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을 향한 추구(A Quest for Godliness)"라는 제목의 책에서, 신학자 팩커(J.I.Packer)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얼마나 주님의 역사하심을 소망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팩커의 말에 따르면, "영국의 청교도들은 조금도 자만심 없이 십자군 운동을 벌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에 의지했던 일군들"이었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칭찬이 돌아오는 것이 당연스러워 보이는 경우에도 하나님께 찬양을 돌렸다는 겁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있는 재능과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쓰임을 받기 원했던 이유는, {이루어진 일}을 통해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면 20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모양은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가, 옛날 청교도들이 보여준 것과 똑같은 신실한 신앙생활을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미성숙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청교도의 삶은, 다름 아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도달한 성숙함에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바라고 소망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로마서 12장에 있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1절 말씀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어디에, 무엇에 열심을 품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로 인해 얻은 새 생명의 불씨를 조금 남긴 채 연기만 겨우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믿음의 불길이 그렇게 잦아 들어서 결국 새까만 잿더미로 변할 때까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보십시오. 바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피운 믿음의 불길을 꺼뜨리지 않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주를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열심을 품고 부지런히 주님을 섬긴다면, 우리의 믿음은 다시 불꽃을 피우고 다른 이들에게 빛과 열기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까운 곳에서부터 주님을 섬기는 일을 시작하실 수 있습니다. 교회에 우리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한 가지 일을 택해서,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십시오. 구체적인 섬김의 행동은 우리 믿음의 불꽃을 새롭게 피우지만, 헌신과 섬김이 없는 믿음은 곧 남아있는 믿음의 불씨마저 꺼뜨리는 일입니다. 오늘도 섬김의 불길이 만든 불씨로 인해, 영적으로 성숙함에 이르는 힘을 얻으며 생활하는 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당신의 믿음의 불꽃은 계속 타오르고 있습니까?
사 59:17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며 보수로 속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1. 이제 11월도 몇일 남지 않았습니다. 이 한 해도 이제 한 달 남짓 남았습니다. 힘써 부지런히 주의 일을 하며 달려온 이 해를 모두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도록 기도속에서 점검하며 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2. 카페지기의 거리에서 찬양하면서 영혼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사역을 하나님의 은혜속에서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부산교도소 선교사역도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어둠에 묶인 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사역을 위해 장비를 싣고 다니는 제 차량이 노후되어 (뉴카렌스 2006년식, 28만키로) 계속 어려움이 있습니다. 여러곳을 수리해야 하는데 수리비가 너무 많이 나와 손을 못대고 있습니다. 부산 교도소 선교사역은 장거리 이동이 필요합니다. 중고차라도 말썽 없이 장비를 싣고 다닐 수 있는 자량을 후원해 주실 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제목 : 말씀대로 행하는 믿음 본문 : 롬4:21,22
믿음이 신앙인의 내적 원리라고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인생관, 그리고 세계관에 이르는 삶의 전반적인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기초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그러한 삶의 원리는 반드시 행위로써 그 실제적인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1. 믿는 것과 행하는 것(약2:14-16)
1)경계해야 할 외식주의 아무리 좋은 약도 먹어야 몸을 건강하게 하는 약효를 나타내게 되는 법이며, 훌륭하고 완벽한 이념이나 사상도 그것이 구체화될 때 비로소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입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요 보배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형식과 외식이라는 옷을 입게 될 때 믿음은 그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맙니다. 유대 경건주의자들이 지닌 최대의 약점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다만 그들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그들의 경건이라는 것이 마음이나 생활과는 거리가 먼 겉모양을 꾸미는 데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식을 경계해야 하겠습니다.
2)유익을 끼치는 신앙 생활 주린 자에게 필요한 것은 말에 그치는 위로가 아니라 먹을 것을 주는 행동이며, 이것이 우리의 신앙 언어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많다고 구원에 참예 할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같은 밭에 심겨졌다고 모두가 알곡이 아니듯이 교회 안에는 생명이 없는 믿음, 구원에 이를 수 없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단히 자신을 돌아보고 점검하여 우리의 신앙이 자신에게는 물론 전체에게도 유익을 끼치는 것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2. 믿음으로 행하는 생활(약2:17-19)
1)의로운 믿음 사람은 세 가지 차원에서 의로워야 합니다.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로워야 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무근 일이든 내 자신이 알고, 믿고 행하는 일에 있어서 한 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즉 양심에 있어서는 하나님 앞에서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가 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신앙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의롭게 사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고 또한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의로운가에 대해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주의 말씀이 내게 이루어지는 생활이 곧 의로운 생활이며 의로운 믿음인 것입니다.
2)믿음이 강한 자의 태도 믿음이 강한 자는 믿음이 약한 자를 이해하고 그를 보호하여 귀한 믿음으로 자라나게 해야 합니다. 즉 믿음이 강한 자는 진리로 자유인이 되었지만 믿음이 약한 자를 위해 스스로 진리로 인해 누리는 자유를 절제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우상 제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며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질 것은 믿음이지 종교적인 금기나 가책이 아닙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비밀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강자의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못할뿐더러 충성스런 종이 될 수도 없습니다. 강자의 믿음은 확신을 소유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먹어야 하는지 안 먹어야 하는지 또는 이것을 해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하는지의 신앙의 자기 결단이 세워져 있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믿음의 행위는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는 것이어야 합니다.
3. 믿음과 행위의 일체성(약2:22)
1)행위의 원리로서의 믿음 야고보는 본문에서 믿음과 행함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에 대하여 그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라고 하는 사람에 대하여 야고보는 믿음과 행위는 따로 떨어진 별개의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믿음과 보이는 행위가 하나라는 것은 믿음이란 행위로써 그 실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이란 보이지 않지만 그것은 바로 외적 행위를 주관하는 내적 원리로 작용하고 있으므로 믿음은 영적이고 행위는 육적인 것이며 따라서 이 영적인 믿음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고(마7:21), 그렇게 될 때 믿음과 행위는 별개가 아닌 하나로 조화된다는 것입니다.
2)믿음과 행위의 일체성 행위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죽은 것이라고 할 때 행위는 곧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그것은 바로 믿음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행위는 신앙이 없는 불신자의 행위가 되고, 그것은 바로 죽은 행위인 것입니다(계3:1). 따라서 행위 없는 믿음 또한 죽은 믿음이므로 믿음과 행위는 역시 하나라는 것입니다. 행위의 원리로서의 믿음, 그리고 믿음의 표현으로서의 행위란 명제를 야고보는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받은 인간의 내적 실상과 외적 실상을 말하는 것으로 한 나무에 있어서의 뿌리의 열매와 같이 이 믿음과 행위는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것입니다(약2:22).
결론 성도들은 주일이나 혹 그 밖의 다른 모임에서 기독교회들이 채택한 신앙을 공적으로 고백합니다.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다만 문제는 신앙 고백이 단지 입술에만 붙어 있어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가장 힘있고 확실하게 나타내는 언어는 행동이며, 이 언어로 고백되어지는 신앙을 통해서 어떤 역사를 기대할 수가 있습니다. 말만 하고 행치 않는 신앙은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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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 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샬롬
오늘도 주안에서 성령의 도움으로 주님의 영광과 복음과 선교와 설교와 목회와 치유와 상담과 지혜와 능력과 성령의 도구로 쓰임받고 열매 맺게 하소서 샬롬
~감사합니다 ~샬롬~!!~ㅎㅎㅇㅇ
오늘도 하늘의 감사의 마음으로 축복합니다.
오늘도 함께해 주신 예수 사랑 목사님, 평안 장로님, 만경강 목사님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