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나라마다 동성애가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아래 글은 모사이트에 올린 글입니다. 동성애 대한 글을 올렸는데 안티댓글이 무더기로 올라온 것에 대한 답글입니다.
동성애. 강도와 살인이 죄라는 것에 대해서는 거의 논란이 없지만, 동성애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다른 죄들은 유무형의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 분명한 반면, 동성애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동성愛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의 문제로 보입니다. 그래서 동성애 옹호론자들은 당당하게 '사랑'으로 논증하는데 반해 동성애 반대론자들은 '사랑'이라는 거대 담론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성경에 기록된 일부 구절만으로 논증합니다. 상호 해석의 차이가 있는 성경구절들(디모데전서1:9-10, 로마서1:26-27, 레위기18:22, 20:13, 창세기19:5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성경 원어인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논증을 하고픈 부분이 있지만, 이미 이런 논증은 양쪽 모두가 해석의 차이로 치부하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동성애'를 게시한 까닭은 논쟁을 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성경해석과 성경윤리의 지표가 될만한 이슈 중에 가장 적절한 게 동성애 문제이기에, 이 문제를 간단히 제시함으로 한기연이 시도하는 성경읽기과 해석적 패러다임을 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가지고서 테스트를 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진지하고 정직한 대화를 터기 위함입니다. 한기연에 가입한 후에 게시된 글을 읽었는데, 한기연에서 내세우고 구하는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나, '인문학적 성경읽기'를 치열하게 하는 모습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래에 게시한 '동성애'에 대한 댓글의 내용에서는 더욱 그러했고요)
기존의 선교단체와는 다른 얼굴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도대체 어떤 정체성과 방향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하기 힘들었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같은 청년을 자녀로 둔 동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 대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동성애에 대한 제 생각을 여러분에게 드러냄으로 저를 솔직하게 소개를 하고 싶었을 뿐이지, 동성애자에 대한 정죄와 폄하에 초점을 둔 건 아니었습니다. 동성애라고 하는 예민한 이슈를 시작으로 진지하고 정직한 성경읽기와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유익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리 마태의 집에 계실 때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과 함께 하셨을 뿐이지 그들을 정죄하거나 꾸짖지 않으신 걸로 기록됩니다. 또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자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러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간음을 허용하시고, 세리의 탐욕을 허용하시고, 죄인의 죄를 허용하신 건 아닙니다. 문제는 바로 이겁니다.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과, 정죄하지 않고 함께 하시는 행위를 어떻게 연결짓는가 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대놓고 정죄하신 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힘 있는 사람들이었지 종교적&윤리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동성애자를 만나셨다고 가정한다면, 아마 예수님은 세리 마태에게 하셨던 것처럼 동성애자를 정죄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고 그를 향한 연민을 드러내셨을 겁니다.
동성애와 관련되는 종교적&철학적&사회학적 담론은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 동성애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 신선한 충격을 줬던 책을 하나 소개한다면 중국인 우춘춘이 쓴 [남자, 남자를 사랑하다]입니다. 이전에 읽었던 푸코나 니체의 책에서는 '권력'과 같은 몇 개의 매카니즘 속에다 모든 걸 집어 넣고는 해석을 하려는 무리수를 던진데 반해. 이런 류의 책은 인위적인 매카니즘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동성애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는 분이든 간에,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서 생각을 시도한다면 좀 더 진실에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이 사실이라고 봅니다. 그 중에 많은 내용들이 상징과 은유, 알레고리로 묘사된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하는 패턴은 꿈이나 시를 해석하는 패턴과도 유사합니다. 다만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꿈이나 시,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것과의 차이점은, 성경을 뮈토스가 아니라 로고스, 진리라고 전제를 하는 겁니다. 또 우리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어낼 수 있게 하는 매개물을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을 전제하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이 두 가지 전제는 언제나 저의 성경읽기를 건강하게 해주는 트랙이 됩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만드셨습니다. 성적으로 남자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의 뼈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성적으로 여자입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자와 남자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자와 여자를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생육하라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다고만 보면 곤란합니다. 하나님이 남녀를 만드신 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가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는데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후, 생육과 번성, 정복과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곤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여자)와 한 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에덴동산의 남녀는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만드셨고, 남자와 여자의 성적결합을 유도하셨고, 남자와 여자의 잉태와 해산을 통해서 자녀를 낳게 하셨고, 그 자녀들이 또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를 성취해나가십니다. 남녀의 성적결합과 거대한 하나님의 이야기는 무관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론 생육과 번성, 혈통 보전이라는 차원만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에 흐르는 이야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슈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분별 혹은 구별'로 실체가 드러납니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가인의 제사도 받으셔야만 했을 것이나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홍수나 바벨탑 사건에서도 이런 분별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고, 사라와 하갈의 이야기에서도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별&구별로 인해 구원하시는 사건으로 귀결됩니다. 누구든지 분별&구별에서 선택받지 못한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신약시대인 지금은 더욱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믿음대로 살아가는 행위가 없다면 구원은 멀어집니다. 마음으로 간음을 해도 간음을 범했다는 말씀은 더욱 분별&구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분별&구별이 없는 사랑은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에게서 분별&구별을 지워버린다면, 성경의 하나님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문제는 동성애가 이런 분별&구별의 대상이 되느냐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여자를 만드셨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논란이 있는 성경구절은 예외로 하더라도, 성경 그 어디에도 동성애를 긍정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이같이 동성애를 긍정하는 구절이 없을 뿐만 아니라, 개인이나 사회적인 성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론 성을 개방시키려고 작정을 한 듯이 성행위를 직간접으로 묘사하시기도 하시고, 때론 성문제에 대해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하시면서 성을 터부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십니다. 성경을 직간접으로 드러내시는 본문의 내용은 한결같이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가서도 그렇고, 아브라함이나 룻의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남녀이야기에는 동성애를 볼 수 없습니다. 반면 성에 대해 알레지 반응을 일으키시는 경우는 한곁같이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성적결합이 아닙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어떤 자세로 성행위를 했고 어디서 성행위를 했느냐를 문제 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성행위 전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문제시하십니다. 여기에 동성애가 포함되는 건 분명합니다. 동성애가 다른 죄들보다 더 중한 죄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근친상간, 난교, 수간과 다르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정의하는 사랑에 근거하여 변론을 한다면 근친상간과 난교, 수간과 같은 것도 정당시 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분별&구별의 근거를 찾는다면 동성애는 하나님이 ‘의도하신’ 성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지 않으셨는데도 동성애를 문제시하지 않는 태도는 하나님보다는 자신들이 지닌 논리와 사실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동성애에 대해 이런 태도를 보인다면,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동일한 패턴을 취하게 될 겁니다. 모든 존재의 문제는 결국 관계의 문제로 귀결되는 성경의 패턴에서 본다면, 동성애 문제는 관계(하나님과의, 이웃과의, 자신과의)의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성애를 대하는 한기연의 이러한 패턴은 모든 문제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관계의 문제는 ‘사실’ 보다는 ‘실재’와 관련된다는 걸 받아들여야 합니다. 실재의 근거는 전적으로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무엇이 사랑이냐 하는 것도 하나님에게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발견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동성애는 兩性의 모든 변증법적 균형이 깨어지는데서 비롯됩니다. 동성애 행위에는 어느 한 쪽이 異性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는 자기의 성 안에 異性의 반응을 잠재적 반응 형태로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兩性性’이 드러난 겁니다. 이럴 때 성적정체성은 ‘종교적&윤리적&정치적’이기보다는 ‘심리적&사회적’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 동성애자들은 동성애를 종교적&윤리적&정치적 문제로 비판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반대합니다. 더 나아가 동성애는 양성성의 구현으로 인간의 정신적 고양으로 여기게 됩니다. 동성애자들은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틀을 깨고 자신들 스스로가 성적모델을 만들어내는데, 그 어떤 틀도 없어지고 오직 자신들이 만들어 내는 모델만 좇아가게 됩니다. 리차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의 내용이 생각나는데, 그는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이란 이름 뒤에 그려진 사람의 가치와 본성&본능을 치열하게 탐색해나갔습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틈새숭배’라고 단정하면서 몰이해에 만족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동성애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들의 논리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동성애를 죄라고 본다고 해서, 제가 동성애자와 다른 차원의 죄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내를 위해서 사랑하고 희생하는 것이 동성애자들의 그것보다 더 진지하거나 강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결혼생활이 동성애자들의 결혼생활보다 더 행복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든지 더 나은 가치를 향해 진지하게 살려고 한다면 사랑이나 희생,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신 결혼생활은 남자와 여자의 ‘연합&결합’이라는 사실과 그와 다른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부정하신다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의 비밀이 남자와 여자의 결혼생활에 담겨져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동성를 긍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