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듬듯 담고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스마트폰, 화장품 주머니, 칫솔, 손수건, 책 한 권은 필수이고 선글라스나 양산도 곧잘 보태어진다. 어떤 날은 무용 연습복과 부채와 명주 수건까지 포개어지고 어느 땐 악보며 음악책이 번갈아 담기기도 한다. 토트백의 일종인 나는 손가방치곤 꽤 큰 편으로 맵시보다는 아무래도 실용성이 장점이다.
평소 큼지막한 손가방을 선호하는 주인은 작은 핸드백을 갖고 외출하는 일이 드물다. 그러나 치수 넉넉하고 수더분한 내가 웬만한 나들이엔 적격일 수밖에. 나는 자주 포화 상태인데 중요한 건 내 안 깊숙이 주인의 신분증과 카드는 물론 작은 돈지갑도 품었다는 사실이다. 고 쪼그만 지갑이 덩치가 몇 배나 큰 나보다 엄청 값나가는 브랜드라니 나로선 어이없다.
그렇다고 내 태생이 그런걸, 특별히 불만은 갖지 않는다. 백화점의 조명 아래 보기 좋게 진열된 샤넬, 루이비통, 셀린느, 구찌, 프라다, 버버리, 다올 등등 이름 짜한 것들의 기(氣)싸움도 관심 밖이다. 삶이란 ‘이름씨’와 더 밀접하다고 여긴다. 값비싼 명품이라며 아무 곳이나 데리고 다닐 수 없어 집안에 모셔져 있다면 무슨 살맛이냐고, 산다는 일은 움직이는 것이다. 움직임이 멈춘 몸은 살아도 생명이 아닐지니, 주인과 날마다 동행하는 세상 길 나들이가 그래서 신명 난다.
넓고 찬란한 세상이지만 좋은 사람들만 사는 곳은, 아니다. 영뚱하고 고약한 사람들도 많으며 끔찍한 일도 일어나는 번잡한 삶터다. 손가방도 난데없는 수난을 겪는 경우가 더러 있다. 주인의 말에 의하면, 예전엔 바쁜 출퇴근 시간에 버스에서나 길거리에서 소매치기라는 ‘나쁜 손’들의 침범을 자주 받았단다. 어처구니 없는 건, 종종 가방의 지퍼가 열린 걸 발견해도 본인의 건망증 탓이라 여겼다니 아둔한 사람인지 순진한 사람인지, 어느 날 마침내 예리한 칼날에 손가방이 죽 찢기고서야 알아차렸다는데 와중에도 돈지갑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고, 상상만 해도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주인은 그날 지갑을 지켜 준 일등 공신이 커다란 가방 안을 채웠던 물건들이라고 한다. 초를 다투는 시간에 날쌔고 예리하게 가방을 찢긴 했어도, 정작 소매치기가 스리슬쩍 하려던 돈지갑 탐색전은 좌절됐다는 얘기다. 신용카드도 없던 시절이고 월급쟁이 지갑 사정이야 빈약하기 그지없었을 텐데, 그런 가방 안을 기웃거리던 ‘나쁜 손’들의 사정은 또 오죽했으리. 나라 전체가 궁핍에서 벗어나려고 아둥바둥하던 시기였으며 모두 살아 보겠다고 발버둥 치던 날 들이었다.
강산이 다섯 번쯤 바뀐 지금엔 아뿔싸, 딴 세상이 펼쳐졌다. 어른도 이이도 휴대전화기를 가졌는가 하면 ‘나쁜 손’들의 수법도 엄청 지능적인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됐다.‘보이스 피싱’이라는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을 꼬드겨 앉은 자리에서 남의 통장에 든 돈도 갈취한다. 신출귀몰한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고 하루하루가 변화무쌍하다. 경험이 풍부한 노인도 내비게이션을 쓰는 청년보다 길을 더 잘 알 수는 없으며, 매 순간 나 자신으로 존재하기조차 위태위태한 세상이라고 할까.
이젠 백발이 성성해진 우리 주인도 노인층에 포함되기에 충분하다. 얼핏 보면 소녀적인 분위기도 조금쯤 갖고 있건만, 동동거리던 시간과 출퇴근하던 일 모두가 세월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가끔 지나간 날들을 혼자 되감고 풀며 회상에 젖는 모습을 훔쳐볼라치면 마음이 아릿해진다. 하지만 외출 길엔 여전히 실용성을 앞세운 커다란 손가방을 걸치고 자기 주도적인 소비 취향을 즐긴다.
주인은 예나 지금이나 허황된 이름엔 무관심인 듯 손가방도 태생을 따져 차별하는 일은 거의 없다. 다자인과 색깔이 외출복과 어울릴 정도면 구색을 갗추었다고 치는 게 그녀의 패션 취향이다. 거기에 재질까지 마음에 든다면 금상첨화이니 내가 때아니게 호사를 누린다. 이 광활한 세상에서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과의 만남은 생에 최고의 행운일 테다. 대도시에선 과시형 명품 소비를 일삼는 여자들도 흔한 판에, 전형적인 도시 여자이면서 소탈한 주인에게 신뢰가 간다.
살다 보면 별별 사람들과 만나야 하지 않는가. 관계의 갈등으로 가슴 에는 때가 오죽 잦은가. 고집스럽고 오만하고 뻔뻔스럽고 편협하고 배은망덕하고 잘난 척하는 사람과, 정의롭고 신의 있고 온화하고 겸손하고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 중 어디에 포함되는지. 누구라도 늘 자신을 깨우쳐야 하리라.
날마다 담는 것들이 많아 벅차지 않느냐고? 천만에, 지금이 내겐 호시절이다. 서로 복닥복닥 부딪치고 끌어안으며 살아 봐야 할 일생인데, 쓰임새가 한창인 이 순간이야말로 삶의 클라이맥스다. 더구나 당당하고 멋진 우리 주인의 지기로 여기까지 온 내가 그럴듯하다.
지켜보며 믿음이 생기고 믿음으로써 보이는 것도 있다. 알고 보면 눈물 많고 뱃속 바람구멍 숭숭한 주인에게 깊은 애정과 신뢰를 보내는 나. 손가방 주제에 물색없는 오지랖이라면 널리 용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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