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씨의 시조 9 성주이씨(星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성주 이씨((星州李氏)의 시조(始組)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 제 56대 왕 재위기간 924~927) 때 재상(宰相)을 지낸 이순유(李純由)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는 아우 돈유(敦由)와 더불어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마지막을 지켜본 충신으로 경순왕이 고려(高麗)에 항복하고 손위(遜位)하자 마의 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천년(千年) 사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국(救國)의 방책을 기도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왕 건(王 建)은 순유의 재주와 기량을 흠모하여 벼슬할 것을 권유했으나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하여 거절하고 이름까지도 극신(克臣)이라 고쳐 경산(京山 : 지금의 성주면 경산동)으로 옮겨 살았다. 그 절의에 감복한 태조 왕건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 틀림없다”하고는 향직(鄕職)의 우두머리인 호장(戶長)으로 삼았다. 그로부터 후손들은 그 지방에 살며 대대로 호족(豪族)을 이루었고, 순유의 12세손 장경(長庚)이 크게 현달(顯達)하여 가세(家勢)를 크게 일으켰다. 고려 고종(高宗 : 제 23대 왕, 재위기간 1214~1260) � 그의 어머니가 꿈에 문창성(文昌星)이 경산(京山)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그를 낳았는데, 장경은 장성함에 따라 도량과 재주가 뛰어났다. <밤마다 이슥토록 임금님을 생각하니(夜夜相思到夜深), 기우는 달만 님과 나를 비추이네(洞來殘月兩鄕心), 이 원한을 풀어 줄 사람 없어(比時寬俍無人解), 외로이 산정에 기대어 눈물 흘리네> 그후 단종이 영월(寧越)에서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매일 박유산 꼭대기에 올라가 통곡을 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성주 이씨 중에서 가장 화려한 인맥을 형성한 문열공(文烈公) 조년(兆年)은 충혜왕(忠惠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올라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포(鮑)는 광정대부(匡正大夫)로 도첨의평리(都僉議評理)를 역임했다. 1326년 (충숙왕 13) 19세로 문과에 급제했던 인복(人復)은 어려서부터 백이정(白이正)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주자학(朱子學)에 밝았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문장이 탁월하여 사은사(謝恩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와서「고금록(古今錄)」을 편수했고,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로 목은 이 색(李 穡)과 함께「금경록(金鏡錄)」을 증수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 창업(朝鮮創業)에 공을 세웠던 직(稷 : 평리 인민의 아들)은 개국 3등공신(開國三等功臣)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고, 제2차 왕자의 난 때 방원(芳遠 : 태종)을 도와 좌명 4등공신(左命四等功臣)이 되었으며, 대제학(大提學)을 거쳐 판사평부사(判司評府事)로서 왕명을 받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 동활자(銅活字)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뛰어난 문장으로 시명(詩名)을 떨쳤던 그는 1411년(태종 11)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진봉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세종(世宗) 초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순충좌명개국일등공신(純忠佐命開國一等功臣)으로 흥안군(興安君)에 봉해졌던 제(濟 : 성산군 인립의 아들)는 이성계의 셋째 딸인 경순공주(慶順公主)와 혼인했고, 왕자(王子)의 난 때 태조비 신덕왕후의 구명 소청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당했다. 남편이 죽자 경순공주는 아버지인 태조 앞에서 울면서 삭발하고 비구니(比丘尼)가 되어 절로 들어갔다. 세종 때 병조 판서(兵曹 判書)를 역임했던 발(潑 : 성산군 인립의 아들, 제의 아우)의 현손(玄孫) 항(恒)은 일찍부터 무사(武士)가 되는 것일 꿈이어서 무예(武藝)를 익히다가, 백부(伯父)의 꾸지람을 들은 것을 계기로 각성하고 30세에 이르러 박 영(朴 英)의 문하로 들어가 학문을 닦아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명망이 높았으며 <호남오현(湖南五賢)>의 으뜸으로 추앙받았다. 어느날 말 위에서 책을 들고 생각에 잠기다가 관원 행차의 벽제(辟除 : 존귀한 사람의 행차 때 여러 사람의 통행을 금하는 것)를 범하여 종은 붙들기고 말만 가는데도 그는 깨닫지 못할 정도로 독실하게 글을 읽었다고 한다. 1566년(명종 2) 조정에서 학행이 뛰어난 선비를 뽑을 때 수석으로 천거되어 의영고령(義盈庫令)을 거쳐 임천 군수(林泉郡守)로 나갔으나 잘못 다스린다는 비방이 있자 곧 사직하고 어머니와 함께 태인(泰仁)에 은거(隱居)했는데, 전라도(全羅道)로 감사(監司) 나간 사람은 으레가 그를 찾아보는 것이 예의가 되었을 만큼 학덕(學德)과 인망이 높았다. 태종(太宗)은 딸 숙혜옹주(淑惠翁主)와 혼인하여 성원위(星原尉)에 봉해졌던 정녕(正寧 : 영의정 직의 손자)의 아들 집(諿)은 성종(成宗)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관찰사(全羅道 觀察使)와 이조 참의(吏曹 參議)ㆍ부제학(副題學)ㆍ대사간(大司諫)ㆍ이조 판서(吏曹 判書)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나치게 청렴하고 사청(私請)을 거절하여 송(宋)나라 포증(包拯)이 법관으로서 사정(私情)이 없었기에 지옥의 염라대왕에 비유하여 붙여졌던 별칭인 <포염라(包閻羅>로 불리었다. 대사헌(大司憲) 언충(彦忠)의 증손(曾孫) 광적(光迪)은 삼조(三朝 : 효종ㆍ현종ㆍ숙종)에 걸쳐 60년 간이나 입사했던 명신(名臣)으로 90세에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며, 영의정직(稷)의 현손(玄孫) 충건(忠楗)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1515년 (중종 10) 문과에 급제, 이조 정랑(吏曹 正郞)을 지냈고 호당(湖當)에 뽑혀 문명(文名)을 떨쳤다. 그의 아우 문건(文建)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죽게 되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중형(仲兄)인 충건(忠楗)과 함께 조문하고 통고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대윤(大尹) 일파로 지목되어 성주(星州)에 유배되었다. 특히 그는 성품이 순후하고 청백하기로 유명했으며 글씨에 뛰어났었고, 당대의 석학(碩學) 이 황(李 滉)ㆍ조 식(曺 植)ㆍ이 이(李 珥) 등과 응답(應答)한 내용을 엮은「묵휴창수(黙休唱酬)」가 전해진다. 그 밖의 인물로 연산군(燕山君)이 그의 가기(歌妓 : 노래 잘하는기생)를 위해 가시(歌詩)를 지어 바치라고 했을 때 최초로 거절하고 성덕(聖德)을 우려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자건(自建)은, 이것이 탈이 되어 곤장을 맞고 선산(善山)으로 유배당했다. 그 죄상으로 보아 복직이 가망없다고 생각한 선산의 수령은 군졸을 데리고 가서 자건의 우소(寓所)를 포회하고는 그를 묶어서 끓어 앉히곤 직접 매질까지 하였다. 그후 자건이 황해 감사(黃海 監司)가 되었을 때 이 선산의 수령은 안악 군수(安岳 郡守)로 있다가 그 저보(邸報)를 보고 수령직을 사임하려 하자 자건은 안악으로 찾아가 잘 달래어 머물러 있게 했고, 치산(治山)에 소홀하여 무척 가난하게 살면서 녹미(祿米)를 아껴 조금씩 술을 빚어먹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고 한다. 구한말에 와서는 조선 이학(理學)의 6대가(六大家)로 불리웠던 한주(寒州) 진상(震相)이 3ㆍ1운동 때 만국평화회의에 연판장을 찍어 그의 문인(文人) 김창숙(金昌淑)으로 하여금 해외에 부치게 하였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대구 형무소에서 재판을 받을 때 재판정에서 “구형(求刑)은 너희들(日本)이 할 것이니 내가 알 바가 아니나 나에게는 공소할 곳이 없구나”라고 발언하였다고 한다. 제국신문사 사자을 지낸 종일(種一)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손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고 옥고를 치루었고, 조선국문연구회(朝鮮國文硏究會) 회장이 되어 한글 맞춤법 연구에 이바지한 공으로 대한 민국 건국공로훈장을 수여받아 학문(學文)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이니 성주 이씨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회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7,251가구, 153, 14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준이씨 성준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24가구 2,16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수안이씨(遂安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수안 이씨(遂安李氏)의 시조(始祖) 이견웅(李堅雄)은 고려 태조(太祖)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삼중대광태사(三重大匡太師)에 이르렀으며, 후손 연송(連松)이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고「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전하며, 수안(遂安)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아 후손들이 그 곳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수안(遂安)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견웅(堅雄)의 손자(孫子) 빈(彬)이 사공(司空)을 지냈고, 충렬왕 때 판례빈시사(判禮賓寺事)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한 연송(連松)은 추충보정공신(推忠輔靖功臣)으로 삼중대광태사 평장사(三重大匡太師平章事)에 이르렀고 수안군(遂安君)에 봉해졌다. 판삼사사(判三司事) 수산(壽山)의 아들인 염(恬)은 고려에서도 벼슬을 지냈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된 후에는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특히 정한(廷翰)의 아들 시항(時恒)은 성품(性品)이 고결(高潔)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고,「화은집(和隱集)」을 저술하여 명성을 날렸고, 독립운동가로 크게 활약한 준식(俊植)은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수안 이씨(遂安李氏) 가문을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안 이씨(遂安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3,541가구, 14,0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원이씨(水原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수원 이씨(水原李氏)의 시조(始祖) 이자송(李子松)은 문무공(文武公) 천일(天一 : 공주 이씨의 시조)의 34세손으로 전한다. 그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도찰리사(道察理使)를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로 원(元)나라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와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고, 단성보조공신(端誠輔祚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그후 우왕(禑王) 때 개경 유수(開京留守)로 왕의 방탕함을 간(諫)하다가 한 때 파직되기도 했으나 다시 등용되어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에 봉해졌다가 사망 후 수성(隨城 : 수원의 별호) 부원군(府院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자송(子松)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수원(水原)으로 삼아 수원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며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자송(子松)의 아들 장길(長吉)이 조선(朝鮮)에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손자 인기(仁奇)가 판밀직사(判密直事)를, 증손(曾孫) 인수(仁壽)는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그외 호조 참판(戶曹參判) 효신(孝信)과 공조 참의(工曹參議) 령(嶺)이 유명하였고, 원휘(元輝)는 벼슬이 판서(判書)에 이르렀다. 또한 영석(永碩)과 징명(徵明)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휘백(輝白)은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수원 이씨(水原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424가구, 6,37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순천이씨(順天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순천 이씨(順天李氏)의 시조(始祖) 이사고(李師古)는 고려에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승평백(昇平伯)에 봉해졌으며, 그의 후손들이 순천(順天)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게 되면서 본관(本貫)을 순천(順天)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사고(師古)의 아들 양소(陽昭)가 일찍이 정몽주(鄭夢周) 문하에서 글을 배워 문과에 급제, 사예(司藝)를 거쳐 군수(郡守)를 역임했다. 특히 그는 이방원(李芳遠)과 곡산(谷山) 청룡사(靑龍寺)에서 함께 학문을 닦아 교분이 두터웠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태조(太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거절했다. 태종(太宗)은 옛 벗인 그의 의절(義節)을 가상히 여겨 그가 은거(隱居)해 있는 산을 청화산(淸華山)이라 부르고 저택을 하사했으며, 그가 죽은 후에는 장지(葬地)까지 지정해 주었다고 한다. 양소(陽昭)의 아들 두 형제도 모두 벼슬에 나갔는데, 맏아들 극문(克文)은 부사(府使)를, 차남 극충(克忠)은 현령(縣令)을 지냈으며, 손자 눌(訥)과 성(誠)도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후손 정조(鼎祚)․영복(永福)․영기(永祺)가 현감(縣監)을 역임했고, 덕구(德耈)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태진(泰鎭)은 참판(參判)을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 이씨(順天 李氏)는 남한(南韓)이 총 1,064가구, 4,64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평이씨(新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신평 이씨(新平李氏)는 백제(百濟) 때 신평 호장(新平戶長)을 지낸 이인수(李仁壽)의 후손으로 고려(高麗)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덕명(德明)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신평(新平)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덕명(德明)의 아들 환(桓)이 좌복야(左僕射)를 역임했으며, 그의 맏아들 임(稔)은 시중(侍中)을, 차남 비(秘)는 시랑(侍郞)을 지냈다. 덕명(德明)의 7세손인 첨(詹)은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에 올라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벼슬이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고, 문장에 능하여「저생전(楮生傳)」과「삼국사략(三國史略)」을 저술하였다. 부제학(副提學)에 오른 가종(可種)과 효자(孝子)로 이름난 상(祥)은 거(蘧)와 함께 신평 이씨(新平李氏) 가문을 빛냈다. 중국어에 정통했던 거(蘧)는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로 있을 때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將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형조 참의(刑曹參議)․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를 걸쳐 관찰사(觀察使)에 이르렀다. 또한 원로(元老)는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으로 신양군(新陽君)에 봉해져 녹권(錄券)을 받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어 명망(名望) 높은 가문으로 널리 알렸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평 이씨(新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6,983가구, 29,28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산이씨(牙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아산 이씨(牙山李氏)의 시조(始祖) 주좌(周佐)는 소판공(蘇判公) 거명(居明 : 경주 이씨의 시조)의 5세손이며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승훈(承訓)의 둘째 아들이다. 주좌(周佐)는 고려에서 형부 상서(刑部尙書)․판어사대사(判御史臺事)를 지냈고 사공(司空)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후손 서(舒)가 원종(元宗) 때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벽상공신삼중대광(壁上功臣三重大匡)으로 아주백(牙州伯)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아산(牙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인물을 보면 옹(邕)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옹의 맏아들 천계(天桂)가 감찰(監察)을, 차남 천기(天杞)가 감정(監正)을 역임하였다. 또한 천계(天桂)의 아들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원생(原生)과 정언을 역임한 원명(原明)․원항(原恒) 3형제가 유명했고, 손자 종신(宗信)은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용(聳)의 맏아들 효반(孝盤)은 벼슬이 도첨의(都僉議)에 이르렀고, 차남 시반(時盤)은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올랐다. 그밖의 후손중에서는 석번(碩蕃)이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으며, 홍(泓)과 대춘(大春)은 절제사(節制使)를 역임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아산 이씨(牙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2,470가구, 10,40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이씨(安東李氏) 안동이씨 시조는 미상이다. 인물로 조선 영조조에 이두화(李斗華)의 자(子) 이경수(李景洙)는 문과에 급제했다.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195가구 3,88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산이씨(安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안산 이씨(安山李氏)의 시조(始祖)는 1231년(고종 18) 몽고(蒙古) 원수 살리타이(撒禮塔)가 군사를 거느리고 함신진(咸新鎭)을 거쳐 철주성(鐵州城)을 침략할 때, 판관(判官)으로 성(城)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한 용장(勇壯) 이희적(李希勣)으로 그 후손들이 누대(累代)에 걸쳐 안산(安山)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안산(安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을 대표하는 인물로는 희적(希勣)의 7세손 보림(寶林)이 지제고(知制誥)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익룡(翼龍)은 간의 대부(諫議大夫)를 역임하여, 정언(正言)을 지낸 경흠(敬欽)과 함께 명망높은 가문으로 이르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외 판관(判官)을 지낸 후적(厚績)과 부정(副正)을 역임한 인석(仁碩), 참판(參判)을 지낸 난중(蘭仲)은 가문(家門)을 더욱 빛냈고, 화가로 이름난 의양(義養)은 특히 산수화(山水畵)에 능하여「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와「강남우후도(江南雨後圖)」를 남겼다. 군수(郡守)를 지낸 한철(漢喆)은 아버지 의양(義養)의 대를 이어 산수(山水)․화조(花鳥)․인물(人物) 등 그림에 능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산 이씨(安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224가구, 4,9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성이씨(安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안성 이씨(安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중선(李仲宣)은 고려에서 경군호장(京軍戶長)을 지냈고 장민(長民)의 공(功)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올라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에 이르렀으며 백하(白夏 : 안성의 고호) 군(君)에 봉해졌다. 상계(上系)가 실전(失傳)되어 정확한 계대(系代)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안성(安城)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 중선(仲宣)의 아들 영(永)은 아버지가 죽자 영업전(營業田)을 이어받고자 하여 서리(胥吏)가 되었는데, 문서를 정조(正曹)의 주사(主事)에게 줄 때 절을 하지 않아 주사가 성을 내며 꾸짖었다. 그는 즉시 그 문서를 찢어버리며 말하기를 “내가 과거를 하여 조정에서 벼슬을 할 수 있는데 어찌 너 따위에게 머리를 숙이랴”하고 학문에 힘써 과거에 올라 사관(史館)의 대간(臺諫)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갔다. 1122년(예종 17) 이자겸(李資謙)이 한안인(韓安仁)을 죽일 때 영(永)이 매부였던 관계로 연좌(緣坐)되어 진도(珍島)로 귀양갔다가, 어머니와 자식들이 노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술을 한 말이나 마셔 분사(憤死)했다고 하며, 이자겸이 쫓겨난 뒤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추증되었다. 희(禧)는 공민왕때 명경과에 급제하였으며 양광도 안무사(楊廣道按撫使)로 왜구방어에 큰 공을 세웠고 후에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며, 우왕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평왜 대장군(平倭大將軍)이 된 경(埛)은 왜병(倭兵)을 격파한 공으로 추충정난 보조공신(推忠靖難補祚功臣)에 오르고 안성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는데, 이로써 명망있는 안성 이씨(安城李氏)가문은 더욱 빛났다. 그외 인물(人物)로 좌사낭중(左司郎中) 극엄(克儼), 병부상서(兵部尙書) 유(裕),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인(惟仁)과 함께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 숙번(叔蕃)이 당대에 널리 이름을 떨쳤다. 숙번(叔蕃)은 경(埛)의 아들로 1393년(태조 2) 문과에 올라 여러 벼슬을 거쳐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正社功臣)에 올랐고, 뒤에 안성 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항혁(恒赫)은 학자(學者)로 이름을 날려 임진왜란 때 순절한 전(㙉)과 더불어 충절(忠節)의 안성 이씨(安城李氏) 가문(家門)을 더욱 유명하게 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성 이씨(安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4,258가구, 17,54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악이씨(安岳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안악 이씨(安岳 李氏)의 시조(始祖) 이 진(李 震)은 중국(中國) 농서(隴西) 사람으로 기원전 108년(한무제 원봉 3)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이 한(漢)에 불공(不貢)하여 무제(武帝)가 무장(武裝)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왕검성(王儉城)을 토평(討平)할 때 부장(部將)으로 출전하여 공(功)을 세워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낙랑후(樂浪候)에 봉해지고 낙랑태수(樂浪太守)로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대명(大命)을 완수했다. 그후 그의 증손(曾孫) 천보(天寶)는 한(漢)나라 선기사 대장군(善騎射大將軍)으로 흉노토벌(匈奴討伐)에 공(功)을 세워 양산후(楊山候)로 봉해져서 낙랑태수(樂浪太守)를 지냈으므로 양산 이씨(楊山 李氏)로 칭관(稱貫)하였다. 그뒤 낙랑(樂浪)이 망하자 후손들은 고구려(高句麗)․신라(新羅) 등지로 이거(移居)하며 대(代)를 이어오다가 후손 극규(極奎 : 중시조)가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양산백(楊山伯)에 봉해지고 안악(安岳)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므로 그 곳에서 정착 세거(定着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안악(安岳)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해왔다.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극규(極奎)의 10세손 위(魏)가 고려 때 삼중대광 문하시중(三重大匡門下侍中)으로 양산백(楊山伯)에 봉해졌고, 후손 견(堅)은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신 부(辛 富)와 함께 분전하다가 장렬하게 순절하여 가문(家門)을 빛냈다. 관(灌)의 아들 계을(桂乙)이 고려 말에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 역임한 후 고려가 망하자 울분을 참지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그의 아들 신(晨 : 해명 양소)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절의(節義)를 지켰다. 한편 세종(世宗) 때 안악 군수(安岳郡守)를 지낸 구관(九寬)은 뒤에 벼슬이 예조 참판(禮曺參判)에 이르렀고 만년에 충북 괴산으로 낙향하여 터를 잡았다. 그밖의 인물로는 중종반정(中宗反正) 공신(功臣)에 오 른 심(심)이 하원군(河原君)에 봉해졌고, 희순(希舜)은 남원부사(南原府使)를 역임한 수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호당(湖堂)에 들어가 문명(文名)을 떨쳤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화(禍)를 입었다. 임진왜란 때 옥천(沃川)에서 왜적을 격파했던 잠(潛)은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다가 혈전(血戰) 끝에 장렬하게 순절했으며, 응순(應順)은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고 오위도총관(五衛都摠管)에 올라 익흥군(益興君)에 봉해져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오른 정립(挺立)과 함께 이름을 떨쳤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안악 이씨(安岳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980가구, 7,97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양이씨(安養李氏) 안양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27가구 1,05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안평이씨(安平李氏) 안평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47가구 1,24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는 성본으로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동이씨(陽東李氏) 양동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636가구 2,053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양산 이씨(梁山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양산 이씨(梁山李氏)의 시조(始祖) 이만영(李萬英)은 고려말(高麗末) 에 문과에 등제했으며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후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인천백(仁川伯)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전생(全生)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고 양산(梁山)에 정착 세거(定着世居)했으며, 손자(孫子) 징석(澄石)․징옥(澄玉)․징규(澄圭) 3형제 중 징석(澄石)이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세조(世祖)의 왕위 찬탈을 도와 좌익 3등공신(左翼三等功臣)에 올라 양산부원군(梁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양산(梁山)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징석(澄石)의 동생 징규(澄圭)가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지냈고, 징석의 아들 팔동(八仝)은 현령(縣令)을 역임했다. 그외 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한 윤조(胤祖)와 금산 군사(金山郡事)를 지낸 윤환(胤環)이 뛰어났고, 군자감 주부(軍資監主簿) 종(種)과 효자(孝子)로 이름난 우춘(遇春)이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성춘(聖春)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산 이씨(梁山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100가구, 4,51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양성이씨(陽城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양성 이씨(陽城李氏)의 시조(始祖) 이수광(李秀匡)은 송(宋)나라에서 금오위대장군 상주국(今吾衛大將軍上柱國)에 특진되고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보국(三重大匡輔國)으로 양성군(陽城郡)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본관(本貫)을 양성(陽城)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훌륭한 인재(人材)를 많이 배출시켜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시조의 아들 신정(臣靖)이 고려조에서 이부 상서(吏部상書)를 역임했고, 손자(孫子) 원의(元義)는 승지동정(承旨同正)에 올라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밀직사사에 올라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왔던 영주(英柱 : 시조의 증손)의 아들 천(梴)은 충숙왕(忠肅王)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과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고 개성윤(開城尹)에 올라 양성군(陽城郡)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5형제가 현달(顯達)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양성군(陽城郡) 천(梴)의 맏아들 수방(守邦)은 도첨의 평리(都僉議評理)와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를 지내고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양성군(陽城郡)에 봉해졌고, 그의 아우 수인(守仁)은 고려가 망하자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절의를 지키다가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지켰다. 한편 병조 참판(兵曹參判)을 지낸 한(澣)의 아들 맹상(孟常)은 태종(太宗) 때 강릉 판관(江陵判官)을 거쳐 세종조에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을 지내고 벼슬이 누진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이 이르렀으며, 슬하에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오자등과(五子登科)〉의 영예를 누렸다. 한편 해주 목사(海州牧使) 사근(思謹)의 아들 온(蒕)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해주(海州)에 은거(隱居)하며 충절을 지키니 세인들이 화산처사(花山處士)〉로 일컬었고, 그후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고 적성군(赤城君)에 추봉되었다. 1435년(세종 7) 문과(文科)에 급제한 휘(徽 : 양성부원군 사검의 아들)는 단종(端宗) 때, 이조 좌랑(吏曹左郞)을 지내고 좌익3등공신(左翼三等功臣)에 책록되었으며,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단종복위(端宗復位)를 도모했다가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피화되어 순절하였고, 진사(進士) 백근(百根)의 아들 정영(廷英)은 음죽 현감(陰竹縣監)을 역임한 후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록되고 문행(文行)으로 가문을 빛냈다. 세종(世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세조(世祖)의 총애를 받았던 예(芮)가 뛰어났는데, 세조(世祖)가 발영시(拔英試)를 보인 뒤에 사은(謝恩)하던 날 사정전(思政殿)에서 잔치를 벌이고 어제시(御題詩) 한 수를 써서 여러 신하로 하여금 화답하게 하였다. 이때 예(芮 : 전지의 아들)가 시를 짓기를〈성덕을 읊으려고 일어서 춤추려니(歌詠聖德起舞), 하늘바람 소매에 불어 춤바람을 돕는 듯이(天風吹神助回旋)〉이라 하였더니 세조가 웃으면서 “내 일찍이 이 예를 오괴(迂怪)한 선비라 하였더니 이제 이 시를 보건대 호기가 만만하구나.”하고는 곧 나인으로 하여금 비파를 타서 그의 시를 노래하고 그에게 일어나 춤추게 했다고 「용재총화(慵齋叢話)」에 전한다. 성종(成宗) 때 박식(博識)하여 천재라고 일컬어졌던 승소(承召 : 적성건 온의 아들)는 세조 때 왕명으로「명황계감(明皇誡鑑)」을 한글로 옮겼고, 예학(禮學)․병학(兵學)․음양(陰陽)․율력(律曆) 등 여러 방면에 조예가 깊어 당대의 명문장가(名文章家)로 이름이 높았다. 그는 너그러운 인간관계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가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있을 때 한 낭관(郎官)이 날마다 술만 마시고 공무를 게을리 하였으므로 동료들이 그를 내쫓고자 판서인 승소에게 품위를 올렸다. 이에 승소는 크게 웃으며, 허 승(許 承)이 오랜 시일 동안 귀가 먹어 잘 듣지를 못했으나 장관은 차마 그를 내쫓지 않았다는 한(漢)나라 고사(故事)를 예로 들고, “지금 그 낭관이 항상 술에 취해 있으나 깨어 있을 때도 많으니 어찌 탓하랴.”라고 하였다. 증이조 참판 옥번(沃蕃)의 아들 세영(世英)은 평생에 한마디도 청탁을 한 일이 없는 유일한 도승지(都承旨)로, 성종(成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지평(持平)과 병조 정랑(兵曹正郞) 등을 지내고 춘추관의 편수관이 되어「성종실록(成宗實錄)」편찬에 참여 했으며 연산군(燕山君) 때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와 한성우윤(漢城右尹)․공조 참판(工曹參判)․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한 후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이르렀다. 나라법에 도승지(都承旨)는 정비(政批 : 벼슬을 임명할 때 임금의 결재를 받는것)에 참례하는 까닭에 청탁하는 일이 많은데, 세영이 너무도 청탁이 없으니 이조 당상(吏曹堂上)이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 미안하여 “공은 어찌 한 마디 청탁의 말도 하지 않느냐”고 하며 청탁을 권유하기 까지 했다고 한다. 부사직(副司直) 사종(嗣宗)의 아들 영남(英男)은 가문에 의맥(義脈)을 살린 인물로, 1584년(선조 17)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첨정(訓鍊院僉正)과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을 역임했고, 태안 군수(泰安郡守)를 거쳐 강계부 판관(江界府判官)에 전임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조방장(助防將)으로 명량해전(鳴梁海戰)에서 전공을 세운 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순절하여 선무원종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그밖의 인물로는 이순신의 휘하에서 나대용(羅大用)과 함께 거북선 제작에 참여하고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설(渫 : 언간의 아들)과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으로 활약했던 광익(光翼)․광주(光宙)가 유명했고, 판관(判官) 하(夏)의 아들 문령(文齡)은 율곡(栗谷) 이 이(李 珥)와 수계강론(修契講論)을 하여〈석촌존사(石村尊師)〉로 일컬어졌으며, 장사랑(將士郞) 대명(大鳴)의 아들 몽길(夢吉)은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文章)에 뛰어나 이월사(李月沙)․류필선(柳弼善) 등과 더불어〈낙중팔현(洛中八賢)〉으로 불리웠다. 구한말에 와서는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서소문(西小門) 밖에서 순교한 희영(喜英)과 송산정사(松山精舍)에서 후진을 양성하고「겸산집(謙山集)」과「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을 저술했던 병수(炳壽 : 홍구의 아들)가 이 준(李 儁)열사를 호송했던 능권(能權 : 정환의 아들)과 함께 의절(義節)과 도덕(道德)의 전통가문인 양성 이씨를 더욱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양성 이씨(陽城李氏)는 남한(南韓)에 총9,245가구, 38,3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강이씨(驪江李氏) 여강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2,509가구 9,50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주 이씨(驪州李氏)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本貫由來)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고려(高麗)에서 인용교위(仁勇校尉)를 지낸 이인덕(李仁德)을 시조(始祖)로 하는 파(派)와 낭중(郎中) 이윤수(李允수)를 시조로 하는 파, 진사(進士) 이세정(李世貞)을 시조로 하는 파 등 3파가 있으며, 이들은 여주(驪州)에 세거(世居)하는 사족(士族)으로 여주를 관향(貫鄕)으로 하고 있다. 가문을 빛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고려 시대의 문인 백운거사(白雲居士) 규보(奎報)를 비롯하여 조선 초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언적(彦迪), 실학(實學)의 중조격인 학자 익(瀷), 종교운동에 헌신하다가 신유박해(辛酉迫海) 때 순교한 가환(家煥), 지리학의 선구자로서 한국의 지리서인 「택리지(擇里志)」, 일명「팔역지(八域志)」를 저술한 중환(重煥) 등이 있다. 이밖에도 공양왕(恭讓王) 때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거쳐 이조 판서(吏曹判書)를 지낸 행(行), 세조(世祖)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낸 몽가(蒙哥), 선조 때 형조․예조 판서․대사간 (大司諫)․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된 우직(友直) 등이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남한(南韓)에 총 15,288가구, 61,907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흥이씨(驪興李氏) 여흥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1,004가구 3,384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나지 않고 조선조 이후에 신설된 성본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연산이씨(連山李氏) 연산이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전국에 319가구 1,05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된 성본이다. 이 성본은 조선조(朝鮮朝)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에 기록된 성본이지만으로 시조, 연원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출처] 각성씨의 시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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