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 겨울밤 선율
최 화 웅
어느새 시월이 가고 십일월 중순이다. 십일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과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가 영혼을 울리는 계절이다. 라틴어 경구(驚句) ‘죽음을 생각하라’,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은 항상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준비하라는 깨우침이리라. 날씨는 겨울이 다가와 춥다. 지난 9일 밤 금정문화회관에서는 아트뱅크코레아가 마련한 피아니스트 박정희 교수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연주회 여섯 번째 연주회와 13일 밤 부산문화회관에서는 부산문화 초청으로 세계를 품은 대한민국 1세대 피아니스트 한동일 교수의 초청콘서트 ‘귀향’이, 이튿날 수능 한파가 덮친 날 같은 장소에서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은 마에스트로 장한나와 피아니스트 임동혁이 만났다.
초 겨울밤 연주회는 하나같이 내가 생각하고 기대한 이상의 선율로 가을밤을 수놓았다. 2년 전 여름 베토벤 소나타 전곡 연주회의 대장정에 나선 박정희 교수는 올가을 여섯 번째 연주회로 베토벤의 초기작품 1, 2, 3, 7번을 자신감 넘치는 터치로 열정을 불태운 연주였다. 피아니스트 박정희는 선화예술학교, 선화여고, 서울 음대, 미국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석사학위와, 보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일찍이 부산MBC 음악콩쿠르에서 최연소 1위로 입상하고 한국쇼팽 피아노콩쿠르 1위를 비롯한 국내 콩쿠르와 더불어 미국과 유럽의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하고 특별상을 두루 수상했다. 평소 베토벤에 깊이 몰입한 스승을 두고 제자들은 ‘박토벤’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평소 “피아노가 나의 숨결, 나의 언어”라고 말해온 한동일 교수는 13일 저녁. 부산문화회관에서 ‘귀향’ 초청연주회를 통해 스토리텔링으로 자신의 어린 날의 애환을 낱낱이 건반 위에 풀어놓았다. 그는 어린 날 6·25 피난시절에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13살 때 고국을 떠나 65년 동안 미국에서 나그네로 떠돌다 희수를 넘기고서야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긴 이야기를 전했다. 팬들과 만나 진솔하게 소통하려는 노(老)피아니스트의 열망이 늦가을 싸늘함을 밀어내는 온기로 따뜻했다. 6·25 종전 이듬해 미국으로 유학, 줄리어드에서 학석사 과정을 마치고 1962년 케네디 대통령 초청으로 백악관에서 카잘스와 함께 연주하였다. 1965년에는 번스타인이 심사위원장을 맡은 제24회 레벤트리트 국제콩쿠르에 우승하면서 보스톤 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그는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국민훈장(모란장)을 받았다. 울산대학교 음대 교수로 영구 귀국한 그는 이번 초청콘서트를 강단에서처럼 스토리텔링으로 이어나갔다.
한동일 교수는 모차르트, 슈베르트,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를 차례로 들려주었다. 첫 곡으로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20번 A단조 D. 959 2악장 안단테를 마치 시작기도를 대신하듯 연주하며 박수를 사양했다. 이어 모차르트가 어머니 안나 마리아를 잃은 마음을 담은 피아노 소나타 8번 K. 310번과 쇼팽의 피아노 소나타 3번 B단조 Op.58을 차례로 연주했다. 오늘 연주회에는 아흔다섯이 되도록 피아노와 함께 살아온 부산의 제갈삼 교수가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으며 무대에 올라 관객들의 뜨거운 해우에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제갈삼 교수는 자신이 스물한 살 때 작곡한 ’감상적 판타지'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Moonlight' 2악장을 해설을 곁들여 연주하며 피아노와 못 다한 사랑을 전했다. 이어 한동일 교수는 울산대 제자 이정원과 듀엣으로 슈베르트 네 손을 위한 판타지 F단조 940을 연탄해 지난날 jtbc드라마 <밀회>를 떠올리게 했다.
40여 년 전. 부산mbc-fm에서 피아니스트 한동일 초청음악회를 개최했을 때. 나는 포스타 제작과 행사를 도왔다. 그 인연으로 행사가 끝난 뒷풀이 자리에 함께했다. 송도 해변의 어느 횟집이었다. 눈을 껌벅거리는 싱싱한 도미가 마리 채 접시에 담겨 올라왔다. 그 광경을 지켜본 한동일이 아이처럼 “원더풀‘을 연발하며 만찬의 분위기에 만족하던 모습이 새롭게 떠올랐다. 우리 부부는 연주회가 끝난 뒤 옛 사우 곽근수와 만나 젊은 날을 회상하며 한동일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되새겼다. 기온이 뚝 떨어진 14일 저녁에는 장한나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와 임동혁의 협연이 초겨울밤의 싸늘함을 따뜻하게 감쌌다. 장한나는 열한 살 때인 1994년 로스트로포비치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하며 세계를 놀라게 하였고 2006년에는 클래식 전문지「그라모폰」가 선정한 ‘내일의 클래식 슈퍼스타 2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9년 지휘자로 변신한 장한나는 창단 110주년을 맞은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봉을 잡았다.
장한나가 지휘하는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제1 바이올린 수석 주자 Lesley Harfield의 입장과 함께 오보에가 천천히 A음을 잡으면서 시작된 튜닝에 이어 1부에서 그리그의 페르퀸트 모음곡 1번을 시작으로 피아니스트 임동혁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하고 2부에서는 챠이콮스키 교향곡 6번 ‘비창’을 연주해 관객을 북극의 광활한 대양과 대륙으로 이끌고 나갔다. 지휘자 장한나와 피아니스트 임동혁은 연주가 끝날 때마다 열광저인 환호와 기립박수에 거듭된 커튼콜로 응답했다. 장한나는 카타르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를 거쳐 2017년부터 노르웨이의 옛 수도 트론헤임의 이름을 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을 맡아 귀국했다. 때마침 1930년대 여성으로서는 처음 베를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안토니아 브리코의 삶을 소개하는 영화 <더 컨닥터>가 개봉해 장한나에 대한 관심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장한나는 귀국인터뷰에서 “성이든 인종이든 나이든 차별 없는 분야는 없다. 오직 실력을 닦는 것만이 길”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연주회가 끝나고 지난 5월 워너 인터내셔널 클래식스에서 제작한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임동혁의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과 장한나 첼로 연주곡 CD를 샀다.
첫댓글 찬미예수님 참으로 행복하셨고 힐링이 되셨겠습니다 저물어가는 멋진 가을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