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리스트 오승국이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밤과 꿈>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悲歌)>의 탄생지를 찾아 ]
* 두이노 성

이탈리아 최동북단의 트리에스테는 아드리아 해 수일(隨一)의 항구. 한때는 접경을 이루는 옛 유고슬라비아와의 귀속(歸屬) 분쟁이 시끄러웠던 곳이고, 런던에서 발칸 반도를 거쳐 터키까지 가는 왕년의 <오리엔탈 특급열차>가 멎던 추억의 해역(海驛)이기도 합니다.
역전에 있는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두이노로 가는 버스를 탑니다. 트리에스테의 상징인 빗토리아 등대 앞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바다를 끼고 갑니다. 높은 벼랑 위로 차들이 달리는 이 아름다운 해안을 이곳 사람들은 <트리에스테의 리비에라>라고 부릅니다.
미라마레의 고성을 지나고 관광지로 이름난 시스티아나를 지납니다. 시스티아나의 카사 델 포레스티에로(외국인 방문객의 집)에서 바라보는 시스티아나 만(灣)의 파노라마는 절경입니다.
* 트리에스테 지도

버스는 20여 분 만에 두이노에 닿습니다. 손바닥만한 마을입니다. 성(城) 하나가 마을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넓은 정원 끝에 성이 있습니다. 이끼 낀 석조의 거대한 고성입니다.
오른쪽 숲 사이로 역시 물가에 황성(荒城)이 하나 보입니다. 무너진 석벽만 앙상히 성지(城址)로 남았습니다. 14세기 초 방랑 중이던 시인 단테가 두이노 백작의 초대로 잠시 머문 적이 있다는 구성(舊城)입니다. 그래서 성 밑의 암벽을 <단테의 절벽>이라고 부릅니다.
* 두이노 성

절벽에는 긴 드레스를 입은 여인 모습의 하얀 바위가 있습니다. 이 바위에는 <백녀(白女)>의 전설이 전해집니다. 성주가 아내를 죽이기 위해 절벽에서 바다로 밀어뜨리자 아내는 떨어지면서 하늘을 향해 구원을 요청하는 소리를 질러 그 자리에서 바위가 되었다는 옛이야기입니다.
<단테의 절벽>도 <백녀의 바위>도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여기 왔을 때 있던 그 자리의 그 돌입니다.
릴케는 1911년 10부터 이듬해 10월까지 두이노 성에 빈객으로 와 있었습니다. 파리에서 알게 된 호헨로헤 공작 부인이 그에게 성의 문을 활짝 열어 주었던 것입니다.
터로만 남은 11세기의 때의 구성 대신에 지금의 신성이 세워진 것은 15세기 말께였습니다. 17세기부터 현 소유주인 델라 토레에 탓소 가(家)의 것이 되어 대대로 내려옵니다. 지금의 성주는 라이몬드 델라 토레에 탓소 공작.
* 성 안의 서재, 이곳에서 두이노가 글을 썼을 겁니다

70대의 독신인 이 성주는 대단한 문화 애호가이기도 해서 트리에스테 시(市)의 문화 사업에 막대한 재산을 희사해 덕망가로 평판이 나 있는 사람입니다. 릴케를 성으로 불렀던 호헨로헤 공작 부인은 라이몬드 공작의 친할머니뻘이 됩니다.
릴케는 과객이었으므로 성에 남긴 흔적은 거의 없습니다. 릴케는 영지 내의 떡갈나무 숲에서 사람이 살지 않는 정자를 발견하고 성 안 대신 여기 살게 해달라고 주인에게 간청했습니다. 주인은 버려진 정자를 릴케를 위해 꾸며 주었습니다. 그 정자는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다만 성의 고문서실에는 릴케와 호헨로헤 공작 부인 사이에 오고간 많은 편지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호헨로헤 공작 부인은 1933년 릴케와의 우정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회상>이라는 책으로 기록해 남겼습니다.
릴케가 두이노 성을 떠난 얼마 후 1차대전이 일어나고 불과 수km 거리에 전선이 있었기 때문에 성은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두이노 성은 위대한 문학적 유산의 기념비로 살아 남았습니다.
* 성 안의 테라스

1912년 1월의 어느 겨울날, 릴케는 두이노 성의 절벽 위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바람이 세찼습니다. 그 바람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귀를 기울였습니다. 릴케는 그 소리를 얼른 받아 적었습니다.
"아, 내가 아무리 외친들 9계급의 천사 가운데 내 목소리를 들을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 이렇게 해서 <두이노의 비가>의 첫 행을 얻었습니다. 릴케는 그날 밤으로 제1 비가를 다 써내려 갔습니다.
호사스러움으로 더욱 쓸쓸한 두이노 성에서 허허한 바다를 향해 절벽 끝에 서면 고독과 우울이 멀미처럼 치밀어 오르는 것 같습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무한(無限) 앞에 무력한 시인의 호읍(號泣)-소리를 내어 우는 것-이었습니다.
* 성의 붉은 지붕

성을 나와 벼랑 밑으로 바닷가의 마을로 내려갑니다. 빌라지오 델 페스카토레(어부의 마을)라는 이름의 예쁜 포구입니다. 선창가에 조그만 식당들이 여럿 있습니다. 이 마을의 홍합 요리는 소문난 일미입니다.
릴케는 1912년 <두이노의 비가> 중 제1비가와 제2비가를 두이노 성에서 쓰고 제3비가를 시작했다가 1913년 파리에서 끝낸 뒤 제4비가는 1915년 런던에서 썼습니다. 그리고는 오랜 문학의 한발기가 계속되었습니다. 1922년 갑자기 폭발적인 영감이 샘솟아 나머지 비가들을 1주일 동안에 완결한 것은 스위스 뮈조트 성관(城館)에서였습니다.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쪽으로 가자면 철길이 처음에는 레만 호를 옆으로 끼고 가다가 호반을 떠나가면서부터는 알프스 연봉(連峰) 사이의 좁다란 협곡을 론 강 상류와 길동무하여 달립니다. 두 시간 만이면 기차가 시에르 역에 멎습니다. 인구 1만 4천의 과히 크지 않은 도시입니다.
택시를 잡아 타고 뮈조트 마을을 물어 시외로 빠져 나갑니다. 띄엄띄엄 민가가 흩어진 산비탈로 자꾸 오르기만 합니다. 15분 쯤 가서 차는 길가의 외딴 성관 앞에 섭니다. 3층 높이의 누런 돌집입니다. 밋밋한 벽에는 시원한 창문 하나 없이 숨구멍 같은 것만 몇 개 뻐끔뻐끔 뚫려 있습니다.
현관 쪽 담벼락은 담쟁이덩굴이 덮였습니다. 기척 하나 없이 폐가 같습니다. 대문 기둥에 뮈조트라고 당호(堂號)가 새겨져 있습니다. 할머니 한 분이 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은 할머니 한 사람 외에는 아무도 없는 이 집은 릴케가 1921년부터 1926년 운명할 때까지 그의 만년을 살다 간 곳입니다.
* 릴케가 만년을 살다 간 뮈조트 성관(오른쪽)

나무울타리를 친 뜰은 3백평 남짓합니다. 릴케의 사색이 담긴 나무의자들이 비바람에 빛바랜 채 나 둥그러져 있습니다. 릴케가 가시에 찔려 결국 그 때문에 죽게 된 장미밭은 어디였는지. 한쪽 가에는 20m도 더 되어 보이는 키다리 포플러 한 그루가 정정히 산간의 좁은 하을을 찌르고 서 있습니다.
릴케는 고향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프라하에서 나서 뮌헨으로, 베를린으로 그 뒤로는 러시아, 파리, 스칸디나비아,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등지를 정처없이 떠돌다가 1차대전을 뮌헨에서 보냈고 전후의 정신적 재건을 위해 이 뮈조트 성관으로 왔습니다.
지금 이 집 또한 릴케의 유물이라고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주인이 취리히에 살면서 바캉스 때나 와서 쉬다 갈 뿐, 할머니 혼자 대문을 잠그고 불꺼진 듯이 이 집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랑 봉뱅, 프티 봉뱅의 쌍봉(雙峰)과 그 맞은편으로 절벽 같은 당 드 클베츠 산을 낀 뮈조트 마을에는 햇볕이 사발에 담기 듯이 굅니다. 스위스에서도 일조(日照)가 가장 많다는 고장입니다. 그래서인지 비탈들은 온통 포도밭입니다.
시에르 시내에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 가(街)가 있습니다. 그 1번지가 세피뷔스 부인이 살던 집입니다. 릴케가 이 집을 자주 드나든 인연으로 길 이름이 이렇게 붙여졌습니다. 세피뷔스 부인은 나이가 9순일 때 41세 때 릴케가 죽었습니다.
남편이 의사여서 릴케가 시에르에 오자 친교가 맺어졌습니다. 처음 릴케를 알게 되었을 때는 유명한 시인인 줄 전혀 몰랐었다고 합니다.
릴케는 라인하르트라는 당시 많은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던 갑부의 도움으로 이 집을 사들였습니다. 지금의 집 주인은 그의 조카뻘되는 라인하르트입니다. 릴케는 혼자 와서 가정부 하나를 데리고 이 집에서 외롭게 살았습니다. 부인 클라라는 단 한 번 다녀갔다고 합니다.
* 뮈조트 성관에서의 릴케

당시 세피뷔스 부인의 기록에 의하면 릴케는 아주 공손하고 조심성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좀 멜랑콜리하기는 했지만 이따금씩 크게 활짝 웃었다고 전해집니다.
릴케는 여행을 하거나 할 때 세피뷔스 부인에게 편지를 자주 보내왔습니다. 받은 것이 모두 36통. 부인은 이것을 시에르 시에 기증했습니다. 시에서는 시청에 릴케 기념실을 만들어 이 편지와 다른 유물들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릴케가 살았을 때는 시청 자체가 호텔이었고 릴케가 와병을 하자 기념실이 되어 있는 그 방에서 한 달 동안 치료를 받다가 몽트뢰에 가까운 발몽의 병원으로 옮겨져 죽었습니다.
무덤은 그의 유언에 따라 라론이란 마을의 교회 묘지에 있습니다. 역시 론 강변의 한적한 역촌(역촌)입니다. 시에르에서 이탈리아 쪽으로 20km 밖에 안 떨어졌지만 스위스에서 불어 지역과 독일어 지역의 경계라 라론으로 오면 독일어 밖에 안 씁니다.
역에 내리면 마을 가운데에 바위섬처럼 외따로 절벽이 높이 치솟았고 그 위에 교회가 우뚣 서 있는 것이 첫눈에 보입니다. 릴케는 이 교회의 남쪽으로 향한 담벼락 밑에 온 마을을 내려다보며 누워 있습니다. R.M.R이라 쓴 나무십자가 밑의 묘비에는 비명으로 자작한 시를 새겨 있습니다.
* 릴케의 묘지

"오, 장미, 순수한 모순의 꽃, 겹겹이 눈꺼풀처럼 쌓인 꽃 아래 누구의 잠도 아닌 잠을 자는 즐거움."
장미를 그토록 사랑했고 많은 장미의 시를 썼고 결국은 장미 가시 때문에 죽은 시인을 위하여 장미의 묘비명 양 곁에다 죽은 시인을 위하여 장미를 한 그루씩 심어놓았습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두이노의 비가>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의 장시(長詩) <두이노의 비가(悲歌)는 현대 서정시의 금자탑이라고 일컬어지는 명편(名篇)입니다.
1912년에서 1922년까지 10년에 걸친 고투(苦鬪) 끝에 완성된 것으로 10개의 비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릴케 시업(詩業)의 구극(究極)을 보인 이 작품의 제명(題名)은 제1비가의 영감을 얻은 북부 이탈리아의 고성(古城) <두이노>에서 따온 것입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다양한 테마, 대담 간결한 구절들, 특이한 이미지, 독창적인 인스피레이션으로 인간 존재의 무상(無常)과 우주의 영원성을 비탄조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산다. 그리고 영원히 이별을 한다.”
릴케는 예술을 위해 수도사적(修道士的) 생애를 보낸 시인 중의 시인이었습니다.
* 세계적인 테너 이안 보스트리치가 <밤과 꿈>을 노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