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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 -28
서양의 Troi전쟁 vs. 동양의 涿鹿(탁록)대전
서양의 트로이 전쟁에 빗대어 일컬어지는 탁록대전은 4,700년 전 동방 종주국 배달의 치우천황(蚩尤天皇)과 이에
대항한 서방 軒轅(헌원) 세력의 대결로 시작되었다. (제후의 위치에 있던 헌원이 천자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천자인 치우천황에게 도전했다. 10년 간 73회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치우천황의 승리
로 끝났다. 치우천황의 쇠로 만든 투구와 갑옷은 서방족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후대에 銅頭鐵額동두철액)이라
는 기록을 남겼다.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
전투에서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은 치우천황은 동방 무신의 시조, 兵主가 되어 수천 년 동안 동방 배달족은
물론 서방 漢族에까지 숭배,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司馬遷은 『史記』「五帝本紀」에서 사실과 반대되는 기록을 했다.
“신농씨의 나라가 쇠하여 제후들이 서로 다툴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납게 짓밟았으나 신농씨는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이때 헌원이 무력으로 제후들을 치니 모두 복종하였다. 그러나 치우가 가장 사나워 칠 수가 없었다.
염제(신농씨)가 제후들을 침탈하려하자 제후들이 헌원에 귀의하였다.
이때 치우가 복종하지 않고 난을 일으켜 헌원은 여러 제후들을 불러 모아 탁록의 들에서 치우와 싸웠다. 드디어
치우를 사로잡아 죽이고 제후들이 헌원을 높이므로 신농씨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었다.”(『사기』「오제본기」)
여기에서 황제 헌원과 그 족속은 치우천황과 그 족속에게 패했기 때문에 그들은 물론, 그 후손들이 치우와 동이족
에 대한 공포, 적개심을 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華夏족은 2,300여 년 동안 황하 中, 上流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秦始皇에 이르러 강력한 힘을 길러 東進을 거듭, 中原 전체를 華夏족의 확실한 터전으로 만드는 統一을
달성한 것. 동이족을 변방으로 밀어내거나 무자비하게 숙청, 동화시켜 통일제국을 이룬 것이다.
秦의 유래를 살펴보면 東夷에 대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宋史』「印度傳」에 따르면, 옛 인도인들이 秦을 그 音에 따라 支那라고 하고 진시황을 支那皇帝라 했는데, 이를
따라서 외국 사람들도 중국을 支那라 불렀다.
불교 여러 책에서도 秦나라는 支那로 기록되어 있는데, 秦나라를 震檀國 혹은 震檀나라라 일컫기도 했다.
(안호상,『배달, 동이는 동아문화의 발생지』,pp.260-261.)
※지나라는 이름을 서양서는 시나(sinae), 키나(cina), 차이나(china) 등으로 음역.
일본은 서양 文物 받아들이면서 (명치유신) 중국이란 이름이 中華思想을 강하게 암시한다고 하여 중국 대신 支那라
불렀다.
(왜 支那라 했나?)
태호복희의 八卦 그림에서 震괘는 離괘와 坤괘 사이에 있다. 離 괘는 동녘을, 坤괘는 북녘 자리를 차지하고, 震괘는
동녘과 북녘사이를 차지한다.
배달나라가 동아시아의 동북에 있는 까닭에 아득한 옛적부터 배달나라를 震괘를 따라 震 또는 震旦이라 했다.
이를 통하여 秦나라 사람들이 배달- 동이 겨레의 후손이므로 아득한 예로부터 자기네 조상들이 살던 震 또는 진단
(眞檀, 震旦, 眞丹)을 따서 나라 이름을 秦이라 하였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주쉐안(朱學淵)은
嬴(영)씨 부락에서 기원한 秦,
안추 부락에서 창업한 金(여진)
愛新覺羅에서 건국한 淸 등
세 글자의 音讀은 각각 qin(친), jin(진), qing(칭)인데, 건국 시점을 서로 달리하는 이 세 나라가 어떻게 해서 서로
비슷한 발음의 국명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진일보한 연구가 필요할 것이라 본다.
(주쉐안,『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족 이었다.』,p.159에서 주학연은 秦나라 名이 동이족 언어와 무관치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東夷가 오랑캐가 되었나?)
華夏족은 東夷를 大人으로 우러러 보면서도 계속되는 동이족의 정복 정책에 시달려 나중에는 동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히 동이족에 대한 적개심이 쌓여 동이의 뜻을 오랑캐로 바꾸어 해석
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漢武帝 때 司馬遷은 중국 최초의 正史인『史記』를 저술하면서 동이족의 역사를 뿌리부터 왜곡했다.
中國史觀의 핵심인 中華意識을 처음 표방한 것은 周나라였다. 주나라가 동이족이 세운 商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갑자기 중국에는 화하족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이때부터 화하족이 본격적으로 동이족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동이와 대립되는 화하는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周족은 서쪽에서 기원하여 활동하다가 후에 中原을 차지. 周족은 자신의 국토를 時夏라 부르고, 자민족을 諸夏라
칭했다. 후에 夏자 앞에 華자를 더하니 華夏라는 민족이 생겨난 것. 이 같은 명칭이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중국인의 자부심의 상징이 되고 있다.(웨 난, 심규호, 유소영 역,『夏商周 단대 공정』p.1,p.138)
중국학자 장타이옌(章太炎)은 夏란 이름이 夏水라는 강물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화, 하라는 이름은 주나라 무왕 때에 “화, 하 蛮貊(만맥)이 따라오지 않음이 없다.”란 말에서 처음 나타났다.
린후이샹(林惠祥)은 하 라는 글자가 「舜伝」에서 처음 나타났고, 또 화 라는 글자는「春秋左傳」에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했다.
이상의 내용에 따르면, 華夏라는 단어는 춘추시대 이래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夏자의 뜻은 분명 禹夏의 夏와 같고,
부족의 관념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중원의 민족 문화 공동체가 성숙되고 확립되는 시대에 夏는 그러한 공동체의 별칭이 되었고, 따라서
전에 부르던 夏부족만을 가리키지 않게 된 것.
그 정치적 의미는 中原 왕조를 가리키고, 민족적 의미는 중국 사람을 가리키며 문화적 의미는 中原文化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하는 당시의 전중국, 중국의 전민족을 대표하게 되었다.
夏왕조는 중국 최초의 왕조이기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계속 中原을 夏라 불렀다. 周가 중원의 主人이 된 이후에도
四方의 蠻夷(특히 동이)와 차별을 두기 위해 여전히 夏란 호칭을 사용. (張富祥,『東夷文化通考』,p.2.)
그런데『四書釋地』3續卷 下에는 夏, 殷, 周(三代) 이후에는 夏와 夷를 구별했지만, 三代 이전에는 華와 夷가 정
해진 구분이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中華와 東夷를 구분하여 尊王攘夷를 내세운 것은 후대의 일이고,
본래는 중국에 華와 夷의 구분이 따로 존재치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처럼 西周 세력은 夷족을 몰아내고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東夷
개념을 만들어 냈다. 이후 華夷 개념은 춘추시대의 孔子에 의해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中華란 단어는 中國+華夏를 합쳐서 부른 말. 현존 문헌에는『삼국지 제갈량전』에서 裴松之(배송지)의 주석에
처음 나온다. 中國이란 용어는 周나라 초기『何尊』銘文에 이미 기록되어 있다.(張富祥,『東夷文化通考』,p.418.)
동이의 眞面目을 찾아내어 세상에 처음 알린 淸나라는 역시 동이에 속하는 만주족이 세운 나라였다.
청나라는 한족 학자들의 거센 反淸思想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려고『四庫全書』라는 대규모의 국가적 편찬사업을
추진, 완성했다. 78,000여 권에 달하는 四庫全書
經部에는 총 491권에 736군데
史部에는 총 563권에 915군데
子部에는 총 497권에 689군데
集部에는 총 278권에 308군데에 걸쳐 東夷라는 용어가 2,648번 등장한다.
(심백강,『四庫全書中의 東夷史料의 解題』)
『四庫全書』를 보면, 중국 한족 역사의 실체를 알 수 있고, 중국문화의 근원적 뿌리를 동이가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중국 왕조사의 혈통과 문화는 동이가 동방문화의 뿌리요, 근원이라는 사실이다.
동이는 큰 활을 쏘며, 웅대한 역사의 기상을 떨친 동방 군자 나라를 건설한 주인공이었다.
후기 중국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말하는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이 서로 다른 별개의 종족이 아니라, 본래 동일한
하나의 夷족이 발전하여 四方의 夷, 즉 四夷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중에 華夏족이 중국의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동방에 사는 夷를 東夷....식으로 부르게 된 것.
따라서 東夷, 구체적으로 말하면 九族, 분포 상황을 중심으로 말을 하자면, 四夷가 되는 것이다.
(桓國=9환족 12분국) 7代 桓因 3,301년. ca. BC7,000-BC4,000)
※음성학적으로 보았을 때 중원 부족들이 동방인을 尸(시), 夷라 한 것은 방언을 취하여 부른 것이다.夏는 중원의
표준말이고, 尸, 夷는 동북의 방언으로 사실은 모두 人에 대한 호칭으로 처음엔 찬양, 폄하가 없었다.
夷, 夏라고 부른 것은 華夏족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西周시대부터 거의 모든 문헌에서 夷자를 폄하하는 뜻으로
사용. 중원 주변을 四夷로 폄하.(張富祥,『東夷文化通考』)
桓檀古記 -29
(동이와 한민족)
한민족은 과연 동이족인가? 동이족이라면 원류? 지류? 핵심? 주변 세력?
『禹貢錐指』4권에는 “堯 임금 때의 嵎夷(우이)가 현재의 山東省인 登州, 淸州에 있었는데 조선 땅이었다.”는
견해가 실려 있다.
嵎夷라는 말은『書經』「堯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堯가 義仲에게 명하여 우이에 거주토록 했는데 바로 暘谷(양곡)이라는 곳이다.”
우이는 바로 堯 당시에 존재하던 夷족으로서 동양 고전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夷의 명칭이 그런데 우이가 바로
고조선에 속했다면 한민족은 東夷九族의 뿌리요 원류라는 얘기가 된다.
또『五禮通考』201권에서는 “한 무제가 설치한 현도, 낙랑 二郡이 옛 嵎夷의 땅으로서 淸州지역(산동성 동부)에
있었고, 三韓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과 “燕과 秦이 경략한 조선은 대체로 禹貢의 우이 지역이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두 자료를 통해 嵎夷는 곧 조선의 영역이었고 연, 진 시대의 조선과 한 무제가 설치했다는 현도, 낙랑 지역이
실존했다면, 한반도가 아니라 모두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심백강,『四庫全書中의 東夷史料의 解題』,pp.38-40.)
대만의 역사학자 쉬량즈(徐亮之)도『中國史前史話』에서 “은, 주나라 앞 시대부터 周가 망할 때까지 동이족의
활동 영역이 사실 지금의 산동성과 하북성의 발해연안, 하남성 동남지역, 강소성 서북지역, 안휘성 중북부지역,
호북성 동부, 요령성 요동반도지역, 조선반도 등으로 廣大하다.”고 적었다.
고대사회에서 동이족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존재가 아니라, 중국의 지배세력이었다.
특히 요령성 서부와 하북성에 거주하던 동이 중 한 갈래는 동북으로, 다른 갈래는 발해를 따라 산동 반도로 진출
했다.
신석기 말기부터 동이족은 회수와 황하유역, 산동 반도에 걸치는 중국의 동해안 일대, 남만주, 발해만 일대, 한반도
등에 거주하면서 古朝鮮이라는 강대국을 세워 東夷 文化圈의 중심을 형성. 桓國에서 발원한 배달의 동이족은 고대
동북아의 문화를 창조하고 꽃을 피운 주체 세력이었다.
東洋문명=동이족
西洋문명=Sumer족
배달시대(18대 환웅 1,565년, BC3,897-BC2,333) 이후로 동이족이 동북아를 주름잡을 때, 서남아시아에서는 天山
을 넘어간 Sumer人이 서양 文明을 일구었다.
동이족과 수메르인이 모두 환국의 환족에서 동-서로 분화된 것을 생각할 때, 수메르인을 西洋의 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東夷의 諸族들)
고조선 시대 때 中原의 족속들은 동방의 諸族屬들을 夷라 칭했다.
『後漢書』(후한은 AD23-220)「東夷列傳」에 의하면, 황하 下流와 江淮(강회)유역에서 활약한 동이는 모두
9種으로 이를 통칭, 九夷라 불렀다. (畎夷, 于夷, 方夷, 黃夷, 白夷, 赤夷, 玄夷, 風夷, 陽夷). 이 밖에도 위치에
따라서 鳥夷, 嵎夷, 人夷
(人方), 淮夷, 徐夷, 介夷, 奄夷, 萊夷, 島夷, 藍夷, 郁夷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현재 중국의 壯族, 瑤족은 동이(鳥夷 한 갈래로 黃夷가 있었는데 楚나라에 망한 뒤 남으로 이동, 장족이 됨)의
支派.
※중국에서는 그동안 山東, 河南, 江蘇, 安徽 등 그들 동부지역에서 大汶口, 龍山文化와 같은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新石器文化를 東夷文化로 규정하며 최근에는 이 지역을 통틀어 海岱文化區(海岱는 泰山의 다른 이름)라는 개념
으로 많이 부르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있다. 이중 漢族은 92%. 기타 55개 족은 8-9%정도 소수민족.
소수민족은 漢族에 비해 人口는 적지만 땅은 중국 국토의 60% 이상을 차지.
따라서 중국 중앙정부는 이들의 독립을 결사반대.
西南工程-티베트 역사를 중국 역사로.
西北工程=위구르 역사를 중국 역사로.
東北工程=만주지역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
이 같은 工程들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 역사로 규정하고
이를 정치적, 이론적으로 확립시키기 위한 영구 정책.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따르면, 현재 중국 땅에 있는 모든
민족은 하나의 중화민족으로 융합되어 왔기 때문에 각 민족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고 그 영토도 중국에 귀속된다는 것.
桓檀古記 -30
5)인류 創世史를 다시 쓰게 한 紅山文化
(동북아의 여러 신석기 文化)
Sumer 문명 vs. 요서지역 文明(紅山)
130년에 걸친 이라크 지역 유적 발굴..... (서양 문명의 뿌리인 Sumer 文明이 세상에 드러났다.)
20세기 最大 발굴(사건)..... 遼西지역(발해연안 지역) 신석기..... 청동기 문화 발굴.
프랑스 사람 에밀 리쌍이 1922-1924년에 내몽골 적봉지역에서 신석기 유적지 22곳 발견한 이래 21세기인 지금
까지도 발굴 계속.
요서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신석기 문화는 8,5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小河西 文化다.
(인류 최고의 신석기 文化).
小河西 유적은 7,000-8,000년 전에 만들어진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와 그 연대가 일치한다. 재질, 모양이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빗살무늬 토기와 같은 계통 ..... 小河문명의 주인공과 동방 한민족의 연관성 시사.
(紅山文化)
1945년 중국학자 尹達(인다)이 山 전체가 철광석으로 덮여 붉게 보이는 紅山에서 借名하여 紅山文化라 命名했음.
요서의 여러 신석기 문화 중 하나인 紅山文化는 요령省 조양시 建平縣과 凌源縣의 접경지역에서 번창했던 文化.
신석기 말 文化. 석기와 청동기 섞어 사용. BC4,500-BC3,000년경의 文明.
10,000년 전 homo sapiens sapiens 등장과 더불어 신석기시대 시작. 이때부터 間石器(磨製石器)사용하고 토기
제작. 토기로 물 떠먹을 수 있었으며 저장용기 역할을 했다. 정착-농경생활가능.
세계 4대문명처럼 북위 30-45도에서 발생.
지중해 문명(지중해를 둘러싸고 태동한 이집트문명, 에게문명, 그리스. 로마문명)이 서양문명에 자양분을 공급
했듯이, 東夷족이 발해연안에서 창조한 문명은 中國은 물론 만주, 한반도, 일본의 고대 문명을 일궈내는 젖줄이
었다.(이형구)
塚, 廟, 壇이 모두 나타내는 紅山文化
돌무덤(塚), 신전(廟), 제단(壇)은 인류의 정신문화를 가늠케 하는 3요소이다.(이형구)
積石塚은 고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 계속 나타나는 동이족의 대표적 廟制.(黃河지역의 華夏族 문명권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음.)
곰을 숭상한 紅山人
홍산인들은 女神을 모시고 곰과 새를 신성시했다.
요서지역의 유물과『환단고기』가 밝히는 내용을 종합해서 볼 때 紅山文化는 桓檀(桓國과 倍達)의 문화로 볼
수밖에 없다.
(세계 최고의 玉 문화)
발해연안 古代文化 中에서 가장 큰 특징은 玉 문화. 중국인들은 龍 신앙의 기원이 中原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원류는 동북지방-요령성 홍산이다.
석기시대(軒轅, 神農, 赫胥시대에는 돌로 兵器제조)⟶ 玉期시대(중국의 黃帝시대 때는 玉으로 만든 兵器 사용)
⟶ 청동기시대(禹 임금은 청동기로 병기제조)⟶ 철기시대
玉 문화는 BC6,000년경부터 요서, 요동, 한반도가 하나의 문화권이었음을 의미. 고대 동북아의 옥은 홍산문화
보다 더 오래된 흥륭와(興隆洼) 문화에서 발견되기 시작. (興隆洼村...내몽골 자치구 敖漢旗에 위치).
흥륭와 문화에서 시작된 옥 문화가 후대의 紅山文化에서 더욱 다양, 화려. 하나의 연속된 문명이 3,000년-4,000
년 동안 지속적으로 발전.(?)
홍산문화는 동북아 신석기 문화의 최고봉으로서 중국 漢族의 것과는 계통이 전혀 다른 문화이다.
오히려 그들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환단시대 배달 동이족의 독자적인 문화이다.
시베리아 과학원의 고고학자 세르게이 알킨 교수도 홍산문화의 독자성에 대해 “홍산문화는 中原文化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中原文化가 홍산문화에 영향을 주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龍 문화에 대해서도 “中口의 용 文化는 독자적으로 발생하지 않았다.
고대 중국의 기록을 보면, 북방 이민족 中 용을 totem으로 하는 민족도 있었다고 하는데, 바로 홍산문화의 주인공
들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밝혔다.
“한국의 曲玉은 龍의 변천일 것이다. 그것은 日本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발해연안의 고유 文化이다.
중국인들은 龍 신앙의 기원이 中原으로 알고 있지만, 실은 만리장성 너머에서 왔다.
그 원류는 中原이 아니라 동북지방이라는 것에 깜짝 놀랐다. 그래서 중국은 동북공정을 시작한 것이다.”(이형구)
그러나 중국은 홍산문화 유적지인 우하량을 지나는 대형 도로공사를 함으로써 동북아 고대문화 흔적 지우기를
시도하고 있다.
紅山문화는 桓檀시대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올바르게 해석을 할 수가 없다. 환국, 배달, 고조선이라는 동북아 시원
역사를 인정해야 홍산 문화를 포함한 발해 연안의 그 엄청난 유적과 유물을 해석할 수 있다.
(왜 홍산문화를 알아야 하는가?)
중국은 유적과 유물이 史上 처음이고, 인류사 최고인 紅山文化를 黃河文明보다 2,000-3,000년 앞 선, 황하문명의
源流로 규정하였다.
그런데 중국이 불편하게 여긴 것은 황하문명의 원 뿌리가 오랑캐의 땅이라고 여겼던 만리장성의 밖(이북)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은 위와 같은 난처함을 多民族 역사관으로 해결했다. 漢族+55개 소수 민족으로 이루
어진 中國땅에서 발견되는 소수 민족의 문화와 역사는 모두 중국의 문화와 역사라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紅山文化를 遼河文明이란 이름으로 전 세계에 소개하면서 中國을 Egypt, Mesopotamia, Indus 문
명보다 앞서는 세계최고 문명국으로 내세우고 있다.
桓檀시대의 한민족 문화를 자신들의 문화로 둔갑시켜 이제 경제 대국에서 문화대국으로까지의 꿈을 꾸고 있다.
중국이 미래 세계의 중심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노골화하고 있는 이때에 환단 시대를 인정치 않는 환국의 강단
사학자와 史魂을 잃은 이념적 변종들이 나타나 역사에 분탕질을 하고 있다.
홍산문화에 침묵하거나 우리나라와는 상관없는 문화로 여기고 있다.
※어떤 유적, 유물이 어디서 발굴되었다 해서 그곳이 인류 최초라 할 수 있는가?
그렇다고 다른 곳은 모르니 아니다 라고 할 수도 없지 않나?
따라서 있다는 것, 볼 수 있다는 것, 만질 수 있다는 것만을 기준으로 有無를 판단하려 들면 현상적인 것에 치우
치는 결과만을 낳고, 유추적이거나 관념적인 추론에 치우치면 감각적이지 못하니 공허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역사에 대한 고민이다.
(요녕성에서 만난 홍산문화에서)
옥돌(新石器문화)은 정교함, 세련미의 극치였다. 특히 德輔博物館 에서 만난 石磬(악기)은 東方 古代사회에서
의례에 사용되던 타악기로서, 후한의 경학자인 鄭玄(127-200)은『禮記』에 주를 달면서 ‘옥경은 天子의 악기’
(玉磬天子之樂器)라 했다. 석경이 발견된 것은 홍산문화가 예악, 즉 음악의 시원이라는 것을 뜻한다.(?)
(玉은 하늘의 德性을 상징)
옥은 우주의 모든 神을 다스리는 三神上帝님의 마음, 대자연의 순수성과 영원한 生命을 상징한다.
德輔博物館의 玉 동곳(동곳은 상투가 풀어지지 않도록 고정시키는 장신구)은 死者와 하늘(天)을 연결시켜 주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박물관 학예사의 설명. 상투는 인간이 하늘과 소통하는 경로-상징.)
※『說文解字』(漢나라 때 字典)에서 “玉은 五德을 갖춘 아름다운 돌”이다. 孔子는 “군자는 옥으로 덕을 견준다.”
고 했다. 玉은 하늘의 빛깔과 하느님의 신성을 상징.
紅山文化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황하문명보다 무려 1,000년-2,000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 문명이다.
이 만리성 밖의 문명인 홍산문화(요하문명 혹은 발해연안문명)는 檀君王儉의 옛 조선 이전의 上古文化인 桓因의
桓國과 桓雄의 倍達文明을 알아야만 이 문명의 실체를 설명할 수 있다.
桓檀古記 -31
(인류 祭天문화의 발상지 牛河梁)
우하량에서는 무려 BC3,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積石塚, 女神廟(모성 중심 사회?. 神敎 원형문화의 모습을
보여주듯이 女神像 자세는 반가부좌 수행 자세), 대형 圓形祭壇을 모두 갖춘 동북아 최고 文明이 발굴 되었다.
이는 5,500년 전에 이미 종교를 중심으로 祭政一致의 국가조직을 갖춘 上古文明이 存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이 文明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문명보다 1,000-2,000년이나 앞선 인류의 시원 문명으로서 인류
祭天文化의 고향이요 동서양 pyramid, 巨石文化의 원조이다. 우하량 유적지에는 150m X 60m(대형 축구장 크기)
의 우하량 제2지점 제단과 무덤(총), 묘(신전) 유적이 있다(塚, 廟, 壇). 제천행사 원형제단과 方形 돌무지무덤도
있다.
牛河梁 圓形祭壇(추정)
三圓 구조로 된 거대한 원형의 天地제단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方正하다’는 天圓地方 사상을 담았다.
上古시대 주인공은 上帝님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중시했다. 그는 東方 神敎文化의 三神과 天地人 三才思想을
반영한 제단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고, 고조선과 동일한 돌무덤 방식의 墓葬法을 썼다.
따라서 이 유적은 天符經의 天一, 地一, 太一 사상을 생활화한 고조선의 전 단계로서의 배달국의 文明이다.
7,000여 년 만에 햇빛을 본 환국, 배달시대의 동방 천자문화의 상징인 龍鳳(용봉은 동아시아의 독특한 문화 상징
으로 음양문화의 뿌리이며 천자를 상징한다. 서양문화에서는 Griffin을 모든 創生의 王으로 인식한다.
몸은 사자이고 머리와 날개는 독수리인 Griffin의 원조는 봉황이다.),
부엉이나 매, 태양을 상징하는 三足烏는 上帝의 명령을 인간 세계에 전달하는 매개체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새 형상의 玉器는 새를 토템으로 삼은 동이족 문화의 원형이 담긴 神物이다.
만주족, 몽골족 등에는 鷹神崇拜 전설이 많다. 만주족의 창조신화에서 매(鷹.응)는 하느님의 창세에 참여한 大神
으로 각종 동물의 우두머리 神이었다. 또한 고대 신화에서 부엉이나 매는 밤이 되면 태양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옮기는 태양의 神舟로 태양의 사망과 부활을 상징하며, 陰陽, 生死를 이어주는 존재로 여겼다.
환국, 배달시대의 三神文化를 보여주는 유물들.
①뿔이 3개 달린 구름무늬 모양 청동 禮器.
일찍이 天地 변화를 깨달은 동방의 한민족은 예로부터 宇宙萬有를 태어나게 한 조물주를 三神이라 불렀다.
이 三神이 스스로 顯現하여 하늘, 땅, 인간 三才가 생겨났다. 동방 한민족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섬기며 천지와 하나 되는 삶을 살았다. 이 문화가 동아시아에서 6,000년 이전부터 존재한 太一文化이다.
②상투용 玉笟(옥고)
天上 북녘하늘의 七星은 삼신상제님이 계신 곳.
동방문화에서는 인간의 生死禍福과 깨달음이 모두 七星에서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칠성을 극진히 섬겨왔다.
인류 최초의 문명인 홍산문화에서 한민족 고유의 두발양식이 상투문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상투를 맨다는 것은 내 마음을 삼신상제님의 마음에 맞추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칠성문화를 보여주는 유물로는 七支刀(백제 왕세자인 奇生이 제후국인 倭왕 旨에게 하사한 칼. 지금까지는 백제
근초고왕이 하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干支가 맞아 떨어지는 진지왕(眞智王) 4년 혹은 동성왕(東城王) 2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가 있다. 홍산문화의 連珠玉에서 일본의 국보인 七支刀와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오늘날의 생활도구의 기본은 배달국 시대에서 나온 것이다.(홍산 문화의 다양한 생활도구).
단단한 돌과 옥, 뼈로 만든 각종 도구를 보고 있으면 현대 디자인과 비교해도 전혀 뒤지지 않고 오히려 그 원형이
이미 다 나왔다 해도 좋을 정도다. 돌, 옥, 뼈를 자유 자래로 다룬 상고시대의 기술이 놀라울 정도다.
桓檀古記 -32
3. 한민족의 전성기 고조선
1)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
배달국의 18세 환웅 居弗檀이 82세로 죽자(배달 역대 천황 나이는 평균 104세) 단군왕검이 38세에 天帝아들로
추대되어 제위에 올랐다.(BC2,333). 송화강 유역(흑룡강성 하얼빈)의 阿斯達(아침 태양이 빛을 비추는 땅)에
도읍. 그 후 22세 索弗婁단군은 송화강 아사달(1,048년) 남서쪽의 白岳山 아사달(860년. 길림성 장춘. 궁홀산
弓忽山 또는 금며달今㫆達이라고도 한다.)로 천도.
44세 丘勿 단군은 남쪽으로 더 내려와 藏唐京 아사달(요령성 開原市)로 천도.
2)나라를 삼한으로 나누어 다스림
고조선은 神敎의 三神(造化神, 敎化神, 治化神) 중 만물의 질서를 바로 잡는 治化神의 道가 실현된 때이다.
그래서 단군왕검은 삼신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삼한, 즉 진한, 번한, 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고조선 도읍지 변천.
| 진한(太一) | 번한(地一) | 마한(天一) |
제 1왕조 | 송화강 아사달 (흑룡강성 하얼빈) | 안덕향(탕지보湯池堡 ) (하북성 당산. 안시성 인근)
| 백아강 (대동강 평양)
|
제 2왕조 (삼조선 시대) | 백악산 아사달 (길림성 장춘) | ||
제 3왕조 (대부여 시대) | 장당경 아사달 (요령성 개원) | 험독(險瀆) (하북성 창려원) |
단군왕검은 大檀君으로서 요동과 만주지역에 걸쳐 있던 진한(太一)을 통치하고,
요서지역에 있던 번한(地一), 한반도에 있던 마한(天一)은 각각 副檀君이 통치했다.
馬韓 = 하늘의 정신
番韓 = 땅의 정신
辰韓 = 天地의 주인이요, 인간의 중심(太一)을 상징하였다.
삼한으로 나뉘었으니 도읍지도 3곳.
진한 수도 = 아사달(하얼빈)
번한 수도 = 안덕향(하북성 당산시.安德鄕. 난하 부근)
마한 수도 = 백아강(평양.白牙岡의 白牙는 '희다'는 뜻으로 맑고 깨끗한 별(은하)을 뜻한다.
백아강은 후에 白馬江으로 바뀌었다. 백마강은 현재 충청남도 부여지방을 흐르는 백마강.)
...................................................
※줄어든 강토 (滿洲, 遼河, 遼西의 삼한에서 한반도 안의 三韓으로?)
丹齋 申采浩(민족사학자)는 三韓管境이 고조선의 국가경영 원리임을 밝혀냈다. 맨몸으로 북만주 누비며 한반도의
남쪽 삼한시대 이전에 만주, 요서, 한반도에 걸쳐 광대하게 뻗어 있었던 단군조선의 삼한시대가 실재했음을 입증
하였다.
三韓管境은 고조선 역사와 문화의 핵심을 헤아리는 결정적이고 중대한 열쇠이다. 이에 대한 이해 없이는 고조선의
영토 범위, 여러 도읍지, 복잡한 대외관계, 당시의 국내외 상황 등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다.
현 주류 강단 사학계가 고조선 역사를 제대로 밝히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神敎三神文化의 우주관과 神觀에
근거한 삼한관경제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근세조선의 高宗皇帝가 선포한 국호 大韓은 삼한에서 由來하였다.
삼한을 크게 하나로 통일한다(三韓一統)는 뜻에서 大韓이라 지었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東北亞의
중심이었던 옛 조선 삼한의 영광을 회복코자 했다.
3) 고조선의 강역
고조선은 광대한 제국이었다. 東으로는 한반도의 東海, 西로는 몽골, 南으로는 규슈와 일본 본토까지, 北으로는
흑룡강 지나 시베리아까지였다.
이러한 古朝鮮을 고려, 조선의 中華 事大主義者들과 日帝의 식민사학자들이 한반도 북부에 국한된 小國으로 줄여
놓았다. 그러나『환단고기』에 나오는 地名 몇 개만 고증해 보아도 그 진실은 쉽게 드러난다.
삼한시대(제1왕조) : 송화강 아사달(하얼빈). 단군왕검-21세 소태 단군까지 1048년간 지속.
三朝鮮시대(제2왕조) : 백악산 아사달(장춘). 22세 색불루 단군-43세 勿理단군까지 860년간 지속.
大夫餘시대(제3왕조) : 아사달(개원). 44세 丘勿단군-47세 古列加 단군까지 188년간 지속.
영토를 확장하며 중국을 제압하던 古朝鮮은 제3왕조에 이르러 수세적인 입장에 놓이게 되어 戰國七雄의 하나인
燕나라의 침략을 받음. 45세 여루(余婁)단군 때 (BC365) 燕이 고조선과의 국경인 雲障을 공격, 燕에 빼앗겼으나
고조선의 三國(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이 협력, 곧 회복.
그런데 이 운장은 BC195년에 번조선의 準王이 망명객 衛滿을 받아주면서 그 곳 국경수비대장으로 임명한 곳.
고조선의 강역이 대륙 깊숙이 뻗어있었다는 사실은 고고학 발굴로도 입증되고 있다.
고조선은 만들어진 신화? (송호정) 그러나 홍산문화(玉문화)와 夏家店문화를 알면....
(20C 후반에 발굴된 夏家店문화)
夏家店은 내몽골 자치구 赤峰市의 한 촌락. 건조한 기후 때문에 유적, 유물이 빗물에 유실되지 않고 시대별로
층층이 잘 보존된 곳.
상층에선 유목민 문화가, 하층에선 BC2,400-BC1,500년경의 농경집단 靑銅文化가 나타났다.
하층에서 비파형 청동검이 나옴.(만주와 한반도에서 발굴된 청동검과 동일. 따라서 하가점 하층문화는 고조선
문화이고, 하가점 지역은 고조선 영역인 것.)
이상에서처럼, 기록(문헌)으로나 유물로나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요서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한 동북아시아 대국.
고조선은 70여 개의 크고 작은 제후국을 거느렸다.『檀君世紀』,『帝王韻紀』,『三國遺事』,『고려사』,『세종실록』,『應製詩註』,『揆園史話』, 중국 史書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세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단군은 제후국을 순회하였고, 제후들은 단군에게 조공을 바쳐 그 속족임을 자인
했다. 단군은 제후들을 불러 三神上帝님께 올리는 천제에 참여시키고 함께 적국을 공격하기도 했다.
하지만 中國, 日帝는 고조선의 제후국들을 모두 고조선과 무관한 별개의 나라인 양 서술함으로서 지금의 중국
본토 일부와 만주,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다스린 대제국 고조선의 면모를 은폐하려고 했다.
桓檀古記 -33 (고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
4)고조선과 중국의 관계
『단군세기』는 고조선이 초대 단군 때부터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고조선은 회수와 태산지역(淮垈)의 제후들을 평정하고 그곳에 설치한 分朝 舜으로 하여금 감독케 했고, 현 산동성
교남시의 낭야성(琅耶城은 번한의 2세 왕 낭야가 산동지역에 있던 성을 개축한 것. 낭야는 단군왕검이 번한의
초대왕으로 임명한 蚩頭男<치두남-치우천황의 후손>의 아들이다. 단군은 서방 漢족을 제지하고자 한족이 두려워
하던 蚩尤天皇의 혈통을 번한의 통치자로 내세웠다.)에 監虞所(감우소. 堯舜의 정치를 감독하는 곳)를 설치하여
舜으로부터 分朝에 관한 일을 보고 받았다.
覲(근)=가을에 天子를 알현하는 것.
朝=봄에 天子를 알현하는 것.
『書經』을 보면 ‘東巡望秩 肆覲東后‘(동순망질 사근동후)라는 구절이 나온다.
『단군세기』의 기록으로 볼 때 肆覲東后라는 구절은 舜 임금이 동방의 天子를 알현하였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마땅. 결론적으로 ‘사근동후‘는 제후 舜이 동방의 천자인 단군천황을 알현한 것이다.
禹가 세운 夏나라(BC2,205-BC1,766, 439년간)도 역시 고조선에 예속되었다. 禹는 父 鯀(곤)이 治水에 실패하여
순 임금이 처형하자 父 뒤를 이어 나라의 治水사업을 맡아보던 司空의 신분이었다.
禹는 舜을 대신하여 도산(塗山=지금의 절강성 회계산)회의에 참석, 고조선의 太子 扶婁로부터 五水治水法이 적힌
금간옥첩(金簡玉牒. 죽간을 엮어 만든 책)을 받았고, 이 비법으로 홍수(9년 홍수)를 해결하고 인심을 얻어 夏나라
를 열게 되었다.
※商이라는 나라 名은 시조 契(설)이 禹의 治水를 도운 대가로 商이라는 곳에 봉지(封地)를 받은 데서 유래한다.
원래 商이라 불리던 나라 이름을 周나라가 殷이라 고쳐 불렀다.
(周는 漢족 중심의 나라로서 동이족의 나라였던 商나라를 폄하하기 위해서 그렇게 불렀다.)
殷三代
①成湯이 伊尹을 등용, 夏나라의 桀王(걸왕)을 치고 세운 나라.
②周 武王이 殷(商)의 紂王(주왕)을 치고 周나라 세움.
③殷.....처음 국호를 商이라 했다가 盤庚 때에 殷이라 고침.
※중국이 중화주의 史觀으로 쓴『오월춘추』는 夫婁 태자를 蒼水使者라 말하여 殷人의 실체를 감추었다.
창수사자가 꿈에 나타나 비법을 알려 준 것으로 기록. 禹가 순전히 자신의 현몽으로 국난 해결한 것으로 왜곡.
또 조선시대의『응제시주』,『세종실록』「지리지」는 "禹가 도산에서 제후들과 회동할 때 태자 부루를 보내
조회하게 하였다."고 하여 고조선이 오히려 중국의 속국이었던 것처럼 주객을 전도시켜 기록했다.
※商나라 시조인 설의 어머니가 제비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는 卵生설화는 전형적인 동이족 탄생설화이다.
商나라 개국공신 伊尹도 동이족 출신이고, 상나라 말기의 도읍지였던 하남성 안양시 은허 유적에서 출토된 궁전,
성벽, 무덤 등 모두가 동북방을 향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북은 삼신이 머무르는 땅 (『太白逸史』「신시본기」)
이고 商나라의 동북방에 고조선이 위치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초기의 商은 고조선을 문화의 조국으로 받들었으나 (商)12세 하단갑(河亶甲) 때부터 조공을 바치지 않고
22세 武丁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고조선의 변방을 침범. 이에 단군조선의 21세 蘇台단군과 22세 索弗婁단군이
商나라를 쳐서 大破. 패전을 거듭하던 商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약 100년 후에 亡했다.
商 다음의 중원 지배자 周(550년 간)는 漢족이 세운 나라로 알려져 있으나, 창건자인 文王과 武王 부자는 그들의
시조 설화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이족 출신이다. 무왕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商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동이족의 협조가 필요했다. 商은 많은 병력, 전차 보유. 다수의 동이인이 무왕에 협조.
姜太公도 그 하나였다. 무왕은 周 건국 도운 강태공을 산동지역에 있던 제 나라의 제후로 봉했다.
동이족 출신인 강태공으로 하여금 周왕실에 비협조적인 산동지역 동이족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무왕 이후 周나라는 이전의 왕조와 마찬가지로 고조선에 조공과 방물을 바쳐 禮를 표했다.
요컨대 고조선은 동북아의 天子國이었고 夏,商,周 중국 3왕조는 모두 고조선의 정치적 지배를 받았다.
5)조선과 일본의 관계
古代 일본사는 동방 한민족의 이민개척사다. 일본의 정통 역사서인『日本書記』(720) 와『古事記』(712) 에
기록된 건국사화에서도 일본 역사는 동방 한민족이 開創했다고 썼다.
도네리 친왕(舍人親王)이 저술한『日本書紀』와 백제人 太安麻呂가 저술한『古事記』는 모두 백제 멸망(660)
후 모국인 백제와 고리를 끊고 일본왕조를 自生왕조로 변색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집필된 것(?)
天孫降臨의 일본 건국사화가 환웅의 倍達 건국사화와 그 틀이 같다. BC660년에 즉위한 일본의 초대왕 진무(神武)
의 정체 또한 일본 고대사는 고조선이 개창한 역사임을 밝혀준다.
桓檀古記 -34
6)고조선과 북방민족의 관계
『단군세기』에는 고조선과 북방민족간의 관계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가 있다.
3세 嘉勒단군 6년(BC 2,177)에 “임금께서 열양(列陽) 욕살(褥薩) 삭정(索精)에게 弱水지방을 봉해 흉노의 시조
가 되었다.”고 기술하였으며, 4세 烏斯丘단군이 재위 원년(BC2,137)에 자신의 아우 오사달을 몽고리한에 봉했
다고 기록하였다.
30세 奈休(내휴) 단군 5년(BC905)에는 흉노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이 있으며, 32세 鄒密(추밀) 단군 3년(BC847)
에 鮮卑山(선비산)추장 문고가 공물을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몽골 고원~ 중앙아시아~ 남러시아~ 동유럽에 이르는 일대의 광활한 초원지대는 다양한 유목민들의 공간이었다.
중국인들은 이들 북방민족을 戎(융), 狄(적), 호(胡)라 부르며 무지하고 흉악한 오랑캐(匈奴)로 여겼다.
(흉노, 선비, 돌궐, 몽골 등 북방민족은 크게는 한민족이다.)
동방의 三神과 天祭文化를 생활화한 흉노(匈奴)는 그 우두머리를 선우(單于)라 했는데, 漢나라 초기 묵특(冒頓)선우
(BC209-BC174)때 서쪽의 月支(터키계 유목민족)와 동쪽의 東胡(번조선)를 격파하고 아시아 최초로 유목 대제국
을 건설하였다.
묵특 선우는 흉노 제국을 神敎 三神文化의 고향인 고조선과 같이 셋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자신은 中央을 통치하고 東쪽은 左현왕이, 西쪽은 右현왕이 통치하게 하였다. 좌현왕은 우현왕보다 우대되었는데,
보통 선우의 아들은 우현왕으로 삼았다.
흉노족은 선우를 탱리고도(撐犁孤塗) 선우라고도 불렀다. 탱리 = 하늘을 뜻하는 흉노語 tengri의 音譯이고,
고도 = 아들을 의미한다. 따라서 탱리고도는 하늘의 아들, 즉 天子를 의미한다.
흉노는 天地와 日月을 숭배하고 조상을 숭배하며, 1년에 3번 큰 제사를 지냈다. 흉노는 자신들이 거처하는 게르
(천막집) 門도 항상 동쪽을 향해 배치하고 매일 해와 달을 향해 절을 했다.
문을 동쪽으로 한 것은 동쪽을 중시하는 동이족의 관습과 일치한다.
中國의 역사서에서 흉노는 BC4세기 戰國時代에 처음 등장한다. 그들(중국) 입장에서 볼 때, 흉노는 틈만 있으면
燕, 趙, 秦을 침략하는 골칫덩어리였다. 이들 3국은 모두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장성을 쌓았다.
이를 연결한 것이 진시황의 萬里長城이다.
長城 축조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고, 秦 2세 황제 호해(胡亥) 때 秦나라는 진승, 오광 등의 반란으로 망했다.
흉노의 위협이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멸망시킨 원인 중 하나가 된 것. 天下 劉邦 漢高祖도 흉노와의 전쟁에서
포위당했다가 뇌물을 주고 겨우 탈출한 바 있다. 공주와 공납을 보내 굴욕적인 평화를 유지한 것. 漢 무제(武帝)도
흉노토벌에 세월을 다 보냈다. 50년간 전쟁.(BC141-BC139까지. 오랑캐와의 전쟁)
武帝는 흉노와의 전쟁이 민생을 도탄에 빠뜨림을 알고 다시는 변방으로 出征하지 않겠다는 輪臺의 詔書를 발표
하고 자신의 실책을 반성하였다. 이 때 漢무제는 衛滿정권을 공격하고 그 곳에 군현을 설치하려 한 것도 흉노를
견제키 위한 것이었다. (위만정권이 흉노와 손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苦盡甘來? 포로에서 다시.....)
흉노 좌현왕의 아들이 자기 어머니와 함께 漢 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왕자는 궁궐의 말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
품위 있고 성실해서 漢 무제에 의해 측근이 되었다.(왕자 名 = 金日磾.김일제).
후에 무제는 그를 莽何羅(망하라)의 반란을 막은 공으로 秺侯(투후)에 봉하였다. 투후는 ‘오르도스의 제후’라는
뜻이다.
그 후손 중에서 왕후(前漢 11세 元帝의 妣 효원왕후)가 나왔다. 前漢을 무너뜨리고 新을 건국한 王莽(왕망)은
김일제의 玄孫이었다. (서동인,『흉노인 김씨의 나라 가야』.P.125)
※Ordos = 중국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의 중남부에 있는 고원 지역. 북쪽과 서쪽은 황허(黃河) 강, 남쪽
은 만리장성이 둘러싸고 있다. 예로부터 한족(漢族)과 북방 유목 민족의 쟁탈지였으며, 明나라 때에는 몽고의
오르도스부(部)가 점거하였다.
외척인 金日磾 가문은 왕망이 정권을 잡으면서 최고의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왕망이 몰락하자 한반도로 망명을
했다.
신라 文武王碑 비문과 중국 西安에서 발견된 唐代의 묘비명에 김일제가 신라 金氏 왕가의 조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1세기 초 漢나라에서 망명한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에 들어와서 王權을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가야가 있었던 지역에서 기마민족의 유물이 대거 발견되었다.
유물 중 청동제 솥인 銅鍑(동복)은 흉노를 비롯,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이 제사의식을 치르기 위해 말에 싣고 다니던
祭器로 유럽의 훈족 route에서도 많이 발견되었다.
(흉노제국은 BC1세기 중반 내분으로 分列)
동흉노 : 呼韓耶(호얀하)선우가 이끄는 동흉노는 漢과 동맹을 맺고 중국 북쪽에 머물렀다.
서흉노 : 郅支(질지)선우는 漢나라와 타협거부, 중앙아시아 쪽으로 이주.
한 세기 후에 동흉노는 둘로 분열.
①남흉노 : 고비 사막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漢나라의 藩兵(수비병)이 되었다.
②북흉노 : 몽골 초원을 지배. 한帝國과 南흉노 연합세력의 공격 때문에 BC1세기 말(91)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 일리江 쪽으로 갔다.
북흉노는 한 때 일리강 인근 오아시스 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
의 압력에 못 이겨 2세기 중반 경 더 西進,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흉노는 기록에서
사라진 듯 했으나, 4세기 중반에 갑자기 Hun(훈)이란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훈족은 370년경 흑해 북부에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유럽에 그 존재를 알렸다. 이들은 볼가강을 건너 南Asia
초원지대에 거주하던 Alan족을 공격했고, 이어 알란과 함께 東Goth, 西Goth族을 공격, 유럽에 민족이동의
대물결을 일으킨 바 있다. (민족 대 이동)
공포에 질려 도주한 German 민족이 밀물처럼 로마 국경 안으로 쇄도하자 이를 제어하지 못한 西로마 제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훈족에 의해 촉발된 German 민족의 이동은 서양 역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초래한 사건
으로 평가한다.
훈족이 통치한 거대한 나라를 훈 帝國이라 일컫는데, 우랄산맥에서 동유럽 열대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훈족= 기마민족.....동서문화 교류. silk road)
1973 경주의 옛 고분에서 황금보검(보물 635호 金製篏寶劍)이 나왔다. 이 보검은 신라가 아니라, 동로마서 제작.
(트라키아 지방産?)
※트라키아 (Thracia)는 발칸 반도 동남부에 있는 지방. 시대에 따라 지역의 범위가 다르며 지금은 에게海 동북쪽
기슭을 가리킨다.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영토 분쟁지이며 발칸 전쟁이 일어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