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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가를 부른 정동교회 제주 ‘4.3’사건 강연
정동교회에서의 ‘4.3’강연은 지금까지 살아 온 보람이었습니다. 정동교회 벧엘 대학장으로부터 "4.3사건의 핵심"을 학생들에게 소개해 달라는 주문을 받고 쾌히 승낙을 한 후 천안호 침몰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애통과 비통 속에 옛 4.3 사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자체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렇다고 약속을 취소 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밤잠을 자다가 깨고 하면서 준비한 내용입니다.
부여받았던 제목은 ‘4.3사건의 핵심’인데, 발표하는 동안 준비 없이 발표한 내용까지 추가 정리하면서 제목을 아래와 같이 바꾸었습니다. 여러 차례 박수도 받다가 발표자가 울어버렸습니다. 대한민국 국방을 위한 바른 시각이 생겨나기를 바라며 안보게시판에 올립니다. 조금 길지만 한 번 읽어주시고 동문들 간에 토론의 광장이 열리기를 기대합니다.
제주 4.3‘사건’과 7년 전 사퇴한 4.3위원의 소회(所懷)
-천암함 침몰사건의 불가사의를 대하며-
인사말씀
저를 아는 분들 중엔 늘 과거 이야기만 한다고 역정을 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동교회에서는 과거를 모르면 그 과거가 반복될 수 있으니 4.3사건에 대한 핵심을 요약하여 벧엘 대학생들께 설명해 달라는 특별 주문을 해 주셨습니다. 저는 사기가 올라 이곳에 달려왔습니다. 귀중한 기회를 주신 민용식 학장님께 큰 감사를 드립니다.
이곳은 정동교회! 소년 이승만이 배재학당 다닐 때 예배를 보았던 역사적인 장소 아닙니까? 이승만 박사가 우리 역사에 없었더라면 대한민국 탄생조차도 있을 수 없었기에 대한민국의 원로 선배 님 여러분들을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뵙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정동교회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여러분들 중 대부분은 우리들의 나라가 없었던 시절, 조국이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에서 사시다가 대한민국의 건국에 참여하시고 6.25전쟁 때는 나라를 지켜 내시고 그 후에는 오늘의 발전을 있게 하신 장본인들이시며 살아계신 증인들이십니다. 존경의 거수경례를 올립니다.
어른님들에게 먼저 여쭈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반만년 역사의 한반도에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혁명은 언제 있었다고 보십니까? 4.19입니까 5.18입니까 6.29입니까?
말씀이 없으십니다. 그 답은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입니다. 자유민주주의 혁명이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류근일 선생이 그의 까페인 ‘류근일 탐미주의 클럽’의 온 라인 칼럼에 “4.19와 이승만 제자리 찾기”란 제목으로 쓴 글이 정곡을 찔러 주고 있기에 그 일부를 낭독해 드리겠습니다.
"한반도 최초의 근대적 자유민주주의 혁명의 출발점은 대한민국 헌법제정과 대한민국 건국이었으며 그 혁명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선두에서 리드 했다. 4. 19는 훼손당한 그것을 되살린 혁명이었다. 이 점에서 4.19는 반(反)대한민국 체제 아닌 친(親)대한민국 체제였으며 한 마디로 자유주의 봉기였다. 그리고 자유주의는 대한민국 헌법 체제에서만 가능하다."
2차 대전 이후에 지구상에는 147개 국가가 새로 태어났는데 그 중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성공한 나라는 아직은 우리 대한민국뿐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6.25전쟁의 폐허위에 그리고 유사 이래 지속되었든 전 근대적 봉건왕조의 토양 위에, 미국과 영국이 2-300년 동안에, 그리고 일본이 100년 동안에 이룩했던 산업화와 민주화의 근대화 혁명을 불과 50년으로 단축할 수 있었던 것은 온 국민의 자랑이 아닐 수 없으며 이자랑은 자유 민주 대한민국으로서의 출발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와는 판이한 출발을 했던 북한의 동포들은 오늘 어떤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까?
시작이 반이란 속담도 있습니다만 우리들이 함께 누리는 축복은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강했기에 북의 6.25 남침을 맨주먹 붉은 피로 막아내신 6.25참전 용사들이 계셨고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 근대화 웅지가 있었고, 대한민국 국민들의 성실성을 독일국민들에게 알림으로서 서독정부의 차관기회를 열 수 있게 했던 서독 파견의 광산 근로자와 간호사들의 땀이 있었고, 그리고 베트남 전선에서 생명을 바쳐 국방 현대화와 산업화의 초석을 쌓았던 베트남 참전 용사들의 피와 땀이 섞인 애국심이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보리 고개를 넘기며 각자의 가정과 학교와 저마다의 직장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땀 흘리며 일했던 말없는 절대 다수 국민들의 헌신적 나라사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벧엘 대학생들의 모습에서 그 나라사랑을 읽습니다.
금년이 6.25 전쟁 60주년입니다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엔 북한의 6.25기습남침 때 UN깃발 아래 참전했던 미국을 비롯한 자유우방국가들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6.25 발발 60주년을 맞이하여 온 국민들이 크게 뭉쳐서 서로 환영하고 감사하며 위로도 받고 박수도 치면서 미국을 비롯한 우방국가의 국민들에 대해서도 감사하는 마음을 새롭게 하며 앞으로의 60년을 설계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불시에 천안호 격침을 당해 애통과 분통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천안호 사건은 매우 중요합니다만 오늘의 주제는 아니기에 그 애통과 비통이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로 바뀌기를 바라며 준비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4.3사건이란?
4.3사건은 여러분들의 일생을 통해 여러 가지로 불려왔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봉기, 무장봉기, 폭동, 무장폭동, 반란 ---, 그 당시를 목격하신 분들도 당시배경에 대해선 정확히 알 수가 없으셨고 지금 아시는 것은 2003년 10월에, 16대 대통령 노무현이 4.3사건에 관하여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 사과로 인해 4.3사건은 외부의 개입이 전혀 없었던 순박한 제주도민들만의 봉기 내지 무장 봉기였다고 바라보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으며, 무장폭동 혹은 반란으로 아셨던 분들도 대통령이 사과까지 했으니 이제 이의를 제기해야 무슨 뜻이 있겠나? 하고 체념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기록으로 확인되는 4.3사건의 배경사실 몇 가지만은 확실히 알아야만 이승만 박사의 선견지명에 대한 감사와 함께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대한 신념이 높이 살아 날 것입니다.
제주 4.3사건은 48년 4월 3일에 발생해서 1954년 9월 21일까지 6년 5개월간 지속된 사건으로서 미 군정시절에 발생하여 6.25 전쟁휴전 후에도 1년 2개월이 더 지속되었음으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과 시점과 시각에 따라 서로 다른 관점이 존재합니다만 그 호칭의 구분에 관계없이 당시의 4.3사건이 속수무책으로 확대되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탄생조차 할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필히 알아야만할 몇 가지 사실만을 간단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배경지식이 전혀 없었던 제가 어떻게 4.3위원이 되었는지에 대한 궁금증부터 풀어드리는 게 순서일 것 같습니다.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이 2000년 1월에 제정되면서 성우회의 예비역 장군들은 헌법소원을 내고 강력한 항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4.3특별법의 시행을 위한 4.3위원회가 생겼으니 밖에서 성토하지 말고 내부에 들어와서 따지라는 취지에서 국방부에 2명 경찰에 1명 계 3명의 4.3 위원이 배당되었던 것이며 국방부는 재향군인회의 추천을 받아 4.3 사건관련 실무경험이 가장 많았던 김점곤 장군과 박창암 장군을 위촉했었습니다.
그러나 박창암 장군은 4.3특별법 헌법소원 시 연대서명을 했던 관계로 그 법에 반대한 사람이 어떻게 그 법에 따른 위원회에서 활동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제기되면서 대타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제가 2000년 8월에 이 한동 국무총리의 위촉장을 받았던 것입니다. 저는 예편 후 재향군인회에서 안보정책을 맡아 관련분야의 글을 썼든 탓으로 추천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는 굳이 고사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백지상태에서 4.3사건을 연구해야 했으며, 4.3사건 당시 순박했던 제주도 주민의 억울한 희생도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손상되었던 주민들의 명예는 최대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무장 폭동을 진압해야 했던 군이 전체적으로 양민 학살의 주범으로 몰려서도 안 됨으로 4.3사건에 관한 대통령의 사과는 부적절했다는 생각을 지금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4.3사건의 목적과 배경
‘4.3사건’은 48년 5월 10일의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방해 및 거부하기 위한 제주도 남노당 인민해방군의 무장폭동으로서 무방비로 확대되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무방비로 허용되었었다면 대한민국이 탄생될 수 없었다는 판단의 기초 사실 몇 가지만 짚어 보겠습니다.
첫째는, 한반도에 소련 위성국가를 수립하라는 스탈린 비밀지령(45.9.20) 사실이 소련의 비밀문서 해제로 1993년도에 확인(일본의 마이니찌 신문:93.2.26)된 바, 이 사실은 당시의 제주도 주민들은 물론 오늘날의 우리 국민들도 대부분은 모르고 있습니다.
이 비밀 지령문은 구소련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 후, 일본군의 항복접수를 위한 소련군의 평양 진주(45.8.24)기회를, 일-노전쟁의 패배로 빼앗겼던 한반도 종주권의 회복 기회로 삼고 있었음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비밀지령에 따라 소련군 정치사령부는 일본군의 항복접수와 관계가 없는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을 설치(45.10.13)하고는 그 명칭까지도 북조선 공산당으로 변경(12.17)하면서 서울과의 관계를 먼저 단절시켰고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설치(46.2)후 북한만의 단독흑백선거(46. 11.3)로 도·시·군 인민위원회의 인민위원을 선출하고 1947년 2월21일에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선정하면서 사실상의 인민공화국 정부를 수립했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정부수립보다 최소한도 18개월이 빠른 시점이었습니다.
그리고는 UN이 요구하는 선거관리 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거부함으로서 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실시되었던 것입니다. UN 감시하의 남북 자유 총선거에 의한 최초의 통일기회를 거부한 쪽은 소련이었고 소련의 지시에 맹종한 김일성이었습니다.
북한이 그들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이미 완료해 놓은 상태에서 남쪽의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방해 및 거부한 것이 4.3무장 폭동이었던 것입니다. 인구비례에 따라 북한에는 100석, 남한에는 200석의 국회의원이 배당되고 제주도에서는 3명의 국회의원이 선출되어야 했으나 폭동에 의한 투표율 미달로 1명의 국회의원만 당선되고 미 선출 2명은 다음해에 별도로 선출되었던 것입니다. 5.10선거에서 뽑힌 198명의 국회의원이 1948년 7월 17일 헌법을 제정 공포함으로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던 것입니다.
북한은 그들의 정부수립 공식발표만을 25일 늦은 1948년 9월 9일에 해 놓고는 대한민국의 단독정부수립이 남북의 분단을 고착했다는 억지 선전 선동을 지금까지도 해 왔다는 사실을 우리의 후손들에게 확실히 알려야합니다.
다음은 스티코프 비망록의 발견입니다. 스티코프 소련군 상장은 1945년 4월에 연해주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김일성을 발탁한 인물이며, 그 후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측 수석대표(46-47년)와 연해주군관구 정치담당 부사령관(47~48년)을 거쳐 북한주재 초대 소련 대사(48~51년)를 역임했던 당대 최고의 북한 실권자로서 그의 비망록을 구소련의 개방 후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가 발굴했던 것입니다.
스티코프 비망록은 그가 미소 공동위원회의 소련 측 수석대표를 맡고 있었던 기간 중의 일기장으로서 46년 9월 당시의 남노당수 박헌영이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스티코프에 문의하자 스티코프가 “테러와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적인 시위를 벌이고 항의집회를 개최하라”고 지시한 기록이 나타나며 46년의 9월 총파업 때는 일화 2백만엔을, 10월의 대구 폭동 때는 3백만엔의 공작금을 지원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스티코프의 비망록에 “체포된 좌익 활동가들의 석방”등 정치문제를 파업 요구조건 속에 포함시켜 관철할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한 것 등이 나타난 것은 소련군이 남한의 정치공작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것을 의미하는 바, 소 군정은 4.3무장 폭동이 있기 훨씬 이전부터 남한의 각종 폭동과 파업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 비망록 상에는 당시에 존재했던 남북의 여러 정당이 북조선 노동당(북로당)과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통합되는 과정의 스티코프 역할도 자세하게 나타나는 바, 당시의 스티코프의 역할이 오늘날 북한의 누구에게 승계되었을까를 엿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북한의 통일전선부장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남북을 오가는 인물들을 관심 있게 살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도 갖게 해 줍니다. (스티코프 비망록: vietnamwar.co.kr 인강칼럼의 헤드라인)
다음은 ‘4.3사건’ 초기의 동아일보 및 서울신문 기사 한 토막입니다. 48.9.1자의 동아일보는 제주도 ‘인민 무장대원’ 들에게 순경 1만원, 형사 2만원, 경위이상 3만원, 경찰 유력자에게는 100만원(당시 쌀 한가마니는 3백원)의 살인 현상금을 내걸고 살인을 독려하면서 “목포까지 김일성 군(軍)이 내도하였으니 안심하라”는 선전이 통한다는 보도를 하고 있고 , 서울신문(48.10.13)은 9월 9일의 인민공화국의 수립발표 이후부터는 “제주 각처에 인공기”가 오르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보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군과 경찰의 임무수행이 얼마나 어려웠을까를 연상케 해 줍니다. 군경의 양민학살론을 무색케 해 주는 대목입니다.
끝으로, 4.3폭동의 주동자 김달삼이 4.3폭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48년 8월 25일(대한민국 정부수립 10일 후)에 해주의 남조선 인민대표자 대의원 총회에 참석해서 4.3사건의 전과보고와 통일된 중앙정부 수립에 관해 보고를 하면서 말미에 "조국의 해방군인 소련군과 천재적 영도자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불렀던 연설문이 발견된 사실입니다.
남노당 제주도당의 군사부장 김달삼은 남로당 중앙당의 선전부장 강만석의 사위로서 김달삼의 가묘가 평양근교의 애국열사능에 "남조선 혁명가"의 비문을 받고 있는 현장을 2000년 3월, 감귤보내기 운동으로 평양을 방문했던 제주도의 우근민 지사가 직접 목격했다는 기사가 제주일보(00.6.8)에 보도된 바 있었습니다. 이 김달삼 연설문과 제주일보의 기사는 4.3무장폭동의 배경에 소 군정과 북한이 깊이 관련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상의 몇 가지 사실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는 스탈린의 비밀지령과 스티코프의 대남공작에서 비롯되는 온갖 방해 공작과 선전 선동이 횡행하는 악조건 하에서 제주 4.3 무장폭동을 진압해야 했던 것이며 그 기초위에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주장이 가능한 것입니다.
대통령 노무현은 4.3사건 55주년 하루 전인, 2003년 4월 2일에 4.3위원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청하였습니다. 저는 모처럼의 기회를 포착, 대통령 노무현에게 4.3사건에 외부의 개입이 있었음을 다음 내용으로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1)4.3폭동의 배경으로 작동된 45년 9월 20일의 스탈린 비밀지령이 1993년에 발견되었고 (2)소련군의 정치부사령관이 남노당 당수 박헌영에게 지침을 내리고 공작자금을 제공한 기록이 나타난 스티코프 비망록이 발견되었고 (3)4.3폭동의 주동자 김달삼이 폭동 발발 4개월 후, 북한 해주의 민족 대표자회의에 참석, 4.3사건 전과를 보고하며 말미에 스탈린과 김일성 만세를 부른 연설문이 발견되었고 (4) 그의 가묘가 북한의 애국 열사능에 남조선 혁명가로 안장되어 있다는 사실을 두 차례의 발언기회를 통해 설명했으며 그 자리에는 당시의 국무총리 고건씨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6개월 후인 2003년 10월 31일, 대통령 노무현은 4.3사건’과 관련하여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고뇌와 노심초사는 안중에도 없이 정부차원의 공식사과를 단행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의 군 통수권 행사에 관해 5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사과를 하는 4.3사건 “사후의 불가사의”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 보다 2주 앞서서 대통령 사과의 기초를 제공했던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가 고건 총리 주재하의 4.3위원회에서 채택되는 자리에서 국방부와 경찰위촉의 4.3위원 3명은 서명란에 전원 ‘부동의’를 표기하고 항의의 듯으로 일괄 사퇴를 선언한 바 있었으나 어떤 언론에서도 그 과정에 대해 문의조차 안 해 주는 것은 참으로 섭섭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국민들은 4.3사건에 관하여 무관심할 수밖에 없으며 모르니까 오늘까지 침묵할 수밖에 없고 침묵이 길어질수록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심한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6.25 전쟁의 10대 불가사의
여러분 중에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란 말을 들어 본분 계시면 손 한번 들어주십시오. 아니! 정말 아시는 분이 한 분도 안 계십니까? 이 말은 6.25 정전 직후에 육군참모 총장을 역임하신 이형근 장군의 “군번 1번의 외길 인생”이란 회고록에 나오는 말입니다.
1. 일선부대의 남침징후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
2. 6.25발발 2주전에 단행된 각급 주요 지휘관의 대규모 인사이동
3. 6월 13-20일간에 단행된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4. 6월 11일부터 발령되어있던 비상 경계령이 6월 24일 0시에 해제.
5. 비상경계령 해제와 함께 전 장병의 1/2에게 휴가 외출외박을 허용
6. 6월 24일 저녁에 개최된 육군 장교 클럽에서의 고급장교 댄스 파티
7. 서울 북방으로의 축차적 병력투입으로 불필요한 희생 발생초래
8. 6월 25-27일간의 국군후퇴를 반격, 북진 중으로 허위 보도한 중앙방송
9. 한강교의 조기 폭파단행
10. 한강교를 폭파한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집행
이 형근 장군께서는 언젠가 누군가가 이 의혹들을 풀 것이며 이것이 풀려야만 국가의 백년
대계가 보장될 것이란 요지의 기록을 그의 회고록에 남기셨습니다. 혹시 국군의 후퇴를 북진으로 허위 보도했던 당시 중앙방송의 사장 이름이 거론된 것을 들어 보셨습니까?
4.3 사건의 배후와 배경에 대한 관심을 갖고 지금까지 연구한 저의 짧은 안목에서 보면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규명하기 위한 구체적인 규명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10대 불가사의를 풀어 주는 열쇠 하나
노무현씨의 4.3사건 관련 정부차원 공식사과에 대한 항의로 4.3위원 사퇴를 결심했던 저는 4년 이 지난 2007년 10월에 6.25전쟁의 10대 불가사의를 풀어주는 열쇠하나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저의 4.3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신 한 북한 전문가가 한번 읽어보라고 건네준 1997년 5월 26일자의 북한 노동신문 기사였습니다. 이미 10년이 지난 구문이었습니다.
“민족의 영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열사”라는 제목아래 성시백이란 사람이 4.3무장폭동 발발 1년 전인 1947년 초에 평양에 올라가 김일성으로부터 회중 금시계를 받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울에 돌아온 후 육군의 ‘사단’ 예하 ‘대대’는 물론 ‘헌병대’, ‘사관학교’, ‘육군정보국’까지 ‘조직선’을 늘려 국군의 와해공작을 했고 당시 서울에서 활동했던 ‘UN 임시조선위원단’ 조직의 와해 및 방해공작은 물론, 김구 선생에게 김일성의 특사임을 스스로 밝히고 1948년 4월의 ‘남북연석회의’ 초청장을 전달하고 참가하게 했다는 등등의 대남공작 활동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저의 관심을 끈 것은 성시백이가 남한의 각 정당과 산하단체를 정당협의회로 묶는 통일전선 형성과 ‘선전공작’을 하면서 ‘조선중앙일보’와 ‘광명일보’등의 10여개 신문사를 경영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4.3사건 당시 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을 암살했던 좌익계의 부하들이 애국심이 강하다고 찬양보도를 했던 ‘조선중앙일보’가 오늘의 ‘중앙일보’ 전신으로 만 알고 매우 황당한 적이 있었는데 그 ‘조선중앙일보’를 성시백이가 직접 운영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저는 무릎을 쳐야했습니다.
성시백이 운영했던 ‘조선중앙일보’의 당시 기사들을 모두 찾아내서 기타의 신문들과 비교만 해도 김일성의 비밀 공작원이 4.3사건에 미친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 그 때 부터 97년 5월 26일자의 노동신문 특집보도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제 나름의 노력을 다해 왔으나 오늘까지도 별 반응이 없어 무척 고통스러웠는데 오늘 정동교회에서 저를 이처럼 불러 주시니 지금까지 살아 온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제가 지금까지 갖고 있는 의문은, 항상 오리발을 내 밀며 남한의 수사당국이 발표했던 모든 간첩사건들을 전부 “고문에 의한 조작”으로 일축해 오던 던 북한이 왜? 김대중 대통령 선거를 앞두었던 97년 5월에는 그 태도를 갑자기 바꾸어 그간의 대남공작을 대대적으로 인정하고 찬양하는 특집 보도를 했을 것인가에 있어 왔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수수께끼는 우리의 언론들은 왜 오늘까지 13년이나 침묵을 해 왔는가 입니다. 제가 4.3위원으로 활동하는 동안에만 그 내용을 알았었더라도 2003년 4월 2일, 청와대의 4.3위원 초청기회에 김일성의 특사가 4.3사건에 개입한 근거가 있다는 주장을 펼 수 있었을 텐데 그 기회조차 없었음을 한탄합니다. 저는 오늘 정동교회 여러분들의 관심은 당시의 특집보도 내용이 김 노 두 전직 대통령에게는 제대로 보고되었으며 그리고 그 내용을 근거로 두 전직 대통령이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에게 대남공작의 중단을 공식적으로 요청했는가에 지향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고가 안 되었어도 문제이고 보고를 받고도 침묵을 했다면 이는 더욱 대한민국의 재앙입니다. 앞으로 있을 수도 있는 세 번째의 정상회담에서도 다시 모른 체 침묵을 한다면 이는 대한민국의 망국과 직결되라고 예상하고 있었는데, 금번 천안호 격침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한 순간에 발생했던 군함의 침몰을 바라보는 시각이 정당과 신문과 방송과 개인에 따라 아직 까지도 4.3‘사건’의 호칭처럼 다양한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하기 짝이 없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이 특집보도 1년 전에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가 북송되어 성시백의 뒤를 이어 공화국 영웅이 되었고 그 4년 후인 김대중 정권 시 63명의 비전향장기수가 집단 북송되어 모두 공화국 영웅대접을 받게 됨으로써 그 후의 남쪽과 북쪽에 어떤 영향이 있었으리라고 보십니까? 남쪽에서 암약하던 북한 공작원들의 사기는 하늘로 솟았을 것이고 이들을 체포하고 수사했던 대한민국 대공수사 요원들의 사기는 땅으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국사모’의 송영인 회장이 최근의 동영상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1998년 4월에 국정원에서는 그간 양성되었던 간첩 잡는 전문인력 581명이 집단해고 되었고 경찰에도 대공요원 2,500여명, 기무사에도 대공요원 600여명, 그리고 검찰에도 공안검사 40여명이 감축되었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의 대공전선은 완전히 와해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는 1997년 5월 26일로부터 1년 후에 있었던 것임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시백 그는 누구인가?
성시백이란 인물의 신상까지 아셔야만 문제의 심각성을 아십니다.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시절 당시, 장개석 정부의 ‘수도경비사령관’에 해당되는 胡宗南 장군의 유능한 참모로 알려졌었으나 실제는 모택동의 첩자였으며 서울복귀 후에는 장개석 휘하의 참모였다는 소문을 이용하여 조선 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장군을 조석으로 만났다는 기록이 상해 임시정부시절 독립군으로 활동했던 태윤기 선생의 “피어린 독립군의 항쟁수기, 회상의 황하”(갑인출판사 1975년 발행)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기무부대가 제공한 최근 참고자료에 의하면 김일성이 해방 후 대남공작 적임자의 물색 중 중국 공산당에서 활동하던 성시백이 조선 사람임을 알고 주은래에게 인편을 보내 “성시백을 우리에게 보내주어 조선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자 주은래가 그를 조선 공작조직에 인계했다고 하며 북한공작원으로 활동할 것을 약속한 성시백은 일본을 거쳐 남한에 입국하여 무역회사 대표로 위장하여 대남 간첩활동을 하다가 50년 5월에 피검되어 6.25발발 이 틀 후인 6월 27일에 간첩죄로 사형이 집행되었던 것입니다. 이 간첩 임무수행의 공로로 성시백은 사후에 “인민 공화국 영웅 1호”가 되었다는 사실도 이 기회에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공화국 영웅 1호”로 추대된 ‘김일성의 비밀특사’가 서울에서 대북 무역회사 대표로 활동하면서 상해 임시정부 시절 장개석의 휘하 참모였다는 소문을 등지고 이승만 정부의 요인들을 자유롭게 만나며 10개의 신문사를 운영했다고 하니 영향력의 끝이 어디였을까를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해 집니다.
오늘은 어떤 성시백의 후예가 ‘김정일의 비밀특사’가 되어 누구를 만나며 무슨 협조와 지시를 하면서 또 몇 개의 신문과 방송을 운영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vietnamwar.co.kr 의 ‘인강칼럼’에는 경계의 눈을 뜨는 데 필요한 300여개의 글들이 올려져 있으니 참고해 주시고 헤드라인에 여섯 번째로 보이는 “10년 전의 노동신문 특집보도 전문”만은 꼭 한 번 확인해 주시고 주변에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그 내용을 읽으시면 오늘의 안보 취약점을 바라보는 시각이 생기실 것이며 ‘철’저한 ‘경’계로 ‘만’반의 ‘대’비가 절실하다는 저의 주장에도 공감을 해 주실 것입니다. ‘철’저한 ‘경’계로 ‘만’반의 ‘대’비를 하자는 말을 줄이면 “철경만대”가 됩니다. 여러분들께서 공감하셨단 뜻으로 복창 한번 해 주시겠습니까? 철경만대! 원로님들의 크신 함성에 감사합니다.
여러분! 어뢰나 미사일이나 핵무기보다도 훨씬 무서운 것은 북의 대남공작입니다. 우리의 안보위기는 “철경만대”의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은 지난 10여 년 동안에 많이 증가되어 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우리의 젊은이들이 북한의 거짓말 선전과 선동에도 무방비로 노출되어 왔습니다.
대한민국에 미군이 주둔하면 미국의 식민지입니까? 독일에도 일본에도 프랑스에도 미국군대는 주준하고 있지 않습니까? 빈부의 차이는 우리나라에만 있습니까? 미국과 중국 일본에도 있으며 북한의 빈부 격차는 세계에 그 유례조차 없는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의 과거에 독재로 인한 희생이 있었다지만 북한에는 지난 60년간의 부자 세습독재 하에 어떤 희생이 지금까지도 강요되고 있습니까?
따라서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적 체제와 가치를 부정하며 미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하는 이 땅의 일부 좌파세력은 북한의 선동에 박자를 맞추는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으며 공무집행 중의 경찰을 납치 감금하고 동료를 구출하려는 경찰들을 불태워 죽인 살인방화범들에게 민주화 국가 유공자의 호칭을 준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이들이 진정한 민주화 유공자였다면 북의 부자세습 독재 권력에 대하여 더 크게 진노하고 질타해야 했으며 그 굴레 속에서 현재 신음하고 있는 북한 동포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민주화에 성공한 대한민국의 과거사만을 공격함으로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해 오지 않았습니까?
많은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진정한 민주화의 달성은 산업화 이후에나 가능한 것임으로 오늘의 이 나라 민주화 달성은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화염병으로 헌법질서를 파괴했던 거리의 투사들이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집니다.
차라리 대한민국의 진정한 참 민주화 유공자는 오히려 독일의 지하탄광과 병원에서 삽과 주사기를 들었던 광산 근로자와 병원의 간호사들이었고, 생명을 바쳐 나라를 지켰던 6.25 참전용사 선배님들과 베트남 참전 용사였으며 그리고 국내의 산업 현장과 중동지역의 건설현장에서 묵묵히 땀을 흘렸던 산업화 역군들 아니었습니까?
이 기회에 신조어 3개만 더 소개합니다.
저는 앞에서 북한의 대남공작에 대한 “철경만대”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만, 이 기회에 신조어 3개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말이 있어야 행동이 따르고 행동이 있어야 우리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승만 박사께서는 “뭉치면 살고 혜지면 죽는다.”는 격언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의 실천에도 기여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는 “영감제안”입니다.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제)잘못입니다, 미(안)합니다 에서 (영)(감)(제)(안)을 따 온 줄임말이며, 한편, 집안에서는 할아버지가 (영감)이며 군이나 직장에서는 2단계 상급자가 영감이 되니, 어떤 조직체에서든 건의나 제안을 할 때에는 영감의 입장에도 서 보고 ‘영감’(Spirit)을 갖고 제안을 하자는 뜻으로 만든 복합어입니다.
여러분! 주먹을 들고 ‘네 잘못이야!’하며 한 손가락을 내 밀어 보십시오. 인지 한 손가락은 상대방을 향하지만, 나머지 셋은 엄지손가락에 가렸지만 자신을 향합니다. (영감제안)은 가정이든 군이든 일반 직장이든 이 손가락의 1:3원리를 알고, 제안이나 건의를 하자는 운동입니다.
또 하나는 “상장인격”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인)정하고 (격)려하자의 준말이며 (상장)받는 (인격)을 갖자는 뜻도 포함됩니다. 이번엔 주먹을 들고 ‘당신이 최고야!’ 하며 한 손가락을 내밀어 보십시오. 엄지가 올라가고 나머지 네 손가락은 자신을 향합니다. 남을 칭찬하면 네 배의 기쁨이 돌아오니 잘하는 사람과 성공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칠 줄 아는 여유와 인격을 갖추자는 운동입니다.
마지막 하나는 “자즐보” 운동으로서 “자즐보”는 (자)랑 (즐)거움 (보)람의 준 말입니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로부터는 (자랑)을 찾아내며 자랑이 없을 땐 발전을 위한 교훈을 찾아내어 자랑을 삼고, (현재)로 부터는 열심히 몰두하는 성취의 (즐)거움을 느끼고 (미래)를 향한 희망 혹은 계획에서 (보)람을 찾자는 운동입니다. (인강칼럼의 헤드라인 “1석3조 자즐보 이야기”)
제주 4.3 사건의 현장에는 반백년 전에 무고한 희생이 있었고 억울한 죽음이 있었습니다. 순박했던 주민들 뿐 아니라 상사의 명에 따라 공무를 집행했던 군과 경찰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이제 반백년이 지나는 동안 그 거룩했던 쌍방의 죽음위에 오늘의 위대한 대한민국이 있게 된 것이니 정부로 부터는 희생자에 대한 “영감제안”의 보호와 지원이 있어야 하고 또 희생자로 부터도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에 대한 “상장인격”이 울어나서 온 국민이 대한민국의 과거-현재-미래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자랑 즐거움 보람”(자즐보)의 시각이 생겨나기를 바라는 것이 7년 전에 4.3위원을 사퇴해야 했던 저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뜨거운 박수에 감사합니다! 그런 면에서 얼마 전에 제주도에 개관된 제주 4.3평화공원은 남녀노소의 구분 없이 온 국민이 서로 서로 “영감제안”하고 “상장인격”하는 “자즐보”의 광장으로 태어나야만 국민의 소망을 따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 최근 제주 4.3평화공원을 다녀오신 분이 계시면 또 손 한 번 들어 주십시오. 한 분도 안 계시는 군요. 제주 4.3평화공원의 공사시작 전에 현지를 방문했던 저는 최근 그 곳을 다녀 온 분들로부터 이 평화의 공원이 국군과 경찰에 대한 증오감을 부각하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는 걱정을 듣곤 했습니다.
저도 앞으로 한 달 후면 고등학교 동창들의 졸업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그곳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전해서 들은 내용이 분명한 사실이라면, 제주 4.3사건은 먼 옛날 제주도에 국한되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니고 오늘 현재에도 진행 중인 대한민국 의 현재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께서도 그곳을 직접 가시든가 혹은 방문하시는 분들에게 큰 관심을 갖고 살피시는 기회가 되도록 말씀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사단장 시절에 장병들 간에 <영감제안>하고 <상장인격>하는 병영 분위기의 확산을 위해 행진 간에 발을 맞추기 위해 복창하는 하나! 둘! 셋! 넷!의 숫자구호대신에 영!감!제!안! 과 상!장!인!격!을 대용토록 했었는데 자랑과 즐거움과 보람(자즐보)의 명랑한 생활 분위기 조성에도 기여했다고 생각합니다.
<영감제안/상장인격> 운동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갈등의 해결에도 기여함으로서 북한의 대남공작에 동원되는 각종 선전과 선동을 막아주는 좋은 방파제가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영감제안하자!> <상장인격하자!> 그리고 <자즐보 하자!>의 뜻을 마음속에 심을 수 있도록 장병들과 함께 불렀던 군가를 1절만 제가 직접 불러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린 마음 밝은 세상
1절:삼천리 금수강산 우리의 조국 (영)(감)(제)(안)으로 꽃 피웁시다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환(영)하고 (감)사하며 (제) 잘못이요 (미)안합니다로 더 잘 할 것을 다짐합시다.
2절: 더 불어 함께 사는 열린 세상도 (상)(장)(인)(격)으로 꽃 피웁시다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어디서나 (상)대방의 (장)점부터 찾아내어 (인)정 (격)려로 더 잘할 것을 다짐합시다.
3절: 지구의 심장부에 자즐보 솟는
(영감)(제안)(상장)(인격) 꽃 피는 나라
세계의 자유 시민 우리 친구 만들고
<자즐보> 파괴하는 적에 대해서는
두 눈 부릅뜨고 (철)(경)(만)(대) 다짐합시다.
3절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북한에는 (영감)(제안)과 (상장)(인격) 그리고 <자즐보>의 개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우리들의 <자즐보> 파괴를 시도할 수 있으며 금번의 천안함 격침도 그런 각도에서도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반도가 지구의 심장부인 것은 지구(5대양 6대주)와 인체(5장 6부)가 5:6으로 닮았고 심장이 멎으면 즉시 사망이니 심장이 가장 중요하고 한반도는 가장 큰 바다와 대륙의 연결지점으로서 지리정치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요충지니 닮았다는 주장을 한 것입니다.
결론
1. 금년이 6.25 전쟁 60주년입니다. 더 늦기 전에 6.25전쟁 10대 불가사의는 규명되어야 합니다.
2. 그 길은 13년이 지난 1997.5.26일의 노동신문 특집보도의 내용을 많이 늦었지만 온 국민의 목소리로 공론화 하는 것입니다. 정동교회가 앞장을 서 주십시오.
3. 이것이 초대 대통령의 선견지명에 감사하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함께 지키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천암함 격침을 직접 당한 해군의 가족들과 이를 바라보고 있는 온 국민들의 애통과 분통이 치유되고 대한민국 안보를 위한 전화위복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여러분과 함께 기원하며 여기서 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불러 주시고 긴 시간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2010.4.20. 11:00 정동교회에서, 한광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