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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어머니께서 입원하셨을 때, 병실에 함께 입원하셨던 분의 얘기 중에, 아는 사람이 가래떡을 뽑았다면서 잔뜩 주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이 “이게 웬 떡이냐?”고 물었더니, 집 근처에 누가 쌀을 한 포대나 버렸길래, 그 쌀을 보니까 바구미가 많더랍니다. “이것 때문에 버렸구나”라며, 그것을 가져다가 응달에다 펼쳐놓았답니다. 그랬더니, 그 많던 바구미가 모두 사라져서 방앗간에 가서 쪄다가 떡을 한 것이라며 주더랍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버리는 것이 너무 많아”라고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요즘에는, 버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이러한 소비문화는, 우리나라가 너무 빨리 발전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무심결에 버리는 것이 쓰레기가 되고, 이로 인해 세상이 병들고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를 초래하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는 쓰레기가 없고 버려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버려지는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만큼 낭비가 많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닙니다. 본문 12절을 보시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는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합니다. 본문에서의 이 말씀은 앞선 오병이어의 사건이 너무 크기에, 가려진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사건은, 4복음서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에 나오지만, 예수님이 친히 명하신 본문의 말씀은 유독, 요한복음서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의 “주도면밀”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모든 일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며 또, 받은 은혜를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으로, 아무리 작은 은혜라 할지라도 잘 기억해서 간직하라는 겁니다. 곧, 이제 배부르게 먹었으니, 또, 은혜를 받았고, 응답을 받았으니, “이제는 됐다”라며 넘기지 말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인하여, 그들이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를 주시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음식이 조금도 낭비되지 않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배고플 때는, 단 한 광주리만 있어도 감사했을 터인데, 배부르고 나니 12광주리가 버려져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면, 참된 신앙은 배부름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남은 조각의 가능성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보관하고 기억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 삶 속에서 잊혀지지 않도록 사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을 보며, 우리 역시, 그 동안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모두 모으면, 엄청난 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본문의 무리들처럼 잊으며 살아왔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삶 속에서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들이 쉽게 잊혀지지 않도록 잘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는 가운데, 본문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는 말씀을 통해, 날마다 오병이어의 축복 속에서 아름다운 절제와 경건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5 - 7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성도는 모든 문제 해결의 근원을 하나님으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 5절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따라온 많은 무리들에게 긍휼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정신적인 황폐함과 영적인 방황을 안타까이 여기셨을 뿐 아니라, 육신적인 배고픔에도 연민의 정을 가지셨습니다. 이러한 무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바라고 나오는 것을 “눈을 들어”보셨습니다. 본문의 내용 전달만을 위해서는 굳이 이렇게, “눈을 들어”라는 표현까지 사용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라고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예수님의 지극한 관심을 강조하여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마치 목자 없는 양 같이 불쌍한 무리들을, 측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눈망울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무리의 형편을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왜? 많은 제자들 중, 유독 빌립에게 물었을까요? 그것은, 본문의 배경 장소가 “벳새다”이기 때문입니다. 요 1: 44을 보시면,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곳 지리를 잘 아는 빌립에게 물었던 겁니다. 그런데, 빌립의 조언을 구하고자, 물은 것이 아닙니다. 이에,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빌립은 수학적이고 계산에 밝은 사람이었습니다. 히 11: 1절을 보시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합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처럼 확신하고 믿는 것입니다. 빌립은 이때, “선생님, 저희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해결해 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예수님이 참으로 기뻐하셨을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빌립을 테스트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빌립에게 던진 질문은, 오천 명의 사람들을 먹일 빵을 구입하는데 얼마의 비용이 필요한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던진 질문은, 필요한 떡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질문의 요지에서 벗어난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빌립의 대답은 현실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 않고 이성에 의한 산술적인 계산에만 의존하는 모든 이들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요구에 여전히 부정적인 대답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본문 속의 빌립 뿐만 아닙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현 시대는,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하는 일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래서, 자기가 부담할 수 있는 일인지, 부담할 수 없는 일인지를 먼저 생각합니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배금주의에 익숙해져 있다는 겁니다. 본문 6절을 보면, 예수님은 기적을 통해, 그 곳에 있는 큰 무리를 모두 배부르게 먹이실 것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랬기에,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날 때, 그들에게는 길이 없었고, 목적지가 없었지만, 하나님께는 길이 있었고, 목적지가 있었듯이, 하나님께는 방법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방법이 없어서 빌립에게 물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 속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언제나, 하나님을 해결의 근원으로 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8 - 11절을 보면,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순종할 때, 문제 해결의 단초가 주어집니다.
본문은 “안드레의 보고”입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라고 합니다. 예수님과 빌립의 대화가 한참 무르익을 때, 안드레가 나섰습니다. 안드레는 자신의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했던 겁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어디서” 떡을 구할 것인가를 물을 때, 안드레는 “여기”라면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드레 역시, 오병이어가 장정만 5천명이나 되는 무리를 배불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안드레의 보고를 통해 일하셨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의 말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은, “여기”입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물음에 순종으로 행했습니다. 그랬기에, 채워야 할 나머지 부분에 대해, 예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가진 것을 다 드려도 어림없다며, 예수님께서 채워주시기를 간청했던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기적의 출처, 문제 해결의 단초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보잘 것 없습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한 끼 식사량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니까, 그것으로 오천 명이 모두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이 12바구니가 되었던 겁니다. 여러분, 모세의 지팡이가 보잘 것 없었지만, 하나님이 쓰시니까 홍해를 가르며 반석에서 샘물을 솟아나게 했습니다. 또, 다윗에게 들려진 물맷돌은 보잘 것 없었지만, 하나님이 쓰시니까 골리앗을 넘어뜨렸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연약하지만, 하나님이 쓰시면 우리를 통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약한 데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나타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성가 “약할 때 강함되시네”의 가사를 보면, “약할 때 강함 되시네 / 나의 보배가 되신 주 / 주 나의 모든 것 / 주 안에 있는 보물을 / 나는 포기할 수 없네 / 주 나의 모든 것 / 예수 어린 양 / 존귀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시간, 환경, 능력 안에서 최선을 다 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행하는 “최선”을 통해 일을 하십니다. 빌립과 안드레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빌립은 비관적이었고 부정적인 믿음을 가졌지만, 안드레는 순종하는 믿음으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겁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의도와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으로 행하는 것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든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는 단초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셔서,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2 - 13절을 보시면,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고 합니다.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본문 12절의 시작을 보면, “그들이 배부른 후에”라고 합니다. 빌립이 걱정했던 것처럼, 그 곳에 있던 무리들이 겨우 끼니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양껏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만족감은 매우 컸을 겁니다. 또, 예수님을 더욱 높여서 영웅으로 생각했을 겁니다. 벳새다 빈들에서 펼쳐진 만찬은, 예수님의 은혜로 풍성한 만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만찬을 마친 뒤에는,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왜? 하셨을까요? 우리가 잔치자리에 다녀올 때, 그 곳에서 풍족히 먹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 곳 분위기만을 생각하며, 마음이 들뜹니다. 아마, 이 곳에 있던 무리나 제자들도 그랬을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잊지 말라는 의도에서,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신 겁니다. 눅 16: 10을 보시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고 하며, 또, 눅 19: 17을 보시면,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난 이후, 여기저기 먹다 남은 빵과 물고기들이 널려져 있는 것을 보고 버려지는 음식들이 하나도 없도록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첫째, 배부름으로 인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잊혀지지 않도록 한 겁니다. 만족하면, 모든 긴장이 느슨해집니다. 그래서, 회의를 할 때는 대부분, 풍족하게 식사를 한 후 회의를 합니다. 그래야, 회의 진행시 예민한 문제가 있어도 쉽게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긴장해서, 그 은혜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욕구가 만족으로 채워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의 긴장감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버리는 음식이 없게 하라고 하신 겁니다. 둘째, 하나님이 베푸신 기적 속에서 현실의 감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에게 주신 오병이어의 기적은, 환상속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남은 음식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심으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현실을 확실하게 하신 겁니다. 셋째, 남은 음식들을 거둠으로 차후를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으로 남아있는 음식이 12광주리나 되었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은혜는 오병이어로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오병이어 한 바구니만 있어도 감사하겠다던 제자들과 무리들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12바구니나 되는 음식이 남았음에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랬기에,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군중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오면서, 하나님의 기적을 얼마나 경험했습니까? 우리가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그 당시에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이제 와서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가 대수롭지 않다고 해서 잊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그 모든 것을 다시 기억하고, 마음에 새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족을 채우시며,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심에 감사하며,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기적 가운데 풍성한 삶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