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해 -5-
피아노의 시인 쇼팽은 오직 피아노곡만 작곡했고, 연주했다. 피아노가 가장 감정을 드러내기 적합한 악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음악은 서정적인 선율을 따라 부드럽게 흘러가고 때로는 파도처럼 물결치기도 하는 하나의 스토리가 있는 동화책 같다. 하지만 그 쇼팽의 음악이 전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화성이 하나하나 변할 때마다 신경을 거슬렀다. 얼마나 공부했는지 어지럽게 표시되어 있는 피아노 악보를 보고 손가락을 움직이던 지윤이 갑자기 돌변했다. 피아노를 있는 힘껏 쾅쾅 내려친 것이다.
‘너 이런 애였냐?’
민규의 그 한마디가 뇌리에 박혔다. 악보 한 장을 갈기갈기 찢어서 공중에 날려버렸다. 조민규, 네가 어떻게 나한테. 충격에서 이어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올랐다. 이 모든 건 한서리 때문이야. 그녀 때문에 관계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단정 지었고, 증오심은 더 차올랐다.
“엄마, 한서리 우리 집에서 언제 나가?”
피아노 연습실 방문을 세게 여는 지윤이 부엌에 있는 미영에게까지 성질을 부렸다.
“서리 엄마가 데리러오든지 해야 나가겠지.”
“짜증나.”
“무슨 일 있어?”
“내가 좋아하는 남자 애한테 자꾸 들러붙잖아.”
전기포트에 물이 끓었다. 막 설거지를 끝낸 미영은 커피를 한 잔 타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민규 말하니? 그만 포기해, 너를 더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아니야, 곧 날 좋아하게 될 거야. 두고 봐.”
늦은 시각 서리가 들어왔다. 고모에게 인사하자마자 바로 할아버지 방으로 향했다.
“다녀왔습니다.”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책을 읽고 있었다.
“늦게 들어왔구나. 밥은?”
“먹었어요, 할아버지. 쉬세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고모에게 굳이 서리가 먹을 걸 준비해달라고 시켰다. 사실은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는데 했다고 하는 서리를 챙긴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감해하는 서리가 얄미운 고모였다. 미영은 끓는 속을 애써 감추고 밥솥을 열었다. 서리가 할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뭇거리자 밥을 한 주걱 펐다. 그리고 냉장고에 보관한 찬 물을 꺼내 말아주었다.
“뭐하니, 안 먹고.”
서리는 앉아서 숟가락을 들었다. 차가운 물만큼 막히는 밥을 삼키기 힘들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모진 수모를 참고 어떻게든 견딜 수 있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내일 여섯 시까지 집 앞에 나와.’
민규가 서리를 집까지 데려다주면서 한 말이었다. 친구가 생겼다는 게 기뻤다. 진정한 친구가 있어서 괜찮다. 외로운 도시에서, 할아버지밖에 없는 대도시 서울에서 누군가를 의지하게 되었다는 것이 어머니가 데리러 올 때까지 견딜 수 있는 충분한 이유였다.
* * *
새벽에 쏟아진 굵은 빗방울이 잠을 깨웠는데 아침까지 그치지 않았다. 계속해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 때문에 새까만 구름에 가려 하늘이 어두웠다. 교복을 입은 서리가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리본을 단정하게 다시 메고 밖으로 나갔다. 민규가 약속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교복 겉에 투명 우비를 입고 있었다. 자전거를 옆에 두고 벽에 기대어 있다가 서리가 우산을 쓰고 나오자 우비 모자를 벗고 성큼 다가갔다.
“너는 핸드폰이 없어, 답답하게.”
민규는 신경질적이었다. 서리는 그에게 우산을 씌어주며 눈치를 살폈다.
“오늘은 비 오니까 먼저 학교 가있어.”
비 오는데 자전거를 둘이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그녀가 시작하기 전에 일을 해보려고 했다. 자신이 그녀에게 제안해서 시작했기에 끝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내가 하고 갈 테니까 먼저 가라고.”
서리는 그의 배려를 납득할 수 없었다.
“아니야, 왜 그래. 내가 하는 일인데.”
“나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 간다.”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자전거를 타고 가버린 민규 때문에 서리는 당혹스러워 한동안 멍하게 서있었다. 다시 집에 들어가긴 이상하고 그렇다고 민규를 따라잡자니 한참 앞이고 하는 수 없이 학교에서 그를 기다렸다. 제일 먼저 교실에 와서 수학 공책을 펴고 문제를 풀었지만 여섯 바닥을 다 푸는 시간까지 그는 오지 않았다. 여덟시가 되어서야 민규가 서리 옆에 앉아 허리를 바로 폈다. 미안하고 고마워서 어떤 말을 건네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신문배달 처음 해보는데 넌 안 되겠다, 한서리.”
100부를 돌리는데 한 달에 15만원 받는 것치고 너무 힘든 일이었다. 민규는 이 일을 서리에게 절대 시킬 수 없다고 확신했다. 대신 다른 일이라도 맡기려면 그녀의 사정을 알 필요가 있었다.
“넌 돈이 왜 필요한 거냐.”
“교복 사는 돈을 빌렸어.”
“얼만데.”
“한 사십만 원?”
민규가 잠시 고민하더니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 세차해드릴까요.]
[세차는 갑자기 왜.]
[돈 벌고 싶어서요.]
[돈 그냥 주면 되지. 얼마 필요해.]
[사십만 원.]
[사고 쳤어?]
[친구가요.]
[세차 일 주일에 한 번씩 해라, 세 달 동안.]
[감사합니다.]
“됐다. 너 주말에 우리 집에 와서 세차하면 되겠다.”
민규의 두 번째 제안은 더 황당했다. 신문배달에 이어 세차라니, 어이가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사십만 원 준다고, 세차 하면.”
그렇게 해서 시작한 일명 손세차 아르바이트. 서리는 민규의 집에 처음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아니, 가본 적도 없는 남자의 집에 발을 들였다. 학교로 가는 길 한편에 자리 잡은 학교만한 저택에 누가 사는지 궁금했는데 여기였다. 서리는 신기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한발자국씩 조심스럽게 구경했다. 드넓은 잔디밭에 나무도 많았고 차고도 있었다. 정원사가 나뭇가지들을 정리하고 있었고, 코커스패니얼 개 한 마리도 키웠다. 펜트하우스처럼 꾸며진 집은 유리창이 많아 고급스러웠고, 집 안은 못 들어갔지만 넓은 정원만 보아도 집의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방된 마당 덕분에 마음 놓고 물을 틀었고 준비한 비누 거품으로 차를 문지르고 있는데 피할 겨를도 없이 차가운 물이 튀겼다. 민규가 수도꼭지에 곱힌 호스로 서리를 향해 뿌렸다. 얼굴에 직방으로 물줄기를 맞은 서리는 정신이 번쩍 차려졌다.
“야!”
“시원하지.”
저걸 그냥! 서리는 반대편에 있는 호스로 민규에게 복수했다. 질 수 없다는 듯 그는 봐주지 않았고 그녀도 물을 흠뻑 맞아가며 공격을 계속했다. 교복은 물론 머리도 샤워한 것처럼 엉망진창이 되어서야 끝났다.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어영부영 세차는 다했지만 뜨거운 햇빛에 일부 말려진 머리를 정돈하는 서리는 지쳐있었다. 옷은 다 말랐지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마무리로 자동차 내부를 청소하고 있는데 대문으로 누가 들어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 없이 치장을 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아마도 민규 어머니인 듯싶었다.
“안녕하세요.”
서리는 자동으로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는 깜짝 놀란 듯 선글라스를 벗었다.
“누구니?”
“아, 그게…….”
“여자친구.”
대답을 가로채는 민규 때문에 당황한 서리는 두 눈을 깜빡거렸다.
“뭐? 여자친구?”
어머니만큼이나 서리도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데 민규는 너무도 태연했다.
“여자 사람 친구. 친구라고.”
어머니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민규를 타박했다.
“놀랐잖니. 그런데 여기서 뭐하니?”
“세차.”
깨끗해진 차를 보면서 어머니는 민규를 이상하게 보았다.
“아, 그냥 돈 좀 벌려고 그러는 거야.”
아들의 행동이 수상쩍은 것은 당연했다. 평소에 한 적도 없는 세차를 하는 것은 물론 여학생을 데려오기까지, 그런 의심을 거두기 전에 서리가 선수 쳤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녕히…….”
“밥이라도 먹고 가요.”
어머니는 서리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따뜻한 밥상을 차려 대접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민규는 집에 와서 딱 할 말만 하는 성격이고, 그 영향은 아버지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아들의 학교생활을 전반적으로 알고 싶었다.
“우리 민규가 여학생은 처음 데려오는데 혹시.”
“그만 물어봐. 가면 내가 얘기할게.”
민규는 어머니의 질문을 가로챘다.
“이름이…….”
“한서리.”
“너한테 물었니?”
어머니가 말하는 것을 다 막아버리자 서리는 불편해서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더구나 여기 있다가는 어머니에게 말려들 것만 같았다.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바로 자리를 떴다. 민규에게 더 이상 피해를 주기 싫었고 그래서 집 앞에 마중 나오는 그를 거부했다.
“왜 따라 나와, 혼자 갈 건데.”
“나도 갈 데 있어.”
결국 이기지 못하고 민규가 데려다주었다. 서리는 자신을 신경써주는 민규에게 여러 가지로 고마웠고, 무엇보다 큰돈을 받은 게 걸렸다. 빚을 질 수 없다는 피해의식만이 가득 찼다.
“너한테 보답하고 싶은데, 갖고 싶은 거 있어?”
“됐어.”
민규는 짧게 사양했다. 애초에 바라지를 않았다.
“네가 원하는 거 뭐든 들어줄게.”
갑자기 그가 걸음을 멈추더니 서리를 힐끔 흘겼다. 유난히 낮은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여자애가 겁도 없이.”
“응?”
눈치도 없다.
“됐다. 얼른 들어가라.”
서리의 집 앞에 도착하자 민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사라져가는 뒷모습에 허전함이 느껴졌다. 어딘가 모르게 아쉬운 감정이었다.
*독자님들 덕분에 글을 씁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재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