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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백산맥 원문보기 글쓴이: 山白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을 읽고
산백 박희용
1. 해제
한국현대사 전공의 김태우 박사가 집필하고 2013년에 (주)창비출판사에서 초판을 발행한 《폭격-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전쟁》은 저자가 기존에 공개된 다양한 자료에다가, 2000년 즈음부터 미국의 국립문서보관소와 미공군역사연구실을 통해 공개되기 시작한 한국전쟁기 미공군문서 약 10만 장을 수집 ․ 분석하고, 당대의 러시아 ․ 중국 ․ 남한 ․ 북한 문서와의 교차분석을 통해 유엔 측과 공산 측 주장의 신빙성을 검증함으로써, 1950년 6월 29일 평양 인근의 비행장 폭격을 시작으로,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한반도 군사정전협정이 발효된 시점까지 미공군의 한반도 전체, 남북한 모두에 대한 공중폭격의 배경 ․ 목적 ․ 전개과정 ․ 결과를 심도 있게 보여주고 있다.
2. 폭격 전략의 변화 과정
한국전쟁 기간 동안 한반도 상공에서 B-29, B-26 등의 폭격기와 F-51, F-84, F-80 등의 전폭기로 이루어진 폭격의 종류는 정밀폭격과 전략폭격의 두 가지였다. 1950년 7월 초까지는 전시 민간인 보호에 대한 제네바협정을 준수할 것을 공식적으로 언급하며 북한 도심을 향한 소이탄 공격을 완강히 거부한 맥아더의 명령에 따라 북한지역의 비행장, 보급소, 석유탱크, 집합지역, 병력집합소, 기타 순수 군사목표만을 대상으로 한 정밀폭격이 수행되었다. 그러나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되고 연합군이 후퇴를 거듭하게 되자 7월 11일부터는 북한군의 전투력에 기여하는 북한지역의 산업시설과 군수창고, 유류저장소 등 폭격의 범위를 확대하였으며 북한군 남하 전선 이북인 한강-삼척 라인 북쪽의 도로 ․ 철도 ․ 항만 ․ 항공시설 등 병력과 물자의 이동 수단을 파괴하는 전략폭격을 시작하였다.
1950년 6월 29일부터 원산, 평양, 흥남, 청진, 나진, 함흥 등의 주요 도시에서 시작된 대량폭격이 날이 갈수록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겸이포, 성진, 강계, 신의주, 삭주, 북청, 의주, 만포진, 신천, 나남, 초산, 남시, 회령, 무평리, 구읍동, 곽산, 구성, 별하리, 표동, 무산, 장전하구, 운산, 신창, 태천, 희천, 정주, 태산, 대관군, 운성, 해주, 흥덕, 양덕, 신고산, 영흥, 고원, 회양, 선천, 삼동리, 신안주, 진남포, 안악 등 북한지역 주요 도시들과 마을로 확대되었다.
또한 1950년 9월부터 전선이 낙동강까지 남하하였다가 북상함에 따라 지상군 근접지원 대량폭격작전에 동원된 폭격기들이 낙동강전선 왜관 지역의 적진 융단폭격, 적 점령지인 김천, 의성, 포항, 의령, 경주, 군산, 하동, 안강, 송정동, 구미, 청산, 신반리, 풍기, 유성, 함안, 약목, 고창, 진주, 안동, 성주, 합천, 고령, 상주, 영동, 제천, 대전, 대구, 서울, 이리, 충주, 문경, 순천, 예천 등 남한 땅의 도시와 촌락을 폭격 하였다. 이동전선 이북 지역의 적군과 군사시설, 철도, 조차장뿐만 아니라 피난민, 마을주민, 교량, 큰 건물, 마을, 독립가옥 무차별 폭격의 대상이 되었다. 전선이남 지역에서도 역시 조종사가 육안에 조금이라도 수상하다 싶으면 대번에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과 지상군의 패퇴라는 군사적 위기상황이 닥친 1950년 11월 5일 이후부터는 북한지역에 군사목표뿐만 아니라 산업시설, 철도시설, 도로와 교량 등에 대한 대량 파괴폭탄 폭격이 전략폭격이란 논리 하에 수행되었다.
“북한지역의 모든 도시와 농촌을 소이탄으로 불태워 없애버리라”는 맥아더의 공세적 명령에 따라 인구밀집지역에 무차별적으로 소이탄과 네이팜탄 폭격을 퍼부었다. 아주 작은 시골마을까지도 모두 불살라버렸다. 깊은 산속에 고립되어 있던 외딴 가옥마저 상당수 그 같은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것은 군사적 목적을 갖고 나름의 논리에 따라 수행되는 전략폭격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무지막지한 초토화폭격, 대량학살폭격이었다.
「맥아더는 ‘미국’의 이해가 침탈당할 위기에 봉착하자, 혹은 미국의 대표적 전쟁영웅이었던 그 ‘자신’이 전쟁패배의 위기에 몰리게 되자 망설임 없이 ‘한국민간인’들을 희생양으로 위기국면을 돌파하고자 했다. 그리고 미 대통령과 국무부를 포함한 워싱턴 정 ․ 군의 핵심인사들은 하나같이 맥아더의 선택에 침묵으로 동조했다. 당시 합참은 “미국의 국익 차원에서 볼 때 한반도 분쟁을 국지화하는 게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초토화작전 수행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중국이나 소련지역 오폭만을 경계할 뿐이었다.」
<1950년 11월 극동공군 폭격기사령부의 북한 대도시 폭격양상 개요> 표에 나타난 1950년 11월 26일부터 30일까지의 ‘폭격지역, 적 점령 도시’라는 기록에서 보듯 중국군의 남진에 따라 내려온 경기도, 서울, 강원도의 남한 도시들도 폭격의 대상이었다. 또한 1951년 초에는 중국군 남하 전선에 인접한 충북과 경북북부지역의 단양, 예천까지 초토화작전의 대상이 되었다. 미공군은 적 점령 하의 남한지역 흰옷 입은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마구잡이로 사냥하였다. 1952년 6월 23일부터는 전력과 식량 단절을 목적으로 수풍, 부전 제3 ․ 4호, 장진 제3 ․ 4호, 부전 제1 ․ 2호, 허천 등의 수력발전소를 폭격하였다. 더하여 견룡, 자모 등의 크고 작은 저수지를 파괴하여 마을과 논밭을 파괴시켰다.
1951년 이후 북한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건축물들이 모조리 파괴되어 더 이상 파괴 목표물을 찾을 수 없게 되자, 산간의 외딴 집을 폭격하고 시골 도로를 가는 오토바이에다가 기총소사를 해댔다. 몇 번의 폭격으로 완전히 파괴된 평양을 이후에도 계속 폭격해대어 겨우 움막 속에 사는 주민들을 숱하게 죽도록 했다.
조종사들은 연료 부족의 압박감 속에 10~15분 내에 자신의 폭격 임무를 완수해야만 했다. 전폭기 착륙 시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일단 전폭기에 싣고 간 로켓이나 폭탄을 모두 소진해야만 했다. 전폭기 조종사들은 제한된 시간 안에 탑재된 무기들을 지신의 임무구역 내에서 어떤 형식으로든 모두 투하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1950년 11월 5일 이후의 폭격은 군사용어로서의 전략폭격이 아니라 화력 소진책이었고 전쟁범죄용어로서는 야수성 광란폭격이었다.
3. 기능주의적 전쟁기계들
야수성 광란폭격의 주체는 미공군 조종사들이었다. 번듯한 인간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야수성 광란폭격을 퍼붓고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을까. 1947년 공군 창설 당시 해군과 육군에서 편입해 공군 지도부를 형성한 장성들과 장교들이 실시한 인종적 편견이 담긴 군사학 교육의 탓도 많지만 직접 폭격기를 조종하고 폭탄을 투하한 조종사인 위관급 장교들의 불량한 자질이 양심 실종의 큰 원인이었다.
물론 극한의 전쟁 상황에서 상관의 명령과 지시에 따라 폭격에 충실한 것은 조종사들의 임무이다. 하지만 외딴 초가를 폭격하고 시골 길 오토바이를 끝까지 추격해 폭격하고, 완전히 파괴된 곳에다 수차례 재 폭격을 해대는 작태에서 드러나듯이 그들은 이미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 사냥꾼이었을 뿐이다. 사냥에 쾌감을 느끼는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그런 자들에게 어찌 한 조각의 휴머니즘이라도 남아있기를 바라겠는가.
「조종사들은 기능주의적 전쟁기계였다. 한국전쟁기 미공군 조종사들 대부분이 엘리트 계층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청교도 배경의 노동자나 중산층 시골 가정 출신 백인 청년들이었다. 1947년 7월과 다음해 12월 사이에 임관한 1만 4000명의 공군장교 중 77퍼센트의 장교가 학사학위를 갖고 있지 않았다. 1948년 공군장교 중 학사 출신은 겨우 37.5퍼센트에 불과했다. 1948년과 1949년에 조종간부후보계획에 따라 배출된 교육수료생 중 4년제 대학 학위를 지닌 사람은 2퍼센트에 불과했다. 더불어 조종간부 훈련생들은 그 훈련과 선발과정에서 인문학적․사회과학적 측면과는 관계없이 철저하게 ‘육체적인 숙련도’를 강조하는 검증절차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야 했다. 비행훈련만을 중시한 훈련과 선발과정은 궁극적으로 훈련이수 조종사들 간에 협동정신이나 조직적 기율을 세우지 못한 채, 전문화되고 격식을 존중하지 않으며 오로지 조종기술만을 강조하는 기능주의적 조종사들을 대거 양산하게 되었다. 조종사들에게 강조되는 제일의 덕목은 오로지 유능한 비행술과 폭격술뿐이었다.」
1947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 한국전쟁 기간 내에 대량생산된 수만의 폭격기계 로봇들이 한반도를 초토화시키는 전쟁 도구가 되었다. 그 전쟁기계를 조종한 자들은 트루먼, 애치슨, 브레들리, 맥아더, 반덴머그, 르메이, 조지 스트레이트마이어, 에밀 오도넬, 얼 파트리지, 월리엄 엘더, 터너 로저스, 팀버 레이크, 크랩, 도일 하키, 에드윈 라이트, 에드워드 앨먼드, 제이콥 스마트, 랜돌프, 메이오, 마크 클라크, 존 머피 등이었다.
이러한 상관들의 조종에 따라 찰스 스툴, 스터전, 딘 헤스, 배일리, 제리 민턴, 하워드 하이너, 조지 버크, 이창실, 이일영 등 수천 개의 전쟁기계들은 조종자들이 요구하는 이상으로 전쟁기계의 역할을 잘 해냈다.
전쟁기계로 사용되었던 미공군 조종사들, 국가 차원에서 수행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나름대로 헌신한 것은 사실이다.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한 그들의 공로 덕분에 휴전선을 그었고, 이후 수십 년 동안의 경제개발을 통해 한국은 든든하게 성장하였다. 2014년 한국인의 시각으로 볼 적엔 대량폭격이 전쟁공로를 벗어나 전쟁범죄로 보이지만, 1950~53년 남한인의 시각으로 볼 적엔 대량폭격이 공산침략을 막아내는 훌륭한 전쟁공로였다.
하지만 역사는 흘러야 하고 앞 시대의 진상을 규명해야만 하는 것이 다음 시대를 위한 현대인의 책무이기 때문에 미공군 조종사들의 공과 과를 분명히 규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야만 혹여 미국이든 한국이든 중국이든 어느 나라든 다시 전쟁행위의 명분으로 그런 대량폭격을 수행하더라도 좀더 높은 적중률을 위해 노력할 것 아니겠는가. 적중률만 높다면 구태여 과부하 폭탄을 탑재할 필요가 없고 착륙 시에 안전할 것이니까 폭탄을 마구 아무데나 소진폭격하지 않을 것 아니겠는가.
그래야 타의로 인한 전쟁범죄가 줄어들지 않겠는가. 전쟁행위와 전쟁공로의 이면에 감춰져있는 전쟁범죄의 진실 때문에 괴로운 인생들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전쟁기계로 사용되었던 미공군 조종사들, 그들의 전쟁 당시의 일상과 전후의 변화 모습을 살펴보면 그들 역시 인간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이라면 어찌 조금이라도 생각이 없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매일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한반도 상공에서 마주하는 정신적 괴로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군의관들은 조종사들의 심리적 고통을 덜기 위해 의도적으로 ‘임무위스키’라는 술을 모든 조종사들에게 권하기도 했다.
조종사들은 기계로 양성되었지만 결코 완전한 기계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무차별적인 민간지역 폭격이나 민간인 공격을 정당화시켜야만 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살상이나 민간지역 폭격과 관련하여 조종사들이 제시한 가장 상투적이고 전형적인 자기정당화 논리는 크게 2가지이다. 첫째는 북한군 점령지역의 모든 민간인이 궁극적으로 북한군의 군사활동을 돕는 세력으로서 사실상 적과 동일시될 수 있다는 논리고, 둘째는 군인으로서의 직업정신을 강조하는 논리로, 자신의 민간인 공격을 부대 상관이나 정찰병의 지시에 의한 직업적 임무수행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조종사들이 자신이 공격한 민간인 촌락을 “게릴라 본부”나 “병력집결지점”으로, 민간인들을 “위장병력”이나 “지원세력”이라는 꼬리표를 붙여 자신의 공격을 정당화했다. 어느 조종사는 “우리는 움직이는 모든 것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무차별적 공격을 정당화했다.
한국전쟁 이전 시기 기독교 목사였던 딘 헤스는 매일 한반도 상공에 F-51기를 몰고 나가 파괴와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찾은 최후의 자기정당화 논리는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소명의식이었다. 그는 이 같은 소명의식을 한국전쟁기 내내 재점검하고 정당화해야만 했다. 물론 이같은 소명의식은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는 상당히 소름끼치는 것이었고, 끝내 헤스는 냉혈동물이라는 악명까지 얻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아이다호 주 시골의 노동자계급 가정에서 태어난 하워드 하이너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공군 학군단에 들어갔는데, 그 이유는 “애국적인 근무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는 한국전쟁 참전 결과로 얻은 공군수훈십자훈장을 “대량학살”의 증거라고 묘사한다. 애국적인 결심에 의해 시작된 전투행위의 가장 자랑스럽고 상징적인 결과물이 그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원죄로서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기고 말았던 것이다.
중산층 백인들의 도시인 웨스트필드에서 성장한 조지 버크는 오로지 비행에 대한 동경심으로 공군 간부후보생에 지원했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버크는 자신이 공중전의 임무를 주로 수행하는 전투요격기가 아니라 지상폭격 임무를 담당하는 전폭기를 조종하게 되었음을 알고는 득달같이 지휘관실로 달려가 항변했다고 한다. “나는 하찮은 동양인들(gooks)을 불태워 죽이려 공군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상관도 소리쳤다. “그냥 익숙해지시오!” 갑작스러운 역풍을 맞은 버크는 당황했다. 그리고 이후 폭격 업무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순박한 애국심과 막연한 비행에 대한 동경으로 공군조종사가 된 미국의 청년들은 미국의 전쟁수행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전투기계로 육성되어 과거에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의 흰옷을 입은 평범한 민간인들을 향해 무감각하게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4. 맥아더의 오류
이들 조종자들 중에서 한국전쟁 유엔군 총사령관인 맥아더가 가장 큰 책임을 진다.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일거에 전세를 역전시킨 명장으로 전쟁사에 기록되고 21세기 한국에서 보수우파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지만, 한국전쟁에서 저지른 두 가지 잘못은 씻어지지 않는다.
스트레이트마이어 극동공군 사령관 등의 전투지역 공군장성들이 거듭 요청하는 소이탄 사용을 거부하며 정밀폭격론을 고수하던 그가 왜 1950년 11월 5일부터 신념을 돌변하여 파괴폭탄, 소이탄, 네이팜탄을 사용한 무차별 대량폭격을 명령하였는가. 그것은 그의 자존심 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 자존심 때문에 한반도가 절단 나버렸다.
「1950년 10월 15일 웨이크섬 회의.
맥아더: 추수감사절 무렵 남북한 전체에서 공식적 저항이 끝날 것입니다. 본인의 희망은 크리스마스 때까지 제8군을 일본으로 철수시키는 것입니다.
전후 한반도 정치 ․ 경제 문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던 중간에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다소 돌출적인 질문을 던졌다.
트루먼: 중국이나 러시아가 개입할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맥아더: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한반도에 우리의 공군기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만 약 중국이 평양으로 밀고 내려오려 한다면 최악의 대량학살이 벌어질 것입니다.
트루먼은 “대량학살”이 벌어질 것이라는 맥아더의 발언에 특별히 토를 달지 않았다. 여타 참석자들도 이 발언에 대한 세부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회의는 무심히 다음 논의로 전환되 었다」
「1950년 10월 19일 극동군사령관 스트레이트마이어는 2개의 B-29 중폭격기 전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방안을 맥아더로부터 구두로 승인받았다. 이 시기 제92폭격전대 소속의 B-29기는 북한지역에 공격할 타깃이 없어서 도로상의 오토바이 1대를 추격하면서 폭탄이 그를 적중시킬 때까지 끊임없이 투하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결국 10월 25일 맥아더는 제22폭격 전대와 제92폭격전대의 미국 본토 귀환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그러나 그 며칠 후부터 한반도의 전황은 그들이 확신했던 방향과는 완전히 다르게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새로운 적이 그들 앞에 등장했던 것이다.」
가정이 사실이 되어버렸다. 중국군은 밀고 내려왔고 맥아더의 가정대로 실제로 최악의 대량학살은 벌어졌다.
‘거의 없습니다’와 ‘전혀 없습니다’는 의미와 결과가 다르다. 그 0.001%의 오차가 얼마나 많은 파괴와 살육을 초래하였는가. 1950년 11월 17일, “북한 지역이 사막화될 것”이라고 주한 미대사 무초에게 한 공언은 가정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중국의 참전 여부를 묻는 대통령의 질문에 ‘거의 없습니다’라고 한 보고가 허위라는 것으로 판명나자, 권위가 무너지고 자존심이 크게 상한 맥아더로서는 평정심을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회 겸 분풀이로, 그동안 신사연척 하며 고수하던 정밀폭격론을 버리고 소이탄 폭격을 허용하는 등의 무차별 대량폭격을 스스로 명령한 것이다.
더구나 맥아더는 1951년 봄 전쟁에서 중국군에게 밀리자 원자폭탄으로 안동, 선양,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의 대륙 주요 도시와 압록강 이북 만주지역에 폭격하자고 주장하며 상세한 계획을 수립했다. 물론 이 주장이 맥아더만의 것은 아니었지만, ‘원자폭탄 사용론’을 불 지피고 부채질한 주동자인 것은 사실이다.
「1950년 11월 워싱턴에서는 중국으로의 확전과 핵무기 사용가능성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게다가 11월 30일 트루먼은 원폭 관련 질문의 마지막 부분에 그것이 쓰이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다는 단서를 달긴 했지만, “원자폭탄의 사용은 언제나 능동적으로 고려”되어왔다고 단언함으로써 그 현실적 사용 가능성을 한층 높였다. 12월 9일 맥아더는 핵무기 사용에 대한 자유재량권을 요구했고, 12월 24일에는 26발의 원자폭탄을 필요로 하는 목표물 리스트를 제출하기도 했다.
1950~51년 겨울, 수많은 북한주민들은 실제 자신의 주거지를 불바다로 만들고 있던 소이탄 폭격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혹은 일순간에 자신의 가족과 이웃을 한줌의 재로 변화시킬 수 있는 핵무기의 공포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적극적인 ‘생존을 위한 피난’을 감행했던 것이다. 이산가족 1세, 2세를 포함한 소위 “1천만 이산가족”의 불행한 신화가 이렇듯 완성되고 있었다.」
5. 무분별한 북진작전의 결과
1951년 4월, 원자폭탄 사용을 이리저리 재어보던 트루먼에 의해 맥아더가 해임되었지만, 진즉에 해임되어 그의 전쟁광기가 한반도에 횡행하지 않도록 해야만 했다. 기본적으로 태평양전쟁의 구도를 한반도전쟁에 적용한 것이 잘못이었다.
중국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계획서를 보면, 맥아더가 중국의 공식적인 경고에도 불구하고 중군군의 참전 정보에 소홀하면서도 한국군에 이어 미군을 북진시킨 이유가 ‘최악의 대량학살’을 감행해 중국을 꺾으려는 전략적 의도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가 붕괴되고 한국인들이 몽땅 몰살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미래의 강적인 중국을 확실하게 꺾어 굴복시켜 순치시키면서 소련을 위축시키겠다는 군사전략가 다운 판단을 이미 내렸기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을 초래하고도 남을 그런 막말이 나온 것이다. 즉각 해임 되어 한반도 북부인들이야 불행 중 다행이지만 중국인들은 얼마나 안도했겠는가. 트루먼이 문화적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전략적 안목이 부족한 현실주의자로서 맥아더의 전쟁영웅 위세에 끌려 다니는 존재였다면 맥아더는 기고만장하여 1950년 여름에 중국에다 원자폭탄을 퍼부었을 것이다.
한반도와 일본열도는 이미 대량폭격을 당했다. 중국은 간신히 원자폭탄 폭격을 모면했다. 일본이야 자업자득이지만 한반도는 외세의 조종에 당했다. 중국 역시 본의가 아니라 타의로 한국전쟁에 전역을 졌다. 한국-중국-일본의 세 동북아 국가가 자업자득이든 외세든 자의든 타의든 이제 다시는 대량폭격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작은 동북아지역에서 패권을 다툴 게 아니라 판을 넓게 봐야 한다. 근대 이후 유입된 서양문명의 장단점에 대한 합리적인 분석과 비판을 통한 동양문명의 법고창신이 있어야 한다. 인종, 문화, 풍습, 학문, 종교 등 모든 면에서 동질성이 강한 세 나라는 공통분모를 새롭게 찾아 수학 공식화해야 한다. 공통분모를 이용하면 어떠한 난제라도 해결할 수 있다.
(맥아더, 그러면 되겠나. 아무리 전쟁이지만 인도주의는 지켜야지. 미제 별 다섯 개 원수 계급장은 달았지만 인간미와 교양은 영 틀렸구먼. 태평양에서 일본군을 떼로 도륙할 때는 백인종 우월감에 만끽했겠구먼, 그러니 하등민인 한국인들이야 떼로 도륙해도 시바가 앞에 전혀 부끄러울 게 없겠지. ‘미축귀영’이란 일제의 말이 공허하지만, 맥아더 자네와 부하들이 전쟁 때에 하는 짓을 보면 영락없이 귀축이야 귀축. 맥아더 이 사람이 이제 완전히 썩어 귀신이 되어 구천에 떠도니 수백만 한반도인의 눈물을 티끌만큼이라도 알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트루먼이 일국의 대통령답게 넓은 안목을 가졌다. 그에 비해 맥아더는 지역사령관다운 안목을 가졌다. 이 때 중국 참전 여부에 대한 정보수집과 분석이 정밀, 정확했다면, 미군의 38도선 월경 북진을 자제하고 한국군만 북진하도록 한 후에 그 귀추에 따라 미군의 북진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미군이 북진하여 한반도 북부가 미국의 세력권 안에 편입되면 중국은 적인 미국과 직접 군사력을 맞대응하는 심각한 상태가 된다. 이후 계속해서 중국을 흔들고 불과 몇 년 안에라도 만주를 간접 또는 직접 침략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으로서는 미군의 북진 문제가 국가 생존적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맥아더는 미군의 북진 문제를 군사적 관점으로 한국전쟁이란 범위 내에서만 보았다. 중국이 한국군의 북진은 묵인하지만 미군이 북진할 시에는 참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공언함에도 불구하고 맥아더는 그것을 공갈로, 설사 참전한다 하더라도 손쉽게 격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믿는 구석은 절대 우세의 공군력이었다.
가정이지만, 미군이 38도선에서 정지하고 한국군만 북진하였다면 아마도 평양 이남에서 전선이 장기간 동안 고착되었을 것이다. 링에 오른 두 형제는 각자의 스폰서들의 요구에 따라 악착같이 싸우다가 함께 죽는 수밖엔 없는 궁지에 몰리게 된다. 전쟁을 실컷 즐긴 외세들이 “이제 그만” 하면 전쟁이 끝나고 그 이북 지역은 북한 정권이 계속 차지하나 중국의 변방국가로 빠르게 편입할 것이다. 즉 현대판 한사군이 다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 이남 수복지역은 남한정권이 차지하나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수십 년 동안 미군이 점령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기지로 사용할 것이다.
복잡한 판세를 읽은 미국 지도부가 북진의 득실을 저울질하기 위하여 미군의 북진을 일단 정지시켰지만, 외세를 이용할 수 있는 이번 기회에 무력통일을 완성하려는 조급함과 복수일념에 충만한 이승만이가 미군과 협의 없이 국군만의 북진을 명령하는 바람에 미군도 덩달아 북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북진의 결과가 유종의미를 거두었으면 다행이었으나 불과 한 달 뒤에는 중공군에게 밀려 고난의 후퇴를 해야만 했고 1951년 봄엔 한강 훨씬 이남 선까지 점령당하고 말았다. 즉 북진의 실패가 막심했다. 아주 중요한 정책적 판단이 필요한 시점에 이승만의 외고집이 전쟁을 망쳐버렸다.
또한 북진 시에 중국의 동향, 중공군의 이동 상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미군의 정보력은 큰 문제였다. 정보도 없이 간선 도로를 따라 적을 추월하면서 벌이는 북진 경쟁에 날이 갈수록 얼마나 큰 허점을 생기는지를 승리에 취한 미군은 몰랐다. 이것은 미국인이 갖고 있는 특유의 성질에 기인한다.
6. 대량폭격의 피해와 인종주의
미국인들은 정교함, 아담함보다는 우활함, 광대함을 즐긴다. 서부극에 나오는 사내들, 좋게 말하면 건맨이고 비하하면 총잡이인 건달적인 사고와 행동이 미국인들의 유전인자에 들어있다. 즉 미국인은 단순하다. 물질문명을 추종하는 자들은 내면 정화보다는 외면 장식과 위력 과시에 만족한다. 폭력도 헐크와 같은 무한폭력을 숭상한다. 그래서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는 일본열도에다가, 1950년 6월 29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는 한반도에다가 목표물 적중 여부에 상관없이 무차별 대량파괴살상폭격을 자행한 것이다. 또한 1968년부터는 북베트남 지역을 마찬가지로 폭격하여 초토화 시켰다.
이러한 대량폭격을 당한 일본, 북한, 월맹의 세 나라 가운데에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으나 북한과 월맹은 끝까지 항전을 계속해 전쟁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물론 일본 역시 워낙 악착스런 국민성이기 때문에 아무리 대량폭격이 자행되어도 결코 항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원자폭탄 두 방 시범 폭격을 하고 일본인 멸족과 일본열도 방사능 오염화를 협박하는 미국 앞에 일본은 동물적인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한반도와 베트남엔 원자폭탄이 투하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엔 북한군은 정전 상태, 월맹군과 베트콩은 베트남 땅에서 미군을 추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군의 물량공세의 허점을 효과적으로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대량폭격은 지하 동굴과 통로, 대량토벌은 도피와 은닉으로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폭격기 조종사들이 떨어뜨린 폭탄이 목표물 반경 안에 들어갈 확률이 0.1%가 채 안되는 물량공세 위주의 군사력이 반드시 승리하진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도 그들이 믿는 구석은 물량 밖에 없어서 지금도 항공모함들이 첨단무기와 핵탄을 가득 싣고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며 어슬렁어슬렁 6대양을 순찰하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스스로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1999년 12월 16일 유엔 주재 북한 상임대표가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하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배포한 서한을 통해 북한은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북한지역에서 190만 명의 주민을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즉 북한은 이 문건을 통해 1950년 10월부터 12월간 유엔지상군 점령 시기에 희생된 민간인 17만 명을 제외하고도 약 173만 명에 이르는 전쟁 희생자가 더 있음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것이다. 북한은 이처럼 막대한 희생자의 발생 원인을 상세하게 밝히진 않았다. 그러나 그 희생자의 상당수가 전쟁기간 내내 지속된 공중폭격의 직․간접적 피해자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반면, 1954년 소련에서 작성된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전쟁기 북한지역 폭격 사망자 규모는 28만 2000명에 불과하다. 이 보고서는 이 숫자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통계국’ 자료에 근거한 통계라고 주장한다. 더불어 보고서는 북한지역 전역에서 산업건물 약 9000동, 주택 60만 채, 학교 5000개, 병원 1000개, 극장 263개, 기타 수개의 문화기관이 파괴되었다고 분석했다. 또한 미공군 조종사들의 귀환 후 임무보고서에 기초한 ‘적 병력 18만 4808명 사살’이란 통계수치가 있다.
북한이 주장하는 173만 명과 소련 보고서의 28만 2000명, 미공군 임무보고서의 18만 4808명의 세 통계수치는 큰 차이를 갖지만, 한국전쟁기 공중폭격이 북한주민의 사망과 실종이나 국외 소개, 건물 파괴 등의 주요 원인의 하나였다는 점에 근거해볼 때, 폭격은 전쟁기 북한주민의 일상을 뒤틀어놓는 가장 직접적인 요소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북한 주민들은 전쟁기간 내내 미국폭격기가 저지르는 학살과 파괴에 치를 떨었지만, 전후에도 이 폭격당한 경험 때문에 일상에서 가장 모욕적인 욕설이 ‘미제 승냥이놈’일 정도로 극렬한 반미사상이 대를 이어 전승하게 되었다. 한국전쟁 경험을 통해 내재화된 반미주의가 북한주민의 일상 깊숙한 곳까지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북한지역의 민중들은 소위 정전협정이 진행되던 2년여의 기간 동안 죽음의 공포와 끊임없이 싸워야 했을 뿐만 아니라, 지하생활과 야간생활이라는 비정상적 일상을 정전시점까지 견뎌내야만 했다.」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 속에서 휴머니즘이나 생명존중 등의 가치를 찾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다. 그러나 전쟁도 인간들이 하는 일이라면 최소한의 휴머니즘은 보장되어야 마땅하다. 최소한의 휴머니즘이 보장되지 않는 전쟁은 인간이 하는 전쟁이 아니라 동물, 짐승이 하는 짓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동물들의 광란이었지만, 그 동물들의 광란을 제거하기 위해 인구밀집지역에 무차별적으로 소이탄 폭격을 가해 일본의 여러 도시들을 불태우고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대규모 민간인 희생을 초래한 미국 역시 인종적 편견에 조종당하는 동물스러움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한국전쟁기에 한반도 전역에서 이루어진 공중폭격의 모델은 태평양전쟁기에 일본 본토 폭격이었다. 1945년 봄부터 여름까지 미국의 B-29기들은 거의 매일 일본 본토 상공을 비행하며 도시의 인구밀집 지역 전반을 폐허로 만들었다. 폭격은 독일의 군사․산업시설을 핵심타깃으로 설정했던 미국의 유럽지역 작전양상과는 매우 다르게 전개되었다. 1945년 3월 9일부터 19일까지 10일 동안 총 1595대의 폭격기들이 9400톤의 소이탄을 일본의 주요도시에 쏟아 부어 총 82제곱킬로미터 내의 생명을 말살시켰다.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다음에도 공습은 1945년 8월 15일 종전 당일까지 계속되었고, 최북단의 훗까이도오에서 최남단의 오끼나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도시와 마을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의 전국전재도시연맹의 조사에 따르면, 이재민은 964만 7771명, 사망자는 50만 9469명에 이른다.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은 마크 쎌던의 표현처럼 ‘잊힌 대학살’ 그 자체였다.
2차대전기 유럽과 태평양지역에서 상이하게 전개된 미국의 공중폭격 양상은 여러 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연구자들은 유럽에서의 전쟁과 달리 태평양전쟁은 상호 간의 증오와 편견이 큰 영향을 끼친 인종전쟁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태평양전쟁기 미국과 일본은 서로 인종차별적인 선전술로 상대방을 묘사했고, 인종적 편견에 기대어 포로나 부상자에게 야만행위를 저지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미국인들은 독일의 야만행위를 인종으로서 독일인을 탓하지 않고 ‘나치’의 행위로 묘사했다. 반면에 일본의 야만행위는 일본인들의 문화적․유전적 유산으로 설명했다. 또한 미국이 유럽에서는 끝까지 소이탄 사용을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열도 폭격에 있어선 오히려 소이탄을 핵심 무기로 사용했던 원인과 배경에 대해 진지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같은 분석은 태평양전쟁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의 해석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물론 남침을 결정한 김일성-박헌영-김두봉-김달현 등의 전쟁지도부와 김책-강건-무정-박효삼 등의 전쟁수행자들이 한국전쟁에 전적인 책임을 지지만, 폭격 부문에 있어선 미국 지도부와 육, 공군 장성들의 인종주의적 편견이 개입된 초토화 폭격 전략, 그리고 시골 하류 계급 출신의 저학력 단기 양성 조종사들의 기계적인 순응에 많은 책임이 있다. 전쟁을 하되 제네바 협정에 저촉되는 전쟁범죄는 저지르지 말아야 문명국 군대이다. 정밀폭격이면 정밀폭격, 전략폭격이면 전략폭격에 충실해야지 한국인들을 하찮은 장난감으로, 흰옷을 입은 자들은 모두 적으로, 한국의 강산은 마구 부셔도 되는 가건물로 여겨 탑재한 폭탄 소진용 무차별 대량폭격을 자행한 것은 군인으로서 수행한 임무가 아니라 간밤에 마신 위스키에 취한 광란으로 명백한 전쟁범죄이다.
7. 0.7~1.95퍼센트의 적중률
미공군이 대량폭격을 하게 된 원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폭격목표에 대한 적중률이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좋은 날도 육안으로 하는 폭격은 매우 힘들었고 적중보단 오폭이 훨씬 많았다. 흐린 날엔 구름 위에서 육감으로, 소위 레이더폭격을 해댔으니 폭탄이 더욱 더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맑은 날 안전한 실험장에서 실시한 공식적인 폭격 적중률 측정치가 0.7~1.95퍼센트이니, 대공포화가 펑펑 터지고 미그-15기가 공격해오는 상황에선 적중률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탑재한 폭탄을 무조건 쏟아 붓고 빨리 폭격지점 상공을 뜨는 수밖엔 없었을 것이다. 워낙 대량폭격이다 보니 소발에 개미 잡기 식으로 목표물에 적중한 것들이 있었을 것이다.
「B-29기 정밀폭격의 수행절차와 위력 및 한계는 한국전쟁 초기 미공군 공중폭격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기본 전제들이다. 미공군은 군사목표 정밀폭격을 정책적으로 분명히 했다. 하지만 이 정책은 사실상 실행 불가능한 목표나 다름없었다. 폭격목표물들이 대부분 도시 인구밀집지역 부근에 위치한 반면에, 폭격을 수행할 B-29기들의 목표물 적중률은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기 미국은 자신의 폭격기들이 군사목표만을 정밀폭격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상 현실과는 거리가 먼 수사에 불과했다. 한국전쟁기 북폭에 동원된 수많은 폭격기 조종사들은 대량의 폭탄을 한꺼번에 쏟아부어 타깃 인근의 민간지역 전반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방식으로 폭격을 진행해야만 자신의 군사적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방식으로 폭격을 수행했다.」
「B-29기 조종사들은 기상악화로 인해 목표물을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1만 피트 이상의 고공에서 지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레이더장치만을 유일한 목표인식의 근거로 하여 대량의 파괴폭탄을 도심 목표를 향해 투하하곤 했다. 조종사들은 이러한 맹목폭격 방법을 레이더폭격이라 불렀다.
한국전쟁 초기 극동공군 작전분석실의 B-29기 중폭격기의 목표물 적중 실험 결과, 6.096미터(폭)×152.4미터(높이)의 목표물에 대한 개별폭탄적중률(폭탄 하나를 개별적으로 투하했을 경우의 목표물 적중률)은 0.7퍼센트에 불과했고, 9.144미터×304.8미터의 목표에 대한 적중률은 1.95퍼센트에 불과했다.
작전분석관들은 전자의 목표물에 대해 50퍼센트의 적중률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90발, 80퍼센트의 적중률을 기록하기 위해서는 209발의 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분석했다. 후자의 목표물에 대해선 각각 35발과 81발의 폭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는 폭 약 10미터 높이 200~300미터의 대형건물을 B-29 중폭격기에서 투하한 폭탄 하나로 적중시킬 수 있는 확률이 0퍼센트에 가까우며, 최소한 100~200발의 폭탄으로 대량폭격을 가해야만 50~80퍼센트의 적중률을 기록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B-29기의 교량폭격 임무의 어려움에 대해 분석한 또 다른 보고서 또한 “평균 1회 4발의 폭탄을 사용하여 13.3회의 폭격을 가한 후에야(교량을) 파괴할 수 있었다”라고 분석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죽어나는 것은 민간인들과 땅이었다. 어차피 전쟁인 이상엔 폭격이 없을 수 없는 것이지만, 워낙 낮은 적중률이다 보니 대량폭격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군수물자가 워낙 풍부한 미국이다 보니 “까짓것 마구 쏟아 부어라!” 작전이었겠지만 온통 당한 북한 주민들과 땅, 군데군데 당하게 남한 주민들과 땅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
민간인들과 맨땅을 폭격한 것은 명백한 전쟁범죄이다. 약간의 오폭이야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지만 0퍼센트에 가까운 적중률 실력을 가진 조종사들에게 중폭격기를 몰아 폭격을 하도록 한 미공군 지도부 모두가 전쟁범죄의 근원이었다. 조종사들 역시 실력이 우수하다면 굳이 대공포화의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여러 번 대량폭격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중률이 매우 낮으니 대량폭격을 하지 않을 수 없고, 대량폭격을 하려니 폭탄을 가득 싣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한 번 탑재한 폭탄은 모두 소진해야 기지에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는데, 폭탄을 가득 싣고 빙빙 돌아다녀도 폭격할 대상을 찾지 못하니 전번에 폭격했던 곳을 다시 폭격하거나 마을이나 외딴 집, 오토바이 등을 폭격하게 된 것이다.
전쟁기계로 써먹으려면 능숙한 폭격 기술을 장착시켜서 전쟁에 내보내야지, 미숙한 기술 밖에 장착 안 된 기계들을 대량으로 쓰는 바람에 전쟁기계들은 전쟁기계들대로, 조종자들은 조종자들대로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소련과 중국에 대비하여 1년 단기로 대량생산한 수만의 불량품들이 한반도의 하늘을 훈련장 삼아 어지럽게 날며 배설한 폭탄들에 꿰여 어육이 된 한반도인들이 얼마나 불쌍한가.
4년제 공사 출신 조종사라면 적중률이 적어도 최소한 30퍼센트 정도는 안 되었겠는가. 세 발 중 한 발은 맞춰야 조종사복을 입을 수 있을 것이다. 적중률이 다만 10퍼센트만 되어도, 대량폭격에 소요된 폭탄이 90퍼센트는 줄었을 것 아닌가. 민간인 피해와 민간 가옥 피해가 90퍼센트는 줄었을 것 아닌가. 적중률이 1퍼센트에 달랑대니 과부하 탑재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공격목표에다 모두 쏟아 붓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보면 상공에 오래 비행하게 되고, 대공포와 적기의 기총소사에 맞아 격추당할 위험이 높아지게 된다. 또한 목표를 찾지 못하거나 없으면 안전 착륙을 위해서라도 아무데나 쏟아 부을 수밖엔 없었다. 폭탄제조공장이야 떼돈 벌었겠지만 조종사들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겠는가. 적중률 1퍼센트도 채 못 되는 자들을 조종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런 자들에게 조종복을 입혀 대량폭격에 동원한 자들이야말로 전쟁범죄의 원흉이다. 전쟁기계 그들 역시 불쌍한 청춘들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은 시대적 영속성을 가지며 인간이 동물인 한에는 절대로 회피할 수 없는 숙명적 재앙이다. 원시시대엔 소수 인구 집단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졌지만 현대문명시대엔 다수 인구 집단 사이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지면서 대량 살육이 빈발한다. 과거의 전쟁은 식량과 노예를 얻기 위한 근접 전쟁이었으나 근, 현대 전쟁은 국가적 경제 발전과 불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륙 단위 전쟁으로 비약하였다. 미래의 전쟁은 인종, 종교, 사상의 차이를 바탕으로 한 정신적 우월감과 자원 쟁탈을 위한 물질적 욕구 때문에 포괄적 민족 단위들 사이에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많다.
그러나 전쟁이 인간 사회의 숙명이라고 해서 전쟁 통제를 포기해선 안 된다. 비록 문명의 발달에 비례해서 전쟁도 발달하지만, 문명의 힘으로 전쟁을 억제하거나 통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전쟁은 문명 중에서도 물질문명의 발달에 의거한다. 문명이 물질과 정신의 두 가지로 이루어져있다면, 문명이 인간의 것이고 인간이 물질과 정신의 두 가지 면의 복합체라면, 인간의 올바른 삶이 정신이 물질을 통제하는 것이라면, 물질문명의 발달에만 의존하는 전쟁을 정신문명으로 억제, 통제할 수 있다.
생물진화론 면에서 보더라도 진화가 꼭 육체적 진화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진화도 초래하므로 인류의 정신이 평화와 안정을 선호하는 쪽으로 더 진화한다면 미래 언젠가 전쟁의 비효율성에 대한 분석을 통해 전쟁이 억제, 통제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화 도중인 현대사에 각인된 한국전쟁에서 1950년 11월 초까지의 정밀폭격이 그래도 정신문명을 조금이라도 고려한 것이라면 이후의 무차별 전략폭격은 완전히 물질문명만을 내세운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공군은 인간이 아니라 동물이었다.
8.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외세의 개입
한국전쟁의 원인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미국의 동북아전략 속에 소모품으로 설정된 한반도정책이었다. 포츠담, 얄타회담을 거치면서, 전후에 적국이 될 소련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열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어선으로 한반도가 필요했고, 역시 한반도를 탐하는 소련과 타협하기에 알맞은 경계선이 북위 38도였다. 전통적으로 미국은 유럽에 식민제국주의 국가들만큼은 해외 영토 확장욕이 낮았지만,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 하는 것을 용인하는 대가로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식의 독식보다는 상호 타협을 통한 이득 분점의 외교정책을 전개해왔다. 중국이 국민당정부든 공산당정부든 이미 강력해진 상황에서 만주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일대일로 맞붙어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점령한 일본열도를 한 치라도 내줄 수 없으므로 막판이지만 소련의 참전을 유도한 대가로 줄 수 있는 곳은 한반도 북부 밖에 없었다. 미국에게 일본은 빼앗은 공주였고 한반도는 시녀들이었다. 공주를 탐내는 우군에게 시녀 하나를 나눠주었다.
대륙에서 국민당정권이 승리했다면 미국의 한반도를 중심에 둔 동북아정책이 굴절되지 않았을 것이다. 한반도 남부에 민주주의를 이식하여 기르다보면 고립된 북부는 저절로 미국의 영향권 아래에 들어오도록 될 것이라고 계산했다. 그렇게 되면 동북아에서의 소련의 영향력을 국경선 안에다가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게 되면 전쟁 점령국 일본을 영구히 조종할 수 있고 한반도와 동남아 등의 지역에서 패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정권이 승세를 타면서 이러한 계획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종전 전에 구상한 동북아 구도가 종전 직후부터 비틀어지기 시작하더니 1948년이 되어선 중국공산당정권의 승리가 확실해지고, 1949년에는 친소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동북아 패권 독점에 위협이 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일본열도의 안전 확보에 취약점이 생겼다.
戰前의 구상과 어긋난 前後의 판을 두고 미국의 전략가들이 어떻게 수정하였을까.
일본 열도의 장기 점령, 공산세력의 통제를 통한 국가 이익 확보, 미국 자신의 힘 과시, 2차대전 때 과잉 생산된 무기, 폭탄의 정리와 쇠퇴하는 군수산업에 대한 보상, 2차대전 때 승진의 기회를 놓친 영관급 장교들의 승진욕구 등의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동북아 전략재구성의 결론은 전쟁 필요론이었다. 2차대전과 같은 전면전은 너무 부담스럽고 국내 여론의 호응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국지전을 펼쳐서 공산국가들의 기세를 꺾어야 하는데, 그 장소로서 한반도가 안성맞춤이었다. 한반도는 좋은 체스판이었고 한국인들은 하찮은 말이었다. 강대국들의 전략 구상은 대동소이한 것, 소련과 중국도 미국과 같은 생각을 했다. 김일성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북한군에게 무기만 들려주면 미군이 철수한 한반도 남부를 순식간에 점령, 미군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이전에 남침 전쟁이 끝나리라 예상했다.
이러한 공산진영의 전략 구상보다 미국의 전략 구상이 한 수 더 높았다. 비록 종전 이전부터 구상한 동북아전략에 장애가 생겼지만 서부의 건맨들 후예답게 적극적인 행동으로 장애를 타개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이행했다.
중공정권이 세워지면서 향후의 세계는 미국 대 소련+중국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더 성장하기 전에 화근을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 방법은 오직 전쟁이었고 그 전장으로는 한반도가 적당했다. 한반도가 초토화 되고 남북의 주민들이 모두 살상되더라도 공산세력의 예봉을 확실하게 꺾어야 할 국가 전략적 필요가 있었다.
명분을 중시하는 대국으로서 북침을 개시할 수는 없으므로 북한으로 하여금 전쟁을 먼저 시작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한국군에게 충분한 무기를 공급하지 않아 약체화시키고, 1949년에 애치슨라인을 발표하고 미군을 철수하여 남한을 방어선 밖으로 밀어냄으로써 북한정권을 앞잡이로 한 공산진영의 남침 입맛을 부추겼다. 뿐만 아니라 좌익 공산세력을 잔혹하게 탄압하여 그들로 하여금 적개심을 갖도록 해 침략의 선봉에 서도록 했다. 그 결과 남로당 세력이 대거 월북하여 남침 전쟁의 전위가 되어 활약했다.
9. 김일성의 좌절과 고민
애치슨라인 발표와 미군 철수가 갖는 허구는 전쟁 발발 3일 만에 미군이 참전함으로써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물론 김일성도 애치슨의 발표를 전적으로 믿진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전략을 훤히 들여다보고 미군 참전을 우려하는 스탈린을 설득하기 위하여 전광석화 같은 서울 점령으로 전쟁을 속전속결하겠다는 말을 수십 수백 번 했을 것이다. 또한 월북한 남로당에서 호언하는 ‘남조선 인민 봉기론’을 굳게 믿었을 것이다. 그래서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해서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를 사흘 더 기다렸으나, 이승만의 명령으로 수십만의 보도연맹원들이 처형당하면서 구심점을 잃은 인민들의 봉기는 사라지고 말았고, 개전 사흘 후인 6월 29일에 평양 비행장 폭격으로 시작된 미군 개입이 예상보다 신속하게 본격화됨으로써 김일성과 스탈린은 중지냐 확전이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서울 점령 후에도 사흘 더 한강 이북에서 전선을 정지시켰다. 평양비행장 폭격으로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졌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 일본 폭격의 참화가 생생한 김일성으로서는 앞으로 있을 공중 폭격이 크게 걱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단기전 준비만 하고 남침을 시작한 상태로서는 한강 이남으로 전선을 확대하기가 여간 벅차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나 하고 기다렸으나 남조선 인민들의 봉기 소식은 들리지 않고, 중지나 퇴각이 이미 불가한 상황에서 미군이 속속 상륙하게 되자 한강 이남으로 남진을 명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남진 중지 한강이북 전선고착의 이 사흘 동안의 귀중한 시간 동안에, 후퇴하던 국군이 한강이남 방어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고 미군이 참전할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이 사흘이 무척 고민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항일투쟁에 헌신한 그로서는 단기 전투를 통한 서울 점령으로 남한 인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얻어서 통일을 달성하고 싶었지, 동족상잔과 국토 파괴의 참혹한 전면전을 통해 통일을 이룩할 생각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남진을 명령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빠르고 전면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미국의 결단과 미군기의 북폭이 강화되면서 그의 고민은 본격적으로 깊어졌을 것이다.
「1950년 7월 7일 슈찌코프는 이날의 만남에 대해 스딸린에게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본인은 김일성이 몹시 화를 내고 허둥대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슈찌코프는 같은 날 스딸린에게 발송한 또 다른 전문을 통해 “미공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조선 지휘 성원들과 주민들에게 어두운 인상을 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박헌영, 김두봉, 김달현 등 많은 간부들이 미국의 참전과 대규모 공중폭격에 대한 우려를 토로했고, 이에 김일성은 “매우 힘들다”고 슈찌코프에게 하소연했다.」
단기전을 예상하고 남침했으나 미국이 사흘 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대량폭격이 벌어진 상황을 맞아 김일성은 전쟁 승리에 대한 불안감과 남침 계획의 좌절감을 깊이 느꼈을 것이다. 이미 태평양전쟁을 통해 수백만 대군과 막대한 군수물자를 생산해내는 미국의 국력과 군사력을 보았고, 일본열도 전체를 소이탄으로 불태우고도 성이 안 차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두 도시의 수십만 인구를 단 두 발의 원자폭탄으로 청소한 미국의 가공할 위력, 그 무지막지한 폭력에 전율했기 때문에 김일성의 낭패감은 상상이상이었을 것이다.
계속 남진 하다간 미군의 대량폭격에 괴멸 될 것은 자명하고, 그렇다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 속에서 김일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신속한 기동으로 미군 주력이 상륙하기 전에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수정 전쟁계획이 차질을 빚고 만주까지 쫓겨 왔다가 다시 충북 전선까지 남하했다가 겨우 38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고착된 상태에서 김일성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종전 밖에 없었다. 이제 무력으로 남한을 점령하여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불가하게 되었으니 전쟁을 끝내고 북한을 재건하는 것이 그래도 한 지도자로서 선택해야 하는 도리였다. 더구나 미공군의 대량폭격은 북한주민들의 기초생활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만들었다.
10. 무승부, 이념의 승리만이라도 얻어야 할 정전회담
「유엔군사령관 메슈 리지웨이는 자기가 1951년 6월 30일에 제안한 ‘정전을 위한 군사회담’에 대응하여 공산 측이 보낸 ‘군사행동을 중지한 후에 평화회담을 개최할 것’에 대한 답신문에서 무엇보다도 “정전협정 체결 시까지 적대행위는 정지되지 않는다”는 내용을 강조하며 공산 측의 군사행동 중지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전투가 중지되면 공산 측이 군을 계속 증강하여 유엔 측에 위태로운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 회담이 개최된 후에도 공산 측은 전투중지를 제안했지만, 유엔 측은 거절했고, 결국 양측은 수차례 논쟁 후 유엔 측의 요구인 ‘전투계속원칙’에 합의했다.
전투계속원칙의 합의는 사실상 미공군의 북한지역 폭격이 지속됨을 의미했다. 신임 극동공군사령관 오토 웨일랜드와 제5공군사령관 프랭크에버리스트, 폭격기사령관 제임스 브릭스 등의 새로운 극동공군 장성들은 1951년 중반 전선의 고착을 오히려 공군력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로 간주했다. (정전회담 개최 이후에도 계속 된 대량폭격은 오폭과 남폭으로 점철되어) 북한지역 민간인들에게는 정전 시점까지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하는 참기 힘든 고통을 안겨주었다.」
매일 매일 고통을 당하는 북한 주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미 전의를 상실한 김일성에게도 미군과 중국군의 전투계속원칙의 합의는 결코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가망 없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전쟁피해 복구에 집중하는 것이 권력 기반을 다지는 첩경이었다.
「1952년 전쟁은 또다시 새롭게 전개되었다. 1952년 2월 27일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포로 관련 협상이 송환원칙문제만 남긴 채 모두 타결되었다고 합참에 보고했다.
미국은 자원송환원칙을 통해 ‘승리의 대체물’을 얻고자 했다. 미국인들은 동북아시아의 두 신생국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협상을 통해 종전에 이른다는 사실 자체를 반기지 않았다. 자원송환원칙이라는 새로운 제도 하에서 좀 더 많은 포로들이 미국진영으로 들어온다는 시나리오 하에, 미국은 최소한 이념적 승리라도 얻고 싶어했다.
이와 같은 입장은 정전회담장에서 공산 측의 입장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마오 쩌뚱은 포로송환의 문제가 ‘정치문제’라고 보았다. 그는 누차 포로송환문제를 양보할 수 없다고 표명했다.」
「반면 북한지도부는 포로문제가 하루빨리 마무리되길 원했다. 1952년 1월 16일 북한 외무상 박헌영은 펑 더화이를 방문하여 “전조선인민은 평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전쟁을 계속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1952년 3월 김일성은 타스통신 기자들을 불러 정전을 호소하는 기자회견을 열었지만, 소련정부의 통제로 지신의 주장을 알리지 못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수차례 정전의지를 표출했다. 그가 포로문제의 조기타결을 강렬히 원했던 핵심적 이유는 미공군의 폭격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북한지역의 폭격피해가 이미 감당할 수준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
북한주민들과 주민들은 인도주의적 관점을 강조하는 미국의 새로운 포로송환원칙과 이를 강경하게 거부하는 소련 및 중국의 틈바구니에서 1년 더 견뎌내야만 했다.」
1951년 7월 이후 38도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장기간 고착되고 미공군의 폭격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1952년에 들어서면서 북한 지도부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정전 오직 하나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쥔 상황에서는 그것도 관철하기가 어려웠다. 미국과 중국은 서로 맞붙어 한판 크게 싸우고 난 다음에는 상대방을 무력으로 제압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각자가 대국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포로송환원칙 문제를 명분으로 내걸고 2년 동안 밀당하였다. 그 바람에 북한주민들은 피해와 고통이 더욱 심해졌다. 전쟁을 시작한 잘못은 분명히 김일성 등에게 있지만, 전쟁 계속 책임은 1952년 초 이후에 포로송환원칙 문제로 전쟁을 1년 반이나 더 끈 미국과 중국에게 있다.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은 2년 가까이 계속된 지루한 포로송환원칙을 단칼에 자른 알렉산더의 칼과 같았다. 공식적인 정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석방한 것은 분명 제네바협정에 위배되지만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정전회담에서 작게나마 주권국가로서의 권리를 주장한 쾌거라고 할 수 있다. 그 바람에 포로송환원칙 문제가 풀리고 곧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으니, 참전한 모든 국가의 군인들과 가족들이 안심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사는 모든 민중들은 환호작약 하였을 것이다. 특히 3년 동안 대량폭격의 고통을 당하며 지하생활과 야간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북한주민들의 기쁨은 참으로 대단했을 것이다. 물론 이승만의 과는 공을 덮고도 넘친다. 김일성 등의 북한 지도부가 남침을 결행하지 않았다면 수년 뒤에 미국이 묵인하는 범위 내에서 이승만 등의 남한 지도부가 북진통일을 결행했을 것이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 조인을 거부한 전쟁계속론을 보더라도 평화적 방법이 아니라 무력에 의한 통일을 건국 초기부터 생각했을 것이다.
11. 한국 근대사에서부터 얽혀있는 미국의 실체
김일성과 스탈린, 모택동의 계산이 주판식이었다면 미국은 계산기를 두드리고 컴퓨터를 이용했다. “에이 거짓말이야” 하면서도 “혹여 정말로?” 슬며시 애치슨라인을 믿고, 설사 미군이 개입하더라도 본격적으로 참전하려면 한 달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느긋하게 여기고, 그 전에 사흘이면 작은 땅덩어리 후딱 먹어치울 것이라고 남침을 결정한 그들. 그러나 이미 전략 구상을 마친 미국으로서는 덫을 놓고 기다리던 바였다.
미국이 이러한 전략 구상을 할 수 있었던 근거는 공군력의 절대적 우세 때문이었다. 북한군 무력을 분석한 결과, 지상 전투력은 우세하나 공군력에서 미공군보다 월씬 약하다는 걸 파악하고, 그들이 남침할 시에 우선 공군력으로 남진을 방해하는 동안에 지상군 병력이 충분히 상륙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부산 앞바다 한일해협까지 날아와 상륙을 방해할 공군력이 전무하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에 북한군의 한반도 남부 점령은 일시적 현상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또한 월등한 공군력으로 남진하는 북한군을 폭격함으로써 남진을 지연시킬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을 내렸다.
시공을 뛰어넘어, 미국의 위세가 한풀 꺾이고 군사력 다원화가 된 2014년 이른 봄. 주변 강국들의 행태를 면밀히 관찰하여 대응하는 냉철한 외교 역량이 필요하다. 어느 한 나라에 구속받지 아니하며, 그렇다고 어느 한 나라에 올인하지 않으면서도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한국 근대사에서부터 얽혀있는 미국의 실체를 직시하자. 페리 호 무력시위에 굴복해 대미 개항을 하고, 그 못된 수법을 배워 조선에 써먹은 일본, 미국의 필리핀 식민지를 용인하고 그 대가로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일본이 통제 없는 팽창정책을 펼치다가 동남아에서 미국과 이익이 충돌하자 과감하게 미국과 전쟁을 했다. 일본을 개항시킨 미국으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일본으로서는 ‘페리 호의 굴욕’을 설분하는 전쟁이었다. 태평양전쟁에 패배함으로써 ‘페리 호의 굴욕’보다 훨씬 더 큰 굴욕을 당한 일본인들로서는 언젠가 설분, 설욕, 복수하고야 말겠다는 특유의 앙심이 국민감정 저변에 짙게 흐르고 있다. 날이 갈수록 초급학교에서부터 국수주의 교육의 농도를 높이고, 군사력을 강화하는 데 비례하여 태평양전쟁 전사자들을 애국영웅으로 숭배하여 야스꾸니 신사를 신성시하고 있다.
태평양전쟁은 곧 미국과의 전쟁이었으니 미국에 맞서 싸운 자들은 애국군인이요 그 애국군인들을 죽인 미국은 불공대천의 원수가 안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인들의 본성은 원래 악착같기 때문에 품은 원한은 언젠가는 반드시 갚는다.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미국은 페리 호로 일본을 개항시켜 근대국가로 만들어 주고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도록 해준 나라로 일본을 인식한다. 국가 이익의 상호 충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거고, 잘만 다스리면 일본은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의 국익을 보장하는 든든한 토대가 된다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일본관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일본의 생각은 다르다. 태평양전쟁 때에도 제일 명분으로 구호되었던 ‘미축귀영’이란 말 속에 들어있는 인종적, 민족적 편견은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은 세 불리한 지금은 미국의 전략 속에 포함되는 척하면서 국력을 기르지만, 멀잖은 장래에 동북아의 맹주, 아시아의 강자가 되면 반드시 복수혈전을 펼치고야 말 것이다.
미국 역시 이러한 일본의 국가 전략을 꿰고 있을 것이다. 1950년대 초에 한반도를 이용해서 동북아에서의 국익을 지켰듯이 21세기에도 일본을 이용해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전략 구조를 유지할 것이다. 그 속에서 한반도는 역시 계속해서 변수일 뿐이다. 일본과 중국이라는 상수의 교체에 따라 값이 달라지는 변수일 뿐이다.
한국전쟁의 원인부터 규명하자면, 1940년경부터 세계 1위 국가로 부상하면서 세운 미국의 세계 전략 가운데 한 축인 아시아 전략의 한 부분인 동북아정책, 그 종속물로서의 한반도. 종속에 종속을 거듭한 속에서도 김일성의 결단에 의해 촉발된 한국전쟁은 결국 미국의 그물 속에서 논 작전이었다. 한국전쟁의 원인과 정범, 공범, 유도자, 조장자 등에 대한 논란이 무수하지만 미국의 동북아정책이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싸 감는 그물이었다. 미국의 거시적 국가 전략에 따라 절대 우세를 자랑하는 미공군력에 의해 한반도가 불구덩이 속 아비규환이 되고 말았다.
두 세대가 지난 지금에 와서 당시의 공과를 따져 새삼스레 논공행상과 처벌을 할 필요는 없다. 주변 강국들의 일방적인 행태에 대해 분노하거나 비판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들의 신념과 논리에 따라 국익에 충성한 것이다. 그들에게 타 인종, 타 국민, 타 민족은 소수의 동지와 다수의 적으로 확연히 구분 될 뿐이었다. 그들에게 정의와 휴머니즘 같은 형이상학의 부재를 탓하지 말고, 정밀한 분석과 냉철한 추론을 통해 당시의 역학 구도를 정확히 알아내어, 한반도에 사는 주민들이 그 외통수를 어떻게 하면 피하거나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를 재구성해봐야 한다. 역사는 반복되기 때문에 미래 언젠가, 아니 지금 현재에 우리 한국인이 당면하고 있는 역학 구도를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조절하거나 지혜를 모아 최소한 과거와 같은 외통 사망 수에 걸리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 대량폭격의 마신이 언뜻언뜻 스치는 21세기의 한반도
김태우 박사가 이 책을 쓴 뜻은 다시는 그와 같은 무차별 대량폭격이 있어선 안 되고, 미국 청년들의 순수한 애국심과 양심 그리고 정열이 헛되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21세기 2014년에도 한반도의 하늘과 땅에는 대량폭격의 마신이 언뜻언뜻 스치고 있다. 한반도 남과 북에 목숨 줄 꽂고 살아가는 생명들이여 다시는 한 회갑 전의 참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자. 이 하찮은 글이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었으면 좋겠다.
「새 정권(2007년 이명박정권)하에 새롭게 취임한 소위 ‘뉴라이트’ 단체 출신의 위원장과 상임위원은 2010년 상반기 조사보고서를 통해 미군에 의한 희생사건 대부분을 무더기로 진실규명불능 판정을 내렸다. 그 판정은 군사적 필요가 민간인 보호 규범 준수보다 더 크기 때문에 대부분의 민간인 희생을 ‘부수적 피해’라는 현대 미군의 공식적 군사용어, 미국이 자신의 전쟁범죄를 정당화하기 위해 수사적으로 만든 개념에 근거하였다. 21세기 2010년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의 공격에 의한 자국민의 대량적 희생을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합법화했던 것이다.」
「사실상 한반도 평화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제도적 장치인 군사정전협정의 모든 조문들이 양측에 의해 형해화 되고 만 오늘의 상황은 끊임없이 한반도를 전쟁위기 국면으로 몰아가고 있다. 북한은 지속적으로 핵실험을 강행하며 동북아의 평화를 위협하고, 미국은 한국전쟁기의 B-29기에 상응하는 B-52 폭격기와 B-2 스텔스폭격기를 한반도 상공에 공식적으로 출격시키며 자신의 군사적 위용을 북한에 의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북한은 조선인민군 최고사령부 대변인의 성명을 통해 한 ․ 미간의 대규모 군사훈련인 키리졸브 훈련이 강행된 3월 11일 “오늘부터 이 땅에서 간신히 존재해오던 조선정전협정이 완전히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했다. 3월 20일 북한 외무성은 “B-52 전략폭격기가 한반도에 재차 출격하면 군사적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한반도에서 전쟁과 공중폭격 문제는 반세기 전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오늘의 문제다.」
「현대 한국인들은 일상 깊숙한 곳까지 파고든 반세기 이상의 불안한 군사안보 상황 속에서 전쟁 위기 국면에 대해 매우 둔감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 어디에선가 크고 작은 전쟁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쟁의 원인은 매우 다양하며, 전쟁의 신은 한반도처럼 갈등하는 지역을 눈여겨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만약 한반도에서 불운의 역사가 재개되어 전쟁이 발발할 경우,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은 또다시 ‘그들을 위한 전쟁’을 수행할 것이다. 물론 강대국들의 ‘그들을 위한 전쟁’은 또다시 남과 북의 평범한 민간인들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할 것이다.」
13. 후기
오마이뉴스에서 보고 2012년 10월 20일에 《조선인민군우편함4640호》사서 10월 30일에 ‘아픔으로 一讀하다’. 2012년 3월 초에 예안 길을 걷다가 이일영 공군 중위의 흉상과 기념비를 보고 북폭 시상이 떠올랐다. 3월 말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남 북
호국 인물 李日泳 공군 중위는 1928년 8월 선비의 고장 안동에서 예안이씨 36대손으로 태어나시다. 1942년 3월에 예안 심상소학교를 졸업하였고, 특히 그림과 산수에 뛰어난 소질을 가졌으며, 1943년 1월 일본 소년비행병학교에 입학하여 2년 과정을 마쳤다. 1948년 9월 육군 항공과에 입대하여 6.25 사변이 일어나자 초기 L-4 연락기로 적정 정찰, 연락 비행, 전단 살포 등 임무를 수행하고, 1950년 9월 1일 대구 영천 일원에 은신 중인 수백명의 적 병력을 색출 격멸하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1951년 10월 25일부터 F-51 전폭기로 동해안 적진에 출격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고 1952년 1월 9일 금성 북방 창도리 상공에서 적 대공포에 피탄되어 24세의 젊은 나이로 장렬히 전사하셨다. 고향땅, 성선산 남은 자락에서 고향과 조국 대한민국의 안녕과 번영을 이루시는 영원한 수호신이 되소서! 이천일년 시월 일 호국 인물 이일영 흉상 건립추진위원회
보고 십다. 정숙아 오레동안, 얼마나 고생하면 얼마나 집에 식구들 보고싶흐겐는가. 놈들의, 공습에, 얼마나 고통이 지나느냐. 과이 놀내지마러라. 평양소식 알인다. 九月十六日에 놈들의 공습에 무사이 지나든, 우리사는, 사택에다가 (수백알) 八十개폭탄을, 던지여, 수백명 사람죽고 하는 중에 우리의 두집식구는, 천명으로 사라낫다. 자근어먼님집도, 폭탄에치여, 형편이업고 물거지는, 집속에서, 사라나고, 우리집 식구는 집안에, 있다가, 폭탄,파편에 겨우 몸을 빠저서, 사라낫다. 나는 현장에, 갔다가, 연기가 매우 나서, 집에 도라온즉, 식구들은 울고인는 현상이다. 그리고 매일갗이, 일하든, 완수리, 아버지는, 그날 일 안이나가고있다가, 그만, 압집 치는 파편에, 편소에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마럿다. 살기위하여, 연옥이와, 너의 옸빠는 비행기를, 머리에 두고, 매일 같이 현장으로, 나가는길이다. 1950년 10월 5일 평양사동에서 백인하
제일전선에서 씨우는 인민군대아저씨 앞.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 아저씨, 들이여 얼마나, 수고하십니까. 전쟁이, 6월 25일, 이른, 새벽에, 리,승만, 밑에있던, 「국방군」, 놈들이, 38선이북에, 1k내지, 2k로를, 쳐들어와서, 내,무성이 보로하였다. 물리치기하였을부터 미군놈들이, 7월5일부터 비행기로와서 진남포,원산,평양,청진,함흥 같은 큰 도시들을 폭격하였고 흥남 같은 큰 바로공장 같은 것도 하 퍼하고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바삐 우리들은 공부 할것이면 인민군 아저씨들은 하루바삐 그놈들을 물치기로 하여야하겄습니다 나의 말은 이만 끝이겄습니다 원산제二인민학교 제4학년2반 임만수
1)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 「이일영 공군 중위 기념비」
2) 1950년 10월 미군 노획 북한 편지집 『조선인민군우편함 4640호』(도서출판 상인. 2012) 208p
3) 상동 247p
경향신문에 난 책 소개를 보고, 북폭의 실상을 알기위해 2013년 9월 2일에 《폭격》을 사서 조금 읽고 덮었다가 2014년 1월 29일에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다.
2월 2일 ‘통곡으로 一讀하다’.
징기스칸 · 나폴레옹 · 히틀러 · 이등박문을 영웅이라 칭송하는 자들은 들으라. 그들은 도살자일 뿐이지 인간이 아니다.
호미닌의 유전자 깊숙이 자리 잡아 또아리 틀고 있는 폭력성. 경쟁, 갈등, 분쟁이 깊어지며 형성되는 전투 그리고 전쟁.
학살과 폭격이란 말로 대표되는 한국전쟁의 비극, 참극, 그래도 이 땅이 살아났고 8천만이 살고 있다. 자연복구력.
미공군의 학살과 폭격에 짙은 분노를 가지면서도, 저 깊이 이면을 보자. 학살과 폭격을 초래한 원인은 우리 한반도인에게 있다. 조선시대 이래 누적된 모순이 초래한 식민지, 분단의 결과인 한국전쟁의 실체를 정확하게 들여다 봐야한다.
또한 미국의 힘과 야욕, 국가전략을 허술하게 파악하고는 남침을 결정한 북한지도부, 김일성 · 박헌영 · 김두봉 · 김달현 · 김책 · 강건 등의 역사적 과오를 엄중히 기록해야 한다.
물론 이승만 · 채병덕 등의 남한지도부의 역사적 과오도 마찬가지로 엄중히 기록해야 한다.
잔혹한 대량폭격에 희생된 북한과 남한의 인민들에게 애도와 명복을 빈다.
호미닌이 존재하는 한에는 전쟁이 계속된다. 이무리 지성과 지혜가 진화한다 해도 호미닌이 몸을 갖고 있는 이상엔 싸움과 전쟁이 생리현상이다. 이성은 부유물이고 감성은 흐르는 물이다.
1950년 10월에 중국지도부의 결정은 항미원조 명분이었지만 자국의 안보를 위한 조치였다. 임진왜란 때와 마찬가지로 전장을 한반도로 만들었다.
중국은 1952년 5월의 북한지도부의 종전 요구를 수용했어야 했다.
2014년 2월에 남한과 북한의 격차가 38배 이상 벌어진 상태에서 중국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1950년의 상황과는 판이하다.
후학들이여! 아픈 마음으로 과거를 기억하라 꼭.
2014년 2월 4일에 시작하여 2월 8일에 열락연재에서 마쳐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