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에 올라가서(2014 하계수련회 2 )
대구 팔공산에 있는 맥섬석 유스호스텔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이튿날 청라언덕으로 간다.
대구시내 중심가에서 가까운 동산동 90개의 계단을 올라가서
제일교회 신건물 옆을 청라(靑蘿)언덕이라고 한다.
청라란 푸른 담쟁이를 가리키는 말이고 비단을 깔아놓은 언덕이란 뜻도 갖고 있다.
언덕을 올라가는 90계단의 시멘트 벽에 드문드문
3.1운동 당시 모습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은 3.1운동 당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학생들이 일본군의 감시를 피해서
도심으로 모이기 위해 통과 했던 솔밭길이었다고 한다.
대구의 만세운동은 일제의 감시가 심해 3월1일 보다 늦은 1919년 3월8일 오후에
큰 장에서 학생과 교회 지도자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고 한다.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이곳을 당시 만세운동의 드높은 함성을 느낄 수 있는
대구 3.1운동 길로 지정하고 숭고한 역사적인 동산으로 보존하고 있다
언덕을 오르는 3ㆍ1운동계단에는 당시
독립정신의 숨결이 배어있는사진들을 전시해 놓았다.
대구고보 학생들 사진
대구고보는 교장이 일본인이며 교사들 중에도 일본인이 많은 관립학교임에도
전교생 약 200여명이 3.1운동에 참가했으며 이 가운데 주동인물 일부는
징역6월에서 1년의 선고를 받았다고 쓰여있다.
계산성당과 대구시 전경
고종황제의 서거로 3.1운동의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의 신명학교의 사진이다.
지금은 이 역사적인 건물을 헐어버리고 현대식 건물을 지어서
자취도 남지 않은것이 안타까웠다.
대구 독립만세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신명여학교 제 6회 졸업생들이 교사 앞에 서 있다.
대구 최초의 미국 선교사인 아담스 목사가 사택으로 사용하던 곳으로
3.1운동 당시 계성학교 학생들이
이 건물 지하실에서 독립선언문을 복사하엿다.
대구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신명여고 6회 졸업생들
삼일절 노래가 새겨져 있는 문이 있고
그 문 한 쪽벽에는 3.1 독립만세를 부르던 애국자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다.
맞은 편 벽에는 33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서 우리 일행이 다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100여년전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던 현장에서
"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며 가슴이 찌르르해지는 것을 느꼈다.
1900년 초의 대구시내 전경
초가집들 속에 계산성당만이 우뚝 서 잇다.
제일교회의 화강석 고딕첨탑이 크게 눈에 들어온다.
대구제일교회는 경상북도 및 대구 지역 최초의개신교 교회로
아랫쪽에 있던 1895년에 지은 건물에서 예배를 드렸으나
이곳 청라언덕으로 이전하여 새로 지었다.
새로 건축한 대구제일교회
고종32년인 1895년에 기와집 4동을 교회당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건물을 1908년에 재래양식과 서구 건축양식을 합작한 새로운 교회당이
조선 말기인 1893년에 남성정교회 (南城町敎會)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개화시키기 위해 근대적 의료 및 교육을 전개했던 곳으로
1996년에 동산동으로 이전하기 전의 교회당인 남성로의 이 선교관 건물은
대구광역시 지방유형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08년에 세워진 고딕양식 건물로 대구기독교회의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제일교회는
빨간 벽돌의 벽에 붙어있는 담쟁이 건물로 멀리서도 눈에 띠어 발걸음이 옮겨진다
오래 된 건물에 담쟁이 넝쿨이 감겨있어 운치가 더해진 고풍스러운 모습이다. .
며칠 후 부터는 노후되고 부식됨에 따라 담쟁이를 없애는 공사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데
행여 오래 된 역사적인 건물에 손상이 가지 않고
다시 이곳을 찾았을 때 그대로 보존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달성토성(현 달성공원)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다하여 "동산"이라고 하였던
자그마한 동산을 1899년 ,
제일교회를 설립한 아담스와 동산병원(현 동산의료원)을 설립한 존슨 선교사가 .
달성 서씨 문중으로부터 매입하여
청라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에 정착하게 하였다.
동산언덕에 대구 근대 1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90개의 계단을 올가가면 오래 전 선교사들이 살았던 붉은 벽돌 사택들이 있는데
대구에서 본격적인 선교활동이 이뤄지던 1906년에서 1910년 경에 건축되어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사들이 머물렀던 집이다.
스윗주택, 챔니스주택, 블레어 주택으로 3개의 동인데 그 당시 선교사들의 이름을 따서 붙였으며
지금은 의료와 선교, 교육 ,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대구 유형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그 사택을 덮은 푸른 담쟁이 넝쿨들이 벽을 감싸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담쟁이는 미국 선교사들이 대구의 더운 날씨를 덜기위해
미국에서 가지고 와서 심었다고 한다.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으로 전국 담장 허물기의 첫 행사로 철거한
본원의 유서깊은 정문 및 중문 기둥과 담장을
초창기에 개척한 수많은 교회의 종들 중 하나를 옮겨다 놓았다.
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상징하고
두 기둥은 환자를 돌보는 교직원들의 사랑의 손길을 나타내며
보도에 놓은 다듬이 돌들은 본원이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디딤돌임을 상징한다.
챔니스 선교사가 거처했던 곳을 의료박물관으로 만들었고
블레어 선교사의 집은 2001년 교육역사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곳곳에 파견되어 선교를 하기 위해 미신을 버리게 하고
오랜 계급사회의 제도와 문맹을 깨우치고 교육을 하기 위해과 싸워야 했다.
이질과 장티푸스라는 풍토병에 스러져 갔던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의
숭고한 희생을 새삼 알게 되었으며 그들의 자취가 남아있는 것을 보며
아직도 우리를 위해 드리는 간절한 기도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지금은 의료선교박물관으로 남아있는 선교사 주택으로
' 사랑 봉사 희생'이 느껴진다.
선교사 블레어 주택
문화 해설사가 청라언덕에 얽혀있는 이야기와 선교사들의
희생과 봉사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선교사의 주택 2층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가 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배를 타고 제물포항에 내렸을 때 대구까지 어떻게 운반을 하였을까 ?
해설사가 질문하고 답을 해주었는데
가마를 만들어 여러명이 메고 걸어서 운반을 하여 갖고 왔으며
피아노의 소리를 들은 주민들은 처음으로 피아노 소리를 듣고
귀신이 들어있다고 도망을 하였다고 한다.
이 피아노를 꼭 보고 싶었는데 그날은 문이 잠겨 있어서 돌아섰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노래를 다함께 합창을 하였다.
동무생각, 사우(思友)
이은상 시 박태준 곡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제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은상이 가사를 쓰고 박태준이 작곡을 한 곡으로 마산 창신학교 시절 만든 곡이다.
박태준이 흠모했던 여학생에 대한 사연을 듣고
이은상이 즉석에서 가사를 써주어 완성 된 곡이다.
작곡가 박태준(1900년~1986년)은
서양 음악이 우리나라에 자리 잡는데 선구자적인 역할을 한 작곡가로
우리나라 최초의 동요인 "가을 밤"을 작곡하였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마산에서 교편을 잡으며
당시 음악의 불모지와 같던 우리나라에서 여러곡을 작곡하였다.
이곡을 만들게 된 동기는 박태준이 다니던 남학교인 계성학교와
옆에 있는 여학교인 신명학교 사이엔 언덕이 있었다.
소년 박태준은 솔밭길을 내려오는 한 여학생을 보고 연정을 갖게 되었지만
쉽게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언덕에 올라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며
백합화 같던 그녀를 흠모하며 그리워 하기만 했다고 한다.
그때 바라보던 푸르게 언덕을 감싸고 있는 담쟁이와
바로 그 언덕이 "사우"를 만들게 된 청라언덕이다.
언덕 위에는 청라언덕 노래비와 박태준님을 소개한 글이 있다.
다음편에는 선교사들이 잠들어있는 은혜의 정원으로 간다~~
첫댓글 청라언덕에 대해 자세하게 잘 설명해
주셨네요. 더운 대구 날씨의 시원함을 위해
담쟁이 넝쿨을 미국에서 가져와 심었다는
선교사들의 이야기등 비화가 많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