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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행(中國紀行)
秀峯 鄭用眞 詩人
오래 전부터 중국의 명소를 찾아보고 싶었다. 중국은 땅이 넓고 산이 높아 나이를 더 먹으면 관광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 아내와 서둘러 계획을 세우고 2013년 10월8일부터 21일 까지 11박 12일의 여정으로 집을 나섰다.
미국에서 삼호관광을 통하여 동행한 34명의 일행으로 로스엔젤레스 공항을 떠나 고국의 인천공항을 경유하여 중국의 수도 북경(베이징)도착하여 여장을 풀고, 강행군의 여정이 시작 되었다. 중국은 2004년 북한방문길에 만리장성과 자금성 그리고 이화원을 본 터이지만 이번에도 첫 여정이 천안문 광장과 자금성 관람으로 시작 되었다.
여행은 본래가 틀에 박힌 일상을 잠시 떠나 떠도는 구름처럼, 흘러가는 물결 같이(行雲流水)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게 운행하는 여정이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기에 항상 바쁘고 힘에 벅찬 것이 여행이다. 그러나 돌아온 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 또한 여행의 보람이다. 오늘은 이 마을에서 먹고(東家食), 내일은 저 마을에서 자고(西家宿) 하는 것이 방랑자의 혼이 깃든 낭만인의 행로다.
중국은 세계에서 캐나다 다음으로 국토가 넓고 인구가 13억을 넘는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다. 이들은 자고로 자만심이 몹시 강해 자신들은 세계의 중심인 중화(中華)라 칭하고, 동쪽은 동이(東夷). 서쪽은 서융(西戎). 남쪽은 남만(南蠻). 북쪽은 북적(北狄).이라 하여 모두 오랑캐로 취급하였다.
그리고 자국의 통치자는 하늘이 내린 천자(天子)라 부르거나 황제(皇帝)라 칭하고 이웃 약소국가들에게는 왕(王)의 칭호를 주어 조공을 바치게 하고 복속케 하기가 일수였다.
중국화인민공화국은 행정구역이 23성. 4직할시(북경. 상해. 중경. 천진)와 5자치구(내몽고. 티벳, 서장. 광서, 장족. 영화, 회족. 신장, 위그루.)로 구성되어 있다.
종교는 국가의 승인을 받아 불교. 천주교. 기독교. 도교. 이스람교가 있고, 명 요리로는 북경요리. 산동요리. 회양요리. 사천요리. 광동요리 가 유명하다.
여행 첫날인 11일에는 천안문 광장을 찾았다.
천안문은 명나라 영락(永樂)제 15년(1417년)에 지어졌다. 지어질 때에는 천명(天命)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에서 승천문(承天門)이라고 불렀는데, 전화(戰火)로 소실되어 청나라 순치(順治)8년(1651년)에 재건되었고 그 때부터 천안문으로 불리었다.
명, 청시기 황성(皇城)의 정문으로 지붕은 2중으로 되어있고 황색 유리기와를 사용하였다. 성루(城樓)의 높이는 34.7미터, 동서의 칸수가 9칸, 남북이 5칸이다. [9.5]라는 숫자는 제왕의 존엄을 암시한다는 뜻이다. 기단에는 5개의 통로가 있고 황제는 중앙의 문으로 출입하였다. 명, 청나라 때에는 황제의 칙서를 발하는 의식이 이 천안문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천안문의 정면에 걸려있는 것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장(國章)이고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모택동 주석의 초상화이다. 그 양쪽에는 슬로건인 "중화인민공화국만세(中華人民共和國萬歲)"라고 쓰여져 있다. 중국에서는 모택동과 등소평은 중국 근대화의 상징으로 많은 존경과 사랑을 받는 것을 보고 퍽 부러웠다. 우리나라의 정치가들도 이런 대접을 받는 진정한 지도자가 나오기를 바란다.
천안문이 세계 각국에 알려지고 또 중국을 상징하는 건물로 된 것은 1949년 10월1일 모택동주석이 천안문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였다고 선언하고서부터였다. 그 후 천안문은 1976년 4월5일 중국 인민들의 폭력적인 유혈사태가 난 곳으로 도 유명하다.
계속하여 자금성(紫金城)을 관광하였다. 북경시의 중심에 위치한 명·청대의 황궁으로, 천안문 정문으로 들어가 울창한 가로수 길을 따라 단문과 오문을 지나 보이는 곳이다. 중국에서는 고궁(故宮)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게 이용되고 있으며 '자금성'이라는 이름은 "천자의 궁전은 천제가 사는 '자궁(紫宮)'과 같은 금지 구역(禁地)이다"는 데에서 연유된 것이다. 전체 면적은 72만㎡이며, 총 9999개의 방이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대 궁전 건축물이다.
1406∼1420년에 건조된 이래로 5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15명의 명나라 황제와 9명의 청나라 황제가 일생을 보냈고, 현재는 105만점의 희귀하고 진귀한 문물이 전시, 소장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자금성은 외조와 내정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오문과 태화문을 지나면 흔히 '3전'이라 부르는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이 나타난다. 3전에서 안쪽으로 들어가면 자금성의 내정에 이르게 되고 이곳에는 건천궁, 교태전, 곤녕궁 등이 있으며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동육궁과 서육궁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나라 궁전의 강녕전 교태전 동궁 서궁 등이 여기에서 영향을 받은 듯하다.
방어의 목적으로 궁전 밖에는 10m 높이의 담이 있는데, 사방에는 성루가 있고 밖에는 넓이 52미터, 깊이 6미터의 호성강(護城河)이 흐른다. 4면의 담에는 각기 문 하나씩이 나있는데 남쪽에 오문(午門), 북쪽에 신무문(神武門), 동쪽에 동화문(東華門), 서쪽에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자금성에는 나무. 변소. 굴뚝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변소는 공동용으로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이다. 한옥 마을에는 사합원(四合園)이 있는데 아들은 동쪽 동궁에, 딸은 시집으로 떠날 몸이기에 해가지는 서쪽 서궁에, 북쪽에는 첩살이 살았고, 남쪽에는 창고가 있고 하인들이 살았으며, 초록색 기와집에는 황제의 가족들이 살았고, 황금색 기와집은 왕궁이며 황제가 살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전설로는 궁전이 1천 칸에 이르므로 노비가 자기의 방을 못 찾아 며칠을 헤매다가 굶어 죽었다고 전한다.
다음 날에는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용경협(龍慶峽)을 찾았다.
만리장성은 흉노족 등의 북방민족을 막기 위해 BC 208년 춘추전국시대 때 제나라에 의해 처음 착공된 후 고대 진나라(시황제)때까지 세워져 현재까지 존재하는 오래된 성곽으로 중국인들은 평소에 만리장성 보다는 장성(長城)이라고 부른다. 그 규모의 거대함 때문에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인공 건축물'이라고 거론되었으나, 2004년 12월8일, 우주 공간에서 사람의 눈으로는 관측할 수 없다는 것이 중국과학원에 의해 확인되었다. 만리장성은 문화, 역사, 건축적 가치 등이 높이 평가되어 1987년 12월 유네스코 본부에서 개최된 제11차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흔히 사람들은 만리장성은 진시황이 쌓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진나라 이후 중국을 차지한 여러 나라들에 의해 계속 보강되어 왔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만리장성은 대부분 명나라 때 건설된 것이다.
기원전 7세기 경 중국이 진, 조, 연등 여러 나라로 갈라져 서로 세력을 다투던 춘추전국시대에 북쪽의 이민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자국의 방어를 위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에 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시기에 쌓은 성을 호방장성(互防長城)이라고 한다. 그 후 진나라가 기원전 221년 중국을 통일한 후에 중국 북방의 여러 성을 이으면서 필요한 곳에 더 쌓았는데, 이것이 만리장성의 시작이다. 이 시기의 장성은 흙으로 쌓은 것이기에 말이나 사람들이 넘어 다니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정도로 높은 성벽은 아니었고 현재 쌓여진 장성의 위치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며 요동반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시기에 쌓은 성을 진장성(秦長城)이라고 부른다.
전한시대 무제는 흉노를 몰아내고 영토을 확장하면서 장성을 서쪽의 옥문관까지 확장시켰고 장안에다 한나라를 세우면서 역시 자기나라를 보호하는 성을 쌓았는데이 시기에 쌓은 성을 한장성(漢長城)이라한다.
그 뒤, 오호십육국 시대에 이민족의 힘이 강해지고 북위는 장성의 위치를 남쪽으로 옮겨 현재 위치에서 새로운 장성을 쌓았다. 그러나 이후 북방민족이 세운 국가인 거란의 요나라, 여진의 금나라, 몽골의 원나라는 장성을 넘어 침입하여 중국은 3세기 동안 북방민족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가 세워진 뒤 북방민족의 재 침입을 막기 위해 장성을 강화하여 지금 형태의 장성이 완성되었는데 이를 명장성(明長城)이라 부른다. 명장성은 벽돌로 쌓은 구조가 완벽한 장성이고 관리가 가장 잘 되어있으며, 배치가 조화롭게 되어 있다. 이어서 북경의 작은 계림이라 불리는 용경협(龍慶峽)을 찾았다.
용경협(龍慶峽)은 중국 북경 북부에 있는 협곡의 이름이다. 계곡의 모양이 마치 '용'과 같다고 하여 용경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73년 중화인민공화국 장쩌민 주석이 용경협을 둘러본 뒤 특별 지시를 내려 계곡에 댐을 짓고 인공 호수를 만든 뒤 배를 띄워 관광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베이징에서 자동차로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댐의 아랫부분에서 댐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 용 모양의 에스컬레이터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한다. 곳곳에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관광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유람선을 타고 강의 상류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하류로 돌아내려온다. 깎은 듯 한 기암절벽에서 번지점프를 즐길 수 있다. 강물의 색깔은 파랑색이 아니라 짙은 초록색이다. 겨울에는 영하 20도까지 온도가 떨어지며 빙등축제가 열린다. 용경협 근처에 만리장성 팔달령 구간이 있다. 계곡을 시원하게 내려 쏟는 폭포가 일품이다.
기암괴석과 여인의 젖가슴처럼 아름답고 등근 산을 바라보면서 유람선으로 용경협을 오르는데 좌우에서 남녀가 사랑의 노래를 구성지게 부른다.
본래는 남녀가 함께 불렀는데 서로 간에 사랑이 불타서 떼어 놓았단다. 그 후 남자가 자기의 심금을 울리는 사랑의 노래를 부르면, 여자가 찾아가서, 또 여자가 사랑의 노래를 부르면 남자가 찾아가서 자기 마음에 들 때 상대방의 발을 밟으면 결혼의 의사가 있음을 알리는 정표라 이것이 곳 약혼인데 만일 남자 쪽에서 여인이 맘에 안 들어 파혼을 하면 여자의 집에 가서 3년 동안을 농사를 지어주며 머슴살이를 해야 되고, 여자가 파혼을 선언할 경우에는 앞으로 3년간은 다른 연인과 약혼이나 결혼을 할 수 없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 다음 차례로는 이화원을 찾았다.
이화원(頤和園)은 1998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이 된 중국에서 최대 규모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완전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는 황족 정원이다. 특히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더 유명하다. 북경 서쪽 외곽인 해정구(海淀區)에 위치해 있으며, 북경 시내에서는 15㎞ 떨어져 있다. 이화원의 전신은 북경 청의원으로, 후에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원명원을 불태웠을 때 함께 파괴되었다. 그러다가 광서 14년(1888)에 서태후는 해군 군비를 이용해서 다시 재건했으며 이 때 이름을 현재의 "이화원"으로 바꿨다. 1900년, 이화원은 또다시 팔국 연합군의 선공을 당했다. 서태후는 서안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에 다시 거대한 자금을 들여 복구에 나섰다. 이화원은 무엇보다도 규모가 실로 엄청나며 총면적이 294㎡이다.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昆明湖)와 호수에서 파낸 흙으로 쌓은 만수산(萬壽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수면이 전체의 3/4을 차지한다. 서태후가 이화원에 이처럼 각별한 관심을 둔 목적은 피서와 요양이었으며, 1903년부터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냈다.
서태후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국정을 논할 일이 많이 생기자 정원 앞부분에 궁전과 생활거주 지구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화원은 궁전과 정원 두 가지 기능을 모두 갖춘 황족 정원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서태후는 항주의 서호를 본 따서 곤명호를 만들었다고 전한다. 서호. 곤명호. 이태백이 달을 건지다 빠져 죽었다는 동정호 모두가 중국의 명 호수로 유명하다.
만수산 북쪽에 있는 건물은 그 규모가 웅대하여 천간낭하(天間廊下)라 불리며 서태후의 별궁으로 유명하다. 청조에 건륭제(乾隆帝)가 많은 전각을 세웠다 한다.
이화원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곤명호는 인공호수이지만, 인공호수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나다. 겨울에는 얼음이 얼어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사람을 볼 수 있으며, 여름에는 보트와 곤명호 위를 운행하는 유람선을 타고 뱃놀이를 즐기는 많은 사람들을 볼 수 있다.
특히 곤명호 동쪽 기슭에 있는 17 공교의 난간에 새겨져 있는 544마리의 사자도 볼 만하다. 또한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은 역시 곤명호를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인공산으로 화려한 누각이 있으며 이화원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어서 역시 인기가 좋다.
이화원의 주요 명소들로는 정문인 동궁문(東宮門)을 비롯해, 덕화원(德和園), 장랑(長廊), 향각(佛香閣) 등이 있다. 동궁문은 이화원의 정문으로 삼명양암(三明兩暗)의 무전식 건축양식이 사용되었으며, 덕화원에는 중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큰 규모의 경극극장이 위치하고 있다. 높이 21미터에 상, 중, 하 3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장랑은 동쪽으로는 요월문(邀月門)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석장정(石丈亭)까지 전체길이 728미터에 총 273칸의 화랑으로 이어진 복도 건축물로 중국에서 가장 크고, 길며, 유명한 장랑(긴 복도)이다. 마지막으로 불향각은 만수산 앞의 산비탈 길에 세워진 높이 21미터의 거석 위에 세워진 전각으로 남쪽으로는 곤명호를 향하고 있고 뒤쪽으로는 지혜해불전(智慧海佛殿)을 기대고 있다. 이화원을 본 후 4일째 여정으로 계림(桂林)으로 향하였다.
중국 남부에 위치한 계림(桂林)은 수많은 봉우리들이 겹겹산천을 이루고 있어서 동양화의 배경은 물론, 세계 각국에서 여행자와 사진작가들이 몰려드는 곳이다. 계림은 1억 5천만년 전에 지각변동으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계수나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향기로움이 그윽하다는 의미로, 계수나무가 유독 많아서 가을이면 도시 전체가 계수나무 향기에 휩싸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계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이강(漓江) 유람이다.
계림은 광서성 (廣西省) 동북부에 위치해 있다. 아열대 기후에 속해서 기온이 온화하며 연평균 기온은 19℃ 정도이다. 인구는 약 50만 명이다.
계림 공항에 도착하면 공항에서부터 시내로 들어가는 모든 가로수가 대부분 계수나무로 이뤄져 있는 점도 이곳이 계림시임을 한 눈에 알 수 있게 해준다.
이곳은 약 3억 년 전에 원래 바다였다가 지각 운동으로 인해 바다에 쌓여 있던 석회암이 육지위로 상승한 형태다.
풍화와 침식작용을 거친 후에 비로소 지금과 같은 지리 형세가 이루어졌다.
연평균 기온은 18 정도이고 아열대 기후로 4계절 내내 따뜻한 편이다. 주민들이 생활하기 적당한 편이다.
이곳에는 강이 발달하여 오래 전부터 하천교통의 요충지로 이용 되었으며 이강 자체가 교통수단뿐 아니라 산세가 수려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끊임없이 찾아드는 곳으로 더욱 유명하다. 오늘날에는 상계(湘桂)철도가 개통되어 전통적인 상업 외에 면방직을 중심으로 한 화학·정비·농기구·제사·제지공업이 활발히 발달하고 있다.
계림은 광주에서 비행기로 1시간거리이며 북경 ,상해, 서안 ,성도, 곤명등 중국의 주요 도시는 물론 홍콩에서도 비행기로 직접 연결된다. 계림 신공항은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공항이다. 우리나라에서 가려면 상해를 거쳐 계림으로 가던지, 북경을 거쳐 계림으로 들어가도 된다. 상해를 거쳐 가는 것이 상해의 아름다운 대도시 풍경을 본 이후 계림을 함께 들러보는 것이 좋다.
桂林에 와서
秀峯 鄭用眞
계림에 와서
산수(山水)를 보니
산은
왕소군(王昭君)의 가슴처럼
봉긋봉긋 솟아있고
호수는
초선(貂蟬)의 눈물을 닮아
방울방울
玉 구슬이구나.
청산이 둘러서서
가슴 조여 짜낸 진액
高粱酒로 농익어
저리도 넘쳐나니
양귀비(楊貴妃)는 가야금 뜯고
서시(西施)는 춤을 추고
물위에 배 띄워
달이 지도록
太白. 杜甫. 東坡와 짝하여
詩를 짓고 대작(對酌)하며
흥에 취한 후
이 밤도 선경에 잠들어
신선(神仙)이 될 가하노라.
중국여행의 절정 이강유람
계림에서 시작하여 양삭까지 60km에 이르는 리강의 물길을 따라서 중국 옛시인 도연명이 말한 '무릉도원'을 찾아 나서는 듯 한 착각에 젖어보자. 이강에서 유람을 하지 않고서는 계림을 논할 수 없다. 라고 할 정도로 이강의 산수는 빼어나다. 특히 이강 주변에는 관암동굴과 은자암 동굴도 있어 색다른 볼거리도 제공한다. 많은 볼거리와 전설을 가지고 있는 이강은 계림을 대표하는 강으로써 계림 여행의 하이라이트 관광지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이강에서 풍류를 즐기며 여유를 만끽하다 보면 마치 신선이 된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계림의 이강은 옛 진나라 진시황의 군수 물 수송을 하던 강이었다. 그 경관이 수려하며 몇 억년의 흐름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또한 산마다 동굴이 발견되고 있는데 리강의 4보는 다음과 같다. 1)桂花魚(민물고기) 2)물소 3)가마우찌 4)鳳竹. 중국의 남쪽을 화남(華南)지방이라고 하는데 북쪽에 비해 기후가 따뜻한 것은 물론이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약 3억 년 전에는 바다 밑이었는데 지각변동에 의해 치솟은 카스트지형으로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1만5천여 개에 이른다고 한다.
기괴한 석회석으로 이루어진 관암동굴
계림으로부터 약 10㎞의 거리, 남쪽 초평향에 있는 멋진 종유동굴이다. 관암의 길이는 12㎞이며 이미 리강에 근접한 3㎞는 개발이 되어 있다.
석회석이 녹아내려 동굴의 기이한 형상을 이루고 있는데 내부 모습이 가히 절경이다. 관암 동굴은 오랜 기간 동안 폐쇄되어 있었기 때문에 보호가 잘 되어 있어 동굴 안에는 종유석, 석주, 석순 등이 모두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동굴의 입구가 높으며, 리강 유람선을 타고 난 후 바로 관암동굴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이곳 동굴 입구에 설치되어 있는 수동식 전동 열차가 운치 있고 여행의 맛을 더욱 즐겁게 해준다.
계림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첩재산
계림시 동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첩재산은 색깔 있는 비단을 포개놓은 것과 같은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강, 독계봉과 인접하며 그 이름도 이러한 산의 형상을 본뜬 것이라 한다. 첩재산은 4개의 봉우리로 되어있고, 산에 올라가면 계림 시내 전체를 감상 할 수 있다. 또한 해발 223m의 가장 높은 명월봉에서는 ‘풍동’이라 불리는 호리병같이 생긴 동굴이 있는데, 동굴 벽에는 불상, 그림, 시 등이 새겨져 있다. 이 외에도 첩채정, 월각, 인지당, 첩채누, 망강정 등 볼거리들이 많이 있으며, 정상까지는 등산객을 위해 설치되어 있는 계단을 이용해 약 20분 정도가 소요된다.
코끼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이름 붙여진 상비산 관광
계림의 그림엽서에 빠짐없이 소개되는 곳으로, 마치 코끼리가 강물을 마시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멀리서 바라보면 그 보습이 흡사 코끼리 바위를 닮은 듯하다. “물 아래 밝은 달이 있어, 물 위로 밝은 달이 떠있네. 물이 흘러도 달은 가지 않고, 달이 가도 물은 흐리지 않네.” 라는 화수월동이란 시로도 유명한 곳이다. 또한 이전에 한 비행기 조종사가 목숨을 걸고 이곳 바위 틈 사이를 비행하여 더욱 유명해진 곳이기도 하다.
상비산은 또 상산(象山)이라고도 불리며, 해발 200m의 높이에 길이는 103m이고 폭 길이는 100m이다. 이강과 도화강이 회류하는 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전체 면적이 1300㎢로 3억 6천만년전에 바다 밑에 있던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는 자연적으로 생긴 산이다. 과거 송·당 때부터 이미 중국내 널리 알려진 유명한 관광지였다. 주요볼거리로는 수월동, 상산암, 보진탑, 운봉사, 운내의 태평천국 혁명유적 진열관 등이 있다.
양삭의 밤은 낮보다 더 아름답다.
계림에서 1시간 30분을 소요해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 양삭으로 이동한다. 걸어서 1시간이면 시내구경을 다할 정도로 아담한 마을이다. 특히 양삭에서 바라보는 계림의 모습은 계림을 관광하는 관광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최고의 경치를 선사한다. 양삭의 경치는 계림 안에서도 최고의 경치라고 많은 사람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다.
이국적 느낌의 양삭의 명물거리인 서가재래시장
유람선 선착장에서 이어지는 1km의 서가 골목에는 많은 배낭여행객들을 볼 수 있다. 중국과 유럽의 색깔이 혼합되어 있는 골목은 벼룩시장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서양인을 포함한 외국인을 많이 볼 수 있는 배낭족이 많이 찾는 지역으로 서양식 카페, 음식점, 술집 등이 있는 이국적인 풍경이 나타나는 장소이다.
예술의 보고라 불리는 석회암 동굴인 은자암 동굴
은자암은 계림시로부터 85km, 양삭으로부터 3km 떨어진 여포현 마령진에 위치하고 있고, 마치 거대한 천연 분재 화분과 같아 유명하다. 은자암은 소청산과 조채산에 둘러싸여 있는데 산에는 복숭아나무가 숲을 이루고, 사계절 내내 풍성한 열매가 맺는다. 또한 천애절벽으로 유명하며 암벽등반을 하기에 적격으로 아슬아슬해 전문가들로부터 계림 산수의 걸작이라고 불리고 있다. 은자암 풍경구는 휴양, 위락, 쇼핑 등 시설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어 레져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지하 1200km 깊은 암반수의 용승온천
묘, 요, 장족 등 여러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용승현내에위치하고있는용승온천은온천욕을하면서원천수를볼수있는노천온천이다. 온천 주위가 여러 개의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산 정상에는 ‘신수’라 불리는 맑은 물이 흘러내리고, 평균 수온은 60도이며 온천물 속에는 많은 광물질이 포함되어 있다. 질병 치료에도 많은 효과가 있다고 하는 용승온천에서의 온천욕은 여행자의 피로를 말끔히 풀어주기에 족하다.
당송 8대가의 한사람인 한유(韓愈)는 계림의 절경에 취하여 ‘강은 푸른 띠를 두른 듯 하고, 산은 백옥으로 만든 비녀 같구나.’라고 시를 읊었고, 장쩌민 전 주석은 계림산수 갑천하(桂林山水 甲天下) 양삭풍경 갑계림(陽朔風景 甲桂林)이라고 찬사를 보냈다고 전한다. 산은 여인의 유방처럼 봉긋봉긋 솟아올라있고, 물은 명경지수, 지나는 구름이 그림자를 짓는 산명수청의 절경이다. 그 물결위에 달이 솟으니 금상첨화다.
계림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계림에서 양슈어, 또는 양디에서 싱핑까지 이강(漓江)을 따라 유람하는 것으로, 계림의 풍경들은 이강을 유람하면서 볼 때 가장 찬연하게 빛난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계림의 절경들은 모두 계림 시내가 아닌 유람선을 타고 가면서 만나게 되는 풍경들이다. 이강은 강폭은 좁지만 카르스트 지형의 봉우리 옆을 따라 흐르는 데가 강물이 맑아서 강 옆에 겹겹이 늘어선 산봉우리의 모습을 고스란히 받아낸다. 강물에 비친 산과 바위의 실루엣을 보며 뱃놀이를 하다 보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유람하는 동안 간혹 뗏목이나 쪽배를 타고 작살이나 가마우지 등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목가적인 풍경도 접할 수 있다. 이강은 강물이 맑아 1급수에 사는 어종이 많이 사는데, 중국에서 이강처럼 맑은 물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밖에 강물에서 유유히 놀고 있는 물소와 평화로운 주변 풍경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이강 여행의 즐거움이다. 계림은 베트남의 명승지 하롱베이와 연결 되었다고 한다.
천하절경 계림을 보고 침대 열차를 타고 12시간 밤을 새워 달려 장가계에 도착 하였다.
장가계(張家界)는 중국 호남성의 주요 관광지로 국가 삼림공원으로 지정되었고 1992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에 등록되었으며 주요 관광지로는 무릉원, 천자산, 원가계, 금편계곡의 십리화랑, 황룡동굴, 천문산, 보봉호수, 양가계 풍치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암괴봉의 수려한 경관이 감탄을 자아내며 가는 곳마다 와! 와! 를 연발하는 자연의 신비가 경지를 이루는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고 있다.
백장협에 있는 보봉호수 관광이 시작되며 보봉 호수는 기암봉우리들로 둘러싸인 해발430m에 있는 자연과 인공으로 만든 호수이며 길이 2.5km, 평균수심 72m로서 비취색의 호수에 유람선을 운행하고 있다.
호수관광을 마치고 천자산(天子山-2084m) 등정은 케이블카로 정상 오르면 발아래 화룡공원의 붓같이 생겼다는 어필봉과 선녀처럼 생겼다는 선녀헌화봉의 신비를 감상하고 산정식당에서 한식 뷔페로 식사 후 버스로 원가계로 이동하여 무릉원 위를 걸으며 신비스러운 거대한 돌기둥의 숲을 조망하며 높이 300m, 길이 20m 폭2m의 천하제일 교를 지나 326m의 엘리베이터로 하산한다.
금편계곡 십리화랑으로 이동하여 모노레일을 타고 15분정도 걸려 금편계곡 좌우로 높이 솟은 기묘한 형상들의 모습들이 형형색색으로 느껴지며 무아지경에 이른다. 기봉들의 조망을 끝내고 다시 모노레일로 제자리로 돌아온다. 다음날 오전에는 길이 15km 와 4층 높이의 거대한 황룡동굴을 관람하고 오후에는 하늘구멍이 있는 천문산 등정을 케이블카로 올라간다.
무릉도원(武陵桃源)-장가계 원가계(張家界 遠家界)
秀峯居士 鄭用眞
武陵桃源 白雲來
千仞斷崖 綠水去
秀峯居士 相逢願
李白杜甫 何處隱
장가계(張家界) 원가계(元家界) 무릉도원에 백운이 서렸구나,
산 높고 물 깊은 천만 길 낭떠러지 녹수가 유유히 흘러가는데
수봉거사(秀峯居士)가 찾아와서 시선과 시성을 만나기를 원하거늘
시선 이백(詩仙 李白)과 시성 두보(詩聖 杜甫)는 어디 은거하였는고.
중원여행(中原旅行)
遠路長足 中原行
靑天大地 萬里長
今日黃山 登頂樂
明日西安 魏國踏
중원 땅 먼 길을 찾아 왔노라
하늘은 드높고 땅은 끝없이 넓은데
오늘은 황산을 오르는 즐거움에 취하고
내일은 위 땅에 이르러 조조(曹操)를 만나리로다.
"人生不到張家界, 百歲豈能稱老翁? (사람이 태어나서 장가계에 가보지 않았다면, 100세가 되어도 어찌 늙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 그야말로 장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무릉원(武陵源)은 가장 높은 봉우리가 1334m이고, 풍경구의 면적이 264㎢에 달하며 크게 장가계시의 국가 삼림공원(張家界森林公園), 츠리현의 삭계곡(索溪谷)풍경구, 쌍즈현의 천자산(天子山)풍경구 등 세 개의 풍경구로 나뉜다. 이들은 모두 인접해 있어 산책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전체를 다 보려면 최소한 4-5일 정도가 소요된다.
장가계는 중국 호남성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는 제일의 국가 삼림공원 및 여행 특정지역으로서 현재 계속해서 개발, 건설, 발전중인 곳이다. 원래는 대융시였는데 1994년에 국무원에서 대융을 장가계시로 승격시켰다.
장가계시의 총 인구는 153만명이며, 20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총 인구의 69%가 토가족(土家族), 백족(白族), 묘족(苗族) 등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토가족인 93만명으로 제일 많고, 다음으로 백족이 10만명, 묘족이 2.7만명 살고 있다.
전체 면적은 9,563평방킬로미터로 전국의 1/1000을 차지한다. 장가계는 국내외에서 보기 드물게 수려한 봉우리와 동굴 외에도 인적이 드문 자연 지리 조건으로 인해 원시상태에 가까운 아열대 경치와 생물생태 환경을 지니고 있다.
약 3억 8천만년전 이곳은 망망한 바다였으나 후에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해저가 육지로 솟아올랐다. 억만년의 침수와 자연붕괴 등의 자연적 영향으로 오늘의 깊은 협곡과 기이한 봉우리, 물 맑은 계곡의 자연 절경이 이루어졌다. 연평균 기온은 16℃정도이며, 연강수량은 1200-1600㎜ 정도이다.
장가계가 일반인들에게 이름을 떨친 것은 오래 되지 않았는데, 1982년 9월 25일에 국가로부터 "장가계 국가 삼림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또 그 후 1988년에는 국무원에서 국가 급 중점 풍경명승구로서 지정하였고, 1992년에는 세계자연유산에 포함시켰다. 오염되지 않은 생태계 그대로 보전되어 있으며, 아직 외국 관광객들에게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곳을 방문하고 간 사람들은 장가계의 웅대하면서도 아름답고 기이한 산세에 넋을 잃으며 이 때문에 수많은 학자, 전문가들은 무릉원을 "대자연의 미궁"과 "지구기념물"이라 부른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소를 잡아 피를 나누면서 태어난 날은 서로 달라도 죽기는 한날로 하자고, 무릉도원에서 형제로서 도원의 결의를 한 곳이 과연 이 무릉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릉원(武陵源)
秀峯 鄭用眞
하늘은 구만리 장천
산은 구천 척(尺) 태산(太山)
허공은 내차지라고
천자산은 우람히도 곧추 섰구나.
길 잃어 떠돌던 운무(雲霧)도
넓은 산의 가슴에
장막을 치고
장가계(張家界)는 넓은 가슴으로
우아한 원가계(袁家界)를
연인처럼 품었구나.
같은 산맥 속에
남녀의 구분이 저러하니
도연명(陶淵明)도 감탄하여
장가계, 원가계, 여기가
과연 무릉원(武陵桃)이라 하였구나.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는 어디 있는고.
도원의 결의(桃園結義)가 꿈결이로세.
천문산(天門山) 999 돌계단을 오르며
장가계 풍경구(索道溪)를 바라보니
만학천봉(萬壑千峰)이 지호지간에
여기가 별유천자라고
저마다 함성을 지르는구나.
얼마나 소중하기에
은빛 찬란한 석순. 석주. 종유석은
황룡동굴(黃龍)에 깊숙이 숨겨두고
저리도 태연한고.
바라건대
신랑 장가계 신부 원가계여
부부의 연으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되고
벽해가 상전 되도록
천추만세를 누리거라.
황룡동굴(黃龍洞窟)은 1983년에 발견되었으며 지각운동으로 이루어진 석회암 용암동굴로서 중국의 10대 동굴중의 하나이며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동굴이라 한다. 동굴은 15km의 길이와 4층으로 되어 있고 입구는 좁은 출입구가 두 개 있으며 주로 큰문으로 들어가서 작은 문으로 나오며 동굴 안에는 2,820m의 향수하(鄕愁河)가 있으며 배를 타고 내려서 계단 길을 걸어서 나오는 방법과 반대로도 관람 할 수 있다.
지하궁전 속에는 수많은 석순, 종유석, 석주들이 오색 조명아래 휘황찬란하게 자태를 뽐내고 있다. 동굴 내에는 한곳의 물구덩이와 두 곳의 하류, 세 개의 폭포, 네 개의 연못, 13개의 궁정, 96개의 길이 있고 각각 석유, 석화, 석주, 석포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향수하의 깊이는 평균6m이고 최고 깊이는 12m라고 하며 수온은 섭씨16도라 한다. 동굴 보트는 오염을 막기 위하여 배터리로 운행한다.
천문산(1568.2m) 등정은 7.45km의 케이블카(8명 탑승)로 올라가는데 시가지와 들판을 지나 중간 정류장을 지나고 종점에 이르는 구간에는 칼날능선에 세워진 기둥은 9년에 걸쳐 완공되었다는 굽이굽이 절벽을 뚫고 이어진 도로가 장관이었다.
케이블카 종점에서의 기암기봉들은 안개에 가려 조망이 어려웠고 미니버스로 곡예의 도로를 굽이굽이 돌며 아슬아슬한 공포를 느끼며 천문동으로 향하는 모두의 마음은 한결같이 불안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사고라도 나는 날이면 수백m의 절벽으로 떨어져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며 과연 인간을 즐겁게 하기위하여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도로와 삭도를 설치하였다.
천문산(天門山)은 999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가파른 계단을 힘들게 올라가는데 토가족들이 악기로 부르는 아리랑이 울려 퍼지며 많은 관광객들이 한국 사람이라는 것이 실감나게 한다. 하늘문(천문동)은 높이131m, 폭57m의 암벽이 뚫린 거대한 구멍으로서 1999년 에어쇼중 소련의 4대의 전투기가 이 구멍을 통과하여 세계에 유명해졌다고 전하며 기록에 따르면263년 전 갑자기 큰소리가 나며 구멍이 뚫렸다고 한다.
천하절경 장가계와 원가계는 산이 그윽하고 깊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시인 묵객들의 작품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이 심히 안타깝다.
이와 반대로 계림과 황산 그리고 서호는 이태백. 소동파 등의 사랑을 받아 시화되고 묵화 되어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장가계는 청룡이 승천하는 기상과 맥박을 지닌 남성적인 산인 반면에 원가계는 아름답기가 여성적이다. 두 산세는 마치 부부와 같다.
원가계(袁家界)는 우아하고 단아하여 곱게 단장한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하여 일본인들은 원가계는 많이 찾아도 장가계는 별로 찾지 않는다하니 기상이 용출하고 호랑이가 포효하는 백두산을 지닌 우리 국민들로서는 가냘픈 일본인들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장가계를 떠나 중국의 명승지요 여러 나라의 수도였던 서안으로 향하였다.
서안(장안)은 옛 주(周)나라의 수도인 서기(西岐)가 이 부근에 있었다. 기원전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되어 장안長安)이라 하였으며 후한(後漢) 말기에 18제후 연합군에게 쫓긴 동탁이 헌제를 옹립하고 한때 이곳에 들어왔다. 오랜 열국 시대가 끝나고 581년에 수(隋)나라의 수도, 618년에 당(唐)나라의 수도가 되어 300년간 국제도시로서 융성하였으나, 안사의 난, 황소의 난으로 일대 타격을 입고 침체되었다. 1936년 장쉐량이 일치 항일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억류하는 시안사건이 일어나 제2차 국공합작의 계기가 되었다.
서안(西安) 시는 옛 이름은 장안(長安), 경조라 하며 산시 성의 성도에 속한다. 중국 지리의 중심으로서,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서안은 중국 6대 중심도시 중의 하나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름난 도시이다. 서안은 중국 중서부지역의 중요한 과학연구, 고등교육, 국방 과학기술 공업과 고급 신기술 산업기지, 중국의 중요 우주비행, 항공공업센터, 기계제작센터와 방직공업의 중심이기도 하다. 서안은 비교적 튼튼한 공업기초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 중서부지역에서 과학기술 실력이 가장 뛰어나고, 공업부분에서 가장 완전함을 갖춘 대도시중의 하나이다. 이곳에는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과 동포들이 진출해 있다.
양귀비와 현종이 겨울을 보내던 화청지(華淸池 : 화칭츠)란
중국에서 현존하는 최대규모의 당나라 왕실 원림이다. 고대부터 수려한 풍경과 질좋은 지하 온천수때문에 역대 제왕들의 관심을 받아왔던 장소이다. 화청지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일찌기 서주(西周)시기, 주유왕(周幽王)이 여산(驢山) 앞에 려궁(驪宮)을 지었으며, 후에 진시황과 한 무제도 이곳에 행궁(行宮)을 건립하였다. 특히, 당 현종 천보년간에 건설한 궁전누각이 가장 화려하며 이때 정식으로 "화청궁(華淸宮)"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당시(唐詩) 중에는 화청지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는 시가 비일비재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했다.
그 중 온천석벽에 있는 <온천송비(溫泉頌碑)>는 중국 비석예술 중에서도 우수한 예술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중앙구역에는 당 화청궁 어탕유적박물관이 있으며 연화탕, 해당탕, 태자탕, 상식탕, 성진탕 등의 당나라 때 현종과 양귀비가 온천을 즐기던 탕과 문물 진열실이 있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또한 매일 육각정 무대 앞에서는 당나라 시기를 재현한 공연이 열린다.
화청지 온천의 수질은 매우 깨끗하며, 수온은 항상 43℃를 유지한다. 다량의 화학물질을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 또한 매일 육각정 무대 앞에서는 당나라시기를 재현한 공연이 열린다.
양귀비(玉環)를 만나고서
秀峯 鄭用眞
옛 洛陽城 西岸을 찾아
여산(驪山)으로 병풍을 두르고
청화궁(淸華宮) 온천수에
발을 담그고 서있는
옥환(玉環)을 만나 손을 잡아보니
얼마나 당 현종(唐 顯宗)에 부딧쳤으면
지문(指紋)이 닳아 없어졌느냐?
그래도
내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젊어
보름달 같이 도톰한
네 얼굴이 퍽 마음에 든다.
옥환아 너는
미색(美色)이 워낙 출중하여
살아서 염복(艶福)을 충분히 누렸으니
저승에서도
춤과 노래로 살겠구나.
秀峯이 찾아오면
살아와서 반기려니 하였더니
일생일사(一生一死)가 과연 허사로구나
나는 이제
서시(西施)나 만나려고
항주(抗州)서호(西湖)로 떠난다.
서운해 마라
잘 있어!
네 미소 가슴에 담아
두고두고 기억하마.
서안성벽은 중국에서 보전하고 있는 건축물 중에서 가장 완정한 고성중의 하나다. 전체 길이가 13.6km, 높이가 12m, 폭이 15m로 높고 두터운 고 성벽이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 성벽은 명나라 홍무제 3년에서 11년까지에 걸쳐 건설되었으며 그 역사가 이미 600년에 이른다. 고대 전쟁사를 보면, 이 성벽은 유일한 출입 통로로서 통치자에게 있어서는 방어를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성벽은 동서남북의 4개문이 그대로 보전되어 있고, 주변에는 넓고 깊은 호성하(護城河)가 흐르고 정문에서 시작되는 정로를 가로지르는 조교(弔橋)가 놓여있다. 1982년 7월에는 섬서성 정부의 주창아래 서안시민 몇 십만 명이 힘을 합쳐 독특한 풍격의 환성공원(環城公圓)을 조성했는데, 성 정상부분에는 조그마한 화원을 여러개 만들어 놓았다. 서안성벽은 단지 역사적인 건축물의 의미를 넘어서 공원과 성, 길, 물이 어울어진 공원이 조성됨으로서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서안에서는 장한가(長恨歌)가 유명하다.
장한가(長恨歌)는 당나라 때 백거이가 지은 장편 서사시이다. 당 헌종 원화 원년인 806년에 지어졌다. 당 현종 이융기와 그의 비 양귀비와의 사랑을 읊은 노래이다
당 현종(712-756)이 죽은 지 50년이 지나 백거이 나이 35세에 친구 왕질부(王質夫)와 진홍(陳鴻)이 그를 찾아와 선유산에 놀러 갔다. 거기서 당 현종 이융기와 양귀비와의 로맨스가 화제에 올랐다. 왕질부의 제의로 백거이는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시로 진홍은 산문으로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신화적인 내용으로 애절하게 썼다.
장한가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부분은 양귀비가 총애를 받고,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양귀비가 죽는 장면, 둘째 부분은 양귀비를 잃고 난 후의 현종의 쓸쓸한 생활, 셋째 부분은 죽어서 선녀가 된 양귀비와 만나보는 장면으로 되어 있다.
특히, 마지막 구절은 작가적인 상상력을 최대한 드러내 애절함을 고조시킨다.
上天願作比翼鳥 하늘에선 날개를 짝지어 날아가는 비익조가 되게 해주소서
在地願爲連理枝 땅에선 두 뿌리 한 나무로 엉긴 연리지가 되자고 언약했지요 란다.
서안에 도착하여 하루 밤을 보내고 불사약을 구하여 먹고 만년을 살겠다고 다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진시황능을 보고 그는 동키호테 같다고 생각 하였다.
진시황 능은 중국 산시성(陝西省), 옛 도읍지인 서안(西安) 근처에 있는 중국의 주요유적지로서 중국을 통일하고 만리장성 건설에 착수한 진(秦)나라 최초의 군주 시황제(始皇帝)가 묻힌 곳이다. 그는 죽음에 대비해 50㎢에 달하는 무덤 부지와 그 속에 묻을 부장품들을 마련해두었다. 그 속에 든 보물들은 시황제의 사후 약 2,100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되었는데, 1974년 3월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처음으로 지하에 묻힌 방을 발견했다. 뒷날 고고학자들은 이곳에서 6,000구가 넘는 실물 크기의 병사와 병마 도용(陶俑)을 찾아냈다. 이들 도용은 모양이 동일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으로 보아 실물을 모델로 했으리라고 추측된다. 실제의 마차, 철제 농기구, 청동 및 가죽 비단· 재갈. 옥· 뼈 등으로 만든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또 활· 화살· 창· 칼과 같은 무기들과 13가지 성분을 합금한 주형(鑄型)도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빛이 나고 날카롭다. 예전에는 광물성 안료로 밝게 칠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진흙상들이 당시의 군대 규율에 따라 독특한 군사 대형으로 늘어서 있다. 선두에 궁수(弓手)와 석궁(石弓) 사수가 배치되어 있고 그 바깥에는 사수 및 보병과 전차병 무리가, 후미에는 갑옷을 착용한 호위병이 줄지어 있다. 부근에서 3개의 방이 더 발굴되었는데, 그중 한 방에는 1,400개가 넘는 도용이 들어 있었고 이것은 전차와 기병을 보충하기 위한 것으로 더 작게 만들어져 있었다. 또 하나의 방에는 아마도 진군(秦軍)의 정예 지휘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는 68개의 상이 들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빈방이었다. 이 4개의 방, 이른바 시안 유물은 고고학자들의 발굴 작업이 진행될 때부터 지붕으로 덮여 보호되었으며, 현장에 세워진 진용박물관(秦俑博物館)에서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 도기로 만들어져 매장된 호위병들은 무덤 바깥벽으로부터 1.2㎞ 정도 떨어진 곳에서 전투태세를 한 채 동쪽을 향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진이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에 동쪽에서 침입해온 강력한 적수로부터 시황제를 보호하는 형태인 것으로 짐작된다. 능 서쪽의 또 다른 장소에서는 중국에서 이제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청동기들이 발견되었다. 이 청동기는 머릿 부분을 금· 은으로 장식한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인데, 차일을 드리운 채 각기 행정관들을 태우고 있었으며 크기는 실물의 반 정도이다. 또 하나의 부속 동굴에서는 말의 뼈로 가득 찬 지하 마구간, 장군들의 묘지, 70개의 개인 매장지, 그밖에 공예품들이 출토되었다. 시황제의 무덤 자체는 아직 발굴되지 않고 있으나 아마도 4면으로 된 피라미드 형태의 흙 둔덕 바로 아래, 내벽 안에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피라미드형 흙 둔덕은 원래는 낮고 숲이 우거진 산처럼 보이도록 조경된 것이다. 능 내부는 광대한 지하궁전으로, 각지에서 징발된 70만여 명의 일꾼들을 동원해 36년이 넘게 걸려 완성했다고 한다. 역사가 사마천(司馬遷:BC 145경~85경)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노동자들은 매우 깊은 지하까지 파들어 갔다. 그들은 청동으로 바닥을 깔고 그 위에 관을 안치했다. 그들은 궁전· 누각· 집무실의 본을 만들고 멋진 그릇, 값진 석재와 진귀한 물건들로 묘지를 가득 채웠다. 기술자들은 침입자가 나타나면 석궁이 자동적으로 발사되도록 장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국의 여러 강, 예컨대 양자강(揚子江)과 황하 강(黃河), 심지어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까지 수은으로 만들어 흐르게 하고 기계적으로 순환되도록 장치했다. 반짝이는 진주로 천상의 성좌를 천장에 설치하고, 금· 은으로 새를 만들었으며 옥을 쪼아 소나무를 만들었다. 마차는 바닥에 진열했다. 등불은 고래 기름을 연료로 써서 영원히 탈 수 있도록 했다".
이 유적지에서 발굴 작업이 시작된 지 10년이 지난 뒤 고고학자들은 진시황릉에서 나머지 보물을 완전히 발굴해내려면 아마도 몇 세대가 더 소요되어야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어서 섬서성 역사박물관을 찾아서 중국 고대의 역사적 숨결을 더듬어보았다.
그리고 당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 장소인 온천 휴양지 화정지에 서있는 양귀상과 현종의 욕탕 그리고 양귀비의 욕탕을 둘러보았다. 화정지는 명산인 여산(驪山)을 등에 업고 있다.
중국에는 옛 부터 유명한 4명의 미인이 있었는데 서시(西施), 왕소군(王昭君), 초선(貂蟬), 양귀비(楊貴妃)라고 한다.
서시(西施)는 월 왕 구천이 오 왕 부차에게 공물로 바친 미인이다.
이 미인 때문에 결국 오나라는 망하게 된다.
하루는 아름다운 서시가 강변에 서 있는데, 강물에서 헤엄치던 물고기가 물속에 비친 서시의 미모에 놀라 천천히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물고기마저 가라앉힐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뜻으로 쓰는 말이 '침어(浸魚)'이다.
서시에 관한 고사에 서시빈목이 있다.
아름다운 서시가 길을 가다가 두통 때문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었는데, 그 찡그린 모습마저도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 모습을 지켜본 마을의 추녀가 자기도 멋지게 보이고 싶어 그대로 훙내를 냈다고 한다. 추녀가 이맛살까지 찌푸렸으니 가관이었으리라.
분수에 맞지 않게 흉내를 내 비웃음을 산다는 뜻으로 '서시빈목'을 쓴다.
왕소군(王昭君)은 한나라 원제 때의 궁녀였다가 흉노 단우에게 시집간 미인이다.
왕소군이 집을 떠나는 노중에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고향 생각이 나서 금(琴)을 타자 한 무리의 기러기가 금 소리에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잊고 추락해 죽고 말았다고 한다. 아름다움과 금 타는 솜씨에 반해 기러기들마저 나는 것을 잊고 떨어질 정도로 미인이었던가 보다. 기러기를 떨어뜨릴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으로 쓰는 말이 '낙안(落雁)'이다. 왕소군이 지은 소군원(昭君怨)이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가 않네.
저절로 허리띠가 헐거워지는데
날씬해지고 부러 그런 건 것이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나날이 쇠약해져 간다는 뜻이다.)
초선(貂蟬)은 한나라 헌제 때의 대신 왕윤이 아끼던 기녀이다.
삼국지연의에 기록된 흥미진진한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초선에 관한 것이다.
초선은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가무에도 능했다고 한다.
왕윤과 초선이 화원을 산책하는 중에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자, 왕윤이
"달도 내 아자에게는 비할 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구나!"
라고 읊조렸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생겨난 말이 '폐월(閉月)'이다.
고운 달마저 구름 속에 숨게 만든 참으로 아름다운 여인이 초선이다.
양귀비(楊貴妃)에 쓰인'귀비'는 후궁의 직급이다.
양귀비의 성은 양, 이름은 옥환(玉環)이다.
중국 당나라 현종이 몹시 사랑했던 여인이 양옥환이다.
양옥환이 화원에서 무의식중에 함수화를 건드리자 함수화가 바로 꽃잎을 닫아 버렸다고 한다. 당 현종이 이 광경을 보고 '꽃마저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운 여인이구나!'라고 경탄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나온 말이 수화(羞花)이다.
꽃마저 부끄러워 꽃잎을 닫고 고개를 숙일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으로 '수화'를 쓴다. 함수화란 '(꽃잎을) 닫고 (꽃봉오리를) 수그리는 꽃'이란 뜻이다.
양귀비와 관련된 말에 '해어지화(解語之花), 해어화'가 있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말을 알아듣는 꽃, 말하는 꽃'이란 뜻으로 '해어화'라고 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양귀비와 관련된 어휘에 '무색(無色)'이 있다.
이 말은 무안색(無顔色)이 줄어든 말이다. 백낙천의 <장한가>에 나오는 구절이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에 눌려서 궁중의 다른 미인들의 '얼굴에 빛이 없다, 얼굴색이 핼쓱 해진다. 는 뜻이. 여기에서 나온 말이 '무색하다'이다.
'무색하다'는 겸연쩍고 부끄럽다는 뜻으로 쓰이다. 양귀비꽃은 아름다운 꽃잎이다.
이 꽃 이름도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리라.
양귀비의 초상을 보면 동글동글한 얼굴에 오동포동한 몸매를 하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이런 여인이 미인이었던 것 같다.
화청지에서 미녀들의 향기를 흠뻑 느끼고 중국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황산(黃山)으로 향하였다. 황산은 그 규모가 웅대하고 면적이 방대하여 오르는 케이블카가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는데 오르는 방향에 따라서 산경의 모습이 너무나 다르고 수천 계단을 오르면서 천하절경을 볼 수 있어 그 경치의 표현이 가히 유규무언(有口無言)이다.
황산(黄山)은 중국 안후이 성에 있는 명승지로 전설의 선경을 방불케 한다. 독특한 경관으로 인해 오래 전부터 천하의 명승지, 황산에 모인다고 전해지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았다.
1982년에 국가중점풍경명승구로 지정되었고, 1990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황산은 진나라 때는 이산(黟山)이라고 불렀고, 당나라 때 에 이름은 현재의 황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황산의 운무(黃山 雲霧)
秀峯 鄭用眞
산은 돌기둥으로 서서
하늘을 찌르고
물은 천만 길 계곡을
살 가듯 빠르게 가는구나.
청산이야
천추만세를 태연히 서 있으련만
한번가면 다시 못 올 물은
어이하여 뒤도 돌아봄 없이
주야사시장철
저리 빨리 떠나가는가.
산이 좋아 산을 오르는 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헤아린다면
산을 버리고 떠나가는
발길이 저리도 매정하랴.
가슴 깊숙이 숨긴 신비를
보여줄 듯 말 듯 운무(雲霧)는
우유 빛 커튼을 드리우고
내 연심(戀心)을 가없이 달구네.
한해면 삼백여일이
운무에 쌓인다는 황산
내가 너를 찾아옴을 알고
오늘도 태연히 서서
청수(淸秀)한 자태를 보여주니
고맙고 고맙다.
내가 죽은 후에는 백운이 되어
너를 찾으리니
부디 떠나가지 말고
나를 기다리고 길이 게 서있거라.
황산에 나란히 서있는 암석은 고생대에 생겨난 것으로, 긴 세월이 지나 침식되면서, 현재와 같은 낭떠러지 절벽의 경관이 완성됐다. 해발 1000m 이상의 봉우리가 여러 개 있고, 특히 삼주봉이라고 불리는 연화봉, 광명정, 천도봉이 있으며, 그 밖에 69개의 봉우리가 있다.(이 가운데 광명정은 상시 공개되어 있으나 연화봉과 천도봉은 몇년씩 교대로 공개하고 있음) 또 황산에는 기송, 괴석, 운해, 온천이 있고, ‘황산의 사절이라고 불렸다. 이것이 천하의 명승, 황산에 모인다고 언급되는 이유라고 한다. 이 명성으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고, 많은 명승지에 그 독특한 발상으로 이름이 붙여져 있다.
명나라 말기의 지리학자 서하객(본명: 굉조(宏祖), 호: 하객(霞客))은 황산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五岳歸來 不看山(오악귀래 불간산)이요. 黃山歸來 不看岳(황산귀래 불간악)이라." (오악에 다녀오면 다른 산들이 보이지 않고, 황산에 다녀오면 오악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2002년 가을 금강산을 관광하였는데 황산은 그 산경이 마치 금강산을 다시 보는듯하여 감개가 무량하였다. 그 정경을 시로 읊어 여기에 옮겨 놓는다.
황산(黃山)을 오르며
정용진 시인
청솔가지 부여잡고
황산을 오르는 산행
청산 자락을 가린 운무(雲霧)도
땀 흘려 오르는 내 마음 알아
가슴 깊이 숨긴
산경을 열어 주는구나.
하늘은 구만리
찬비가 내릴 듯 말 듯
천인단애 절경과
기암괴석이 여기저기서
손을 흔들며 어서 오라 반기네.
지호지간에 만학천봉이 다가서고
비개인 후 연화봉(蓮花峰) 내린
우렁찬 폭포소리
잠든 산을 흔들어 깨우는구나.
명나라 서하객(徐霞客)도 산경에 취하여
'오악을 보면 더 볼 산이 없다. 하였다가
황산을 보면 오악(五岳)이
보이지 않는다. 하였다네.'
동설(冬雪) 시린 눈송이
사뿐 사뿐 내려
송림에 꽃으로 피거라.
오호라
여기가 별유천지
중원의 황산(黃山)이로구나.
등정황산(登頂黃山) 천하무산(天下無山)
입이 있어도 할 말을 잃어
유구무언(有口無言)하리라.
*황산(黃山)-중국 안휘성(安徽省)에 있는 산.
*오악(五岳)은 중국의 다섯 이름난 산을 말한다.
*서하객-명나라 지리 탐험가.
다섯 방위에 따라 다음 산이 있다
동악 태산(東岳 泰山, 산둥 성, 1,545 m)
서악 화산(西岳 華山, 섬서 성, 1,997 m)
남악 형산(南岳 衡山, 후난 성, 1,290 m)
북악 항산(北岳 恒山, 산시 성, 2,017 m)
중악 숭산(中岳 嵩山, 허난 성, 1.494 m)
감격과 감동의 황산 등정을 맑은 하늘에 약간의 운무에 가린 모습으로 감상 할 수 있어서 진정으로 행복하였다.
황산 등정의 감흥을 가슴에 안고 항주(抗州)로 향하였다.
항주(抗州)는 풍요롭고 아름다운 곳으로 절강성(浙江省)에 있으며 북경에서부터 항주까지 경항운하가 연결되어 있어서 산업. 교통. 관광의 요충이다.
절강성은 중국 동해변에 위치하며 인구 435만의 풍요로운 곳이다. 연해에 200개 이상의 섬이 흩어져 있어서 가장 섬이 많은 곳으로도 유명하며 아열대에 속해 날씨가 따뜻하고 사계절이 분명하다.
또 절강성에는 산이 많고 중앙에 전당강이 흘러서 많은 볼거리들이 형성되어 있다. 절강성의 성도(省都)인 항주는 소주와 함께 중국 제일의 관광도시로서 서호는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따뜻한 기후와 많은 강수량 덕택에 절강성은 항주의 용정차를 비롯한 녹차의 재배지로도 유명하며 그 생산량도 전국 제일이다. 이 밖에 뽕의 재배도 성하며 비단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해질 무렵의 정경이 아름다운 항주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절강성의 성도(城都)로, 7대 고도의 하나로서 중국이 자랑하는 관광지로 자원이 풍부하고 경치가 수려하다. 13세기 무렵 이탈리아의 유명한 여행가 마르코폴로는 항주에 들렸다가 도시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항주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라고 칭송했다고 전해진다.
항주는 아열대 기후에 속하여 사계절이 분명하다. 6개의 구와 2개의 현으로 나뉘며, 총면적은 16㎢이고, 인구는 608만 명에 이른다.
2,100년 전의 항주는 중국의 여섯 개의 역사적인 수도 중 한 곳이었다. 항주와 북경간에 대운하가 건설되었을 때, 도시는 점차적으로 번영하기 시작했으며, 9세기부터 237여년동안 14명의 황제가 항주를 수도로 선택했다.
항주의 명소 육화탑(六和塔)은 북송 개보(開寶) 3년(970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당강(錢塘江) 북쪽 연안에 위치해 있으며 전단강의 대역류를 막고자 하는 기도를 반영하여 세운 탑이다.
이탑의 이름인 육화(六和)라는 의미는 원래 불교에서의 규약인 '육합(六合)' 즉, '천지사방(天地四方)'의 의미다.
당시 건축계의 거장인 유호(喩皓)가 ≪목경삼수(木經三首)≫를 근거로 하여 설계하여 외관은 13층이며, 내부는 7층으로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다. 전체 높이는 59.89m이며, 중국 목조 건축 분야의 걸작으로 평가되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다.
항주의 영은사(靈隱寺)는 비래봉(飛來峰)을 마주하고 있다. 비래봉에는 10-14세기 경에 만들어진 석불 330여 개가 전시되어 있다. 영은사는 동진(東晉) 시대에 인도 승려 혜리(慧理)에 의해 지어졌으며, 선종 10대 사찰 중의 하나이다.
천왕전(天王殿)에는 "云林禪寺(운림선사)"라고 쓰여 진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것은 청대 강희(康熙) 황제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강희가 남쪽 지방을 순찰하던 중 항주에 들러서 북고봉(北高峰)에 올랐는데, 구름이 자욱하고 안개가 덮인 곳 속에 영은사가 있는 것을 보고 이 네 글자를 생각해 냈다고 한다. 최근에는 불공을 드리기 위해 몰려든 중국인들로 늘 붐빈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높이 33.6미터의 중국 저명한 건축물중 하나다. 보전 안에는 24.8미터의 여래불상이 있는데, 1956년에 절강미술대학 교수와 예술인들이 합작해 만든 걸작이다. 대전 양 옆에는 20존자천불상이 있고, 대전 앞에는 송대에 건축된 8각 9층 석탑이 있다.
영은사의 볼거리 중 가장 유명한 비래봉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209미터의 봉우리로, 인도에서 날아왔다는 혜리가 갔다는 데서 비래봉 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암벽상에는 오, 송, 원에 이르는 석각조상 330여개가 새겨져 있는데, 그중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송대의 것인 미륵좌상으로 얼굴이 개성적이고 독특하다.
영은사 내에는 조그마한 계곡이 있어서 특히 비가 오면 사원전체가 안개에 쌓여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계곡 옆의 바위에는 조그마한 불상들이 촘촘히 새겨져 있어서 산책을 하며 꼼꼼히 불상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진진하다.
중국의 명품 경극이나 써커스는 기교가 대단하고 시설과 동원 인원의 수가 엄청나다. 이들의 야외무대의 연극은 일품인데 우리 일행은 유명하다는 장한가와 써커스도 도 아름답고, 항주에서는 항주의 자랑이요, 남송 시대의 전설과 민족 영웅의 이야기를 극화한‘송성가무쑈,’를 관람 하였는데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 아리랑의 연주에 맞춰 아름다운 부채춤 장면이 연출되어 미국에서 간 34명의 동포들의 큰 박수를 받았고, 이는 중국의 황제 즉위식을 축하하는 축하사절단의 일원으로 조선에서 온 공연단이라 하여 제 마음대로 잘도 뜯어 붙이고 잘들 노는 구나 속으로 웃었다.
중국인들이 우리나라의 고유의 영토였던 고구려를 자기들의 속령으로 주장하고 아리랑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시도하였던 것도 이런 야욕의 표출로 밖에는 볼 수가 없다. 더구나 단오절은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의 명절인데 중국에서는 5월5일이 어부사(漁父詞)를 쓴 초나라 명재상 굴원(屈原)이 세상의 부패함에 상심하여 멱라수에 몸을 던져 자신을 고기 뱃속에 스스로 장사지낸 날이라 하여 대나무 잎에 떡을 싸서 물가에 던지며 고기들이여! 굴원의 몸을 먹지 말고 이 떡을 대신 먹으라고 던져준 데서 온 국민이 기리는 날임을 처음 알았다. 이들은 단오 날에 그네는 안 뛰지만 이런 깊은 의미가 서린 날이기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조상이 물려준 단오절은 민족고유의 명절이요 미풍양속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키고 후손들에게 길이 전해 주어야 한다. 등걸이 없는 회초리는 없기 때문이다.
다음날에는 중국의 명소 서호를 관광 하였다.
서호(西湖)는 항주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를 기념하는 의미로 '서자호(西子湖)'라고도 불린다. 서시에 대해서는 실제 인물인지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로는 월나라 왕인 구천(勾踐)이 오나라의 왕 부차(夫差)에게 공물로 바쳤던 인물로, 결국은 구천의 계략대로 오나라 왕 부차가 서시의 미모에 빠져 나라 일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오나라가 멸망에 이르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서시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이었음이 분명하다. 중국의 역사상 양귀비 등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미인으로 꼽힌다. 서호는 삼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호수에는 소영주, 호심정, 완공돈 등 3개의 섬이 떠있다. 호수의 총 면적은 60.8㎢이며, 그 중 수역의 면적은 5.66㎢이다.
서호는 안개가 끼었을 때나, 달 밝은 밤 또는 일출 때 가장 아름다운 자태를 보여준다. 서호 안과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명소 10가지를 서호 10경(西湖)이라 부르는데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단교잔설(斷橋殘雪), 평호추월(平湖秋月), 소제춘요(蘇堤春曜), 곡원풍하(曲院風荷), 화항관어(花港觀魚)등 이다. 단교잔설은 중국의 오래된 신화고사인 백사전(白蛇傳)에서 백소정과 허선이 만난 무대가 된 곳으로 옛날에는 다리 중간에 문이 서있었다고 한다.
문 위에는 처마가 얹혀있었는데 눈이 내리면 눈이 처마위로 쌓여 멀리서 바라보면 눈 쌓인 다리가 문을 기준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 같이 보여 단교(斷橋)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고 한다. 평호추월은 넓이 400평방미터의 정원으로 호수 수면과 높이가 같아 평호(平湖)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소제춘요는 소동파가 항주에 지사로 부임했을 때 쌓은 둑(제방)으로 사시사철 모두 아름답지만 이름에서도 추측할 수 있듯 봄날 새벽의 경치가 가장 절경이다. 곡원풍하는 소제춘요의 북서에 펼쳐진 풍경으로 여름에 연꽃이 피어 특히 아름답다. 화항관어는 봄에 모란꽃을 보며 용정차를 마실 수 있는 운치 있는 공원으로 누각 등이 세워져 있으며 수많은 모란이 피어있는 목단원(牧丹園)이 유명하다.
중국의 10대 명승지로 손꼽히는 서호(西湖)를 유람선으로 관광하고 소동파 석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호는 원래가 명승지라서 시인 묵객들이 시화를 많이 남겼는데 시선 이태백과 소동파가 서호를 노래한 명시를 여기에 옮겨 놓는다.
月下獨酌(월하독작)/李白(李太白)
花下一壺酒 화하일호주 꽃 밑에서 한 병의 술을 놓고
獨酌無相親 독작무상친 친한 이도 없이 홀로 마시네.
擧盃邀明月 거배요명월 잔을 들어 밝은 달님을 맞이하니
對影成三人 대영성삼인 그림자 대하여 세 사람이 되었네.
月旣不解飮 월기불해음 달은 본래 전부터 술 마실 줄 모르고
影徒隨我身 영도수아신 그림자는 그저 내 몸을 따를 뿐.
暫伴月將影 잠반월장영 잠시 달과 그림자를 벗하니
行樂須及春 행락수급춘 봄날을 당하여 마음껏 즐기네.
我歌月排徊 아가월배회 내가 노래하면 달이 배회하고
我舞影凌亂 아무영능란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가 어지럽네.
醒時同交歡 성시동교환 깨어 있을 때 함께 서로 즐기지만,
醉後各分散 취후각분산 취한 뒤에는 각기 흩어지네.
影結無情遊 영결무정유 속세 떠난 맑은 사귐 길이 맺고자
相期邈雲漢 상기막운한 멀리 은하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네.
天若不愛酒천약불애주 하늘이 만일 술을 즐기지 않았다면
酒星不在天주성부재천 어찌 하늘에 술별이 있으며
地若不愛酒지약불애주 땅이 또한 술을 즐기지 않으면
地應無酒泉지응무주천 어찌 술샘이 있으리요.
天地旣愛酒 천지기애주 천지가 하냥 즐기었거늘
愛酒不傀天애주불괴천 술을 좋아함을 어찌 부끄러워하리.
已聞淸比聖이문청비성 맑은 술은 성인에 비하고
復道濁如賢복도탁여현 흐린 술은 또한 현인에 비하였으니
聖賢旣已飮성현개이음 성현도 이미 마셨던 것을
河必求神仙하필구신선 헛되이 신선을 구하는가.
三盃通大道삼배통대도 석잔술은 대도에 통하고
一斗合自然일두합자연 한말 술은 자연에 합하거니
俱得醉中趣구득취중취 모두 취하여 얻는 즐거움을
物謂醒者傳물위성자전 깨어 있는 사람에게 이르지 말라.
서호(西湖)/蘇東坡
흠호상초 청후우(欽湖上初 淸後雨)
수광염염 청방호(水光瀲灩 晴方好)
산색공몽 우역기(山色空濛 雨亦寄)
약파서호 비서자(若把西湖 比西子)
담장농말 총상의(淡妝濃抹 總相宜)
호수위에서 술을 마시는데
물빛이 남실대는 맑은 날 경치가 좋고,
보슬 비에 산색이 바래지는 모습도 일품이네.
서호는 엷은 화장, 서시는 짙은 화장이라야
나름대로 서로 잘 어울리겠구나.
황산(黃山)/秀峯 鄭用眞
석산황산 금강산(石山黃山 金剛山)
춘하추동 청홍백(春夏秋冬 靑紅白)
중원제일 기암봉(中原第一 奇巖峰)
청풍운무 변무상(淸風雲霧 變無常)
석산인 황산은 금강산을 빼어 닮았구나,
봄. 여름. 가을. 겨울 푸르고 붉고 희더니
중원 제일 기암괴석 천만 봉우리로 솟았네,
맑은 바람 안개구름에 가려 수시로 변화가 무상하구나.
명소 항주에서 서호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이백과 소동파의 시를 읊조리며 이번여행 마지막 여정 코스인 상해로 향했다.
상해(上海)는 중국 대륙 동부의 창강 하구에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직할시이다. 현대 중국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로 널리 알려졌으며, 또한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문화, 상업, 금융, 산업, 통신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행정적으로는 성과 동급인 성급 시이다. 원래는 어촌이었던 상하이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뉴욕과 런던 다음의 순위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금융 중심지가 되었고 극동의 가장 큰 상업도시가 되었다. 또한 중화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고, 대중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한 된 이후로 상하이는 중앙 인민 정부의 무거운 세금, 외국인 투자의 중지 때문에 쇠진(衰盡)했다. 1992년 상하이는 재개발되었다. 상하이는 초기 경제특구였던 선전과 광저우를 능가하고 있고 중국 경제 성장을 이끌어가고 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오나라의 동쪽지역에 속했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했다.
일찍이 초나라 춘신군(春申君)의 봉토였으며, 그 흔적은 현재 상하이를 관통하는 황포강(黃浦江)의 옛 명칭인 춘신강(春申江)과 상하이에 대한 약칭 중 하나인 선(申)에 남아 있다. 그리고, 삼국 시대 오나라의 항구 도시였으며, 오나라 황제 손권(孫權)의 형인 손책(孫策)이 회계 전투에서 이겨 이곳을 차지하였다. 손권은 이곳의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지나칠 수가 없어, 자신의 별장을 만들어 구경하였다고 하는데 이 별장의 위치가 와이탄(外灘) 주변에 있다. 서기 4, 5세기 진나라 때 쑹장(松江)(지금의 쑤저우허(蘇州河))과 임해 일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고, 대나무로 “후(扈)”라고 부르는 낚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또 당시 장강의 지류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을 “두(瀆)”라고 불렀기 때문에, 쑹장 하류일대(현재 쑤저우허와 황푸 강이 만나는 지대)를 “후두(扈瀆)”라고 불렀다. 후에 “후(扈)”를 “후(滬)”라고 부르게 되었다(이 또한 상하이의 약칭 중 하나이다). 상하이는 우쑹장(吳松江) 하류에 위치해 있어 “상하이푸(上海浦)”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당나라 중엽에는 화팅(華亭) 현의 일부였고, 송나라 말에 상하이 진(鎭)이 형성되었으며, 1292년 상하이 현(縣)이 되었다. 명나라가 흥성하던 1553년에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성을 쌓았고, 난징(南京)지구 쑹장 부 관할이 되었다. 쑹장 부 관할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면방의 중심지였다. 청대에는 명의 제도를 답습하여 장강 이남의 쑹장 부에 귀속시키고, 상하이 세관을 설립했다. 상하이 사람들은 홍콩이 중국의 최고의 아름다운 항구라는 것에 신경을 쓰고 지금도 계속하여 중국 및 세계의 최대 항을 만들려고 열을 올리고 있다. 그들은 자유항 홍콩을 넘어서려고 송포(松浦) 강변에 불야성을 밝히고 아름다운 ‘동방명주’의 탑을 건설하였고, 10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을 계속하여 건축하고 있다.
상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도 받을 수 있는 곳이었다. 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쳐나갔다. 이런 까닭에 독립지사들이 상하이로 몰려들었고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國務領. 즉 총리)인 김구(金九)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홍구(홍커우)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天長節))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협의 끝에 윤봉길이 도시락 폭탄을 투척하기로 결정했으며 윤봉길은 의거를 수행했다.
상해(상하이)는 우리 민족이 잊을 내야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우리 일행은 우리 민족이 조국을 일본에게 빼앗기고 권토중래의 아픈 꿈을 꾸며 우리 민족의 지도자 김구 안창호 이승만 김규식 등이 임시정부를 세웠던 역사적인 곳이다.
우리 일행은 옛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건물을 찾았다. 낡고 작은 건물이지만 역사적 유물들이 잘 정돈되어있고 민족의 얼이 숨겨져 있음을 느꼈다. 여비를 쪼개 촌지를 모금함에 담고, 백범 김구선생동상 옆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감회에 젖었다. 벽면에는 도산 안창호의 ‘애기애타(愛己愛他)’란 친필이 걸려 있었다.
중국의 여러 곳을 관광 하면서 절실히 느낀 필자의 소감은 공자가 탄생한 중국에서 덕치주의의 기본정신인 유교가 깊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공산주의 통치이념에 억눌려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심히 안타까웠다. 거리 상인들의 돈만 아는 빗나간 상술, 올림픽을 겪은 나라이면서 매우 불결한 화장실, 수도 북경 주위에 정비되지 아니한 도시환경, 앞으로도 많이 개선되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 들었다. 돈은 인간 삶속에서 꼭 필요한 것이지만 돈이 결코 만능의 신(神)은 아니다. 인간 최종 목표인 행복 추구의 수단적 가치이지 목적적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명소 원가계는 관광객이, 장가계는 등산객이, 계림과 황산. 서호. 그리고 서안은 시인과 예술가들이 찾아봐야할 명소로 꼭 추천하고 싶다.
나를 진정으로 아는 방법은 밖을 나서서 남을 보면서 나 자신을 재발견하는 방법이요. ‘앉은 유식자가 나돈 무식자만 못하다.‘는 속어가 생긴 것도 모두 이 때문일 것이다. 밖과 남은 나를 발견하는 유일한 거울이다. 여행은 고통을 수반한 영원한 아름다움이요. 추억이다. 여행은 곧 인생의 행복이기도 하다. 인생 자체가 곧 멀고 긴 여행이 아닌가?
억조창생(億兆蒼生)이 사는 중국 광야를 6.25 동란 때 중공군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상상하며, 한국인 관광단 등에 떠밀려 주마간산(走馬看山)식으로 둘러봤다.
중국 여행을 마치고 우리 내외는 인천 공항을 통하여 고향인 경기도 여주시(驪州市)로 향하였다. 모토의 아름다움을 다시 음미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11박 12일의 바쁘고 벅차고 감격적인 여행 이었다.
* 이 여행기는 내가 여행 중 느낀 감흥과 견문을 쓰기 위하여 인터넷과 여러 백과사 전을 참조하여 기록하였음을 알려둔다. <필자 씀>.
*筆者: 前. 美洲韓國文人協會 會長
著書: 詩集: 강마을. 장미 밭에서. 빈 가슴은 고요로 채워두고.
금강산. 너를 향해 사랑의 연을 띄운다 (한영). 雪中梅.
에세이: 마음 밭에 삶의 뜻을 심으며. 시인과 농부. ㅁ
시는 언어로 그리는 영혼의 그림(문장 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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