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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27일(사순절 후 네 번째 주일)
누가복음 17:11-19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오늘 본문에는 열 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을에 들르셨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나병환자 열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를 만나기 위해 나아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멀리 서서(12절)”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들이 이러한 행동을 보인 이유는 구약의 율법조항 때문이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병에 걸린 사람은 늘 부정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진영 밖에서 살도록 규정하고 있었습니다(레 13:46).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나오지 못하고, 대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13절).”라고 소리를 높여 외쳤던 것입니다.
나병환자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14절).”고 명령하셨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병환자의 상처가 나았을 경우에 나병환자는 제일 먼저 제사장을 찾아가서 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야만 했습니다. 상처의 치유를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후에야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치유를 위해서는 믿음이 요구된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는 “그들이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14절).”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베풀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이 나병으로부터의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던 열 사람 중에 오직 한 사람이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발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절)”
우리는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감사를 너무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너무나 쉽게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간의 애굽 종살이를 마치고 구원받았을 때, 그들에게는 감사와 찬송이 넘쳤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로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너게 하셨고, 막강한 전차로 무장한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셨습니다. 이에 그들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을 한 장만 더 뒤로 넘기면, 우리는 그들의 입술로부터 다음과 같은 원망과 불평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2-3).”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감사를 잊어버리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은혜와 평강의 삶을 살아갈 때는 몰랐는데, 조금만 어려움이 생기고 고난이 다가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불평합니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보통 사람들은 하루에 15번에서 30번 정도 불평을 하고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클렘슨 대학교의 로빈 코발스키(Robin Kowalski) 박사는 “특정 발언이 불평인지 아닌지는 그 발언을 한 사람이 내적으로 불만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발언이 불평이 되려면 그 발언의 이면에 내적인 불만, 불쾌감, 부정적 에너지가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오늘 덥네요.”라는 말은 사실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너무 덥군요.”라고 말하면 그것은 불평하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발언하는 사람이 날씨가 그토록 더워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더운 날씨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 양말을 바닥에 던졌구나.” 이 말은 사실 그대로는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만날 빌어먹을 양말을 바닥에 던지는구나.” 라는 말은 불평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에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급적 부정적인 에너지가 들어가는 단어의 사용을 줄여 나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너무 배고파 죽겠다”, “너무 배불러 죽겠다”, “너무 좋아 죽겠다”, “너무 졸려 죽겠다”와 같은 표현들입니다. 우리가 “너무”, “빌어먹을”과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을 통해서 상대방에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전달시킬 때, 우리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했던 열 명의 사람들 가운데 오직 한 명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적어도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 대신 불평을 늘어놓을 확률이 90%나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불평 대신 감사의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아홉 배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감사는 무엇입니까? 감사는 치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치유를 경험했던 나병환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치유의 근원이신 예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치유의 근원되신 예수님께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 감사는 치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돌아 온 탕자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어느 날, 둘째 아들이 집을 나갔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몫으로 받게 될 유산까지 풍족히 챙겨서 집을 나섰습니다. 그에게는 친구가 있었고, 여자와 술이 가까이 했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가진 돈을 모두 소비하였고, 그동안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돼지들이나 먹을 만한 쥐엄 열매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배고픔과 싸워야 했고, 배신감에 몸을 떨어야 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그동안 아버지께 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자신이 아버지께로 돌아가 품꾼의 하나로 살겠노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모습을 먼 거리에서 발견하고, 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그 아들에게 입히고, 그의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며 “내 아들을 잃었다가 얻었노라.”고 흥겨워하였습니다.
여기서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었다.”는 말은 잃었던 옛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의 신분을 회복한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험한 세상 가운데 살았을 때에는 배고픔과 배신감이 있었지만, 그가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 왔을 때에는 그에게 풍성함과 감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 진정한 감사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감사는 치유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들을 아주 쉽게 잊어버립니다. 감사하는 마음 역시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감사는 늘 우리의 기억을 새롭게 일깨워줍니다. 감사는 우리 삶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크신 복을 일일이 세어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음과 같은 찬송이 있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감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복들을 일일이 세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우리가 잊고 살던 우리의 기억들을 다시 일깨워 줍니다. 그리한 다시 회복된 우리의 기억들은 우리로 하여금 잃었던 감사를 다시 회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일명 ‘은혜의 선순환(善循環), 감사의 선순환(善循環)’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치유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돌아 왔던 나병환자가 얻은 선물은 무엇입니까? 19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놀랍게도 이 나병환자는 치유의 근원이신 예수님 앞에 돌아와 가장 소중한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아홉 명이 나병으로부터 치유를 경험하긴 했습니다만, 그들이 구원을 선물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돌아와 감사했던 이 나병환자는 육신의 치유뿐만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성숙한 믿음은 감사하는 삶으로 나타나고, 우리의 삶에 감사가 넘칠 때 하나님의 온전한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치유의 근원으로 돌아오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심지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치유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관문(關門)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감사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감사는 훈련이 필요한 감정’이라는 사실을 여러분이 기억하기를 바랍니다.
감사는 훈련이 필요한 감정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는 무의식중에 감사 대신 불평을 늘어놓을 확률이 90%나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불평 대신 감사의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아홉 배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감사의 훈련이 꼭 필요합니다.
미국의 윌 보웬(Will Bowen) 목사님은 ‘감사팔찌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원래 이 운동은 윌 보웬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250개의 감사 팔찌를 나누어 준 것에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 운동은 하나의 세계적 현상으로 확대되어 전 세계 150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620만 명의 사람들이 불평 없는 삶을 살기로 서약했다고 합니다. 주로 교회, 학교, 교도소, 심리치료사, 병원, 마약 재활 센터 등에서 이 프로그램을 채택하여 놀라운 결과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보라색 감사 팔찌를 어느 한 쪽 손목에 끼고 있다가 자신이 불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그 팔찌를 다른 쪽 팔목으로 옮겨 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불평을 하게 되면, 팔찌를 다른 쪽 팔목으로 옮겨 끼는 것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되풀이하다보면, 자신이 얼마나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고, 몇 달 동안 그렇게 하다보면 불평은 점점 줄어들고 대신 감사가 늘어나게 됩니다.
목표는 21일간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지내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새로운 행동양식을 습관으로 정착시키는데 보통 21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21일간 하루도 불평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손목에서 감사 팔찌를 떼어내도 좋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계신데, 그 목사님은 몇 년 전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전교인들과 감사 팔찌 운동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 팔찌 운동을 통해서 의외로 많은 분들이 불평 대신 감사의 언어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기회가 되면 우리 교인들도 감사 팔찌 운동에 동참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한 노인이 새우가 든 양동이를 들고 혼자 플로리다 해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가 부두 끝에 이르자, 곧 끼룩끼룩 울어대는 갈매기들이 다가와 그 노인이 가져다 준 양동이 속의 새우들을 집어 먹습니다. 먹이가 다 떨어진 뒤에도 갈매기들은 그 사람의 모자에 달라붙어 떠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매주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그 사람이 감사를 드리는 방법이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은 에디 라이큰바커(Eddic Rickenbaker)입니다. 그는 1942년 10월, B-17폭격기를 몰고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임무를 수행하다가 그만 비행기가 태평양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승무원 여덟 명 전원이 구명보트에 올랐습니다. 8일이 지나자 구명보트 안의 모든 식량이 떨어졌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대책도 없었습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이들은 오후에 짧은 예배를 드린 다음 쉬려고 했습니다. 모자로 눈을 가린 채 졸고 있던 라이큰바커는 뭔가가 자신의 머리에 내려앉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다 갈매기였습니다. 그 갈매기는 그들의 식량이 되었고, 그 덕분에 모든 승무원들은 가까스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수백 마일이나 떨어진 해안에서 갈매기를 보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후로 라이큰바커는 감사를 드리는 것을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우리도 과거에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며, 하루하루 감사의 양동이를 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매일 감사를 실천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시간과 방법을 결정하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으로 감사를 실천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주신 것으로 감사를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더 큰 복으로 여러분에게 부어 주실 것입니다. 마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감사했을 때 더 큰 구원의 은혜를 경험했던 것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