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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와 전우
고상하고 젊고 활력이 넘치는 무리는 사람을
기쁘게 한다. 기교를 부리지 않고 대화할 수 있는 자유, 남성적이고
격식을 차리지 않는 삶의 방식은 사람을 기쁘게 한다.
몽테뉴 Michel de Montaigne.
예전의 유형이 반복되기 시작했다. 부컴의 나날들은 길고 근사했던 휴가처럼, 이제 막 끝이 나려 하고 있었다. 장학색 자격 시험이 있었고, 그 뒤에는 군대의 그림자가 불길한 종말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그 좋았던 시절은 마지막 몇 달에 이르러 더더욱 좋아졌다. 특히 도네갈에서 수영하던 그 유쾌한 시간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파도 목욕을 했다. 그것은 요즘처럼 판을 타고 헤엄쳐 다니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파도와 난투극을 벌이는 것인데, 물론 귀가 멍멍하게 으르렁거리는 괴물 같은 에메랄드 빛 파도가 언제나 난투극의 승자가 된다. 어깨 너머로 ‘진작 알았으면 도망갈 걸’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엄청나게 큰 파도가 덮쳐 오는 것을 발견하는(너무 뒤늦게)일은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즐겁기도하다. 파도는 서로 뒤엉켜 있다가 마치 혁명처럼 예측할 수 없이 불쑥 솟아오르기 때문에, 진작 알아채고 도망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1916년 늦은 가을, 나는 옥스퍼드에 장학생 자격 시험을 보러 갔다. 평화시에 이 괴로운 시험을 치른 사람은 나처럼 덤덤하게 시험을 치른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합격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했다는(어떤 의미에서)뜻은 아니다. 나는 내가 이 세상에서 생계를 이어갈 방법은 대학에 남는 길 외에 거의 없다는 사실과, 수백 대 일의 경쟁이 걸린 이 게임에 나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커크 선생님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쓴 말은 정확한 것이었다(물론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그 편지를 볼 수 있었다). “자네 아들은 작가나 학자가 될 수는 있겠지만 다른 것은 못 될 걸세, 그점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게.”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가끔 두려웠다. 그 두려움을 다소 무디게 해 준 것은, 장학금을 받든지 못 받든지 다음 해에는 군대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1916년에는 나보다 다혈질인 사람이라도 ‘보병 소위로 복무할 사람이 앞으로의 상황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전후戰後의 삶에 대해 걱정한다는 것은 정신 없는 짓’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번은 이 부분을 아버지에게 설명하려 해 보았다. 그것은 부자간에 맺고 있던 인위적인 관계의 틀을 깨고 진짜 나의 삶을 아버지에게 보여 드리려 했던 여러 번의 시도(자식으로서 부끄럽지 않을만큼 자주 시도한 것은 아니었지만)가운데 하나였다. 그 시도는 완전히 실패했다. 아버지는 근면하게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과 이미 내 교육에 쏟아 부은 돈의 액수, 나중에 아버지가 해 줄 수 있는 원조는 그저 그런 정도라는 점, 아니 사실은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해 아버지다운 충고를 함으로써 즉각적인 반응을 보여 주셨다. 불쌍한 아버지! 공부를 소홀히 하는 것이 내 여러 가지 흠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셨다면,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더구나 생사가 경각에 달려 있는 이때, 어떻게 장학금을 따고 못 따는 일 같은 걸 그렇게 중시하실 수 있을까?’라고 나는 자문했다. 사실은 죽음(내 죽음이든 아버지 자신의 죽음이든 누구의 죽음이든 간에)이 종종 불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정의 주체로 아버지 앞에 생생하게 등장했을 때조차, 아버지는 죽음을 그야말로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사실적인 일, 어떤 결과들을 야기시킬 수 있는 일로 생각지 않으셨다. 어쨌거나 대화는 실패였다. 나의 시도는 해묵은 암초에 걸려 산산조각이 났다. 내가 모든 것을 털어놓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내 말은 알아듣지 못하신(엄격한 의미에서)결과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이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거나 고요하게 만들지 못했다.
옥스퍼드와 첫 만남은 적잖이 우습게 이루어졌다. 나는 숙소를 미리 정하지 않았는데, 짐리라고는 달랑 손에 든 것이 전부였으므로 발걸음도 가볍게 기차역을 빠져나와 여기저기 걸어다니면서 여관이나 싼 호텔을 찾으려 했다. 나는 “꿈꾸는 첨탐들”과 “지난날의 매혹”을 보고 싶어서 좀이 쑤셨다. 처음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실망한 것까지는 참을 수 있었다. 도시는 언제나 기차역에서 볼 때 가장 엉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으면 걸을수록 어리둥절 해졌다. 이 초라한 가게들이 늘어선 거리가 정말 옥스퍼드라는 말인가? 그러면서도 다음번 모퉁이를 돌면 아름다운 모습이 펼쳐지겠지 기대하면서, 또 옥스퍼드는 내가 듣던 것보다 훨씬 큰 도시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걸아갔다. 그러다가 도시가 불과 얼마 남지 않았으며 사실은 내가 집들이 없는 지역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지고 나서야 뒤를 돌아다볼 생각을 했다. 저 뒤 쪽 멀찌감치 전설적인 첨탐들과 높은 건물들이 모여 서서 더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기차역에서 방향을 잘못 잡아, 그때 벌써 초라하고 불품없었던 보틀리 교외를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는 이 작은 모험담이 어느 정도까지 내 인생을 보여 주는 풍유가 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기차역으로 되돌아가, 아픈 다리고 마차를 잡아타고는 마부에게 “일주일 정도 머물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십시오”라고 말했을 뿐이다. 지금 생각하면 위험한 방법이었지만 그때는 완벽하게 성공해서, 곧 편안한 여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홀리웰에서 맨스필드 가로 접어들어 오른쪽 첫 집이었던 그 여관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다. 나는 카디프 칼리지에서 온 다른 수험생과 방을 함께 썼는데, 그 수험생은 카디프의 건물이 옥스퍼드의 어떤 건물보다 건축적으로 우월하다고 단언했다. 그의 박식함에 질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후 다시 그를 만나지 못했다.
그날 몹시 춥더니 다음 날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산봉우리들을 장식 크림 얹은 웨딩케이크 형상으로 만들어 놓았다. 시험은 어리얼 홀에서 치러졌는데, 우리는 모두 두꺼운 외투에 머플러를 두르고 최소한 왼쪽 손에 장갑을 끼고 시험을 치렀다. 펠프스 학장이 시험지를 나누어 주었다. 문제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순수 고전 과목에서는 경쟁자들보다 못했던 것 같고 일반 상식과 변증법에서는 잘했던 것 같다. 나는 시험을 엉망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크 선생님과 함께 지낸 오랜 세월(또는 오래된 것처럼 느껴지는 세월)동안 와이번 시절에 방어기제로 형성되었던 현학적인 태도가 치료되었고, 친구들이 모르는 것을 나만 알고 있다는 생각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논술 문제는 존슨 박사의 글을 인용한 것이 나왔다. 나는 보스웰이 쓴 전기를 몇 번 읽었기 때문에, 그 문제가 어떤 맥락에서 출제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점수를 더 얻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는(쇼펜하우어에 대해 상당히 알고 있다고 해 봐야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생각지 못했다.
시험 칠 자격이 주어진 것은 복된 일이었지만, 시험 보는 순간 자체는 힘들었다. 논술을 끝내고 홀을 나서는데, 한 수험생이 친구에게 “루소와 사회계약론 이야기를 아는 대로 풀어 놓았지”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말은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고백록Confessions》은 그래도 찔끔찔끔 읽었으나(나한테는 별 유익이 없었다),《사회계약론Contrat Social》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날 아침에 멋지게 생긴 해로우 출신 학생이 “나는 샘 존슨인지, 벤 존슨인지도 모르겠어”라고 귓속말을 했다. 나는 순진하게도 벤이 아니라 샘일 거라며, 만약 벤이라면 ‘h’가 없어야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나는 집에 돌아가서 거의 탈락한 것이 확실하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그것은 아버지게서 다정한 마음과 기사도 정신을 끌어내기 위해 계산된 행동이었다. ‘전쟁터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던 아버지도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한 자식의 실망감은 잘 이해해 주셨다. 비용이나 어려운 점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오직 위로와 격려와 애정만을 보여 주셨던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가 거의 임박했을 때, 나는 ‘유니버시키 칼리지’에서 나를 장학생으로 뽑아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 장학생이 된 후에도 ‘학사 후보 시험’을 봐야 했는데 그 시험에는 초급 수학이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그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커크 선생님과 마지막 학기를 보내려고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 부컴으로 돌아갔다. 어두운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가운데 가슴 저리게 행복한 황금기가 지나갔다. 나는 부활절에 보기 좋게 시험에서 미끄러졌다. 늘 그렇듯이 계산을 잘하지 못한 결과였다. “좀더 주의하라”는 것이 사람들의 충고였지만 내게는 소용없는 말이었다. 주의를 기울이면 실수가 늘어났다. 요즘도 유난히 신경을 써서 필사본을 만들려고 하면 첫 줄부터 틀리게 베끼곤 한다.
낙제를 했는데도 1917년 여름(삼위일체 축일)학기에 기숙사에 들어가 살게 되었다. 이제 남은 목표는 대학 장교 훈련단으로 들어가 가장 전도 유망한 길을 따라 입대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옥스퍼드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코앞에 닥친 ‘학사 후보 시험’을 다시 준비하는 것이었다. 나는 하트포드의 나이 많은 캠밸 교수에게 기하를 들었는데(기하 따위는 귀신이나 물어가 버려라!)알고 보니 캠밸 교수는 우리의 친애하는 친구 제이니M의 친구였다. 내가 첫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만큼은 확실한데, 재시험을 보고서도 또 낙제를 했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전쟁 후에 그 문제는 중요치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자비로운 법령 덕분에 군 복무를 마친 사람은 다시 그 시험을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옥스퍼드에 진학한다는 생각 따위는 버려야 했을 것이다.
대학에 가서 한 학기도 끝내지 못했는데 영장이 날아와 군대에 소집되었다. 당시 상황 때문에 그 학기는 아주 비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대학의 절반이 병원으로 바뀌어 육군 의무대의 손에 넘어갔다. 남은 구역에는 몇 안 되는 학부생들이 살았다. 우리 중 두 사람은 아직 군대 갈 나이가 되지 않았고, 두 사람은 부적격 판정을 받았으며, 한 사람은 신-페인계라서 잉글랜드를 위해 싸우려 하지 않았고, 나머지 몇몇은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작은 강의실에서 식사를 했는데, 지금 그곳은 학생 휴게실과 대강당 사이의 복도가 되어 있다. 숫자는 몇 안 되었지만(여덟명 정도), 우리는 눈에 띄는 편이었다. 우리 중에는 나중에 맨체스터 대학의 영문학 교수가 된 E. V.고든,케임브리지의 철학자가 된 A.C.유잉, 그리고 엉터리 잡시를 그리스어 시구로 바꾸는 재주가 있었던 다정하고 기지 넘치는 시어볼드 버틀러가 있었다. 나는 아주 잘 지냈다. 그러나 평범한 학부생활과 비슷한 구석은 거의 없었다. 나에게는 불안정하고 흥분되면서도 전반적으로는 별로 쓸모가 없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나는 군대에 가게 되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군대에 가서도 옥스퍼드에 남게 되었다. 키블에 숙소를 두고 있는 생도 대대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일반 훈련 과정을 마치고(제 2차 세계대전 때의 훈련과 비교하면 그 당시 훈련은 점잖은 편이었다)서머셋 보병 연대, 구 13연대 소속의 소위로 임관되었다. 내가 최전방 참호에 도착한 날은 열아홉번째 생일날이었다(1917년 11월). 아라스 앞에 있는 마을ㅡ팡푸와 몽쉬ㅡ에서 주로 복무하다가, 1918년 4월에 릴러르 부근 베르낭숑 산에서 부상을 입었다.
내가 군대를 좀더 싫어하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물론 군대는 혐오스러웠다. 그러나 ‘물론’이라는 말이 그 고통을 빨아들였다. 이것이 와이번과 다른 점이었다. 군대는 아무도 좋아하게 되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아무도 좋아하라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좋아하는 척하지도 않는다. 만나는 사람마다 군대 자체가 필요악이며 합리적인 생활을 깨뜨리는 지독한 방해꾼이라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여기에 모든 차이가 있다. 쾌락인 양 선전되는 시련보다는 직접적인 시련이 더 견디기 쉬운 법이다. 직접적인 시련은 동지애camaraderie를 불러일으키며, 고난을 겪는 사람들 사이에 일종의 사랑까지(시련이 심할 때)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쾌락으로 포장된 시련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냉소주의, 은밀히 사람을 괴롭히는 원한을 불러일으킨다.
둘째로, 군대 상관들은 와이번의 왕족들보다 훨씬 좋은 사람들이었다. 열세 살짜리를 대하는 열아홉 살짜리보다는 열아홉 살짜리를 대하는 서른 살짜리가 더 친절하다는 점에서 볼 때 이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른 살짜리는 명실공히 어른이므로, 자기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군대가 와이번보다 편했던 것이 내 얼굴이 바뀐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사람들이 그렇게도 자주 “걷어치워”라고 말했던 ‘표정’이 확실히 걷어치워졌다. 아마도《판테스티스》를 읽는 동안 그렇게 된 것 같다. 심지어 동정심을 일으키거나 기분 좋은 즐거움까지 선사하는 얼굴로 바뀌었다는 증거도 있다. 프랑스에 도착한 첫날 밤 100여 명의 사관들이 대형 천막의 판자 침대에서 자게 되었는데, 중년의 캐나다인 상관 두 명이 즉시 나를 맡아 아들처럼은 아니더라도(이 말은 모독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마치 오래 전에 헤어졌다가 만난 친구처럼 잘 대해 주었다f에게 축복이 있기를! 또 아라스의 장교 클럽에서 혼자 식사하게 되었을 때 와인(그때는 하이드직 한 병이 8프랑이었고 페리에 주엣이 12프랑이었다)을 마시고 책을 읽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식사가 끝날 무렵 한참 계급이 높은 장교 두 사람이 다가오더니 나를 ‘서니 짐Sunny Jim'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의 식탁으로 데려가 브랜디와 시가를 대접해 준 적도 있었다. 그들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나를 취하게 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예외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예외적인 일은 아니었다. 군대에도 비열한 사람들은 있었다. 그러나 그 몇 달은 잠시 동안이나마 즐거운 친분을 나눈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며칠에 한 번씩은 학자나 괴짜, 시인, 허풍선이, 이야기꾼 내지는 최소한 선량한 사람을 만났던 것 같다.
그 겨울 중반쯤, 나는 당시 부대에서는 ‘참호열’이라고 불렀고 의사들은 P.U.O.(원인불명열)라고 부르던 병에 걸려서, 르 트레포르의 병원으로 호송되어 즐겁기 짝이 없는 3주를 보내는 행운을 얻었다. 진작 말했어야 했을 것 같은데, 나는 평화시에도 어릴 적부터 폐가 나빠 소소히 앓아눕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았던 사람이다. 이제 참호 대신 침대에 누워 책을 보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천국”이 아닐 수 없었다.
병원은 전에 호텔이었던 곳으로, 환자 두 명이 한 방을 썼다. 첫 주는 야간 간호사 하나가 내 룸메이트와 격렬한 정사를 벌이는 바람에 엉망이 되어 버렸다. 나는 워낙 고열에 시달리고 있던 터라 민망해할 여지가 없었지만, 두 사람이 속삭이는 소리는 아주 지루하고 음악적이지 못한 소음으로 들렸다. 밤에는 더 심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에 운세가 호전되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다른 곳으로 이송되고, 요크셔 출신의 여성혐오주의자 음악가가 그 자리를 채운 것이다. 그는 병실에 온 지 이틀째 되는 날 아침 “어이, 친구, 우리가 침대를 정리하면 XX들이 병실에 오래 있지 않고 금방 가주지 않을까”(대충 이런 취지의 말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침대를 정리했고, 구급 간호봉사대 두 사람은 매일 우리 방을 들여다보면서 “아, 환자들이 침대를 정리했군요! 정말 장하네요”하면서 환한 미소로 우리를 칭찬해 주곤 했다. 우리가 간호사들에게 잘 보이려고 그렇게 한 줄 알았던 모양이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체스터턴의 수필집을 읽었다. 그 당시에 나는 그에 대해 들은 바도 전혀 없었고 그의 입장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또 지금도 그가 그토록 즉시 나를 사로잡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염세주의와 무신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고 감상을 혐오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체스터턴은 그 어떤 작가보다 내 취향에서 먼 작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마 섭리내지는 아주 모호한 종류의 ‘2차적 동인動因’이 작용해서 이전에 가지고 있었던 취향들을 뒤엎고 두 정신을 하나로 묶기로 결정한 듯했다. 한 작가를 좋아하는 것은 사랑에 빠지는 것처럼 자기 의지와 상관없는 일, 도무지 일어날 것 같지 않은데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미 나는 상당히 노련한 독자로서, 내가 좋아하는 것과 동의하는 것을 구별하고 있었다. 나는 체스터턴이 말하는 바를 즐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의견까지 받아들일 필요는 없었다. 그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유머를 사용했다. 케이크에 건포도를 박듯 책장마다 ‘농담’을 박아 넣거나 설상가상으로 익살과 경박함을 전체 기조로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말하고 있는 내용과 분리되지 않는 유머, 오히려 변증의 ‘꽃’(아리스토텔레스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이 되는 유머를 사용했던 것이다. 칼은 검객이 칼을 빼들어 번쩍거리게 만든다고 해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목숨을 걸고 싸우느라 잽싸게 칼을 휘두르는 와중에 빛나는 법이다. 체스터턴이 경박하다거나 ‘자기모순’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 비평가들을 동정할 생각은 전혀 없다. 물론 그들의 의견에 공감할 수도 없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체스터턴의 선량함 때문에 그를 좋아했다. 나 자신도 선량해지려고 노력하느냐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선량함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나의 취향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다(그때도 그랬다),나는 한 번도 선량함을 싫어한 적이 없었다. 선량함을 싫어하는 경향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듯하다. ‘잘난 체하다’, ‘잘난 체함’이라는 비난의 말은 내 비평 어휘에 등장한 적이 없다. 나는 냉소적인 사람의 코, 즉 날카로운 후각을 가진 개odora canum vis 의 감각 내지는 바리새주의나 위선을 예민하게 찾아내는 사냥개의 감각을 타고나지 못했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이다. 남자가 결혼할 생각이 없는 여자에게 매력을 느끼는 식으로, 나는 선량함에 ‘매력’을 느낀다. 사실 ‘매력’은 멀리서 봐야 잘 보이는 법이다.
맥도널드를 읽을 때처럼 체스터턴을 읽을 때도 나는 내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릇 건전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고자 하는 젊은이는 자기의 독서생활에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다. 어디에나 덫ㅡ허버트의 말처럼 “펼쳐진 성경, 수백만 가지 놀라운 일, 정교한 그물과 책략”ㅡ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마다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대대에서도 나는 공격을 당했다. 거기에서 나는 존슨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편히 쉬기를!)전사하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친구로 지냈을 것이다. 그는 나와 같은 옥스퍼드(퀸즈 칼리지)의 장학생으로서 전쟁이 끝나면 장학금을 받을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나보다 나이가 많았고 그때 이미 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나는 커크 선생님 외의 사람에게서는 발견하지 못했던 변증법적 예리함을 존슨에게서 발견했는데, 그의 경우에는 그 예리함이 젊음과 변덕스러움, 시時와 결합되어 있었다.
존슨은 유신론으로 옮겨 가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전선을 벗어나기만 하면 신의 문제와 그 밖의 문제들을 놓고 끝없이 논쟁을 벌이곤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나와 비슷한 부류의 또래 중에서 원칙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을 그때까지 거의 만나지 못했다. 더 놀라운 점은, 그가 자신의 원칙을 당연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좀더 엄격한 덕목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배교한 후 처음으로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더 엄격한 덕목’이라고 말하는 것은. 친절이나 신의나 돈을 너그럽게 사용하는 태도 등에 관한 개념은 나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과 반대되는 악덕에 좀더 세련된 새 이름을 붙이려는 유혹에 빠졌다면 모를까, 이런 정도의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사실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아름다움은 객관적인 것인가’라든지 ‘아이스킬로스는 제우스와 프로메테우스의 화해를 어떻게 다루었는가’따위를 알고 싶어하는 존슨과 나 같은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엄격한 정직성과 순결성을 추구하며 의무에 헌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전에는 심각하게 해 본 적이 없었다. 전에는 그런 것들이 대화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점에 대해 토론하지 않았고, 존슨은 아마 나의 진실성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별 가책 없이 진실한 척했다. 만약 이것이 위선이라면, 나는 위선이 사람에게 유익할 수도 있다는 결론을 내려야겠다.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말을 하는 것, 진담을 하면서 농담하는 척하는 것은 저열한 짓이다. 그래도 부끄럽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또 스스로 더 나은 사람인 양 행세하는 것과 실제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는 것 사이의 차이는, 아무리 후각이 발달한 도덕적 감시견이라 해도 감지하지 못할 만큼 미세한 것이다. 나는 한 부분만큼은 의도적으로 감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원칙은 즉각 수용했고, 속으로 나의 ‘검토되지 않은 인생’을 변호하려 들지 않았다. 예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처음으로 정중한 사람들의 모임에 참석했다면, 당분간은 그들의 행동을 흉내내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흉내내지 않고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우리 대대가 얼마나 좋은 곳이었는지 아마 짐작이 될 것이다. 선량한 정규 군인 몇 사람이 사병 출신 장교(이들은 서부 지역에서 온 농부들이었다). 법정 변호사, 대학 출신 등이 유쾌하게 뒤섞여 있는 무리를 지휘했다. 상당히 좋은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가장 재미있는 인물은 늘 우리의 표적이 되었던 월리였다. 월리는 농부이자 가톨릭 신자이면서 열정적인 군인이었는데(진짜 싸우고 싶어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어설픈 신참의 허튼 소리에도 쉽게 말려들 곤 했다. 그를 놀리는 한 가지 방법은 기마의용군을 비난하는 것이었다. 불쌍한 월리는 기마의용군이야말로 기병들 중에서 가장 용감하고 유능하며 강인하고 깨끗한 군인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기마의용군이었던 아저씨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탓에, 그곳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말을 더듬고 횡설수설했으며, 결국에는 항상 비장의 카드를 꺼내 들곤 했다.
“우리 밴 아저씨가 와서 얘길 해야 하는데, 밴 아저씨라면 얘기 해 줄 텐데, 아저씨라면 말해 줄 수 있을 텐데.”
유한한 인간이 판단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아마 프랑스에서 전사한 사람 가운데 월리만큼 천국으로 직행할 만한 사람은 없었으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그를 놀리기는커녕 그의 군화를 닦아 주었어야 마땅한 사람이다.
그가 지휘한 부대에서 지낸 짧은 기간이 힘들었다는 말도 덧붙여야겠다. 월리는 독일군을 죽이는 데 열성적이어서 자기 목숨이나 다른 사람들의 안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머리카락이 쭈뼛해질 정도로 대담무쌍한 생각을 불쑥불쑥 꺼내 놓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가 조금만 그럴듯하게 구슬리면 쉽게 설득이 되었다. 그는 너무나 용맹하고 순진했기 때문에, 우리가 군사적인 의도 외에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의심을 단 한순간도 품지 않았다. 그는 쌍방의 묵계에 따라 참호전에서 준수되고 있던 원칙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하사에게서 곧 그것을 배우게 되었다. 내가 적진에서 사람의 머리가 움직이는 것을 보고 수류탄을 “퍼붓자”고 했더니, 하사는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맘대로 해 보셔. 일단 그딴 짓을 시작하면 금방 보복을 받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라고 말했던 것이다.
전시의 군대를 온통 황금빛으로만 묘사해서는 안 되겠다. 나는 군대에서 ‘세상’도 만났고, ‘넌센스’라는 위대한 여신도 만났다. ‘세상’은 내가 처음 ‘전선’에 배치되던 날 밤(열아홉 번째 생일날),아주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땅 속 통로를 통해 대피호로 들어가 촛불 빛에 눈을 깜박이며 보니, 내 전입신고를 받고 있는 대위가 바로 학창시절에 존경했다기보다는 좋아했던 선생님이었다. 나는 알은 체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낮고 황급한 목소리로 자신이 한때 학교 선생을 하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말했고, 우리 사이에서 그 이야기는 다시 언급되지 않았다.
‘위대한 여신’과의 만남은 더 우스꽝스러웠는데, 그 일은 내가 연대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일어났다. 군용 기차는 밤 10시 경에 루엥에서 출발했으며, 저마다 다른 모양의 객차를 달고 시속 12마일로 한도 없이 달렸다. 나는 장교 세 사람과 함께 객실 하나를 배정받았다. 난방은 되어 있지 않았고, 조명은 각자 가져온 촛불로 해결했으며, 배설물 처리는 창문을 통해 해결했다. 여행은 약 15시간 동안 계속될 예정이었다. 엄청나게 추운 밤이었다. 루엥을 벗어나자마자 터널을 통과했는데(내 연배 사람들은 다 기억할 것이다)갑자기 무언가 비틀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우리 객실 문짝 하나가 통째로 떨어져 어둠 속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 추위를 견뎠다. 다음 역에 서자 기차 담당 장교가 부리나케 달려와 대체 문짝에다 무슨 짓을 했느냐고 다그쳤다.
“그냥 떨어져 나갔습니다.”
우리가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상사가 말했다.
“야단스럽게 장난질을 치지 않았다면 문짝이 이렇게 떨어져 나갔을 리가 없어!”
마치 ‘네 사람의 장교가 한겨울에 야간열차를 타고 가면서 객차 문짝을 뜯어내는 것(물론 스크루드라이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하에)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투였다.
전쟁에 관해서라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목격한 사람들이 자주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거의 말하지 않으려 한다. 독일군이 봄에 대규모 공습을 개시하기 전까지는 꽤 조용하게 지냈다. 대규모 공습이 있던 날에도 독일군은 우리가 아니라 오른쪽에 있던 캐나다군을 공격했고, 우리 전선에는 1분에 약 세 번 꼴로 하루 종일 포탄을 퍼부어 ‘침묵시킨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나는 거대한 공포가 어떻게 작은 공포를 제압하는지 보게 되었다. 생쥐 한 마리와 마주쳤는데(떨고 있는 불쌍한 생쥐와 떨고 있는 불쌍한 인간이 만난 것이다)전혀 도망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겨울 내내 우리의 주된 적은 피로와 물이었다. 나는 행군마다 잠이 들곤 했는데, 깨어 보면 계속 걷고 있었다. 우리는 허벅지까지 오는 긴 고무장화를 신고 무릎 위까지 물이 올라오는 참호를 걸어다녔다. 그러다가 물 속에 잠겨 있던 철조마을 밟았을 때 장화 안으로 차오르던 얼음장 같은 물의 냉기를 기억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죽은 지 오래 된 시체와 얼마 안 된 시체에 익숙해지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형성되었던 시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확고히 하게 되었다.
나는 보통 사람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들에게 연민과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 특히 친애하는 에어즈 하사에 대해 그랬다. 그는 나에게 부상을 입힌 포탄 파편에 맞아 죽었다(내 짐작에는 그렇다). 나는 변변찮은 장교로서(그 당시 군 당국은 너무 쉽게 임관을 시켰다)꼭두각시처럼 에어즈 주변만 돌았는데, 그는 이 우스꽝스럽고 괴로운 관계를 아름다운 것으로 변화시켜 거의 아버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그 외에 전쟁이 보여 준 것들ㅡ공포, 추위, 폭약 냄새, 참혹하게 뭉개졌으면서도 짜부라진 딱정벌레처럼 움찔거리던 사람들, 앉아 있는 시체나 서 있는 시체, 풀 한 포기 없는 맨땅의 정경, 밤이고 낮이고 신고 있어 발의 일부가 되어 버린 군화ㅡ은 이제 드문드문 흐릿하게 기억날 뿐이다. 그것은 나의 다른 경험들과 너무 분리되어 있어서, 마치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 같은 느낌이 든다.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는 중요치 않은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은 상상의 순간이 그에 뒤따르는 현실보다 중요해 보인다. 나는 거기에서 처음으로 총소리를 들었다. 탄환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치 평화시에 시인이나 기자가 날리는 언어의 탄환처럼 ‘휭’날아갔다. 그 순간 정확히 무서운 것도 아니고, 무덤덤한 것은 더욱 아닌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것은 떨리는 듯한 작은 신호였다. 그 신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것이 전쟁이다. 이것이 호메로스가 말했던 그 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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