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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맞아. 내일 약속 캔슬 하자...아비 병원 스케줄(국가 건강 검진)이 있어서... 쉬는 날인데 늦잠 자시라!(나)" "오늘 모의고사 보는 날이고 막 끝나서 정신이 없네요 ㅎㅎ(그래 욕보는구나. 차분해지면 목소리 한 번 들려주시라!(나/예주)" 에스더랑 하동관 설렁탕 약속을 해놓고 왜 내가 캔슬 했을까요? "오디세이"가 개봉 한 달 만에 900만이 넘었다니 놀랍습니다. 내가 볼 때 1.000만은 무조건 갈 것 같고 "아바타"를 넘어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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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세이"가 흥행하는 이유가 뭘까요?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한 매력은 그림 딱지 칠(7세) 때부터 있었는데 청소년 기는 건들거리느라고 보지 못했고, 30-40대에는 성경 공부에 빠져 막연히 무당을 멀리해야 하는 것처럼 금기시했던 탓도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무비판으로 성공 공부를 시작했던 탓에 신앙에 올인할 수 있었으니 이 역시 후회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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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신화(상상계)라는 것이 인간의 생각이 반영됐기 때문에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것(상징계/실재계)이고, 인문학의 보고라는 차원에서 예주에게 만화책 "그리스 로마 신화" 전권을 사준 것은, 내가 작정하고 얼리어답터를 행한 일과 더불어서 몇 안되는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주가 입시를 하고 있어서 물어보지 못했지만 아비는 예주의 <오디세이> 감상평이 퍽도 궁금합니다. 예공! 너의 감상 평을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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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은 매일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은 없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닥쳐오지요. 문제의 사슬이 매 순간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겁니다. 문제가 없으면 염려가 사라질 것 같지만 그것은 마취에 불과합니다. 마취의 무감각에 빠지지 말자고 곱씹어 보지만 또 다른 문제가 염려를 부추깁니다. 따라서 이것은 인식론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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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 실존의 근본 구조가 <염려>라고 규정합니다. 하이데거의 <염려>와 산상수훈의 <염려>를 연결함으로써 인간 실존의 근본 구조가 <염려>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철학과 신학의 묘미가 흥미진진할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사유에서 <염려>는 인간 실존의 근본 구조입니다. "처해있음" 혹은 '내던져져 있음" "이해와 실존", "말과 빠져있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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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처해있음" 안에서 인간은 사물을 배려하고 다른 인간들을 심려합니다. 배려와 심려의 과정에서 인간은 말을 통하여 모든 사태를 현재 눈앞에 있는 것으로 데려옵니다. 깊은 것과 넓은 것은 모두 실용성을 위한 수단으로 재단 되고, 평균적 이해로 가라앉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역사에 대한 기대 역시 일상의 실용적 목적을 위해 평균적으로 해석되지요. 모든 것이 있는 것 같지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고 어디에나 있지만 거기엔 자기 자신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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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호기심, 잡담, 애매성의 세계이자 빠져 있음의 세계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불안이 찾아와서 "빠져있음"의 세계를 무의미의 세계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을 앞질러 보게 합니다. 죽음에 직면한 인간은 자신의 본래적 실존을 발견합니다. "빠져있음"의 세계가 본래적 가능성의 세계로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비본래적 실존에서도 염려는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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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염려의 종류가 변화되는 것일 뿐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염려는 벗어나야 할 인식론적인 대상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인간의 실존을 사로잡고 있는 존재론적 근본 구조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마 6장에서 염려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가? 그것을 요약하면 "그러므로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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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홥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도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느님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31)" 여기까지가 예수가 비본래적 실존에 관해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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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곧바로 본래적 실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33)" 비본래적 실존을 가리키는 의식주의 문제와 본래적 실존을 가리키는 하나님 나라의 문제는 예수에게서 양방향으로 갈라집니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존재와 시간>을 집필할 때, 두 실존의 대비를 기독교 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했다는 주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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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초대 교회의 삶으로부터 차용되었든 산상수훈으로부터 차용되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문제의 핵심은 다른 곳에 있어요. 예수의 말에서 신의 나라는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그것은 높은 산이 낮아져서 이리 와 어린 양이 함께 사는 나라이며, 가난한 자 병든 자, 고통 속에 빠진 자, 억압받는 자, 사회 중심부에서 추방된 자, 법률의 보호 밖에 있는 자 등이 대접받는 나라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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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예수의 아버지가 원하는 신의 나라이자 신의 정의입니다. 그렇다면 신의 나라와 신의 정의를 구하는 본래적 실존을 발견했다고 해서 염려는 사라지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문제의 해답은 염려에 대한 예수의 마지막 말에서 찾아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낱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 이것은 지금까지 염려에 관해 말했던 예수의 모든 말을 해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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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이 전체를 뒤집는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권고로 시작했지만, 마지막 결론은 하루의 염려는 하루로 충분하다고 하는 권고로 끝이 납니다. 얼마나 인간의 삶에 염려할 것이 많으면 예수는 하루의 염려는 하루로 족하고, 내일의 염려는 내일 하라고 했을까? 그렇다면 예수의 삶에는 염려가 없었을까? 나는 그가 어떤 인간보다 더 많이 염려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의식주 문제에 대하여는 염려를 적게 했지만, 신의 나라와 신의 정의를 위해서는 어떤 인간보다 많은 염려를 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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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의 종류가 다르지 염려로부터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예수 역시 한 인간으로서 염려했고 죽을 때까지 신의 나라와 정의를 위해 염려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염려했고 죽을 때까지 신의 나라와 신의 정의를 위해 염려합니다. 모든 인간은 염려하면서 자신의 삶을 영위할 것입니다. 그러니 "살아있는 곳에 염려가 있다는 것"은 삶의 진리입니다. 때때로 종교는 '나를 믿으면 내가 염려를 제거해 주겠다"라고 하지만 예수는 이런 약속은 애당초 말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은 무서운 기만이자 마취입니다. 종교는 마약을 주지만 진리는 염려에 직면하게 한다는 것 아닙니까? 어쩌라고.
2.
염려는 사라지는가, 아니면 더 가치 있는 염려로 변하는가? 에스더와 하동관 설렁탕 약속을 해놓고 내가 먼저 취소했습니다. 내일 국가 건강검진 일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주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오늘은 모의고사를 치르는 날이라 정신이 없다고 합니다. 별것 아닌 일상처럼 보이지만 묘하게도 그 안에 인간의 실존이 고스란히 들어 있습니다. 건강을 염려하고, 딸을 염려하고, 약속을 염려하고, 내일을 염려합니다. 하나를 처리하면 다른 하나가 나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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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문제를 해결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라기보다 어쩌면 염려의 대상을 끊임없이 바꾸면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과 예수의 산상수훈이 뜻밖의 장소에서 만납니다. 하이데거에게 염려(Sorge)는 걱정거리가 많다는 심리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방식 자체입니다. 우리는 이미 선택하지 않은 시대와 몸과 가족과 환경 속에 던져져 있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며, 동시에 눈앞의 사람과 사물에 관계하면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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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언제나 이미 무엇인가를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염려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것은 인간에게서 인간의 존재방식을 제거하겠다는 말과 비슷해집니다. 문제는 염려 그 자체보다 염려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일상 속에서 인간은 먹고사는 문제와 타인의 평가, 돈, 성공, 건강, 관계에 붙잡힙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인(das Man)’의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남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남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며,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성 속에서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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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나 ‘사람들’은 있지만 정작 ‘나’는 없습니다. 염려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염려가 익명의 세계에 점령당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불안이 찾아옵니다. 불안은 반드시 나쁜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붙들고 있던 일상의 의미망을 흔들어버립니다. 돈도 명예도 관계도 결국 나 대신 죽어줄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하이데거에게 단순한 생물학적 종료가 아니라 나의 삶을 아무도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가능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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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비본래적 삶에서 본래적 삶으로의 전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의 예수도 놀랍도록 비슷한 질문을 던집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걱정하지 마. 하나님이 다 해결해 줄 거야”라는 종교적 진정제로 읽으면 산상수훈은 너무 얕아집니다. 예수는 염려 자체를 제거하기보다 염려의 질서를 뒤집고 있기 때문입니다.“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한 문장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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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고 입을 것인가에서 어떤 세계가 옳은 세계인가로 질문이 이동합니다. 나의 생존에서 타자의 생존으로, 소유에서 정의로, 자기보존에서 하나님 나라로 염려의 방향이 이동합니다. 따라서 하이데거와 예수를 연결할 때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염려하지 않는 인간’이 아니라 ‘다르게 염려하는 인간’입니다. 다만 여기에서 두 사람을 너무 빨리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이데거의 본래성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앞질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떠맡는 실존론적 결단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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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예수에게 결정적인 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의 질문이 “나는 어떻게 나 자신의 가능성을 떠맡을 것인가?”라면 예수의 질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너는 무엇을 위하여 너 자신을 내어놓을 것인가?” 그래서 “하이데거가 본래적·비본래적 실존의 대비를 기독교 신학에서 가져왔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는 표현은 조금 완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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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와 아우구스티누스, 루터, 키르케고르 등이 하이데거의 실존 분석에 중요한 배경을 제공한 것은 분명하지만, 산상수훈의 구조가 그대로 『존재와 시간』의 본래성·비본래성으로 옮겨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둘 사이의 닮음과 결정적인 차이를 동시에 보는 편이 철학적으로 훨씬 재미있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 말씀은 앞의 “염려하지 말라”를 단순 반복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인간에게 염려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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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내일을 오늘로 끌어와 오늘과 내일을 동시에 살아버리는 것입니다. 오늘의 고통만으로도 오늘은 충분히 무겁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기술이라기보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가 오늘을 식민지화하지 못하게 하는 삶의 태도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는 말씀에는 인간의 시간성을 존중하는 놀라운 현실주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자신은 염려하지 않았을까요? 겟세마네를 생각하면 그렇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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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죽음을 앞두고 괴로워했고 제자들을 걱정했으며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울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가 무감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괴로워했는가입니다. 자기보존의 염려보다 하나님 나라와 타자의 고통 때문에 더 깊이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을 “예수를 믿으면 걱정이 사라진다”는 식으로 읽는 것은 위험합니다. 신앙이 불안을 제거하는 마취제가 되는 순간 종교는 현실을 견디게 해주는 대신 현실을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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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종교는 마약을 주지만 진리는 염려에 직면하게 한다”는 마지막 명제 역시 한 번 더 뒤집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교가 언제나 마약인 것도 아니며 염려가 언제나 진리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가 요구하는 신앙은 염려의 제거가 아니라 염려의 전환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무엇을 먹을까에서 누가 굶고 있는가로. 내가 안전할까에서 누가 버려져 있는가로. 내 미래가 어떻게 될까에서 어떤 미래가 정의로운가로. 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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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면 하이데거의 Sorge와 예수의 “염려하지 말라”는 서로를 비추면서도 끝내 갈라집니다. 하이데거는 염려를 통해 인간을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 앞으로 데려가지만, 예수는 인간을 자기 자신 너머의 타자와 하나님 나라 앞으로 데려갑니다. 그래서 에스더와의 설렁탕 약속을 취소한 것도 어쩌면 염려 때문입니다. 밝히지 않았지만 약속의 순서를 바꿀 이유가 존재할 것입니다. 예주의 모의고사가 끝났다는 말을 듣고 “차분해지면 목소리 한번 들려주시라”고 한 것도 염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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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염려들은 반드시 제거해야 할 병리적인 찌꺼기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사람을 나의 염려 안으로 받아들이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문제는 “어떻게 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것인가?”가 아닙니다. “나는 오늘 무엇을 염려하며 살 것인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나의 염려는 나만을 향하고 있는가, 아니면 타자와 하나님 나라를 향해 열리고 있는가?” 살아 있는 동안 염려는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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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신앙은 염려 없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염려할 가치가 있는 것을 발견한 인간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일의 염려까지 오늘 짊어지지는 말되, 오늘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과 오늘 이루어야 할 정의만큼은 외면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산상수훈이 말하는 ‘오늘을 사는 법’이며, 하이데거의 염려를 통과한 뒤에도 여전히 신학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일 것입니다.
2026.9.4.fri.앙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