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는 두 개의 위를 가지고 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사회 적'인 생물은 개미라고 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책 '개미세계의 여행'을 보면, 앞으로의 지구는 사람이 아니라 개미가 지배할 것이라는 다소 생 뚱맞은 주장을 펼친다.
그 근거는 개미들의 희생정신과 분업능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나 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개미는 위를 두 개나 가지고 있 다. 하나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인 위'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인 위'다.
굶주린 동료가 배고픔을 호소하 면 두 번째 위에 비축해 두었던 양 분을 토해내서 먹이는 것이다.
한문으로 개미 '의(蟻)'자는 벌 레 '충(충)'자에 의로울 '의 (義)'자를 합한 것이다.
우리 인간의 위도 개미처럼 두 개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랬다면 인류는 굶주림의 고통 을 몰랐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 에게 딱 하나의 위만 주셨다. 그래서일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굶주 림의 고통이 닥쳐올 때 닭보다 더 무자비한 행위도 서슴지 않곤 한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은 위가 한 개뿐인 인간들이 때로는 위를 두 개나 가진 개미 들보다 더 이웃의 아름을 자기 일처럼 감싸왔다는 사실이다.
1935년 어느 추운 겨울밤이 었다. 뉴욕 빈민가의 야간 법정을 맡고 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 (Fiorello La Guardia) 판사 앞 에 누더기 옷을 걸친 노파가 끌 려 왔다.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였다. 노파는 울면서 선처를 호소했 다. 사위란 놈은 딸을 버리고 도망갔 고, 딸은 아파 누워 있는데, 손녀들이 굶주리고 있었다.
하지만 빵 가게 주인은 비정했 다. 고소 취하를 권면하는 라과디아 판사의 청을 물리치고 '법대로' 처리해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 다.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라과디아 재판장이 노파를 향해 이렇게 선 고한다.
"할머니, 법에는 예외가 있을 수 없어요. 벌은 받아야 합니다. 벌금 10달러를 내시거나 아니면 열흘 간 감옥에 계십시오."
선고를 내리고 그가 자리에서 일 어섰다. 그리고 갑자기 무자를 벗더니 자 기 주머니에서 10달러를 꺼내 거기에 넣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어서 이렇게 최종 판결을 내렸다.
"여러분, 여기 벌금 10달러가 있습니다. 할머니는 벌금을 완 납 했습니다. 나는 오늘 굶주린 손녀들에게 빵 한 조각을 먹이기 위해 도둑질을 해야 하는 이 비정한 도시에 살 고 있는 죄를 물어 이 법정에 앉 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50센트 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자를 법정 경찰 에게 넘겼다. 그렇게 모인 돈이 자그마치 57 달러 50센트였습니다.
대공황의 불황 속에서는 결코 작 은 돈이 아니었다. 판사는 그중에서 벌금 10달러를 뺀 47달러 50센트를 할머니의 손에 쥐어주었다.
다음날 아침 뉴욕타임스는 이 훈 훈한 이야기를 이렇게 보도했 다.
《 '빵을 훔쳐 손녀들을 먹이려 한 노파에게 47달러 50센트의 벌금이 전해지다!' 얼굴이 붉은 락 푸르락하게 된 빵가게 주인과 법정에 있다가 갑자기 죄인이 돼 어 버린 방청객, 그리고 뉴욕 경 찰들까지 벌금을 물어야 했 다. 》
현재 뉴욕 시에는 공항이 두 개 있다. 하나는 J.F.K. 공항이고, 다른 하나는 라과디아 공항이 다.
전자는 케네디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공항이고, 후자는 바로 피오렐로 라과디아 재판장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이후 뉴욕 시장을 세 번이 나 역임하면서 맨해튼을 오늘날 맨해튼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리고 라과디아 공항에는 그곳 주차장의 특이한 주차위치 표시 에 담긴 일화(逸話)가 있다.
그곳 주차장 바닥에는 'Judges(법관)' 그 옆에는 'Handicapped(장애인)'와 'Senators(상원의원)'라는 주차 표시가 나란히 있다.
아무리 법관이 존경받는다는 사 법국가 미국이라지만, 그 미국에 서도 다른 지역에서는 좀처럼 만 나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어째서 장애인이나 상원의원보 다 법관의 주차 위치가 더 좋은 곳으로 지정되었을까?
그것은 한 법률가의 따뜻한 마음 씨에서 우러나온 인간애의 표현 으로 받아들이고 훈훈했던 즉결 법정을 회상하기 위해 공항 주차 장의 가장 좋은 위치에 법관들을 위한 자리를 따로 마련해 놓았 다.!
*글쓴이 장윤재 교수(이화여자 대학교 기독교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