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해 -4-
고모가 우리 집안을 싫어하게 된 때는 고모가 전적으로 제사를 떠맡을 때부터였다. 장남인 아버지가 건어물 장사로 생계를 이어나가면서 제사에 소홀했다. 차례 음식을 직접 만들지 않고 친척들이 모아준 돈으로 반찬 가게에서 사는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었다. 고모 입장에서는 성의가 없다고 느꼈을 것인데,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는 개신교가 모태신앙이었다. 그럼에도 맏며느리로서 제사 준비를 하긴 했지만 고모는 성에 차지 않았다. 암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살아생전 극진히 모신 사람도 고모였고, 남겨진 할아버지를 그냥 둘 수 없어 분당에 있는 자기 아파트를 전세로 넘기고 할아버지 집에 들어와 보살핀 사람도 고모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가진 땅과 재산을 받기 위해 고모가 붙어있다고 했지만 장남의 위상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있었다. 고모는 외가임에도 할아버지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으로서 집안의 실세나 다름이 없었고 어머니는 한결 편하게 본가를 드나들었다. 하는 것도 없으면서 할아버지에게 돈을 받아가는 어머니가 고모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았고, 그렇게 고모가 할아버지에게 지극정성인데도 지윤보다 친손주 서리를 더 아끼는 것이 못내 속상하고 미웠다. 결정적으로 고모 방 서랍에 있던 금반지가 없어지는 사건이 있었다. 본가에만 오면 돈을 받는 우리 집이 범인으로 지목되는 건 당연했고 지윤은 내가 훔쳐갔다고 지목했다. 들어가 본 적도 없는 고모방에 들어갔다고 말하는 바람에 그 어린 나이에 고모에게 그렇게 혼이 날 수 없었다. 겁이 나고 억울해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지윤의 손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지윤은 서리의 가방에서 나온 거라고 거짓말했고 고모는 그때부터 나를 도둑 취급했다. 절대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해도 고모는 믿지 않았고 우리 집을 싸잡아 가난한 것들이 염치도 없고 사리분별도 못하고 남에게 폐만 끼친다고 못 박았다.
서리는 금반지 사건 이후 지윤이 마음만 먹으면 멀쩡한 사람 대역죄인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겠다고 머릿속에 깊이 심어져 두 번 다시 그녀와 얽히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본의와 다르게 본가에 살게 되면서 지윤과 매일 부딪히게 되었지만 아무 상관도 없는 남자 때문에 이런 사태가 벌어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더욱 그 사이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할 말이 뭔데.”
“나 너한테 고백했어. 것도 두 번이나.”
“미안하다고 한 거 같은데.”
“생각해보라고 했잖아.”
“거절한 걸로 아는데.”
딱딱하게 대답하는 민규로 인해 지윤의 속은 새까맣게 탔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가졌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한 지윤으로서는 수치스러웠고 자신이 처음으로 먼저 좋아하게 된 민규의 마음을 어떻게든 돌려보려고 애써도 받아주지 않자 오기까지 생겨버렸다.
“그래, 네가 여자한테 관심 없는 거 알아. 일학년 때부터 차성훈하고만 붙어 다녔으니까. 그래서 내가 고백했을 때 차여도 괜찮았어. 어차피 네 옆에 여자는 없으니까. 근데!”
지윤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한서리가 왜 네 옆에 있는 거니.”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민규는 오른 손을 머리에 짚었다.
“박지윤, 그만해.”
“아니, 얘긴 해야겠어. 며칠은 참았어, 나도. 한서리 전학생이고, 전학생한테 네가 베푸는 호의라고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니?”
“그만하라고.”
“아침 등교 때도, 점심시간에도, 하교할 때도 뭐하는 거야, 둘이? 사귀니?”
“그만하라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한계에 다다른 민규의 경고는 진심이었다.
“다른 여자애는 몰라도 한서리는 안 돼. 제일 싫어. 절대 못 뺏겨.”
“너 이런 애였냐?”
짜증 섞인 한마디가 비수가 되어 지윤의 가슴에 꽂혔다.
“뭐……?”
“뭐든지 잘하고 착한 줄 알았는데, 최악이다. 너한테 호감은 없었지만 악감정도 없었어. 오늘 생각이 바뀌었다. 고맙다, 일찍 알게 해줘서.”
민규가 차갑게 등을 돌리자 지윤이 앞에 달려가서 붙잡았다. 하지만 냉정히 뿌리치는 손.
“잡지 마.”
민규는 자전거를 타고 서리가 떠난 방향으로 페달을 저었다. 서리는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차마 듣지 못하고 앞서 걷고 있었다. 저 끝에 힘없이 가는 그녀를 발견하고는 몸을 일으켜 빠르게 달렸다. 소리가 났다. 딸랑, 자전거에서 나는 소리로 인해 서리의 걸음이 멈춰졌다.
“미안해.”
자전거를 바로 세우고 고정시키는 민규에게 먼저 사과했다.
“뭐가.”
“지윤이가 나 때문에 너한테 그러는 거야.”
민규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리를 쳐다보았다.
“친척인데 그 집에 얹혀살게 됐거든. 내가 민폐를 끼쳤어.”
“사이가 안 좋냐?”
“너한테 사정은 말 못해. 그치만 넌 잘 지내.”
지윤과 벌어진 사이가 회복될 리 없고 엮이기도 싫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과의 문제였기에 서리는 지윤에 대해 민규에게 나쁘게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늘 예쁨 받는 애들은 누가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걸 이해하지 못하거든.”
더 많이 좋아하는 쪽이 약자인데, 사랑 받기만 하던 지윤이 그 입장이 된 듯싶었다.
“내가 왜 잘 지내야 되는데.”
“걔가 널 좋아하는 거잖아. 근데 네가 내 옆에 있었고. 걔는 날 싫어하는데, 그래서 나도 걔가 싫어지게 됐는데, 우리 문제에 너까지 피해보는 건 더 싫어.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걔랑 잘 지내도 된다는 말이야.”
본심을 알아듣기 쉽게 길게 설명했지만 민규는 듣는 둥 마는 둥 언덕 풀에 머리를 감싸고 누웠다.
“관심 없어. 너랑 무슨 사이든.”
서리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말을 못 알아들은 건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지윤이가 내 욕해도 넌 맞장구 쳐야 돼.”
“…….”
“그래야 내가 편해.”
안 그래도 미움 받고 있는데 더 미움 받을 이유가 생겨버렸다. 어쩌면 본가에 와서 지윤이 자신을 더 싫어한 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부터 가난한 집안을 무시하는 것도 있었지만, 금반지 사건도 있었고, 할아버지가 아끼는 사람에 대해 고민했을 수도 있으니까. 그게 민규에 대한 감정으로까지 이어진다면 충분히 싫을 것이다.
“해가 지고 있어.”
하늘이 햇빛에 붉어졌다. 언덕 위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풍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잔잔히 흐르는 강과 맑은 하늘에 붉은 태양이 산 밑으로 숨어버리는 순간을 민규와 공유하고 싶었는데 대꾸가 없었다. 옆을 돌아보니 그는 누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자?”
손을 들어 얼굴 위로 왔다갔다 거리자 민규가 눈을 번쩍 떴다.
“뭐하냐, 너.”
서리는 무안해서 손을 황급히 숨겼다. 그리고 손을 두른 무릎에 턱을 대고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조민규.”
“어.”
“나한테 왜 신경 써?”
일부러 민규를 쳐다보지 않았다. 보게 되면 왠지 민망한 상황이 연출될 것 같았다. 학교에서부터 집에 돌아갈 때까지 그와 함께 있는 시간들이 낯설어서 넌지시 물어본 것뿐이었다.
“내가 언제.”
“아니, 그렇잖아. 네 비싼 운동화도 못 쓰게 만들고, 너한테 살갑지도 않고, 아무 것도 아닌 나한테 왜 잘해주냐구.”
“운동화 비싼 건 아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잘해주는 건가. 잘해주는 게 뭔지 모르는 거 아니냐.”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고민에 잠긴 듯 민규가 머뭇거렸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솔직한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냥, 신기해서.”
서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민규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너 하는 게 다 웃겨.”
서리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같은 반 짝이 되었을 때, 새 운동화를 빨아왔을 때, 대화를 나누었을 때 그녀가 하는 행동들이 이제껏 봐왔던 사람들과는 달라서, 그런 새롭고 흥미로운 호기심이 민규를 이끌었다.
“너 보면 웃는 내가 신기해서, 나 좋으라고 네 옆에 있는 건데.”
“내가 귀엽니?”
“맞을래?”
“미안.”
서리는 언덕에서 옷을 털고 일어났다. 노을이 예쁘게 하늘을 물들였다.
“조민규.”
그녀의 뒷모습이 해를 가려 그림자 졌다.
“네 말대로 우리 친구해.”
안 움직이고 앉아서 서리를 바라본 민규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려오는 느낌이 낯설었다. 그런 민규의 심정도 모르고 서리가 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뒤를 돌아 활짝 웃었다.
“너라면 좋겠어, 내 평생 친구.”
대답하지 않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유지한 민규, 분명한 건 그는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좋은 사람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그는 기꺼이 친구가 되어주었다.
첫댓글 재미나요~ 다음화도 기대되요~
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