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 때 있었던 순천 왜성 전투는 조선, 중국, 일본 삼국이 참가한 가장 치열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장장 2개월에 걸친 수륙합동의 혈전이 순천 왜성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순천 왜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해(1597년) 9월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성을 쌓기 시작하여 같은 해 12월에 성을 다 쌓았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를 한 것으로 보아 3개월에 걸쳐 지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전라도를 공략하지 못한 것이 패인이라 생각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재란 때 수군을 포함하여 좌군과 우군 전 병력을 전라도로 진격시켰다.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명량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참패를 당한 왜군은 내륙에서 고립되었던 임진왜란 때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제히 남하하였다. 그때 순천으로 퇴각한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왜성에 주둔하였다.
1598년 9월, 드디어 고니시 부대를 물리치기 위한 조명 연합군이 고금도에서 순천으로 출발하였다. 그러고 보면 고니시 부대는 1년 가까이 왜성에 진을 치고 활동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이야기하면 비록 왜군들이 세를 잃기는 하였지만 경상도와 전라도 여기저기에 성을 쌓고 버텼던 것이다.
순천 왜성에 있는 고니시의 1만 4천 병력을 섬멸하기 위해 이순신과 진린의 2만 수군, 유정과 권율의 2만 육군 등 전체 4만 명의 조명 연합군이 포진을 하자 일대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5만 4천 명이라면 지금도 적지 않은 수인데 당시로서는 엄청난 부대가 순천 왜성을 중심으로 포진하였던 셈이다.
처음에 고니시 유키나가를 유인해 생포하려던 작전이 실패한 후 조명연합군은 본격적인 수륙합동작전을 개시하였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우리 수군은 율촌 앞바다에 있는 노루섬[장도 獐島]에 진을 치고 대치하였다. 육군 지원병까지 와서 왜성을 포위하였는데도 얼마나 튼튼하게 쌓았는지 왜성은 난공불락이었다.
왜군의 저항이 커 육군은 사상자만 내고 성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육군이 왜군을 밀어내주기만을 기다리던 수군은 왜군이 밖으로 나오길 기다릴 수만 없어 직접 성 가까이로 공격하였는데 연합수군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 그래서 또 대치 상태가 길어졌다.
사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었는데 조선에 있던 왜군들에게는 10월에야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순천 왜성에 있었던 고니시 부대도 이제는 일본으로 철수를 해야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진린과 유정을 매수해 안전한 철수를 약속 받았지만 이순신 장군이 걸림돌이었다.
무사히 빠져나갈 줄 알았다가 연합수군에게 봉쇄당한 고니시 부대는 급기야 원군을 요청하게 된다. 첩보를 접한 이순신 장군은 구원병이 올 길목을 지키기로 하고 급히 출동을 하였다.
11월 19일 새벽, 노량 앞바다에서 매복하고 있던 조명 연합수군은 일본 왜군과 정면으로 격돌하였다. 그러나 승리를 눈앞에 두고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만다. 노량해전이었다. 노량해전은 바로 순천 왜성 전투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조명연합군과 왜군이 대치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율촌 출신 의병들 가운데 주(朱)씨 성을 가진 청년 한 명이 의견을 이순신 장군을 뵙기를 청하였다. 일반 병사라면 감히 장군을 뵙기를 청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지역 의병이었기에 장군은 흔쾌히 그를 만나주었다.
“장군, 저에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을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좋은 생각이 있다고 하자 장군은 평범한 주민이 무슨 좋은 생각이 있을까 하면서도 자세히 들어보았다. 한참을 장군과 의견을 주고받던 주씨가 사람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떠났다.
다음날 아침 왜성 앞에 잘 익은 수박이 둥실둥실 떠다녔다. 그것을 본 왜군들은 군침을 삼켰다. 오랫동안 대치 상태에 있다 보니 먹을 것도 부족한데다 날씨까지 더워 목이 마르던 참에 달콤한 수박이 떠다니니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왜군 장수들이 말렸지만 수박에 눈이 뒤집힌 병사들을 막기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더구나 장수들 역시 은근히 수박 먹기를 바라던 터라 말리는 것이 적극적이지 못한 탓도 있었다.
왜군들이 앞 다투어 수박을 하나씩 건져와 깨뜨리자 갑자기 수박 속에서 벌떼가 나와 왜군들을 쏘아대니 왜성 안에서는 한바탕 큰 소란이 벌어졌다.
전날 오후의 일이다. 율촌 월산마을 출신이라 이곳 일대의 지형을 잘 아는 주씨가 율촌 출신 의병들을 몇 명 모아서 어디론가 갔다. 주씨는 장군의 명령이라며 잘 익은 수박 수십 통을 구하였다. 근처에서 수박을 재배하는 농가를 찾아갔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 하지만 그래도 수박은 잘도 익었다. 수박을 구한 주씨는 사람들을 시켜 수박 밑을 파서 속을 전부 긁어냈다. 그리고는 벌을 키우는 농가를 찾아가 수박 속에 벌을 수십 마리씩 집어넣고는 다시 수박 밑을 봉하였다. 그리고 물때와 바람을 이용하여 모래목(현 율촌면 여흥 3구)에서 신성포 왜성으로 띄워 보낸 것이다.
벌떼 소동이 일어난 며칠 후 이번에는 수박이 아니라 박이 수십 개 왜성 앞바다에 떠다녔다. 그것을 본 왜군들은 처음에는 긴장을 하는 듯하더니 자기들끼리 뭐라고 하다가 급기야 일제히 그 박을 주워갔다.
박을 주워간 왜군들은 이번에는 속지 않는다며 장작불을 피워 놓고 박을 모조리 불속에 넣었다. 그러자 불속에서 폭약이 한꺼번에 폭발하여 근처에 있던 왜군들이 몰살을 당하였다.
벌통 수박을 띄어 보낸 주씨 일행이 이번에는 박을 수십 개 모아 속을 파낸 후 벌이 아닌 폭약을 넣어 왜성으로 띄워 보냈던 것이다.
한편, 순천시 왜교성에서 가까운 여수시 율촌면 장도(獐島), 일명 ‘노루섬’에도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진왜란 때 이곳 노루섬 사람들은 왜교성의 왜군이 언제 이 섬을 점령해 올지 몰라 두려워했다. 그래서 먼저 왜군을 교란시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빈 배에 대나무 다발을 올려놓고 돛을 단 후에 그 대나무 다발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물때를 이용하여 왜교성을 향하도록 배를 띄웠다.
배가 왜교성 가까이 갈수록 불이 붙은 대나무가 터지면서 총 소리처럼 요란한 소리를 냈다. 왜군들은 그 배를 왜교성에서 내려다보고 집중 사격을 했다.
그러나 비 오듯 쏟아져 내리는 총포 속에서도 대나무를 실은 배는 계속 전진하여 왜교성은 그만 화염에 싸이고 말았다. 그때야 왜군들은 자신들이 속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얼이 빠진 왜군들은 노루섬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귀신같은 섬으로 착각하고 그 섬을 없애지 않으면 언젠가는 또 자신들을 공격해 올 것으로 믿었다. 이에 우리 수군이 잠시 물러나 있는 사이에 노루섬의 맥을 끊어야 한다며 마을 뒤쪽 산을 깊이 파고 많은 장작을 넣고 불을 질러 버렸다. 지금도 그 뒷산에서는 검은 흙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때 왜군들이 불을 질러 그렇게 된 것이라 한다.
허석 / 한국설화연구소 소장
(※ 이 설화는 여수문화원장을 지낸 故 문정인 선생님이 채록한 내용에서 기본 뼈대를 삼았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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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역시나....
감사합니다.
왜적을 공격하는 전술도 여러 가지입니다.
궁하면 이상적인 연구의 결과물도 나오지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왜성 깨기가 보기보다 힘들죠.. 요새처럼 지어져서...
역시 지혜로 이기는 것이 최고...
네에. 지혜가 우리를 살게하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