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온종일 잠자지 않는다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때와 장소에 어울리게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젠가 하리라 마음먹고 있다면 ‘지금’ 해야 합니다. 언젠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일이 있다면 ‘지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현재와 어울리는 삶입니다.
시간뿐 아니라 장소에도 어울리게 살아야 합니다. 몸은 성당에 있는데 마음은 집에 가 있다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곳에서는 기도해야 하고, 일하는 곳에서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핸들을 잡고서 정신은 엉뚱한 데 가 있다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지금’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지난 일을 후회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앞날을 걱정하느라 지금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룹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고, 장차 다가올 일도 미리 만날 수는 없습니다. 어제는 그랬더라도 오늘은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자유가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은 현재에 충실하려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는 말씀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 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실천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도 오래하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나름대로 고정된 틀이 있어 거기에 맞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해 수업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초임 때처럼 아이들 앞에서 떨지는 않지만 오히려 뻔뻔해진 것 같아 이것도 별로 좋은 일 같지 않다.
나는 하루 종일 교실에만 앉아서 수업하는 것이 힘들다. 그런 날이 이삼 일 지속되면 견딜 수 없다. 머리가 아프고 답답해 아이들과의 관계도 좋지 않게 된다. 학교 뒷산에 올라가 새로 돋아난 풀이며 꽃을 발견한 아이들이 소리칠 때 비로소 살맛이 난다. 즐겁게 노래하고 땀 나도록 뛰고 난 뒤 수돗가에 몰려가 세수하고 교실로 돌아오면 비로소 가슴이 시원해지고, 아이들도 나도 얼굴에 생기가 돈다. 그런데 우리 반이 늘 소란하고 시끄럽게 보이는 모양이다. 여섯 학급 작은 학교에 아이들도 열댓 명 적은 숫자이니 그 아이들이 뛰고 떠들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나. 그런데도 이것이 윗분들 보기엔 영 거슬리는 모양이다. 올해도 몇 번이나 교장실에 불려갔다. 그때마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불끈 솟곤 한다. 학급 담임 중에 나이도 제일 많은데 아이들이 떠든다고 불려 다니니 참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부끄러운 것은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아이들 앞에 섰을 때다. 이런 날은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진다. 언제까지 더 교단에 서게 될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수업까지 아이들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삶이 아닐까!
노미화(양양 조산초등학교)
소개로 만나게 된 남자와 여자, 남자가 여자에게 물었습니다.
남자: 혹시…, 담배 피우나요?
여자: (호들갑)어머~, 저 그런 거 못 피워요~!
남자: 그럼, 술은?
여자: 어머~, 저 그런 건 입에도 못 대요~!
남자: 그렇다면 지금까지 연애는?
여자: 연애요~? 전 아직까지 남자의 ‘남’자도 모르고 살았는걸요?
남자: 정말 순진하시군요! 전 솔직히 반갑긴 하지만 무슨 낙으로 사시는지?
그러자 여자는 환한 미소를 띠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여자: 호호호~~~, 거짓말하는 재미로 살아요!
거짓말하는 재미로 산다고 말하는 이 여자의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모습을 간직하면서 사는 것 같습니다. 저 역시도 여기에 자유롭지 않은 것 같네요. 바로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에, 다른 사람들에게 더 잘 보이려는 마음에 거짓말이라는 옷을 입을 때가 얼마나 많았던 지요? 결국 드러날 거짓말인데도 불구하고 습관적으로 말함으로 인해서 난처하게 될 때도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진실되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보실 때 어떠한 표정을 지으실지 상상하여 보면 얼굴 들기가 힘들어 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행복한 사람은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렇다면 깨어서 주님을 맞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행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거짓말 등으로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벌을 당할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면 말과 행동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말이 생각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다.”
우리 곁에 있는 그 행복을 우리는 왜 찾지 못할까요? 바로 자기를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입니다. 그 욕심 때문에 거짓된 자기를 만들게 되고, 그래서 행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가 아닌 주님을 드러내려는 사람들은 진실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행복을 간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들 앞에 다가올 미래는 항상 밝을 것 같습니다. 즉, 내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미래만 올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는 모습으로 준비하지 않는다면 결코 밝은 미래는 나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조그만 있다가’, ‘내일 하지 뭐…….’라는 말은 절대로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 당장’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사랑하고, 지금 당장 봉사하고, 지금 당장 희생하면서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다가오는 미래는 분명히 밝을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맙시다. 습관 되어요.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좋은 글’ 중에서)
첫째,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좀 더 주면서 살 수 있었는데, 움켜 쥐어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거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이 가장 큰 후회랍니다.
둘째,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 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좀 달라졌을텐데’ 참지 못해서 일을 그르친 것이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고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 있었는데 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며 또한 이러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한 삶을 살았던 것에 대해서 후회한다고 합니다.
<있을 때 좀 더 잘할 걸>
저희 살레시오 회원들에게 있어 인사이동 때 마다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아이들입니다. 오래전 일이 생각납니다. 정들었던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른 곳으로 둥지를 틀기 위해 떠나던 아침이었습니다.
형들한테 맨 날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던 녀석, 못 얻어먹어서 삐쩍 마른 강아지 같던 한 꼬맹이가 계속 저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바빠 죽겠는데 자꾸 왜 그러냐고 하니, 자기도 저랑 같이 가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난감해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원망과 아쉬움 섞인 아이들의 눈동자들을 뒤로 하고, 또 다른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후회가 막심했는지 모릅니다. 계속 제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한 생각은 ‘있을 때 좀 더 잘 할 걸’이었습니다. 같이 살 때, 한번이라도 더 품에 안아주고, 한번이라도 더 눈길 주고, 한번이라도 더 용서해주고, 조금 더 뛰어다니고...그렇게 살 걸, 하는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늘 준비하고 깨어 기다리고 있어라’고 당부하십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장 기대하는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묵상해봅니다.
아마도 평생을 하루처럼, 하루를 평생처럼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을 마지막처럼, 오늘이 내 일생의 전부인양, 그렇게 진지하게, 철저하게, 심혈을 기울여,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이웃을 바라볼 때도 오늘이 지나면 더 이상 못 볼 사람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 오늘 배당된 일을 시작하면서 내게 주어진 마지막 업무로 여기는 모습이 아닐까요?
한 선교사 신부님께서 회의 차 긴 배 여행을 다녀오셨답니다. 기나긴 여행이었기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치셨던 신부님이셨습니다. 비마저 추적추적 내려서 그런지 초라한 부두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서니 뜻밖에도 한 할머님이 신부님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본당 내에서 가장 가난한 할머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신부님의 모습이 나타나자 그녀의 얼굴이 활짝 밝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외쳐대는 할머님의 말에 의하면 “신부님이 안계시니 마음이 너무 허전해서 벌써 사흘 전부터 부두에 나와 있었다. 배가 도착하는 시간만 되면 비까지 맞아가면서 목이 빠져라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님은 신부님 앞으로 봉지 하나를 내밀었는데, 풀어보니 거기에는 손때가 묻을 만큼 묻어있는 이상하게 생긴 큰 떡이 여섯 개나 들어있었는데, 보아하니 불상 앞에 놓아둔 떡이 틀림없었습니다. 그 할머님을 바라보며 신부님은 이런 진리 하나를 깨달으셨답니다.
이 세상 살아가면서 기쁜 일중에 기쁜 일 한 가지는 ‘한 인간이 적어도 다른 한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다시없는 귀한 존재’로 여기지는 것입니다(A. J. 크로닌, ‘천국의 열쇠’, 바오로 딸 참조).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아마도 그분께서 가장 기뻐하실 삶의 모습은 위의 신부님과 할머님 사이 같은 그런 그림 같은 모습의 삶이 아닐까요?
서로가 서로에게 존재 자체로 삶의 기쁨이며 희망인 그런 관계, 한 며칠 못 보면 허전하고 쓸쓸해서 못 견딜 정도의 그런 관계...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