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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534
9월30일 [성 예로니모 사제 기념일/연중 제26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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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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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eyKIrAWl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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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시련은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주님의 초대장입니다!>
구약 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 참으로 재미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욥기입니다. 욥기는 우리를 무죄한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에로 초대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도 욥이 온 몸으로 겪었던 무죄한 의인들의 고통을 자주 접할 수 있습니다. 악인들은 그 숱한 죄를 짓고 과오를 범하고도, 저리도 건강하게 떵떵거리면서 잘 먹고 잘 사는데, 무죄한 이들, 평생토록 신앙 안에서 올곧게 살아온 사람들이 겪는 끔찍한 고통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잃게 됩니다.
채 인생을 꽃피우기도 전, 청춘의 나이에 끔찍한 사고로 세상을 떠난 자녀, 그를 잃고 슬피 우는 부모, 아직 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어린 아이의 불치병, 평생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일만 해온 의인의 요절... 가만히 들여다보니 이 세상은 인간의 눈으로 이해하지 못할 일들로 가득합니다.
평생토록 하느님을 경외하고 신뢰하면서 악을 멀리해온 욥 역시, 어느 날 갑작스런 큰 시련과 마주합니다. 그는 동방에서 가장 큰 부자였으며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둔 행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주님께서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수많은 가축들과 종들을 불살라버리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금쪽 같은 아들과 딸들도 데려가십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욥은 머리 꼭대기부터 발바닥까지 심한 부스럼증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느님이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외쳤습니다.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욥기 1장 21절)
차라리 주님을 저주하고 죽어버리라는 아내의 조롱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좋은 것을 받는다면, 나쁜 것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소?”(욥기 2장 10절)
욥이 자신에게 닥쳐온 큰 시련 앞에 처음에는 그리도 당당했지만, 점점 증폭되는 고통 앞에 얼마나 괴로웠던지 이런 독백을 남겼습니다. “차라리 없어져 버려라. 내가 태어난 날.”(욥기 3장 3절)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욥기 3장 11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고통 앞에 욥은 큰 시험에 빠집니다.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체험 사이에서 긴 내적 갈등을 거듭합니다. 위로하러 찾아온 친구들과의 대화 중에, 위로보다는 죽음보다 더 큰 고통도 느낍니다.
동시에 자신의 지난 인생을 세밀하게 스캔하면서 혹시라도 주님의 뜻을 거슬렀던 요소가 있었는지 성찰합니다. 한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겪는 우여곡절, 성공과 실패, 병고와 죽음에 대한 진지한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그분의 의지, 그분의 처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우리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꿈꿉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지속되는 상승 곡선, 이 세상에서의 거듭되는 성공, 고통과 시련 없는 평화로운 인생. 그러나 근본적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 인간 존재들에게 시련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인생 안에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불행한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 인생의 단계 안에 화사한 꽃봉오리 같은 순간이 있었다면, 반드시 꽃이 떨어지는 낙화(落花)의 순간도 있기 마련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참혹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은 한낱 티끌같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사 모든 것, 성공도 실패도, 재산도 가족들도, 병고도 죽음도 그분 손길 안에 의탁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자주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더 자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해야곘습니다. 더 그분께 집중해야겠습니다.
또한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혹한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 측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초대, 더 성장하고 더 큰 그릇이 되라는 초대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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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
(묵상 동영상)
https://youtu.be/ysxiUVN0fZ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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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무언가 새로 시작합니다. 작게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직장, 결혼이나 수많은 인간관계도 우리의 결정으로 시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은 끝까지 해내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전체 인생도, 물론 처음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시작되기는 하였지만, 결국 내가 잘살아보려고 결정하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도 중도 포기하거나 죽음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얼마 전, ‘유퀴즈온더블럭’에 고독사, 자살, 범죄현장의 특수 청소 전문가 김새별씨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죽음 뒤에 남겨진 쓸쓸한 집을 수습하고 청소하며 살아왔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도 감정이 북받쳐 일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자신도 딸을 키우는 처지에서, 딸의 죽음을 이기지 못해 딸의 자리에 인형들을 동그랗게 둘러놓고 아빠가 죽음을 선택한 집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한번 시작한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을까요? ‘당신도 그런 처지를 당하면 어쩔 수 없을걸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왜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음을 예상하지 못했나요?’라고 되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왜 딸이 사라진 뒤에라도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놓지 못했나요?’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죽음이 닥쳐왔을 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이제 길어야 3개월 남았습니다.”라는 어쩌면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처신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나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런 일이 지금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꽃길이 아닙니다. 햇빛이 좋은 날도 있지만,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태풍이 몰아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라고 말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셔도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세상인데 우리에게야 어떤 일이든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타임」지의 수석 기자 아만다 리플리는 1917년 몽블랑 군선의 폭발에서부터 2001년 9·11 테러에서 살아남은 1만 5천 명의 생환기까지, 역사적인 재난의 생존자들을 추적해 『언씽커블』이란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제목은 우리 말로 ‘상상도 못 할 일’ 정도로 번역이 될 것 같습니다.
그녀는 재난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행동한다는 결과를 내어놓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쓰나미나 테러와 같은 재난을 당했을 경우 당연히 가능한 한 빨리 현장을 빠져나가리라 생각하지만, 실제로 생존자들은 재난 신호를 감지한 후 ‘한참 뒤에야’ 대피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대부분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닥치겠는가?’라고 생각하며 현실을 부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9·11 테러 당시에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있던 사람 중 많은 비율이, 비상계단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었고, 곧바로 대피해야 하지만 이리저리 전화하거나 사소한 물건들을 챙기느라 시간을 허비하곤 했습니다. ‘몸이 얼어붙는’ 반응 때문에 허둥대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불행은 남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암에 걸리기라도 하면 ‘왜 하필 나야?’라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누구에게 일어날까요? 우리는 특별하지 않습니다. 우리만 꽃길을 가라는 법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가시밭길을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이에게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하십니다. 당신을 따르는 길이 절대로 순탄치만은 않을 것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멀미하는 사람도 자신이 운전하면 멀미하지 않습니다. 예상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길을 나서기 전에 닥칠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예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나에게 닥쳐올 일들에 대해 예상하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지도 훈련해 놓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야 몸이 얼어붙는 상황에서도 훈련된 대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의연히 해야 할 일을 할 것을 종용하십니다.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고 하십니다.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할 수 있음을 예상하는 것은 그 일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예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단호해야 합니다. 아만다 리플리는 “가장 강력한 무기는 특정한 위기 상황 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 일이에요. 그리고 정말로 위기가 닥쳤을 때, 그렇게 할 수 있는 단호한 태도도 필요하고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미적대는 이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하십니다. 어차피 그 일을 하기로 했다면 단호하게 그것만 행할 마음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히노 오키오’의 『내일 세상을 떠나도 오늘 꽃에 물을 주세요』란 책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망해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스피노자의 말을 조금 바꾼 제목입니다. 말기 암 선고를 받은 환자들에게 죽음보다 삶에 더 충실하여지자고 말하는 책입니다. 죽음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으려면 사형선고를 받더라도 그것과 상관없이 해야 할 오늘의 일이 있어야 합니다.
소명이 죽음보다 강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그리스도는 당당히 십자가를 지셨고 수많은 성인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죽음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소명은 이웃의 영혼을 구하는 일입니다. 내일 죽더라도 꽃에 물을 줄 수 있다면 죽음의 공포에 지배당해 얼음이 되어버리는 삶을 살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활기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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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9,57-62 :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떤 사람이 주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57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받아들이시지 않고,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58절)라고 하신다. 그 사람은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것이 사도의 영예를 받으려는 것 같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부르셨고 그들에게 영예도 주셨던 것이다.
주님께서 그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그를 바로 잡아서 하느님 안에 잘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의 새와 여우는 교활하고 부정한 권능들로 악마의 무리를 의미한다. 우리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앗을 채 가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영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 안에 여우의 굴과 새들의 보금자리가 있으면 주님께서 어떻게 들어오셔서 쉬실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59절) 하였다. 주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60절)고 하셨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세례로 새로이 태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은 이들로 표현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61절)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62절) 주님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인간적인 일이 아무리 중요하게 생각되어도,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우리의 발걸음을 조금이라도 더디게 한다면 가차 없이 끊어 버려야 한다.
이 말씀은 또한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서 끊어버리고 도망쳐 나온 악마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며 반대의 길로 가려하는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또 이렇게도 말씀하셨다.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루카 17,31-32) 아무도 재물에 대한 욕심이나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가 믿고 따르고 있는 주 그리스도를 등지는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어둠을 향해 걷는 것이 아니라, 밝아오는 여명을 향해 걸어야 하기에 과거에 집착해서 현실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는데 몰두하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마땅한 거처도 없으셨던 주님을 따르고, 주님을 따르는데 망설임 없이 즉시 따를 수 있는 자세와,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여 집착하지 않고 자꾸 뒤를 돌아봄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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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보스코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잠시도 마음 편히 쉬실 곳이 없으셨습니다. 안타깝지요, 우리의 주님께서 쉬실 곳이 없으시다니요. 그런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오히려 쉬실 곳이 없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장례도, 가족에게 작별 인사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단호함을 만납니다. 어디에 얽매여 있어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먼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겠다. 그 어디에도 나만의 쉼터와 공간을 마련하지 않겠다.’ 하셨습니다.
복음을 논하고 묵상하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이미 알고 있는 신학이나 주석학 지식을 맹신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다 읽기도 전에 이미 우리는 기존의 지식으로 복음의 의미를 판단합니다. 오늘 복음을 듣고 읽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다 버려야 해!’라고 속으로 수없이 외쳤겠지요.
그러나 저는 다르게 보입니다.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이 보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기존의 지식과 삶의 방식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더 좋은 것이 있으면 기존에 즐기고 아끼던 것을 과감히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버림으로써 아까운 마음이 든다는 것은 새롭게 추구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하느님 나라로 떠날 때 기존의 삶이 아쉬운 것은,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제 삶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자유인이셨습니다. 저도, 우리도 자유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숨 한번 크게 들이켜고, 자신만의 세상에서 얼른 빠져나와 하느님 나라로 멋지게 여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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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을 따르려면>
1)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급하고, 가장 먼저 할 일입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이고(마태 16,26), “집주인이 문을 닫아 버리면” 열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소용이 없다는 점에서(루카 13,25) 가장 급한 일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입니다.
2)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으면, 한눈팔지 말고, 딴 생각 하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사탄이 유혹할 때도 있고, 세속이 유혹할 때도 있고, 자기 안에서 유혹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도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니까 간단하게 그 유혹을 물리치셨지만, 우리는 우리 힘만으로는 사탄을 물리치지 못합니다. 사탄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습니다.(마르 9,29) 그래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세속의 유혹이나 자기 안에서 생긴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3) 예수님을 따라 나섰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중간에 그만두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루카 14,28-30) 이 말은, “끝까지 갈 자신이 없으면 시작도 하지 마라.”라는 뜻이 아니라,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전력을 다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 하고 내버려 두고 보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심판이나 하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데리고 가려고 애쓰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힘만으로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성령의 보호와 도움을 받으면서 하는 생활입니다. 그 보호와 도움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집니다. 꾸준히 ‘기도하면서’ 노력한다면, 누구나 그 도움을 받아서 끝까지 갈 수 있습니다.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손을 잡아서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힘들어서 못 걸어가겠다고 하소연하면 우리를 업고서라도 가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고, 찾으면 크게 기뻐하면서 그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의 목자이신 분입니다(루카 15,4-5).>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7-5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온갖 고난과 시련, 사람들의 냉대와 배척을 참고 견딜 각오를 해야 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걸어가는 길은 ‘꽃길’이 아니라, ‘고난의 가시밭길’입니다. 물론 처음부터 줄곧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편안하고 쉬운 구간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좁은 문’을 향해서 걸어가야 하는 힘들고 어렵고 험한 길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 길 끝에서 부활, 생명, 승리,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얻어 누리는 행복은,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겪었던 고난과 시련들을 모두 잊어버릴 정도로 크고 강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고난은 잠깐이고 행복은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루카 9,59-60)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어떤 사람은 아마도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는 일 때문에 걱정을 많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기서 ‘죽은 이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라는 말씀은, 집에 가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지 말라는 뜻도 아니고, “세속의 일에 연연하지 마라. 그런 일로 걱정하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그 제자는 아마도 장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아니라, 사소하고 세부적인 절차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합니다.)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라는 말씀은, “무엇이 가장 중요한 일인지 잊지 마라.”로 해석됩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일을 걱정하거나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에게 효도하여라.”라는 십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위선자들을 엄하게 꾸짖으신 분입니다.(마르 7,9-13) 효도는 살아 있는 부모에게도 해야 하고, 돌아가신 부모에게도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세상을 떠난 일 때문에 충격과 슬픔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그 충격과 슬픔은 비난받을 일이 아닌데,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신앙생활을 중단하거나 부르심에 응답하는 일을 중단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장례식의 세부 절차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거나 갈등을 겪는 것을 볼 때가 있는데, 그런 일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사소한 것에 집착하는 모습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62)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속 일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생각하면,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마음이 그다지 간절하지도 않고, 또 그 마음이 가족들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닌데, 세속 일을 ‘먼저’ 하고, 주님을 따르는 일은 ‘나중에’ 하겠다는 그 마음은 잘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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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형님은 책을 좋아하셨습니다. 가끔씩 형님이 읽은 책을 읽곤 했습니다. 이광수의 흙, 펄벅의 대지, 스탕달의 적과 흑, 헤르만 헤세의 지와 사랑, 리처드 버크의 갈매기의 꿈을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현실이라는 벽을 넘어서려는 내용이었습니다. 농촌의 계몽을 위해서 안정된 자리를 버리고 농민들과 함께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가족의 이야기였습니다. 비천한 신분을 넘어 더 높은 곳으로 가려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유를 찾아 떠나는 고독한 영혼의 이야기였습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 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가치를 향해서 날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장미꽃을 싼 종이에서는 장미향이 나기 마련입니다. 생선을 싼 종이에서는 생선 비린내가 나기 마련입니다. 책을 좋아하는 형님이 있어서 문학의 향기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9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2020년 나는 이웃에게 어떤 향기를 나누어 주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분노, 시기, 욕심, 절망, 편견’이었다면 아마도 코를 찡그리게 하는 냄새가 났을 겁니다. 내 마음에 간직한 것이 ‘인내, 친절, 온유, 나눔, 겸손’이었다면 지친 마음에 위로를 주는 향이 났을 겁니다. 오늘은 예로니모 성인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암브로시오, 아우구스티노, 그레고리오 성인과 더불어 존경받는 서방교회의 4대 교부입니다. 무엇보다 예로니모 성인은 평생을 성서를 번역하고, 성서를 연구하면서 지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성서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복음서를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의 활동은 사도행전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비하심은 구약성서를 통해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심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멀리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이방의 신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멀어지고 타락한 사람을 사랑하신 하느님께서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 믿는 이들의 구원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서를 가까이하면 믿음은 희망이 되고 희망은 사랑으로 꽃이 필 것입니다.
중학생 때의 일입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고, 바람도 불었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데, 버스 안이 너무 좋아서 그냥 지나친 적이 있습니다. 결국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학교로 왔습니다. 저는 당연히 내려야 하는지 알았지만 어렵게 잡은 자리가 좋았고, 버스에서 내리면 추울 거라는 생각에 그만 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살면서 중학생 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는 않지만 다른 면에서 중학생 때와 비슷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담배를 끊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17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 지 25년이 되었지만, 처음에 담배를 끊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담배가 가지는 중독성이 그만큼 강했기 때문입니다. 술도 그렇습니다. 지나친 음주는 건강에도 좋지 않고, 다음 날 일을 하는데도 지장을 줍니다. 무엇보다 기도하는 시간을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 잔 술의 알뜰한 유혹을 이겨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들이 있습니다. ‘기도,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의 정거장을 지나치곤합니다.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나누겠다고 하면서 지금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성당에서 주어지는 희생과 봉사의 시간들과 나의 여가 시간이 겹쳐지면 내 몸과 마음은 희생과 봉사보다는 인생을 즐기는 여가 시간으로 기울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십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는 죽은 이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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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걸음 더>
루카 9,57-62 (예수님을 따르려면)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한걸음 더>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
애써 한걸음 더 내딛는 거야
또 한걸음이 뒤 이을 수 있도록
가끔은 지금여기 잠시 머물러
지금까지의 소중한 걸음들
되새김질이 필요하겠지만
끝 모를 머나먼 길 위의
헤아릴 수 없는 걸음들을 이룰
단 한걸음 막아서는 안 되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수많은 걸림돌들이
여린 발걸음을 멈춰 세우겠지만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가볍게
한걸음 또 한걸음으로
꿈같은 지금여기 설 수 있듯이
여전히 남은 길이 있기에
길을 따르는 한걸음으로 길을 만들며
멈추지 않고 한걸음 더 내딛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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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나를 따르려면>
+찬미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기에 앞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는 사람, 가족들에게 먼저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는 사람에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읽는 많은 사제들은 아마도 신학생 시절을 떠올릴 것입니다. 신학생들은 학사일정 내내 엄격한 규율 속에서 살아가다가, 방학을 앞두고 악의 유혹에 휩쓸리지 않고자 특별 9일 기도를 바칩니다.
“오 예수”라는 라틴어 노래를 끝기도로 바치는데, 이 노래의 가사 중 일부가 바로 오늘의 복음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노래의 번역된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오 예수여! 나의 사랑하는 예수여! 나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리이다.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이 신학교로부터,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으리이다.
우리를 보호 속에 지켜 주십시오.
신학교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세속 마귀와 육신과 무서운 괴물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거룩한 곳으로부터 우리를 불러냅니다.
그러나 오 예수여! 당신은 우리에게 말씀하셨나이다.
나보다 자기 것들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진실로 네게 합당치 않고 나의 제자가 될 수도 없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성소와 간택이 확실해지도록 너희는 힘쓰고 죄를 멀리하여라.
오랜 시간동안 신학생들에 의해 불려온 이 가사를 읊고 있으면 마음을 뒤 흔드는 악한 영들이 얼마나 우리 인간을 나약하고 괴롭게 만드는지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가사 안에서 우리는 악한 영, 즉 사탄이 인간을 어떻게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보다 자신의 것을 사랑하게 하는 것, 즉 오늘 복음의 말씀과 같이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게 하는 것”입니다. 쟁기란, 소나 말 등의 힘을 이용해 논밭을 가는 데 사용하는 농기구로, 땅을 갈아엎어 잡초를 제거하고 작물을 재배하기 쉽게 하는 농기구입니다.
예수님이 살던 팔레스타인 지역 역시 이 쟁기를 사용했는데, 이 지역은 돌이 많아서 흙이 깊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농부가 쟁기를 사용 할 때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보지 않으면 튀어나온 돌에 부딪쳐서 쟁기가 망가질 수도 있었고 밭이랑이 비뚤어지기 쉬웠습니다.
즉 오늘 예수님의 비유는, 밭을 가는 사람은 앞을 주목하며 나아갈 길에 집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의무를 뜻하고, 뒤를 돌아보는 것은 세상의 일 혹은 자신의 일만을 염려하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세속 안에서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따금씩, 세상은 어둡고 나를 짓누르는 현실이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혹은 나에게만 집중하느라 미처 하느님을 기억하지 못할 때도 많고 과거의 일에 얽매여 자유롭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우리들은 언제나 주님께 시선을 두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우리의 마음과 이웃들 안에서 활동하시는 예수님의 움직임을 바라보고자 꾸준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바로 그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의 무거운 현실들,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그 어떤 세속의 즐거움보다 더 큰 행복이 주님으로부터 주어질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학생들이 방학을 앞두고 항상 듣게 되는 신부님들의 권고는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하느님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이것은 비단 신학생들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신앙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주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주님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입니다. 좋은 학벌, 많은 재산,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들. 이 모든 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죽고 나면 가져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모두 지니고 있다고 한들, 하느님께 우리의 삶을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이를 기억하며, 오늘도 하느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의지하며 바른 길을 내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길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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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성우 요셉 신부님]
<사람의 아들, 안식처, 하느님>
사람의 아들이 머리를 두고 쉴 곳은 어디겠습니까? 이 세상 그 어느 곳에 내가 편히 쉴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내가 쉴 곳은 아버지 품이고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나는 오직 그곳에서만 머리를 두고 쉴 수 있습니다. 나의 안식처는 바로 하느님뿐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 하느님의 품에서만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영원한 보금자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나의 안식처가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사람, 힘, 명예, 재산, 권력, 지위 등등, 그 어느 것도 나의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지는 못합니다.
진정한 보금자리가 되지도 못하는 것에 내 인생을 걸고 나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편히 쉬지도 못하는 그곳에 내 모든 것을 걸고 가고 있다면, 잠깐 멈추어 서서 생각을 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나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는가? 나에게 근본적인 행복을 주는가? 세상에서 지혜롭다고 하는 자들이 때로는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 영원한 안식은 하느님뿐이시고, 근본적인 행복의 원천도 하느님뿐이십니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일생을 어디에 가치를 두고, 어떻게 보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길이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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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집에서 자신에 대한 기대가 너무 커서 부담된다는 한 학생의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고 부모님 기대에만 맞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기대가 큰 것일까요? 이제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아이에게 부모는 무슨 큰 기대를 할까요? 부모는 그저 이 아이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해야 한다면서 이 아이를 재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부모가 자신을 간섭한다고, 자신을 힘들게 하고만 있다고 생각하니, 부모의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전혀 알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하느님도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크게 기대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계속해서 주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혹시 자신을 간섭하고 힘들게 하는 어떤 의무감으로만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라고 이르십니다.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달라고 하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장사보다 더 중요한 하느님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때 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작별 인사도 못하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이번에도 예수님의 부르심을 짐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특별한 기대를 하고 계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도 충분히 모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부르십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당신 안에서 행복해지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일을 인간의 일보다 먼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큰 사랑을 알아채고, 하느님께서 바라는 대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주님 따르는 것을 짐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또 주님을 따르는 것이 하나의 의무감으로도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원하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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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미국 배우 케리 워싱턴은 자신의 SNS 계정에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원할 때 신은 세 가지 답 중 하나를 주신다. 하나는 “예스(YES).”, 다른 하나는 “예스(YES). 그런데 당장은 아니야.”, 또 다른 하나는 “안 돼(NO). 왜냐하면, 내가 너를 위해 더 나은 걸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하느님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절망도 없고 언제나 희망 안에서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위의 세 가지 답을 우리 상황에 맞춰서 말해주십니다.
실망과 절망, 좌절의 삶이 아닌 희망의 삶. 기쁨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조금만 바꿔 생각하면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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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된 제자의 삶>
-진리와 사랑-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성인의 생애를 요약한 아침성무일도 5개 연의 찬미가가 참 아름다워 2개 연만 나눕니다.
-“성경의 하늘나라 푸른목장을 땀흘려 정성다해 가꾸신 당신
여기서 모든이게 공급하셨네 백배의 풍요로운 영혼양식을
사막의 고요함을 갈망하면서 하느님 면전에서 늘 깨어있고
육신을 괴롭히고 극기하면서 자신을 주성부께 바치셨도다.”
어제 모든 천사들의 축일에 있었던 사건을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병원에 다녀오다가 예상치 못한 교통사고를 입었습니다. 대형 사고의 경우치고는 아주 경미한 상처였습니다. 즉시 병원 응급실로 이동하여 머리 사진을 찍고 주사를 맞은 후, 왼쪽 머리 상단 부분을 여러 바늘 꿰멘 다음 귀원하여 점심식사 후 9시경을 바쳤습니다. 사고 즉시 원장수사에게 보낸 메시지입니다.
“다행히도 경미한 사고입니다. 전례 때는 외출 시 쓰는 검정 모자를 써야할 것 같습니다. 상처 부위가 커서 분심을 줄 것 같아서요. 깨어 살라는 싸인같습니다”
사고 즉시 떠오른 걱정은 내일 강론이었습니다. 저는 강론에 대해 남달리 집착이 큽니다. 게시판에 붙여져 있는 다짐입니다. ‘날마다의 강론은 내 운명이자 사랑이요, 구원이자 유언이다’, 구원과 유언이란 말마디는 나중에 붙였습니다. 정말 지금은 유언처럼 생각하고 씁니다. 이어 떠오른 생각은 ‘정신차려 깨어살라는 회개의 싸인이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음 귀원하여 떠오른 생각 둘은 ’아, 천사축일에 하느님이 천사들을 통해 도와 주셨구나! 감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여 새삼스럽게 감사와 더불어 힘이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머리에 상처가 부끄럽고 분심을 줄 것 같아 전례시 상처를 가리기 위해 모자를 한 번 썼다가 즉시 짧고 부족한 생각임을 깨달아 모자를 벗었습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죄이지 상처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부끄러워 모자를 썼더라면 죄를 지을뻔 했습니다. 저나 수도형제들이 직접 다친 부분을 보면서 전달되는 메시지가 참으로 중요하다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저에게는 깨어 살라는, 회개하라는 표지처럼 생각됩니다. 마침 수도형제가 십자가 앞에 서도록 한 후 사진을 찍어준 후 전달한 메시지의 재치와 유머도 고마웠습니다.
“주님의 전사, 이수철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들어도 반가운 주님의 전사라는 말마디를 들으니 힘이 불끈 솟는 느낌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 까칠한 별난 성인입니다. 그래도 당시 그 혹독한 은수 금욕생활에도 80세 장수를 누리신 것을 보면 인명은 재천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전설적이 인물이요 파란만장한 생애였고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지닌 신비로운 인물이었습니다. 비록 힘든 성향으로 구설수에 많이 올랐을지라도 그의 학문은 당대 성 아우구스티누스외에는 필적할 사람이 없었다 합니다. 이 두분과 성 암브로시오와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네분은 서방 4대교부이기도 합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깊은 영성과 삶의 준열한 고행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은수처엔 몇가지 필수품에 십자가와 성서뿐이었고. 성인은 인생 후반부 거의 30년동안은 예루살렘에서 은수자로 보내면서 성서연구와 고행생활에 전념했습니다. 특히 가톨릭의 공인 라틴어 불가타 성서는 386년에서 시작하여 404년 18년동안의 작업이라 합니다. 또 성인은 원하지 않았던 서품이라 평생 동안 미사를 봉헌하지 않았습니다.
성덕의 잣대는 열렬한 사랑이요 진리의 삶입니다. 성인의 굳건히 항구히 견뎌내는 견인堅忍이 놀랍고 성서연구를 통한 그 지칠줄 모르는 하느님 사랑의 열정이 불가사의입니다. 한결같고 오롯한 사랑과 진리에 헌신했던,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았던 참 자랑스런 성인입니다. 1600년전 성인이지만 시공을 초월 지금도 신선한 자극에 열정에 불을 붙여주는 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고난 받는 의인 욥 역시 주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주석부분을 읽다가 뒷부분이 좋아 옮깁니다. ‘선인善人의 아픔과 고통은 전혀 하느님의 불유쾌한 표지가 아니다. 이들 고통이나 시련은 때로 긍정적으로 그분과의 깊은 관계를 촉진하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표지로 보여질 수 있다. 하느님께로부터 우리 삶에 어떤 경우로 개입하든 수동적 비관주의에서 긍정적이고 환영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병이나 죽음은 궁극적인 악이 아니다. 정말 죄는 진리와 사랑의 부재다.”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부끄러워할 것은 죄이지 상처나 죽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상처나 병, 죽음보다 더 치명적이 영원한 병이나 죽음은 진리와 사랑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떠나는 것입니다. 욥은 결코 혹독한 시련과 고통중에도 때로 불평하고 원망했을 지언정 끝까지 견인하며 하느님을 포기하지도 않았고 저주하지도 않았습니다. 끝까지 진리와 사랑의 하느님께 깊이 뿌리 내린 참 제자의 길을 살았던 욥입니다.
오늘 루가복음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한 제자들의 조건을 언급합니다. 두 번의 수난과 부활 예고후 예루살렘을 향한 절박한 상황입니다. 세차례에 걸친 예수님 말씀에서 참 제자의 길을 배웁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곳조차 없다.”
여기서 강조점은 가난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가난을, 단식을, 고행을 찬양하지도 않았고 노숙露宿하지도 않았습니다. 먹보요 술꾼이란 별명도 지니셨습니다. 바로 어디든 장소에 집착하지 않고 새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자유로워야 당신을 따르는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뚜렷이 부각되는 절대적 가치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절박성은 가족, 전통, 문화의 필요성 모든 것에 앞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려는 결정은 결코 번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 두 예수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취해선 안됩니다. 루가복음의 참된 제자에게 무엇보다 강조된 주제는 다음입니다.
예수님의 추종자는 결코 기회주의자가 될 수 없고, 그가 하는 일은 ‘시간제part-time’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이든 아무것도 아니든 둘중 하나(all or nothing)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제자직의 사명이 얼마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에게 준엄히 요구되는 길이지만 우리가 볼 때 이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동시에 아가페 사랑의 요구가 언제나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최종 판단의 잣대는 아가페 사랑과 진리라는 것입니다. 하여 매순간 분별할 일은 그것이 진실로 사랑의 행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결국 참된 제자의 길은 사랑과 진리의 길이고 사랑과 진리만이 유일한 분별의 잣대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우리 모두 사랑과 진리의 사람이, 참된 제자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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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묻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 9,58)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루카 9,59)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1)
복음의 대목에서는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각각의 경우마다 사정과 정황이 다른 듯하지요. 그에 따라 예수님의 답변도 달라집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이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자애가 넘치시는 예수님이시지만, 부르심과 소명에 대해서는 이처럼 단호한 모습을 보이십니다. 아마도 그건 제자들이 주님의 은총을 전하는 전달자로서 마냥 수혜자로만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 그분의 대리자로서 그에 합당한 영혼과 정신을 가지고 소명을 수행해야 할 테니까요.
기껏 주님께 다가가 추종의 의사를 밝혔다가 냉정한 답변을 들은 이들 편에서는 다소 냉혹하기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 장례나 가족과의 작별 인사조차 금하는 스승이라면 제자단 입문을 재고해야 할까 인간적으로 고민을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가만히 주님의 말씀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이 무슨 감정이나 편견을 가지고 답을 하신 건 아님을 알겠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렇게 답변하신 이유는 어쩌면 예수님과 당사자 둘만 알 겁니다. 이 말씀들은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갈망과 욕망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의 개인 맞춤형 답변이지요.
주님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가에 대한 답은 사실 우리 각자의 내면에 있습니다.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상처와 어둠, 두려움과 분노 등이 주님을 향한 시각에 필터로 지나치게 작동하면 올바른 하느님관을 지니기 어렵지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집착해 해석하는 것을 넘어서,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을 알아듣도록 애써야 합니다.
제1독서 대목은 삶의 밑바닥까지 떨어진 욥에게 친구들이 충고하자 욥이 답하는 내용입니다.
"분노하시어, 뒤엎으시는 분, 요동치게 하시는 분, 솟지 말라 명령하시고, 봉해 버리시는 분, 등을 밟으시는 분, 잡아채시며..."(욥 9,5-12)
욥의 말 안에 드러난 하느님 모습이 많이 낯설지요? 우리가 아는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욥 1,8) 욥의 목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가 말하는 하느님이 아주 폭력적이고 강압적이며 권위주의적으로 느껴지네요.
어쩌면 지금 가족과 재산, 건강까지 비극적으로 한꺼번에 잃은 욥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던 분노와 억울함, 서러움, 두려움이 한껏 끌어올려지는 것 같습니다. 욥과 함께, 묵묵히 듣고 계실 주님의 마음에도, 읽고 있는 우리의 마음에도 고통이 파고드는 것을 느낍니다. 욥은 지금 그 피폐해진 영육 안에, 불행이 뒤범벅 되어 절규하며 울부짖는 모든 인류를 담고 있습니다.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시리라고는 믿지 않네."(욥 9,16)
욥은 하느님께서 침묵하고 방관하신다고 여겨 더욱 슬퍼합니다. 하느님을 고통 중에 함께하시는 분으로 더이상은 믿지 않는 것. 이 오해는 주님께도 너무나 큰 아픔입니다.
앞으로 욥은 우리도 얼마쯤은 체험으로 알고 있는 시험의 시간을 통과할 것입니다. 상실과 시련, 가난 속에서 예전에 부유하고 행복하고 충만했을 때 가졌던 하느님관이 무참히 부서졌다가 이내 영적으로 거듭 정화되는 죽음과 부활의 영적 여정을 지나게 될 것입니다. 욥은 지금 황망함과 두려움으로 거칠어진 속내를 여과없이 내비칠지언정, 끝까지 하느님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고통받는 이에게서 흘러나오는 울분과 불평, 악담으로 욥을 내치지 않으시고요.
사랑하는 벗님! 나는 주님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자라온 환경과 배움과 사회적 만남 안에서 형성된 하느님관이 주님의 진심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지, 혹은 도움이 되는지요? 우리를 각자의 자리로 불러 주시고, 각자에게 알맞게 권고하시고 이끄시는 그분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요?
복잡한 생각을 내려 놓고 주님을 바라봅시다. 그분의 부르심에는 오직 사랑, 사랑밖에 없다는 걸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알게 될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마음만은 풍요로운 한가위 명절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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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무시당하고 함부로 취급당하는 성격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일까요?
대개는 자식들에게 양육의 수고를 생색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들에게 이런 특징이 드러납니다.
부모 중에는 자녀 돌보는 것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자식으로부터 감사를 받음으로써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수시로 ‘너를 돌보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부모의 도움 하나하나를 더 고마워하고, 자신의 마음속에 자신은 타인으로부터 도움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심어 버립니다.
♣또 자신과 가깝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공손한 태도를 보이고, 반대로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제멋대로 굽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자기를 중심으로 움직여 주지 않으면 불쾌함을 느낍니다. 이런 분은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할까요? 우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함부로 대하는 그 모습이 내가 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닮아 있진 않은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무시하고 홀대하며 이해하려 하지 않고 막대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있습니다. 만약 어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함부로 대하고 가치 없는 존재처럼 취급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아마 그 부모와 똑같이 행동할 겁니다.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지의 이유를 밖에서 찾으려하지 말고 내 안에서 찾으십시오. 내가 가진 가치가 무엇인지, 내가 갖고 있는 나만의 자원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대답하다 보면, 자기 존중의 길이 열리고 차츰 타인에게도 존중받는 내가 될 것입니다.
-「나는 생가보다 괜찮은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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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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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부르심’과 ‘따름’에 대한 세 편의 ‘상황어’입니다. 본문은 “그때에 예수님께서 길을 가는데”(루가 9,57)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이는 바로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앞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로 심부름꾼을 보냈는데 배척을 받게 되어 다른 마을로 길을 가신’ 것을 알려줍니다.
<루카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시작을 갈릴래아에서 배척을 받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였듯이, 이제 예루살렘 상경기도 사마리아인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당하게 될 고난을 미리 암시해줍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게레사인들의 지방에서도 배척을 받으셨고(루카 4,28-30;8,37), 나중에는 예루살렘에서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받을 것입니다.
<본문>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와 세 번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고,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르고자 한 사람입니다.
<첫 번째 사람>은 자신이 먼저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인데,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설익은 고백을 깨우치면서 낮고 겸손한 삶에로 부르십니다. 그것은 거처를 지상에 두지 않는 삶, 곧 순례자요 거류민으로의 삶입니다. 자신의 편리와 안정을 추구하는 삶이 아니라, 떠돌이로서 불투명한 삶에 자신을 맡기는 삶입니다. 믿음을 하늘에 두고, 땅에서 자신이 가난해지고 보잘 것 없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따라라”하고 초대한 사람인데,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죽은 이의 장례는 매우 중요한 일었습니다. 그들의 불문율법을 해설한 미쉬나에 따르면, “장례를 치르는 사람은 쉐마(신앙고백문)나 18기도문(축복기도문)이나 기타 기도들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되어 있으며, 후대에는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바빌론 탈무드)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장례를 선행의 극치로 여겼습니다.(토빗 4,3-4;6,15) 그러니 그가 장례를 먼저 치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은 율법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를 거절한 것은 장례를 치르는 일보다 “하느님 나라를 알리는”(루카 9,60) 일을 더 중하게 여기십니다. 죽음의 나라가 아니라, 살아있는 하늘나라가 더 중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사람>도 스스로 먼저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되돌아보는 자는 하느님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당신을 따르는 삶은 ‘대체 무엇을 “먼저” 앞세워야 하는 지’를 깨우쳐줍니다. 곧 인간의 일보다 하느님의 일을 앞세우라는 말씀입니다. “먼저”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이요, 아무 것도 그리스도보다 앞세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그 무엇에게도 첫 자리를 내어주지 말라는 말씀이요, 뒤를 돌아다보지도 말며, 오로지 임을 향하여 진리를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제자 됨은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 본질인지, 무엇이 우선적이고 무엇이 부차적인 것인지를 잘 아는 일입니다. 세상의 가치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길은 배척과 고난을 받는 길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죽으시러 가시는 길에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당신과 함께 가야 할 고난을 암시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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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주님!
당신은 저의 탯줄, 저의 보금자리, 저의 무덤이오니
제 머리가 항상 당신 가슴에 기대어 있게 하소서.
제 몸이 당신 밭에 머물게 하소서.
제 손이 당신 말씀의 쟁기를 잡고 진리의 밭을 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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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예수님을 따르는 길!>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 사람과 셋째 사람은 스스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한 사람이고, 둘째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나서겠다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죽은 이들의 장사와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으로 중요한 그들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9,60)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9,62)
그리고 "어디를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루카9,57)는 첫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루카9,58)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많은 인간적인 일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데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여정에서 '길잡이'가 되어주는 '등불'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 예로니모'는 길잡이 성경을 쉽게 볼 수 있는 대중 언어인 라틴말로 번역하신 분입니다. 이 성경이 바로 '대중 라틴말 성경'인 '불가타(Vulgata) 성경'입니다.
성경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예로니모 성인께 감사드리고, 길잡이 성경을 가까이 하면서 예수님을 잘 따라나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정말 쉽지는 않지만. 우리보다 더 잘 실행하는 개신교 신자들처럼,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중에서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일이 첫째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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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QdI_L60Op8&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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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 60)
치열한
사랑 없이는
말씀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말씀은
모든 시간의
마디마디와
함께한다.
말씀이
돋아나고
점점 자라난
말씀은 드디어
익어간다.
말씀 하나로
모든 것은
사랑으로
소통된다.
사람의 길은
말씀의 길이다.
말씀이 익어가면
마음도 익어간다.
말씀의 길은
소통과 진정한
자유의 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 내면을 향해
뜨겁게 타들어간다.
말씀에
자신을 봉헌한
성 예로니모
사제의 축일이다.
하느님의 빛은
말씀의 빛으로
우리를 밝힌다.
말씀의 빛은
하느님 나라의
참된 등불이다.
말씀을
사랑한 삶이
은총의 삶이다.
그에게서
성경의 번역은
가장 적극적인
말씀의 실천이었다.
말씀의 대중화는
귀한 말씀의
보편적 만남이며
새로운 시작이 된다.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
말씀은
사랑처럼
가까이 더욱
다양한 방법으로
풍요롭게
전하여져야 한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느님을 찾는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말씀의 번역은
하느님을 사랑한
사람의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다.
말씀으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다 물들이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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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쟁기에 손을 대고>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 62)
너무 많은 것에 묶여 있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진정한 믿음은 부질없는 과거에 머물러있지 않습니다.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에도 부족한 우리의 오늘입니다. 온 힘을 다해 우리의 집착을 갈아엎기에도 부족한 우리네 시간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이라는 쟁기를 잡고 앞으로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집착과 미련을 내려놓을 때 가장 살아있는 오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나라는 새롭게 시작하고 새롭게 따르는 이들의 나라입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에게 소중한 오늘을 깨우쳐줍니다.
허망한 욕망을 내려놓는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예수님에게서 다시 배우십시오. 우리의 잘못된 방식이란 오늘이라는 쟁기를 잡고 자꾸 뒤를 돌아다보는 것입니다. 참된 시간이란 바로 이 순간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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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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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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