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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57편 6절-7절: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기도: 시대적으로, 지역적으로, 개인적 환경적으로, 가정적으로 너무나도 큰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이오니 이런 때일수록 아버지 하나님의 품속으로 들어가 거할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지혜를 주옵시고, 열심을 주옵시고, 개인적으로 부딪히는 환경을 과감히 뚫고 나가면서 구원을 잘 이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6절: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성도다윗의 삶의 걸음걸이는 진리통치를 받으며 이룰구원을 이뤄가는 생애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생애냐? 택한 자기 백성들 전체를 구원하는 발걸음이다. 여기에는 기본구원도 들어있고 우리의 이룰구원도 들어있다. 그러니 그 걸음걸이가 어떠해야 되겠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진대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다윗에게도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방해하는 그물이 있는데, 무엇이 우리의 신앙을 방해하는 그물일까? 자기 신앙을 죽이는 것이 무엇일까? 반대로 자기 신앙을 살리는 것이 무엇일까? 이걸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걸 알지 못하고 세월을 보낸다면 믿음 없는 사람이 되는 거다.
다윗 때의 역사적 상황을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 왕 자기에게 신속히 알릴 수 있는 조직을 짜서 사람을 사방에 깔아놓았다. 이게 그물망이다. 고기를 잡는 그물은 조직적으로 짜여있다. 매듭 하나하나가 조직이다. 그런데 사람의 조직은 그 모양새가 매우 다양하다. 범죄자 하나를 잡으려면 이 범죄자가 있을 만한 주변에 형사를 엿장수로 변장해서 심어놓기도 하고, 배추장사나 무장사로 변장해서 심어놓기도 하고, 수도나 전기 계량기 검침원으로 변장해서 심어놓기도 한다. 이게 다 사람그물인데, 사람을 그물로 표현하는 것은 치밀성을 말한다.
이방세상은 이방세상대로 사람을 잡는 조직적인 그물망이 있다. 이런 것은 다 우리의 영능의 실력을 올려주려고 허용된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다 무엇을 말함이냐? 우리가 영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여러 가지 사건 가운데서 사람들의 정신과 사상과 마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은 자기의 정신과 사상과 소원 목적을 따라 자기의 몸을 움직여 나간다. 이걸 무시하면 큰일 난다. 자기 역시도 자기의 소원 목적을 따라 몸을 움직인다. 사람은 자기의 마음이 가자는 대로 몸이 움직여야지 마음이 가자는 대로 몸이 못 가면 어떤 헌상이 일어나느냐? 고통스럽다. 스트레스가 쌓인다.
당시로 보면 다윗의 신앙사상은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께서 인정을 해 주시는 신앙이다. 이 다윗은 질적 가치적인 면에서 사울 왕이나 이방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 사상보다 더 높은 신앙정신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정신이 다 같은 게 아니다. 정신에도 수준이 있는 거다.
정신이 약한 사람이 있는데, 정신이 약하다고 해서 이 사람이 비진리냐? 그렇게만 보면 안 된다. 예를 들면 고추나무가 살찌게 올라오지 않고 약하게 올라오면 이 나무는 고추나무가 아니냐? 호박도 씨에서 싹이 올라올 때 통통하게 올라오는 게 있다. 이건 참 보기 좋다. 그런데 어떤 호박은 싹이 약하게 올라오는데, 이건 호박이 아니냐? 약하게 올라오는 것도 고추나무요 호박 줄기이지만 미래적인 열매를 생각할 때 느낌성이 달리 다가온다.
이방인들의 지식은 선악과 따먹은 죽은 지식이다. 다윗은 생명과를 먹은 산 지식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지식은 다윗의 지식을 따라올 수 없다. 죽은 자가 산 자를 어떻게 따라오느냐? 다윗의 지식은 영적인 면으로 뛰고 있는데 육적으로 뛰는 안 믿는 사람들의 지식이 어떻게 다윗의 영적인 지식을 따라오겠느냐? 질적으로 못 따라오는 거다. ‘못 알아듣는다’가 아니라 못 따라온다. 왜냐? 근원이 다르고 결과가 다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안 되는 거다.
만일 다윗이 진리지식을 버린다면 다윗은 이방인들의 지식의 수준과 같아진다. 반대로 사망적인 지식으로 사는 이방인이 생명과 따먹는 다윗의 지식으로 전환을 하면 다윗의 지식을 따라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말을 잘 한다, 잘 못한다. 재미있다, 재미없다’ 이게 문제가 아니라 설교의 내용이 근원적으로 생명적 지식에서 나오는 말이지, 사망적 지식에서 나오는 말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지식의 수준이 근원적으로 질이 다른 게 있는가 하면 질은 같은데 수준이 차이가 나는 것도 있다. 본 절에서 사울 왕에 대해 말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질이 다르다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라 사울 왕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신앙지식의 질은 다윗과 같은데 신앙의 수준면에서 다윗에 비해 아주 저차원임을 말하는 거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이방인들이나 이방신의 수준과는 그 뿌리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그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거다. 예수님께서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죄 많은 인간차원으로 내려오셨는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의 모든 지식을 다 버리고 선악과 따먹고 죽은 지식의 차원으로 사는 거냐? 그건 아니다.
오늘날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사단 마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울 왕처럼 질적인 면에서 신앙지식의 수준이 세상 것을 가르치는 거짓 종들의 가르침이 큰 문제인데, 거짓 종들이 세상의 소원 목적에 성경구절을 포장해서 말을 하면 교인들은 이게 그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따라가고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세상적 육적 비진리적인 이론과 학술의 주장들이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의 이룰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방해를 하려고 기독교 제도를 타고 교회 안에서 잘 짜여진 그물처럼 조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으로서 신앙이라고 할 때는 무엇을 먼저 봐야 하겠느냐?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으로서 무엇을 먼저 첫째 우선적으로 봐야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이 하나님의 본질적인 말씀인지를 먼저 봐야 한다. 그 다음에 교회가 기독교 조직 안에 들어가서 기독교의 제도를 다 따르며 성경대로 한다고는 하는데 신앙정신이 하나님의 본질이 아닌 이방 종교적인 지식이나 세상지식으로 되어있다면 이것은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니 참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오늘날 이게 문제다.
오늘날 교회의 많은 종들이 교회를 볼 때 ‘본질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별로 관심이 없고, 이 본질은 두 번째나 세 번째로 뒷전으로 밀어놓고 이 교회가 어느 조직에 들어있는지를 먼저 본다. 정통적인 기독교 조직에 들어있으면 그 교회가 이단적인 설교를 해도 괜찮은 거고, 남들이 이단이라고 하는 교회가 진리본질의 말씀을 전해도 이 교회는 이단인 거냐? 교회가 어느 교단인지, 어느 소속인지, 어느 조직에 들어가 있는지 이런 것은 있어도 그만이요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데 세상 속화된 종들은 진리본질의 교훈보다 이런 걸 더 중요시 하고 우선시 한다.
사단 마귀의 조직이 어디까지 들어올 수 있는 거냐? 교회 안에도 있을 수 있고, 성경을 들고 말씀을 전하는 곳에도 있을 수 있는 거다. 그래서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종들은 분별을 잘 해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먼저 본질적인 교훈을 자기의 신앙지식으로 가져야 하고, 여기서 머무는 게 아니라 더 나아가 이 본질적인 신앙지식을 자기의 인격화 시켜야 한다. 진리본질의 신앙지식을 자기 인격화 하게 되면 이 사람의 모든 이해타산, 평가성, 모든 소원 목적은 전부가 성령님이 보시는 눈으로, 주님이 보는 눈으로 들어가게 된다.
자기가 진리본질로 인격화가 되려면 먼저 지식적으로 진리본질의 지식을 알아야 하고, 진리지식을 알았으면 사건 환경을 겪으면서 깨달은 진리지식을 써먹으면 써먹는 대로 점차적으로 진리지식이 자기의 인격화로 된다. 이처럼 인격적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면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되고, 가르칠 때도 영적인 면에 수지계산을 놓고 가르치게 된다.
예수를 믿느라고 노력과 시간과 물질과 몸과 목숨까지 바쳐서 열심히 충성봉사를 했지만 자기가 진리본질의 사람으로 인격화 된 것이 없다면 이건 이용당할 대로 다 당한 거고, 하나님께 심판은 심판대로 받게 되고, 생명적으로 이룰구원을 이룬 것이 없이 사망성공만 이루게 된 거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냐?
내가 스승목사님으로부터 이 진리교훈을 안 후에 나의 과거를 생각하면 얼마나 억울한지 모른다. 그 때 당시 누구보다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충성봉사도 열심히 하고, 교회의 일이라면 내 일은 뒷전으로 미루고 제일 먼저 뛰어가서 하니까 목사님이 나를 총각집사로 세웠다. 그러나 지금 진리말씀을 깨닫고 보니 내가 과거에 그렇게 했던 일들이 얼마나 억울한지 모른다. 왜냐? 목사라면 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본질을 말해줘야 하는데 이건 없이 맨 충성봉사나 가르치고, 늘 교회에 붙어있는 게 믿음이고 의고 정의라고 하며 맨 종교적 개념으로 가르쳤으니 나는 그게 하나님의 말씀이려니 하고 열심히 충성봉사를 한 거다. 그러니 지금 와서 깨닫고 보니 그 때의 나를 생각할 때 얼마나 억울한 일이냐?
오래 전에 그 목사님을 찾아가서 내가 깨달은 진리본질의 교훈을 한 시간 이상 말을 해 줬는데, 그런다고 해서 그 목사님이 수십 년을 그런 신앙으로 굳어진 상태인데 내가 두 세 시간 말을 한다고 해서 돌아서겠느냐? 그 교회에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사건이 일어나고, 교인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목사가 쫓겨나는 일이 일어나는데도 못 깨닫더라.
이런 걸 볼 때 자기의 사고방식이 잘못된 교훈으로 굳어지면 설령 옳은 교훈을 받더라도 바로 될 때까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는 거다. 그렇다고 해도 자기가 그동안 잘못된 교훈을 받아왔다는 것을 알았고, 이제 진리의 종으로부터 옳은 교훈을 받는다면 이제는 진리의 종의 말씀을 받으면서 천국을 향해 방향을 잡고 계속해서 냅다 뛰어야 한다. 이래야 옳은 거고, 이래야 빨리 본질에 정착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 교회가 있는 거고, 종들이 있는 거고, 선지자가 있는 거다. 이걸 무시하면 안 된다. 아무리 목사안수를 받았다고 해도 자기가 다 된 것처럼 선지자적 권한행사를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내가 이런 목사님을 볼 때 ‘아이고, 이거 캄캄하구나. 바로 가기가 참으로 어렵겠구나’ 이렇게 보인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셀라).’ 자기가 판 웅덩이를 몰라서 자기가 빠진다? 참 이상하다. 실지로 이런 일은 흔치 않다. 악한 자들이 다윗을 잡으려고 웅덩이를 팠지만 오히려 그들이 그 웅덩이에 빠졌고 다윗은 이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다는 말인데, 다윗을 웅덩이에 빠지게 하려고 하다가 자기가 거기에 빠진 자가 하는 말이 ‘아차, 다른 곳에 웅덩이를 팔 걸’이라고 하면서 다른 곳에 웅덩이를 판다면 이 웅덩이에 자기는 안 빠지고 다윗이 빠질까? 이 웅덩이에도 다윗은 안 빠지고 자기만 빠지게 된다. 원리가 그런 거다?
실질적으로 다윗은 악한 자들이 다윗 자기를 잡으려고 웅덩이를 판 것을 미리 알았기 때문에 살짝 비켜간 거냐? 우리는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다윗은 악한 자들이 자신을 잡으려고 웅덩이를 판 것을 보나 안 보나 미리 다 아는 수준의 지식을 가졌다. 그러니까 ‘이건 웅덩이다. 웅덩이가 아니다’ 하는 것을 보지 않고도 자기의 지식이 척 척 아는 거다.
그러면 이게 어떤 웅덩이를 말하는 거냐? 신앙 면에서 보면 지혜지식적인 웅덩이가 있고, 도덕성적인 웅덩이가 있고, 사랑으로 오는 웅덩이가 있고, 물질로 오는 웅덩이가 있고, 시간적 활동적인 웅덩이가 있다. 믿는 우리들에게 웅덩이가 굉장히 많다. 사람을 넘어뜨리려는 웅덩이가 상당히 많다. 자기가 어떤 면으로 좋아하느냐에 따라 자칫 잘못하면 여러 웅덩이 중에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빠질 수 있다. 물질목적으로 유혹을 하면 어떤 자가 이 웅덩이에 빠질까? 물질 소원성을 가진 자는 100% 빠지게 되어있다.
다윗은 자기를 빠뜨리려고 파 놓은 웅덩이를 미리 알았고 빠지지 않았는데 다윗을 잡으려고 한 멍청한 그들은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졌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파 놓고도 그것이 함정인 줄을 몰랐다는 거다. 이렇게 되니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되어버렸다. 신앙 면에서도 이런 일이 있다.
일반적으로 짐승을 잡기 위해 땅을 파서 웅덩이를 만드는데, 이렇게 파 놓은 웅덩이는 판 사람만 아니라 그 주변을 지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이 사람을 빠뜨리려고 하는 웅덩이를 많이 파 놓는데, 이 웅덩이는 주로 사람의 말로 된다. 사람이 이 함정에 빠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함정을 판 자들에게 이용당하고, 피해를 당하고, 죽기도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을 당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된다. 그러니 이미 지나간 것을 어떻게 보충하겠느냐?
우리가 정신적 사상적 신앙 이치적으로 보면 사람이 정신 사상적으로 함정에 빠지게 되면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아래로 내려간 것이니 아래로 내려간 사람은 어디를 쳐다보게 되느냐? 위를 쳐다보게 된다. 이게 뭐냐? 정신적으로 세상에 빠지게 되면 세상과 세상 것을 돋보고 부러워하게 된다는 거다. 반대로 세상을 돋보고 부러워한다면 이 사람은 어디에 빠졌다는 거냐? 세상 밑으로 빠진 거다.
세상을 부러워하는 것은 자기는 그 밑에 있다는 증거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진 거다. 세상 것을 소원 목적하고 세상 것을 부러워하고 있으면 그 밑에 빠진 사람이다. 정신적 현상이 그런 거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것이 부럽다면 정신적인 면에서 세상으로 내려간 거다. 자기가 모든 사람보다 아래로 내려가게 되면 이 사람이 고상한 생각을 하겠느냐, 저질적인 생각을 하겠느냐? 저질적인 생각을 한다. 사람이 저질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세상에 빠진 거다. 저질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은 세상에 빠졌다는 증거다.
아래로 떨어진 사람은 늘 낮은 생각을 한다. 기독자인 경우에 천국사상이 아니라 땅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세상이라고 하는 함정에 빠진 거다. 자기가 정신적인 면으로 어떤 함정에 빠지게 되면 자기가 어느 환경에 빠졌다고 하는 것을 말로, 소원성으로, 목적성으로 나타내게 되어있다. 그래서 자기의 속을 못 속인다.
우리가 영의 눈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세상 물질적, 육적 신앙정신 사상을 가진 사람은 전부가 세상이라고 하는 웅덩이에 빠졌다고 보는 거다. 다윗은 이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함정을 판 자들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지금의 우리가 제 삼자적 입장에서 다윗의 눈을 가지고 이 장면을 보면 다윗은 악한 자들의 함정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거고, 반대로 악한 그들은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자격증이나 입사시험을 보통 주일날 치는데, 주일날이라고 해서 이런 시험을 안 치면 생계에 지장이 오게 된다. 이런 게 다 성도들에게 오는 사단 마귀의 장난들인데, 이건 뭘 꺾으라는 거냐? 신앙정조 신앙절개를 꺾으라는 거다. 그러면 주일예배 시간이 1부, 2부, 3부, 4부, 5부로 나눠져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예배를 드린 후에 시험을 친다면 이거는 신앙정조를 지킨 거냐? 먼저 예배부터 드린 후에 시험을 치는 것과, 시험을 친 후에 예배를 드리는 것과 이 둘의 신앙정신이 같은 거냐, 다른 거냐? 먼저 예배부터 드리고 시험을 치러 가면 다 100점을 맞고, 예배를 안 드리고 시험을 치면 아는 문제도 다 틀리는 거냐? 이게 별 것 아닌 것 같으나 성도들의 함정들이다.
함정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거냐, 안 보이는 거냐? 눈으로 보아서 알 수 있는 거냐, 알 수 없는 거냐? 함정은 알 수 없게 되어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이치를 알기 때문에 함정에 빠지지 않지만 악한 자들은 자신들이 함정을 파기 전에 이미 함정에 빠진 거다. 왜냐하면 그들이 악한 생각, 낮은 생각, 저질적인 생각을 가진 것은 전부가 함정에 빠진 생각들이기 때문이다. 다윗처럼 고차원적인 생각, 진리의 생각을 가진다면 함정에 빠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상을 돋보고 부러워하는 눈을 가졌다면 이 사람은 이미 함정에 빠진 거고, 또한 빠지게 되어 있는 거다. 지식적으로 이미 빠진 거고, 이렇게 되면 사건적으로 빠지는 것은 자동적이다.
세상은 온 사방에 육적 세상적 비진리적 사상과 미혹과 유혹들이 거미줄처럼 깔려있다. 성도가 이 이치를 모르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된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게 되면 악한 자들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절대로 물질욕심을 부리지 말아라. 남 원망하지 말아라. 인간과 싸우지 말고 신앙정조를 지키면서 꾸준히 나가야 한다.
세상적인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을 때 성도는 어떻게 보면 져주는 것이 이기는 거다. 이것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옳은 것을 밝혀야 할 때는 분명해야 한다. 이러다가 자칫 잘못하면 자기가 잘못된 것으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만 옳다면 언젠가는 자기의 옳음이 밝혀진다. 진리를 분명히 밝혀야 하는데도 이래도 가만히 있고 저래도 가만히 있고 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옳은 것을 말할 때는 신앙적인 면에서 자세가 분명해야 하는데 이런 건 별로 없고 인인관계에서 뭔가 야속하고 손해가 되는 게 있으면 따지고 싸운다면 이 사람은 마음이 좁은 거고, 사람을 잃게 된다. 그리고 옳은 진리를 못 받게 된다.
7절: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진리성도 다윗이 무슨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하느냐? 노래하고 찬송하는 마음이 확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전에는 다윗이 찬송을 안 했던 건가? 찬송을 안 하기로 했는데 다시 찬송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건가? 찬송을 안 하는 버릇이 들어서 찬송을 다 까먹었는데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찬송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건가? 다른 사람들이 다윗에게 잘 해주니까 찬송이 나오고, 잘 해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빠서 찬송이 안 나왔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기의 이런 마음이 부끄러워서 이제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누가 잘 해 줄 때나 잘 못 해 줄 때나 찬송을 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는 건가?
찬송은 언제고 부르고 싶으면 부르면 되는 것이지 어떤 마음이 들었기에 찬송을 부르기로 마음을 먹었다는 걸까? 우리가 앞 절과 연관해서 볼 때 사람이 알면 기쁘고, 깨달음이 오면 기쁘다. 또 이기면 기쁘고 지면 슬프고 고통스럽다. 또 분별이 되면 속지 않게 되니 기쁘고, 함정을 알면 빠지지 않게 되니 기쁘고, 높은 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래가 훤히 다 보여서 기쁘다. 이기니 고상해져서 기쁘고, 이기니 평안이 와서 기쁘다. 이게 다 신앙차원을 말하는 거다.
기쁜 것이 한두 가지겠느냐? 우리는 좋은 사건이던 나쁜 사건이던 그 가운데서 깨달을 것이 있고 깨달아지니 찬송이 안 나오려야 안 나올 수가 없는 거다. 사람이 깨달아지면 찬송이 나온다. 사람이 하나님의 옳은 것을 찾으려고 하다가 ‘아, 바로 이것이다. 내가 이제야 찾았다’ 하고 마음 속에서 확정이 되면서 지금까지 궁금했던 수수께끼들이 다 풀려나간다면 그 마음이 기뻐서 저절로 찬송이 나오게 되어있다. 사람은 마음이 기쁘면 찬송이 나오고, 웃음이 나오고, 평안해진다. 이건 사람에게만 있는 거다. 짐승에게는 없는 거다.
그러면 다윗이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서, 주님을 따르는 종으로서 마음에서부터 찬송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뭘까? 오늘날 기독자들의 세계에서 왜 찬송이 나오느냐? 세상 물질적인 요소들이 자기 마음대로 풀려나가니 찬송이 나오느냐? 하나님의 종들의 세계가 돈이 붙으면 찬송이 나오고, 주머니에 돈이 떨어지면 찬송이 안 나오느냐? 말하자면 환경에 피동 되어 환경의 소산물로 살고 있느냐 그 말이다. 우리는 다윗에게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다윗의 찬송을 부르려면 다윗의 신앙이 들어가야 한다. 새사람 속에서 찬양이 나와야 진짜 찬양이지 찬양을 부르기 위한 찬양은 찬양이 아니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