최고 징역 1년 구형
부산지법 제3형사단독 서석구 판사는 국가보안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계엄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호철 피고인에 대해 "정부시책을 비판했다고 하여 이를 확대 해석, 국가보안법으로 다룰 수는 없다"고 판시, 계엄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죄 부분만 유죄로 적용 징역 1년을 선고했다. (경향신문 : 1982.07.06)
1982년 10월 27일 : 부림사건 상고 기각, 대법원 16명(1~2차 구속자) 원심 확정
대법원 형사부는 27일 부림사건 관련자 16명에 대한 상고심 선고공판에서 피고인과 검찰측의 상고를 모두 기각했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은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죄 등이 적용돼 최고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에서 최하 집행유예 2년까지 선고된 원심형량이 그대로 확정됐다. ( 경향신문 : 1982.10.27 )
1983년 8월 15일 : 광복절특사로 관련자 석방
정부는 광복절 제 38주년을 즈음하여 형확정자 1천9백44명에게 특별사면, 감형, 복권, 형집행정지, 특별가석방 및 특별가퇴원의 은전을 베풀기로 결정했다고 11일 발표했다. 이 광복절특사를 통해 송세경을 비롯해 송병근, 설동일, 노재열, 김희욱, 최준영, 주정민 등 총 7명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경향신문 : 1983.08.11)
1983년 12월 26일 : 성탄절특사로 형 집행정지 전원 석방
마지막까지 남아 옥고를 치르던 이호철을 비롯해 김재규, 이상록, 고호석은 1983년 12월 대특사때 형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이로써 부림사건 1~3차 구속자 전원이 석방되었다.
( 성탄절 석방 복권자 명단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88년 12월 21일 : 부림사건 4차 구속자 '김영' 마지막으로 석방
지난 21일 이른바 '부림사건'과 간접적으로 관련된 김영(당시, 부산대 재학, 징역10년)씨가 7년 2개월 만에 석방됨으로써 외견상 부림사건은 마무리된 것으로 보인다. ( 한겨레 : 1988.12.25 )
2003년 9월 18일 : 부산지방법원 '부림사건' 재심 결정
부산지법 형사1부(재판장 권오봉 부장판사)는 18일 80년대초 군사정권의 대표적 '용공조작' 사건의 하나인 '부림사건'으로 유죄 확정판결을 받은 정아무개(42·여)씨 등 2명이 1999년에 낸 국가보안법 위반죄 등에 대한 재심 청구소송을 받아들여 재심하기로 결정했다. ( 한겨레 : 2003.09.18 )
2009년 8월 14일 : 계엄법 및 집시법 위반에 대한 재심, 일부 무죄 선고
부산지법 형사항소3부(홍성주 부장판사)는 14일 국가보안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계엄법 등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각각 징역 3~7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김재규(61.전 국립공원관리공단 이사장) 씨 등 재심청구인 7명에 대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또 법원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관련 법 개정에 따라 면소 판결했다. 다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대법원이 파기하지 않아 따로 결정할 수 없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해 각각 집행유예 2년~징역 1년6개월과 함께 자격정지 8개월~1년6개월을 선고했다. ( 연합뉴스 2009.08.14 )
2011년 4월 5일 : 부림사건 당시 고문, 폭행, 사건조작에 가담한 경찰관 고소
5.18 민주항쟁 이후 신군부에 의한 용공(容共) 조작사건 가운데 하나인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당시 고문, 폭행 등 사건조작에 가담한 경찰관들을 사건발생 30년만에 고소해 결과가 주목된다.
( 연합뉴스 2011.04,05 )
2013년 3월 6일 : 부산지법 '신군부 용공조작 부림사건 혐의 전체'에 대한 재심 결정
부산지방법원 제2형사부(부장판사 한영표)는 고호석씨(57) 등 5명이 제기한 부림사건 재심 청구에 대해 "재심 대상 판결 중 피고인들에 대한 유죄부분에 관해 재심을 개시한다"고 밝혔다.
부림사건에서 문제되었던 불온서적들
* 당시 피의자들의 진술과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부림사건 당시 그들이 읽었던 서적들을 정리했습니다.
'전환시대의 논리' / 저자 : 리영희 (1974)
현대사와 국제정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에 전환의 계기를 마련해 준 고전적 사회계몽서로서, 1977년에 출판된 저자의 또다른 저서 《8억인과의 대화》와 함께 한때 금서목록에 올랐으나, 유신체제시절 지식인과 대학생들에게는 필독서로 꼽혔다. 1999년 서평전문지 《출판저널》에 의해 '20세기 한국고전'으로 선정되었다. ( 두산백과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저자 : 조세희
주 인공 난쟁이네 가족을 통해 1970년대 도시 빈민층의 삶을 통해 좌절과 애환을 다룬 조세희의 연작 소설이다. 줄여서 《난쏘공》이라 칭하기도 한다. 1975년에 발표한 작품 〈칼날〉을 시작으로 1978년 〈에필로그〉까지 12편으로 완성되었다. 1978년 6월 5일에 책으로 출간된 이 소설은 1979년 제 1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다. 극단 세실에 의해 1979년에 채윤일의 연출로 처음 무대에 올려졌고, 1981년에는 이원세 감독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위키백과 )
'우상과 이성' / 저자 : 리영희 (1977)
리영희저작집 제2권 <우상과 이성>. 현대 중국에 관한 몇 편의 논문, 종합잡지의 요청에 따라 그때그때 발표했던 논문, 평론, 에세이 및 수필에 새롭게 몇 편을 보태어 엮은 책이다. <전환시대의 논리>의 속편을 이룬다. 행동하는 지식인 리영희의 저작들을 한자리에 정리한 책.
( 인터넷교보문고 )
'역사란 무엇인가' / 저자 : 에드워드 카
영국의 대표적 역사가 E. H. 카의 역사 입문서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라는 근본 문제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역사 철학서로, E. H. 카가 1961년 1월부터 3월까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연속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E. H. 카의 오랜 역사적 연구 및 서술의 경험을 통해 얻은 지혜의 결정을 담고 있다. 역사가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 모두가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역사 인식의 길잡이가 되어준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저자 : 슘페터
조지프 슘페터의 가장 유명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본주의, 사회주의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창조적 파괴 개념을 서술하였다. 초판은 1942년에 발행되었으며, 2판은 2차대전 이후인 1947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귀결'을 덧붙여 출간되었고, 2년 후에 '전후 전개에의 주석'을 덧붙인 제3판이 발행되었다. 이 책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경제학계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과 달리 수학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으며, 정태적 모형분석이 아닌, 역동적인 자본주의의 모습을 그려냈다. ( 위키백과 )
'경제사관의 제문제' / 저자 : 셀리그만 (1979) 사회발전의 가장 기본적인 동인은 무엇인가, 진보의 조건이 되는 인간의 사고와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는 근본요인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들에 관해 역사적 유물론에 입각하여 접근한 책으로서, 경제사관을 이해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유용한 입문서. |
'제3세계의 이해' / 저자 : 사무엘 팔머
'민족경제론' / 저자 : 박현채 (1978)
우리의 경제현실과 우리 민족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에 대한 열정적 참여를 주장하는 이 비평속에는, 민족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기 위한 경제의 논리와 자립적 민족경제에 대한 전망이 논리적으로 펼쳐진다.
'한국경제의 실상과 허상' / 저자 : 유인호 (1978)
비판경제학의 골자들을 추려담은 책. 71년부터 73년까지 '창작과 비평', '문학과 지성' 등에 실렸던 경제평론들을 책으로 묶었다.
'경제성장의 허와 실'등 이 책에 실린 다섯편의 글들은 책의 제목이 정확히 지시하듯 10년간 성장경제의 뒷면, 그 만만치 않은 반대급부에 주목했다.
'제3세계와 종속이론' / 저자 : 염홍철 (1980)
'종속이론'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A.G.프랑크'를 비롯해 'I.월러스타인', '샤미르아민'등 종속이론의 주도적 이론가들의 논문을 실은 책.
종속이론은 심각한 대미무역적자, 막대한 대미 외채, 저개발경제의 악순환을 겪고 있던 40~50년대 남미를 해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64년 유엔 남미경제위원회(ECLA)의 보고서는 종속이론의 태동에 중요한 문건이 되었다.
'해방 전후사의 인식' / 저자 : 송건호, 백기완 외 다수 (1979)
첫 권이 1979년 10월에 출간됐으며, 이후 10년에 걸쳐 전6권으로 완결됐다. 지금까지 모두 50여만부가 판매되었을 만큼 '명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한국근현대사 분야 논문을 쓸 때 자주 참고서적으로 활용했던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발간 겨우 11일만인 79년 10.26 사건으로 판금되었다 1980년 '서울의 봄'때 해금되었다. 하지만 그해 5.17 군사 쿠데타 이후 저자들이 대거 구속되거나 조사받았으며 대학으로부터 쫓겨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었다. 하지만 판금에도 불구하고 80년대 군부독재정권시기 큰 인기를 얻었다. ( 엔하위키 )
부림사건 수사 검사 고영주 변호사 최근 인터뷰 (2013.12.13)
New Daily |
"영화 [변호인]의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사건" "공산주의 세상 되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겁니다" 고영주 변호사 "부림사건은 절대 용공조작사건 아니다!" "그들은 절대 허위자백한 게 아닙니다. 공산주의 사회가 도래할 거라고 말했어요 |
부림사건과 영화 '변호인'에 대해 비판적 내용을 다루는 글들에는
주요 증거자료로 당시 검사 '고영주 변호사'의 증언이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장 최근까지 부림사건 등의 용공조작 사건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산주의자들'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고영주 변호사는 월간조선 2006년 12월호에 '공안검찰의 대부'로 소개되며
인터뷰를 하는데 당시
"부림사건 관련자들은 명백한 공산주의 지지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조사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는
'검사가 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지 못하느냐?
당신은 역사의 발전법칙도 모르느냐?'면서
'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당신은 심판을 받게 될것이다'라고 하더군요"
라고 발언했습니다.
지금껏 알려진 바로는
당시 부림사건 피의자들이 엄청난 고문을 받으며
읽지 않은 책도 읽게 만들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생각하게 만들며,
말하지 않은 것도 말하게 만들어 허위 진술을 하게 했고
그 허위 진술을 근거로 법정에서 유죄를 이끌어 내는데 성공한 사건이
부림사건인데
왜 저토록 중요한 진술이 공소장에 포함되지 않았느냐 하는게 궁금합니다.
실제 저런 진술이 존재했다면
왜 당시 공안검찰은 피의자 진술내용으로 공소장에 추가하지 않았을까요?
위 내용과는 별도로 '애국시민사회진영 신년하례 (2013.01.04)'에서 보면
"부림사건 당시 변호사가 문재인이었다.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다.
변호사가 자신이 변호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몰랐을 수가 없으므로
문재인도 공산주의자고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면 대한민국이 적화되었을 것이다"
등의 발언을 하는데
결정적으로 문재인은 당시 부림사건 변호인 명단에 포함되지도 법정에 나선 적도 없습니다.
고영주는 이후에도
문재인 전 대통령 후보가 부림사건의 변호인이었다고 발언을 합니다.
당시 공소장에도 없던 피의자 진술내용이
15년이나 지나서 생각이 났을리도 없고
부림사건 담당 검사였던 사람이 당시 변호인이 누구였는지도 모르는 상태라면
그의 최근 진술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지 의심이 가는게 사실입니다.
고영주의 수차례 발언에 대해
당시 부림사건 피의자였던 고호석씨의 최근 발언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디어오늘 - 영화 '변호인' 배경 부림사건까지 '난도질' : 2013.11.20)
"대공분실에서
구속영장 청구해 유치장으로 넘어오면서
다른 소리하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협박해 고도로 위축된 상태였고
유치장에서 밤마다 악몽을 꿨다.
그런 정신 상태에서 검사를 위협하는 말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경찰 조서와 검찰 조서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다.
고영주 위원장의 주장은 검찰에 유리한 진술인데,
그럼 진술을 적은 조서를 공개하면 되는 일 아니냐"
"부림사건은 81년도에 일어났고
문재인 의원은 82년에 막 부산지역 변호사로 오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과 일을 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우리 사건의 변호인 명단에 문재인 의원은 없었고,
단 한번도 법정에 나온 적이 없는데
이를 알고 있는 고영주 위원장의 주장은 완전한 왜곡, 날조"
마지막으로 송병곤씨의 회고문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시사인 2013.12.09) 중
일부를 소개하며 끝맺음합니다.
"나와 당신이 겪었던 부림사건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니 말을 바꾸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민주화 유공자로까지 인정받았던 우리를
용공주의자라고 매도하며 부림사건이 조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억울함이 다시 차오를 무렵
당신의 모습을 담은 영화가 개봉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영화가 우리의 억울함을 잘 대변해줄 것으로 믿습니다.
당신의 그림자가 깁니다.
당신은 우리의 영원한 변호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