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인연 / 송덕희
나는 세상 물정을 잘 모른다. 35년 넘게 학교에서 일하며 다른 것에 고개를 돌리지 않고 살았다. 이러다 퇴직하면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다. 선배들은 손주를 돌보거나, 등산이나 골프 등으로 소일하는 이들이 많다. 빽빽하게 일정표를 짜서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기도 한단다. 나는 우선 체력이 튼튼해야 뭐라도 하겠기에 산에 오르고 있다. 또 글을 쓰고 싶기도 하다.
학창 시절에 여느 학생처럼 작가를 꿈꾸던 문학소녀였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마음 한편에 미련을 둔 채 40여 년을 흘려보냈다. 가끔 글을 어떻게 쓰면 좋은지 연수에 참여하고, 주 1회 블로그에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별반 도움이 안 되었다. 매일 써서 글쓰기 근육을 키우라는 안내서를 따라 했지만 구체적으로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을 많이 읽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젠 노안이 와서 더 힘들다. ‘다 늙어서 머리 아프게 글을 왜 쓰려고 하는 거야?’ 시시때때로 갈등이 일었다.
친구에게 목포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건 지난해 12월쯤이다. <일상의 글쓰기> 반에 자부심이 대단한(나중에 알았지만, 알음알음으로 문우들을 이 과정에 끌어 모았다며 스스로를 홍보팀장이라고 했다.) 양선례 교장은 대학 동기다. 몇 년 만에 만난 자리에서 책 한 권을 내밀었다. 학교 다니면서도 열심이더니 그새 출판했다니 자랑스러웠다. 솔직히 부럽기도 했다. 이훈 담당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며 꾸준히 공부한다고 줄줄 소개한다. 귀가 솔깃했다. 그 강좌 나도 들을 수 있냐니까,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글은 좀 쓰는지 물었다. “관심은 있어. 한번 해 볼게!” 가볍게 대답했다. 집에 돌아와, 돋보기를 끼고서 탄탄한 글쓰기 내공이 담긴 친구의 책을 단숨에 읽었다.
하필 미국에 있는데 수강 신청 기간이라고 연락이 왔다. 염치없이 대신 좀 해 달라고 했다. 정원이 넘어서 떨어진 줄 알았는데, 누군가 포기했는지 나한테 기회가 왔다. 교수님, 문우들과 인연은 이렇게 닿았다.
평생교육원 과정이니 부담스럽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시작’이라는 첫 글감을 받아 후딱 써서 카페에 올렸다. 뭐든 대충하는 내 성격이 드러났다. 수업이 있는 화요일에 빨간색으로 낱낱이 표시한 교정지를 받고 충격이 컸다. ‘이 잡듯이 집어내는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줌(ZOOM)으로 진행하는 첫 시간, 교수님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막힘없이 열변을 토했다. 건강을 잘 관리하고 예리하며 기억력도 좋은가 보다. 20여 편이 넘은 글을 일일이 살피며 띄어쓰기, 단어, 문장, 내용을 파헤쳤다. 어법에 맞지 않고 잘못 쓴 곳은 죄다 골라냈다. 언제 배웠던 문법 지식인가. 머릿속은 텅 비어 있는데, 한꺼번에 휘몰아쳐 들어왔다. 말하듯이 쉽게, 우리말을 살려 쓰라고 했다. 한자어를 섞어 성의가 없이 쓴 내 글이 창피스럽다. 초보자에 맞춰 차근차근 지도할 거라 예상했는데, 빗나갔다. 더구나 수준 높은 문우들 작품을 읽고 코가 석 자나 빠졌다. 나와 달리 꽤 오랫동안 함께 단련한 고수들이었다.
수업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노교수에게 문학 강의를 듣고 있는 대학생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러나 점점 집중력이 떨어지고 초저녁잠을 이기지 못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딱딱한 의자에 3시간을 앉아 있으려니 허리와 엉덩이가 좀이 쑤시고 아팠다. 일어섰다 앉았다 몸살을 앓고 시계를 쳐다봤다. 에누리 없이 정확한 시각에 끝났다. 첫 수업을 듣고 나서 못 따라갈까 봐, 애써 소개해 줬는데 폐를 끼칠까 걱정되었다. 할 수 있다며 용기를 주는 친구의 말은 귀에 들어 오지 않았다. '이 강을 어떻게 건널까?' 밑바닥이 드러난 나를 추슬러야 했다.
다음 주부터 시간을 넉넉히 잡고 집중했다. 글감이 나오면 적어도 수요일에 날것 그대로 한 편을 쓴다. 몇 단락 적어 보고 막히면 다른 걸 써서, 둘을 합쳐 보기도 한다. 테트리스 하듯 문단과 문장을 조각내서 옮겨 붙인다. 낱말과 조사를 바꾸어 본다. 일일이 사전을 찾아서 뜻을 확인했다. 띄어쓰기, 어휘, 문장 연결에서 틀린 곳이 계속 보였다. 금요일까지 소리를 내서 읽어 보고 반복하여 고쳤다. 담금질하다 보면 새로운 생각이 채워진다. 사흘 동안 완성하고, 토요일에는 부담감을 털어 내려고 산에 간다. 마지막으로 점검하여 카페에 올린다.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으면 다시 고친다.
몇 주 지나니 감이 오긴 했지만, 여전히 뭔가가 부족하다. 문장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는다. 무얼 말하려는지 주제가 드러나지 않고 구조도 엉성하다. 상투적인 표현이 많고 성급하게 끝을 맺는다. 다양한 경험과 해박한 지식,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을 글 속에 녹여내지 못한다. 괜찮은 글을 언제쯤 쓰게 될지 모르겠다.
이번 학기를 마치며, 글은 가볍게 써지지 않는다는 걸 똑똑히 알았다. 매일 몰입하여 쓰고 수십 번 다듬은 후에 세상으로 내놓아야 한다. 교수님의 자료에 나온 작가 한비야의 말처럼 철을 갈아 바늘을 만드는 철공의 땀방울로 한 편의 글이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며칠 전에 친구가 ㄲㅊ문학회에 들어오라고 했다. 내 실력은 아직 멀었다니까, 회원들이 동의한단다. 돈 가는 데 마음 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믿고, 마음 바뀌기 전에 연회비를 보냈다. 이제 발을 내딛었으니 망설이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는 중이다.
내 운명이 글쓰기로 기우는 건 아주 좋은 변화다. 퇴직 후에 풍성한 글밭을 가꾸려면 지금부터 잘 갈아 땅심을 튼튼히 돋워야겠다. 정성을 다해 지도해 주신 교수님, 일상의 글쓰기 반을 알게 해 준 친구, 부족한 글을 꼼꼼히 읽고 댓글을 달아 주는 문우들이 있어 힘이 난다. 이 귀한 인연을 오래도록 이어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