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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9주간 월요일 2007/10/22
복음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21 그때에 13 군중 가운데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스승님, 제 형더러 저에게 유산을 나누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중재인으로 세웠단 말이냐?” 15 그리고 사람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아무리 부유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그의 재산에 달려 있지 않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떤 부유한 사람이 땅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었다. 17 그래서 그는 속으로 ‘내가 수확한 것을 모아 둘 데가 없으니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하였다. 18 그러다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지. 곳간들을 헐어 내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다 내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어야겠다. 19 그리고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쉬면서 먹고 마시며 즐겨라.′’ 20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21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오늘의 묵상
노미화(양양 조산초등학교)
![]() <어리석은 자야> (루가12,13-21)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어리석은 자란 그리스어로 아폴론(apholon)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현명하지 못한, 지각없는, 단순한, 어리석은, 무지한, 참 종교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허무한, 겉치례하는 이라는 뜻이다.
로마서에 보면 유다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알고 율법을 배워서 사리를 분별할 줄도 알고 눈먼 사람에게는 길잡이가 되고 어둠 속을 헤메는 사람에게는 빛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그리고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으므로 무식한 사람에게 지도자가 되고 철없는 자들의 스승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로마 2,17-20) 하느님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 스스로 하느님을 알고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어리석은 사람은 하느님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이요, "참 종교에 대한 지식이 결여된 사람이요",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다.
한 마디로 어리석은 자란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하느님인양 착각하고 섬기는 이들로서 우상을 섬기는 이다. 그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마치 자기 생명을 영원히 지켜 줄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다.
"불신자는 이렇지 않나니 이렇지 않나니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도다. 불신자는 심판 때에 버티지 못하리니 의인의 모임에서 죄인도 그러하리라."(시편 1,4-5) 어리석은 이들이 믿고 있는 우상들은 결국 심판 때에 버티지 못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 같은 것들이다.
어리석은 자가 섬기는 우상이란 무엇인가? 오늘 복음에서 비유로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어떤 부유한 사람의 땅이 많은 소출을 내었다."고 말했다. 땅이 소출을 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많은 소출을 내게 하신 것이다. 그리고 많은 소출을 낸 부유한 사람의 땅은 하느님의 것이지 자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부유한 사람은 땅에서 많은 소출을 내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하느님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만 재산을 모았다. 결국 이 부유한 사람은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산을 섬겼다. 재산이 자기 자신을 쉬게 해주고 먹이고 마시고 즐거움을 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느님 대신 재산을 섬긴 것, 그것이 우상을 섬긴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란 총체적으로 어리석게 살았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람은 그 동안 어리석은 말을 하고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고 어리석게 살은 것이다. 결국 영원한 것이 아닌 사라지고 마는 재산을 마치 영원한 것인양 섬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은" 인생을 산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누구인가? 재물에 자기 생명을 맡기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의존하는 사람이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었나이다... 천녀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같고, 한토막 밤과도 비슷하오니 당신이 앗아가면, 그들은 한 바탕 꿈, 아침에 돋아나는 풀과 같이, 아침에 피었다가 푸르렀다가, 저녁에 시들어서 말라버리나이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듯 가버리나이다. 날수 셀 줄을 알기를 가르쳐 주시어, 우리들 마음이 슬기를 얻게 하소서.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 89, 참조)
라고 기도한 것처럼 하느님께 의존하는 사람이요, 하느님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영원한 분이심을 알고 그분을 섬기는 사람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때로는 우상을 섬길 때가 많이 있다. 하느님이 아닌 재물을 또는 하느님이 아닌 자기 자신을, 하느님이 아닌 어떤 사람을, 하느님이 아닌 어떤 물건을, 하느님이 아닌 어떤 자리를 섬기는 경우가 있다. 결국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하느님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무엇을 청하고 어떤 일을 한다면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다.
우리가 어리석은 삶을 살지 않으려면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야겠고 어떻게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올바르게 섬기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상을 섬기는 경우는 대부분 하느님에 대한 무지함이 때문이다.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느님이 아닌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 즉 어리석은 삶에서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이 시간을 잘 사용해서 어리석은 사람에게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듣고도 계속해서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어리석은 사람일 것이다.
-유광수 신부-
<매일 저녁 되풀이해야할 고민 한 가지>
직장인들을 상대로 한 거짓말 조사 결과 이런 거짓말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출근하지 못할 것 같아요.” “거래처 좀 다녀올게요.” “차가 너무 막혀 출근이 늦었어요.” “집에 일이 있어 일찍 퇴근해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님이 갑자기 쓰러지셔서 병원에 갔다 오느라 늦었습니다.” “난 거짓말 같은 것 할 줄 몰라요.” 며느님들이 시어머님께 주로 하는 거짓말 Best 5도 있더군요. 5위: 저도 어머님 같은 시어머니가 될래요. 4위: 전화 드렸는데 안 계시더라구요. 3위: 어머님이 한 음식이 제일 맛있어요. 2위: 용돈 적게 드려 항상 죄송해요.
1위: 어머님, 벌써 가시게요? 한 며칠 더 계시다 가세요. 어르신들은 이런 거짓말을 많이 하신답니다. “내가 얼른 죽어야지!” 말은 그렇게들 하시지만 정말 두려운 것이 죽음입니다. 일생일대의 가장 큰 과제가 죽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녕 견디기 힘든 고통이기에, 또한 가장 큰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기에 사람들은 기를 쓰고 죽음을 피해 다닙니다. 그러나 죽음처럼 공평한 것이 또 없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부자건 거지건, 최고 권력자건 평민이건 대상을 가리지 않고 찾아옵니다. 피하고 싶더라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하는 손님이 죽음입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매일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이 잘 있으라는 말 한마디도 남기지 못한 채 순식간에 이 세상을 떠나가지만, 그 죽음이 적어도 내게는 아직 멀었으려니, 내게는 해당되지 않으려니, 착각하며 살아갑니다. 때로 죽음이 내가 매일 출입하는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각하지도, 준비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십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러면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가 되겠느냐?” 내 죽음이 올해 연말이라면, 이번 달 말까지라면, 아니면 오늘까지라면, 우리들 삶의 태도는 확연히 달라질 것입니다. 불안, 공포, 초조에 떨기도 하겠지만, 남아있는 생을 마무리하기 위해 나름대로 준비도 할 것입니다.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기도 할 것입니다. 이웃들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나? 아직 화해가 안 된 사람은 누구인가 돌아보기도 할 것입니다. 너무도 자기중심적으로, 이기적으로 살아왔던 지난날을 가슴 치며, 남아있는 시간동안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할 것입니다. 사실 성화(聖化)의 비결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매일을 내 생의 마지막으로 여기고, 매일 저녁 위와 같은 고민을 되풀이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주보의 우리성당 소식란을 보면 ‘성당 부지 구입 납부 현황’이 나옵니다. 사실 이 부분을 볼 때마다 답답함을 느낍니다. 특히 과연 내년까지 다 모여질 수 있을까 라는 생각과 구입 후에 필요한 리모델링비는 과연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한 답답한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주님, 저는 큰 욕심 없습니다. 제가 부자가 되고 높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세속적인 욕심이 없습니다. 단지 부지를 마련하고 리모델링까지만 잘 될 수 있도록 만 해주십시오.”
바로 그 순간 나의 이 기도와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 찬 기도의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꼭 돈 많이 벌게 해달라는 것, 높은 자리와 명예를 얻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 등의 기도만이 세속적인 욕심일까요? 어쩌면 지금 자신이 절박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님께 청하는 것 역시도 세속적인 욕심으로 가득 찬 기도는 아닐까요?
사실 돈이 너무 많아서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이 “주님, 돈 많이 벌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겠지요. 더 이상 높은 지위에 오를 곳이 없는 사람이 “주님, 저에게 높은 지위를 허락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사람이 대학합격에 대한 기도를 또 다시 하지 않을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바로 우리들의 기도는 지금 이 순간의 절박한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에는 본인 스스로 아니다 라고 말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만을 위한 욕심이 반드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언제나 함께 하신다는 강한 마음을 가지고 내 삶 전체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는 기도를 바칠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의하여라. 모든 탐욕을 경계하여라.”
부에 대한 욕심만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가지고 싶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욕심 역시 또 하나의 탐욕인 것입니다. 이렇게 계속 청하기만 하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복음의 맨 마지막 구절이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다.”
이제는 나의 필요에 따라서만 하느님을 찾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하느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청원기도가 아닌, 감사의 기도를 바쳐봅시다.
너는 특별하단다(김미희, ‘희망학교’ 중에서) 미시간 주 새기노에서 태어난 스티비 원더는 어렸을 때부터 보이지 않는 눈 때문에 외롭고 불우한 시절을 보냈다. 이 가난하고 앞 못 보는 소년에게는 아무도 친구가 되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비웃고 놀려 대는 아이들만 있었다. “야, 장님이 재수 없게 밖에는 왜 나왔냐?”
그러나 그의 장애가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해 준 계기가 있었다.
그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갑자기 교실에 쥐가 나타나서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여자 아이들은 비명을 질러 대며 책상 위로 올라갔고, 선생님과 남자 아이들은 쥐를 잡으려고 뛰어다니면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데 쥐가 순식간에 몸을 숨겨서 찾을 수가 없었다. 쥐가 교실 안에 있는 것을 알면서 그대로 수업을 다시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선생님이 스티비 원더에게 말했다.
“너는 보지 못하는 대신 남들보다 청력이 발달했을 거야. 그러니 귀를 잘 기울여서 쥐가 어디에 숨어 있는지 찾아내 보렴.”
순간 스티비 원더나 다른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눈도 보이지 않는 아이한테 귀의 감각만을 이용해서 쥐를 찾아내라니, 그러나 스티비 원더는 선생님의 말을 따랐고 마침내 쥐가 숨어 있는 곳을 찾아냈다. 선생님은 다시 말했다.
“봐라. 넌 우리 반의 어떤 친구도 갖지 못한 능력을 갖고 있어. 너는 보지 못하는 대신 특별한 귀가 있어.”
이 말은 어린 스티비 원더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그에게 장점이 있다고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의 꿈을 이렇게 비웃어 주었다.
“너같이 가난한 아이는 그렇게 될 수 없어!”, “너는 흑인이라서 안 돼!”, “너는 장님이라서 안 돼!”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남다른 청력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꿈을 키워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년은 11살에 모타운 레코드사 오디션에 합격하고, 12살에는 앨범을 발표하여 최연소로 당당히 빌보드 차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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