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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경제적 토대(3부-하)
제국주의와 저개발
케인즈에게 제2차 세계대전은 어떤 경제 체제도 원하기만 한다면 완전 고용을 이룰 수 있음을 증명했는데, 그는 종전이 1930년대 규모의 실업을 다시 불러올 뿐이라 예측하고 공포에 질렸다. 그러나, 직후의 사건을 고려하면,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대규모 생산력의 파괴는 경제적 회복의 새로운 기반을 제공했다.
“유럽 철도 노선 전체 곳곳의 철도 조차장, 그리고 항만 시설들이 폐허로 남겨졌다. 기계는 끊임없이 사용하고 수리하면서 낡아 소모되었다. 광산은 무자비하게 착취되어 전쟁 이전 효율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초인적 노력이 필요했다. 농업은 토지 착취로 수확은 형편없었다. 대부분 나라의 노동력은 상당한 손실을 겪었다.”(16)
독일, 일본, 그리고 이탈리아가 전쟁으로 황폐해지는 동안, 대부분 “승리한” 열강들의 경제적 기반 또한 그러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련은 1천2백만 명의 군인과 8백만 명 이상의 시민을, 영국은 1,180만 톤의 선박 운송품, 프랑스는 전체 국부의 45%를 잃었다. 예외는 미국이었는데, 전쟁은 생산을 엄청나게 부양했으면서도 산업 기반은 훼손하지 않았다. 비록 전쟁이 그동안 축적할 수 없었던 미국의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을 대규모로 평가절하했으나, 생산 수단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다. 이것이 미국에 전후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경제적 형태를 멋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을 주었다. 그것은 상당히 불균등한 두 제국주의 블록으로 나누어진 세계가 되었다 : 소련과 동유럽 위성 국가들이 한 편에 있고, 미국과 그 유럽 동맹국들이, 결국은 당연하게도, 그들의 식민지들을 빼앗아 다른 한 편에 있었다. 심지어 루스벨트 이전에도, 처칠과 스탈린은 1945년 2월, 세계를 나누기 위해 얄타(Yalta)에서 만났고, 미국은 (뉴 햄프셔) 브레튼우즈에서 다른 서유럽 국가들을 중무장시키고, 달러를 국제 무역의 새로운 기준으로 받아들이게끔 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에서 구성원 국가들은 자신들의 통화를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고정했고, 양 세계대전 사이 동안 근린궁핍화정책(“beggar-my-neighbour”)의 통화 평가절하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 확신시키기 위해, 미국은 1온스당 35달러 가격으로 달러를 금에 고정했다. 조약의 요점은 세계은행(World Bank)이 설정했고, 세계은행은 IMF의 채권자로서 필연적으로 달러로 거래했다.
소련은 1947년 최종 협정을 비준하지 않았고, UN 총회에서 러시아 대표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Gromyko)는 브레튼우즈 체제를 “월 스트리트 분점”이며, 세계은행을 “하나의 거대한 강대국의 도구가 되는 정치적 목표에 종속되었다”라고 비난했다.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이 이제 대부분의 유럽과 아시아 커다란 부분을 포함한 영토를 통제했지만, 그것은 전쟁으로 부상한 약한 제국주의였다. 미국 달러의 헤게모니로부터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그들이 차지한 영토의 통화를 교환 불가능한 것으로 남도록 보장했다.
소련이 해체되어 그들이 동독으로부터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불변 자본을 러시아로 수송하는 동안, 미국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생산 기반이 온전한 유일한 강대국으로 미국 문제는, 동맹들이 자신들의 경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더는 미국의 상품을 구매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경기 후퇴 위협과 그 모든 결과도 나타났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을 거쳐, 빠른 인플레이션과 대부분이 노동조합이 속하지 않은 5백만 이상의 노동자들이 연료가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거대한 파업의 물결이 일어났다. 미국 지역 경제와 동맹국 경제를 모두 부활시킴으로써 노동계급의 상황을 개선할 방법을 찾는 힘겨운 과제가 미국 자본에 주어졌다. 따라서 미국은 1947년 유럽의 동맹들을 위한 마샬 계획(Marchall Plan)을 시행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이탈리아나 프랑스와 같이 소련에 충성하는 코뮤니스트당의 숫자가 증가하는 국가들에 대한 재정적 원조를 의미했는데, 심지어 그렇지 않은 지역인 영국은 큰 코뮤니스트당은 없었음에도(1945년 영국 코뮤니스트당(CPGB)에는 국회의원이 1명 밖에 없었다), 영국 제국의 전쟁 빚 일부를 상환하기 위해 노동당 정부가 마샬 원조를 수락했다. 이제 뉴욕은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서 런던의 자리를 완전히 대체했다. 달러 지배로부터 탈출하고자 한 소련은, 전적으로 사심이 없진 않았던 원조를 거부했고, 그 위성 국가들의 마샬 지원 수락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동유럽 국가들이 마샬 플랜에 참여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미국, 영국, 그리고 그 외 서유럽 국가들이 부과한 무역 거부 조치에 대응하기 위해, 1949년 경제상호원조회의(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을 설립했다.
이는 양극단에 있는 세계의 제국주의 분파를 위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가장 긴 세속적 호황”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호황의 조건을 만들어 낸 것은 단기적인 마샬 계획의 지원이 아니라, 전쟁 그 자체가 가져온 자본의 대규모 평가절하였다. 전체 세계는, 특히 미국, 소련, 그리고 서유럽과 동아시아 국가들은 유별나게 높고 지속된 성장을 경험했고, 이 모든 것과 함께, 이전에는 성취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 사실상 완전 고용(no unemployment)을 맞이했다. 이것은 1930년대와 극적인 대조를 이뤘으며, 그 계속되는 호황에 직면하여, 그들이 경험한 “아우성치는 20세기”(Roaring Twenties)의 문제, 그 역사를 특징짓는 호황과 불황의 순환으로부터 자본주의가 탈출한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했다.
그러나 재건은 그 한계가 있었다. 1970년대 무렵,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는 다시 위기를 가져왔는데, 그 위기가 19세기의 사업 불경기의 형태는 아니었다.
“축적 수단으로서 경기 순환은 명백히 끝났다; 아니 경기 순환은 세계 전쟁의 ”순환“이 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전쟁은 독특한 것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전쟁이 싸워 쟁취하고자 하는 목표들이 그러하다. 다른 모든 가설적인 이유를 제쳐 두고, 주요한 목표는, 승전 열강들의 전매특허인 정책들로, 경쟁국이나 경쟁 블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전쟁은 이제 국제적인 경쟁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것은 ‘경제 외적’ 수단에 의한 경쟁의 문제라기보다 사람들 사이 유혈 낭자하고 원시적인 투쟁을 위한 가식을 벗은 경제적 경쟁일 것이다.”(17)
이것이 쇠퇴기 자본주의에서 축적을 재건하는 수단이 왜 파괴 도구 생산의 증가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설명한다. 아래의 표는 영국과 미국에서 군비 증가를 보여주는데 1962년에 이르게 되면 430억 파운드가 군 예산과 무기 비용으로 매년 지출되고, 이는 “전 세계 총자본 형성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몫이다.”(18) 무기 생산은 폐기물 생산으로, 총 사회적 자본에 어떤 새로운 가치도 더하지 않는 생산이다. 진실로, 한 국가의 자본은 무기를 다른 나라에 판매함으로써 경제적 문제를 완화할 수 있다. 그러나 거래에 사용된 돈은 그 나라 노동자들 노동으로 생산된 결정화된 가치 형태를 나타낸다. 그리고 그 무기를 갖게 되면 그것으로 대체 무엇을 만들 수 있는가?
< 영국과 미국의 공공 지출, 1913-1969>
연도 | GNP 대비 국방비 비율(%) | GNP 대비 전체 국가 지출 비율(%) | ||
UK | USA | UK | USA | |
1913 | 3.0 | / | 13.5 | 10.5 |
1923 | 4.7 | / | 27.5 | 11.0 |
1933 | 3.8 | / | 30.0 | 16.5 |
1938 | 4.9 | 1.5 | 31.2 | 19.5 |
1948 | 7.4 | 8.0 | 37.0 | 24.0 |
1953 | 8.9 | 13.2 | 35.0 | 27.5 |
1958 | 6.4 | 10.1 | 31.5 | 29.0 |
1960 | 6.2 | 9.0 | 32.5 | 28.0 |
1965 | 5.8 | 7.5 | 34.0 | 28.5 |
1969 | 5.3 | 9.0 | 39.0 | 32.0 |
출처: M. Barratt Brown, “The Economics of Imperialism”, 216쪽. |
정교한 핵무기 구매는 단순히 사냥을 위해 이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목적은 파괴를 위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 말은, 무기 생산은 가치의 창출에 연결되기보다 가치를 파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윤율 하락에 대한 가상의 “역(逆) 경향”은 세계 자본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며, 종국에는 오직 더 심각한 위기, 쇠퇴기 자본주의 아래에서 궁극적으로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주요 특징들을 개괄했다. 자본주의 경쟁은 이제 개별 기업 간 경쟁이라기보다 제국주의 블록에 속한 국가 간 경쟁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성장기 개별 기업들이 순수한 경제적 경쟁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제국주의 시기 국가 수준에서의 경제적 집중은 그 과정을 자본주의 아래 궁극적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제국주의는 지구의 가능한 상당 부분을 원자재, 투자, 시장의 원천으로써, 또는 그 이득을 더 잘 지키기 위한 전략적 기반으로써, 분할 하려는 각 자본주의 국가 내부 투쟁이었다. 제국주의 군비 경쟁은 모든 외교 전술, 무역 전쟁, 제재와 호의적 국가 협정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순수한 군사력이 뒷받침될 때 의미가 있었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위기는 최종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전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왜 자본주의가 “버터보다 총을!”(guns not butter) 선호하는지, 교육, 주택과 같은 사회적 편익보다 일종의 폐기물 생산으로서 군비 지출을 선호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19)
1914년 이래, 제국주의 전쟁은 거의 중단되지 않은 사슬처럼 확장되었다. 물론 가장 충격적인 예시는 명백히 제2차 세계대전이었는데, 이 전쟁은 30년대 초반의 위기가 연장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규모 군비 지출에 뒤이은 것이었다. 영국, 프랑스와 소련을 각각 보면, 군비 지출은 1937년과 1939년 사이 각각 144%, 142%, 그리고 103% 상승했다.(20) 제1차 세계대전이 가장 지배적인 세계 제국주의로서 영국 자본주의의 파괴를 완성했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명백히 미국을 세계에서 선도하는 자본주의 국가로 확립시켰다. 비록 전후 복구를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유럽 산업과 영토 대부분을 장악한 소련이라는 점점 더 위험해지는 라이벌과 직면했지만 말이다.
전후 세계의 역사는 주요 제국주의 국가 둘이 모두 해외로부터 대량의 이윤을 유입함으로써 이윤율 하락 경향을 상쇄시키는 시도 속에서, 세계에 대한 더 큰 통제력을 확보하려 시도하는 역사였다. 따라서 냉전 속에서 제국주의적 갈등은 한국 전쟁부터 베트남 전쟁, 아프리카에서의 전쟁들, 그리고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따른 다양한 중동 위기와 같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불편한 “평화”를 산산조각 내는 대리전쟁의 형태를 취했다. 제국주의는 소수의 높은 유기적 구성을 한 선진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경제의 산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이것이 영토의 물리적인 지배 - 식민주의 - 를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 당시 지배적인 강대국들은 그들이 그 무엇이 되었든 영토에서 뽑아낼 수 있는 가치를 추출하기 위해 직접적인 통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정확하게도, 자본의 수출이 제국주의의 주요한 추동력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식민지에서 초-이윤(super-profit)을 얻지 못하도록 반(反)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이 제국주의 열강을 막고, 따라서 자본주의에 상당한 한 방을 날릴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는 두 가지 점에서 틀렸다. 첫째, 반(反)맑스주의 역사가들(21)이 분명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인도라는 명시적인 예외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식민지들은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그리 수익성이 크지 않았다. 그 당시 그들이 주목하지 못한 것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땅을 점령하는 다른 동기들은 종종 부정적인 것 - 라이벌로 하여금 특정 영토를 이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 - 이었던 반면, 식민지가 곧 수익이 날 것이라는 기대했다는 점이다. 둘째, 식민지의 개발 및 군비 때문이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들을 지배한다는, 더욱 교묘하고 훨씬 더 수익성이 큰 방법(곧 “신-식민주의”로 불리게 된다)을 개발하였다. 비록 정치적 의미에서 명목상 독립했지만, ‘새로운’ “개발도상국” “제3 세계” 국가인 구 식민지들은 세계 시장을 유의미하게 무너뜨리기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두의 제국주의 열강과 “개발도상국” 나라들의 격차는 확대되었다. 1952-1954년, 미국의 1인당 생산량은 1,870달러는 인도의 60달러, 이집트의 120달러였다. 1969년, 이 수치는 미국이 4,240달러였는데, 인도는 110달러, 그리고 이집트는 160달러가 되었다.(22) 2022년, 이 수치는 미국 70,246.6달러, 인도 2,256.6달러, 그리고 이집트 3,698.8달러였다.(23)
앞선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개발도상국 세계의 실패는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와 분리할 수 없다. 자기 노동력만으로는 충분한 잉여가치를 추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은 잉여가치를 저개발 지역으로부터 추출하려고 시도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은) 저개발 국가들의 자본 축적을 통한 잉여(가치를 추출하는 것)를 막았고, 따라서 이 지역에서 자본 재생산 기반을 파괴했다. 따라서, 제국주의자들은 아래와 같은 딜레마에 직면한다.
“낙후된 지역을 계속 착취하는 것은 서서히 개발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그러나 착취하지 않는 것은 자본의 이미 불충분한 이윤을 더 감소시킨다는 의미이다.”(24)
이러한 상황을 바꾸려는 시도로서의 선진 국가의 “지원”은, 가치 법칙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었다. 무조건적인 “원조”는 없는 것이 당연했고, 그것은 자본이므로, 따라서 자본으로 작동하므로, 즉, (원조는) 이윤과 이자라는 이름의 기대 수익을 대가로 빌리는 것이 되었다. 이전 원조에 대한 이자와 빚을 지불하면, 1965년에는 (쿠바를 제외한) 모든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은 8억 8천3백만 달러의 순손해가 발생한다는 계산이 나왔다.(25) 이 당시 쿠바는 제국주의에 의존하던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상황이 좋았는데, 소련으로부터의 30억 달러 “원조”의 수혜자가 되었다. 비록 더 나은 조건이었음에도 쿠바의 경제는 계속 침체했다. 소련은 주요 제국주의 열강들 가운데 약자였기 때문에, “원조”에서 경쟁자를 약화하기 위해 낮은 이윤율과 장기의 대출을 제안했다. 이는 결코 관대한 것이 아니었다. 쿠바와 다른 노동자들의 잉여가치는 이미 알고 있는 그들 나랏빚과 이자를 갚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전후 제국주의 게임에서 소련의 다른 약점은 무기를 공급함으로써 민족해방 투쟁을 지원할 수는 있었지만, 베트남 전쟁의 운명이 명백히 보여주었던 것처럼, 독립을 쟁취한 이후 경제적 지원은 거의 할 수 없었다는 데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저개발 경제가 견고한 산업 기반을 확립하기 어려운 가장 설득력 있는 이유는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이 세계 시장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각 자본은 경쟁으로 인해 대략 유사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밖에 없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부터 고도의 유기적 구성을 한 자본으로 지속적인 가치의 유출이 발생한다. 더욱이, 이윤율은 균등화(equalisation) 경향이 있으므로, 낮은 유기적 구성을 한 국가들은 새로운 축적을 위한 충분한 규모의 이윤이 없음을 알게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사회 개혁인가 혁명인가」(Social Reform or Revolution)에서 상당히 명확하게 본 것처럼.
“생산성과 교환 사이의 모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노동 생산성 그 자체의 성장에서 비롯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위협이다. 그것은 어떤 새로운 중소 규모 자본의 기업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극도로 위험한 경향이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자본) 형성, 그러므로 자본 배치의 확장도 제한한다.”(26)
그러므로, 저개발 국가가 그들이 생산할 수 없는 자본을 대출하여 무거운 빚더미 위에 앉게 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1960년대 개발도상국의 공공 대외 재무는 매년 14%씩 상승했다. 1968년 6월, 빚은 475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27)
어떤 이들은 저개발 국가의 계획 경제 정권이 해당 지역 잉여가치 생산 부족의 만성적 영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안적 국가 자본주의 해결책으로 소련을 모델로 삼은 것을 지적했다.(28) 그러나, 쿠바와 극찬받던 중국 사례가 대표하듯이, 그런 지역에서 계획 경제의 적용은 문제에 대한 해결책 된 것이 아니라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었다. “국외 자본”이 실패하자, 지역 부르주아지는 축적을 위한 충분한 잉여가치를 집중시키기 위해 집중화된 국가 권력에 고삐를 채우고자 했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주의의 지배로부터 “민족해방”을 달성하길 희망했다. 쿠바는 우리가 이미 언급했다. 그러나 중국은 많은 인구와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고, 1960년대 핵폭탄을 개발하고 위성을 쏘아 올렸다. 그러나 중국에 호의적인 이들조차도 아래와 같은 것은 인정했다.
“이례적인 진보에도 중국은 여전히 결정적인 경제적 도약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통계적 계산이 보여주는바, 1인당 곡물 공급이 여전히 국민당의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절)’ 때 달성한 것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29)
가치 법칙은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똑같이 작동했다. 계획 경제의 집중화도 독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충분한 잉여가치를 불어넣지 못했다. 전후 호황이 1970년대 초반 “자유세계”의 종말에 도달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지표들은 소련과 그 위성 국가들도 하락세에 직면했음을 보여주었다. 물론 우리도 당시 이 경제들의 이윤율을 계산할 수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률을 보아 모든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었다. 1951-5년 시기, 코메콘(동구 경제상호원조회의)의 전반에서 성장률은 1960년대 성장률에 비해 2배였고, 5개년 계획(1971-5년)의 주요 목표 달성은 모조리 실패했다.(30) 냉전의 양측 모두에게 “멈춤쇠(détente)”는 평화를 향한 진정한 단계를 밟는 데서 온 것이 아니라 군비 경쟁을 완화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베트남 전쟁의 비용이 1973년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에 이바지했다면, 코메콘의 무기 생산은 GDP 성장 둔화의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점차 지속 불가능한 것이 되고 있었다. 이것이 부패, 낮은 노동 생산성, 알콜 중독자 비율의 증가, 그리고 소비재의 부족이 만연했던 브레즈네프(Brezhnev) 시절이었다.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는 1982년 그가 죽은 이후에서야 있었고, 이 시기에 소련은 1979년 필사적인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자신만의 베트남 전쟁에 휘말려 있었다.
그동안, 중국과 미국 모두 경제적 문제로 인해, 1971년 닉슨의 중국 방문 이후 그들의 화해를 향한 첫 단계를 밟았다. 새로운 접근은 1958년 대약진 정책과 같은 중국의 주체적인 발전 시도의 실패,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소련과의 관계가 무너진 이후 뒤이은 스태그네이션 결과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마오쩌둥은 1976년 사망), 그리고 1980년대 초반, 중국 코뮤니스트당, 서유럽의 지도자들과 기업인들은 모두 그들 각자의 문제를 다루는데 상호 이득이 되는 방법을 우연케도 발견했다. 서유럽 자본에 있어서는 스스로 해결책은 만들지 못한 채, 1970년대 위기 비용을 노동자에게 지불하도록 하려는 시도에 완고하게 저항하는 노동자를 패배시키는 방법을 제공했다. 서유럽의 산업 구조조정(즉각적인 자본의 단순한 형태를 취하곤 했다.)은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 내 서유럽 금융 자본(그리고 멕시코와 같은 보다 작은 장소들)의 대규모 투자를 동반했다. 이곳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매우 낮은 임금으로 일하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이것은 규제가 사라진 통화, 금융화, 세계화의 경제적 결과이며, 이에 더해, 우리가 다음 장에서 다룰 소련 붕괴의 결과이기도 하다.
-ER
코뮤니스트노동자조직(CWO)
<주>
(16)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51쪽
(17) 매틱(Mattick), 앞의 책. 135쪽
(18) M. Kidron, Western Capitalism Since the War, 쪽
(19) 적어도 세계부르주아지의 부분적 실현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명백한 정치적 강점.
(20) 수치는 클로프와 콜(Clough and Cole), 앞의 책. 818쪽.
(21) 고전적인 예시는 D.K. Fieldhouse, The Theory of Capitalist Imperialism (Longman 1967)
(22) Key Issues in Applied Economics, 1947-1997 Economist Intelligence Unit
(23) data.worldbank.org
(24) 매틱(Mattick), 앞의 책. 262쪽
(25) T. Hayter, Aid as Imperialism, 174쪽
<출처>
https://www.leftcom.org/en/articles/2023-09-08/capitalism-s-economic-foundations-part-ii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