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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이 쟁점에 대해서 볼 때에.. 단순 진화론 내용 외에 다른 면으로 생각을 하게 됩니다..ㅎㅎ 과연 한국 사회에서의 '이타주의'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에 대해서요..ㅎㅎ
사실, 저도 '이기적 유전자 가설'을 처음 접할 때엔 그 가설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서 상당히 거부감을 느꼈습니다. '아니, 인간의 이타성이 결국엔 이기적인 마음에 의해 생겨난 것이야? 이건 도저히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점차 이기적 유전자 가설을 배워가면서 이게 그리 비도덕적인 가설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습니다. 도리어 한국 사회의 윤리적 병폐를 정면으로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한국 사회에선 '전체'를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회사를 위해 회사원들 개개인의 몸이 상하더라도 야근을 견뎌야 하고, 국방을 위해선 군인들은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한채 열악한 환경에 놓여야 하지요. 이 모두 다 'Greater Good(이보다 더 좋은 표현을 찾지 못하겠네요..ㅎㅎ;;)'을 강요하며 개인의 희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고 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이런 Greater Good은 표면적으론 개개인에게 강한 도덕적 의무감을 안겨줌으로써 개개인의 눈과 귀를 막고 그들이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지 인지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설치류의 동물 나그네쥐(lemming)는 오랫동안 자살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의 치티(Dennis Chitty) 교수의 연구로 결국 그들이 자발적으로 죽음을 택하는 게 아니라 미처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들판에서 먹이를 찾아 떼로 돌아다니다가 벼랑 끝에서 멈추지 못하고 차가운 강물에 빠져 죽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어쨌든 그들이 이처럼 떼죽음을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제시하는 ‘이론’은 철저하게 집단선택설의 관점을 지닌 것이었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데 너도 나도 살려 하면 모두가 살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일부 ‘숭고한’ 나그네쥐들이 동료들을 위해 죽어준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라슨은 그의 만화에서 그 숭고한 나그네쥐들 중 홀연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돌연변이 개체의 출현을 상상한다 만일 구명대를 두르고자 하는 이기적 성향이 유전하는 변이라면 이듬 해 봄에는 구명대를 두르고 내려오는 나그네쥐가 더 많아질 것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고귀한 유전자들은 숭고한 나그네쥐들의 죽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말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발현되기 때문이다.
위의 본문에서 이 문구는 Greater Good을 위한 희생의 맹점을 잘 보여줍니다. 모두가 Greater Good을 위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집단에서 가장 이득을 보는 개체는 배신자개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타적 개체'는 희생을 감수하기 때문에 자신의 후손을 남기기 어렵지만, 배신자개체는 지속적으로 살아남아 번식에 성공하게 되고, 결국 전체 유전자 풀에서 배신자 개체의 유전자가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지요.
인간 사회로 다시 넘어가서.. 이런 배신자 개체가 '집단의 룰'을 조절하게 되는 상황에선 Greater Good을 위한 희생은 그대로 폭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회사가 위기에 처해있다는 논리로 일반 사원들에게 야근과 임금체불을 강요하는 것, 그리고 그들의 노동쟁의를 막는 것은 'Greater Good'을 가장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Greater Good를 외치지만(그리고 경영자 대다수는 자기기만에 의해서 자신의 행동이 Greater Good을 위한 것으로 믿어버리고 있을 것입니다.), 실제 손실을 떠앉는 것은 노동자들 뿐이지요.
'이기적 유전자 가설'은 이런 '폭력적인 이타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는 가설이라고 봅니다. 이기적 유전자 가설 하에선 게임에 참여하는 각 개체들은 '협력'과 '배반에 대한 보복'을 통해 '상호 이타주의'를 유지합니다(이에 대해서 자세히 쓰긴 힘들겠습니다..ㅎㅎ;; 자세한 내용은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지도자 개체'도 게임에서 예외가 되진 않습니다. 지도자 개체가 자신에게 유리하게 룰을 바꿈으로써 다른 참여자들에게 손실을 안겨줄 경우, 다른 참여자들은 룰 조정자에게 보복을 하거나, 협력을 끊을 수 있습니다. 단편만 바라보면, 이런 보복행위들은 자신의 손실에 대해 보복을 하는 '이기적 행동'이지만, 이런 이기적 행동들은 결국 전체적인 면에선 '상호 이타주의'를 유지시키는 토대가 됩니다.
현대 한국 사회에선 이타주의와 이기주의에 대해 너무나 오해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타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선 '이타주의적 행동'만 취해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있는 것이죠. 자신이 손실을 입더라도, 그에 대해서 양보하고 감수하는 것이 이타주의를 위해선 꼭 필요하다는 생각말입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수준의 '이기주의'는 상호 이타주의가 유지되는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개체가 입는 손실을 Greater Good이란 이름으로 정당화시키게 될 경우, '국가체'와 '기업체'만 과도하게 이득을 얻게 되고 그 이득을 당연시하게 되어 '상호 이타주의'는 깨져버리게 됩니다. 자신이 입는 손실에 대해 어느 정도는 저항할 수 있는게 보장되는 사회야 말로 진정 '열린 사회'가 아닐까 싶습니다.
첫댓글 그렇죠, 비둘기파만 있으면 몰라도 현실적으로 매파가 섞일 위험이 있으니
보복파(기본은 비둘기, 상대가 매이면 매전환)가 있는게 낫다는 것이더군요.
보통 '이기적인'이란 타이틀만 보고 매도하는 경우가 흔하지만요.
집단선택설은... 참 어려운 문제로군요. 생물학으로 뒷받침 가능할지. 유전자 이후의 사회적 단계에 대해 어느정도의 위상을 부여해야 할지가 논란의 핵심일듯. 개인적으로 개미학자로의 에드워드 윌슨은 정말 좋아합니다만, 통섭의 에드워드 월슨은 그다지 좋아하진 않습니다. 그가 비판하는 철학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다만 그가 그렇게 되는 지점 자체가 철학의 필요성을 보여주는거 같긴 하더군요. 어쨌든... 말씀하신데로 어떤 이타주의, 어떤 이기주의이냐가 중요하겠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이타주의와 이기주의라는 구분 자체는 큰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개인-개체의 수행적 차원의 구분일뿐이고, 유전자로 밝혀낼수
있는 부분도 종적인 경향성 - 그냥 그런 요소가 있다는 정도이니... 개별자의 동기의 차원에서 보면 둘 다 다를것도 없지요. 스스로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것이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타심은 결국 자기 만족이라는 이기심의 발현이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비슷한 내용을 보니 반갑네요 ㅎㅎ
'이타심은 결국 자기 만족이라는 이기심의 발현'이라고 이해하셨다면, 잘못 이해하신 것입니다..ㅎㅎ;; 이기적 유전자 가설은 그저 유전자 선택과정에서 유전자가 '이기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지, 이타심은 결국 이기심의 발로에 의한 것이란 주장은 아닙니다. 인간이란 개체의 차원과 유전자 차원은 구분지어서 생각해야죠..ㅎㅎ;; 이기적 유전자 가설에서의 이타심은... '이타적인 형질과 관련된 유전자는 개체의 번식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전체 유전자풀에서 번성한다.' 수준입니다.
이타심은 이기심으로부터 발현된다는 주장은, 인간사회에서 무쟈게 많이 보이는 '자기희생'을 전혀 설명하지 못하죠.
제가 쓴 코멘트의 의도는... '완벽하게 이타적이고 양보하는 개체들이 모인다고 상호이타주의가 유지'되진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호 이타주의가 유지되기 위해선 이타적인 행동과 함께, 이기적인 행동조차도 필요하다는 것이죠. 각 개인의 이기심이 '죄악'으로 낙인찍히는 사회에선, 상호견제가 붕괴되어 '높으신 분들을 위한 이타주의'가 되어버린다는게 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