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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득거'를 아시나요? 국가 건강검진 D-day (9.4.fri.am9:30) 맞추느라고 욕봤는데, 무엇보다 인풋이 가장 신경 쓰였어요. 전날 pm7시 금식, pm11:00 워터 금지를 지키려고 잠자는 걸 선택했어요. 덕분에 배는 고팠지만 몸이 가벼워진 느낌입니다. 내시경과 CT를 뺀 건강 검진은 30분 만에 속전 속결로 마쳤습니다. 피/소변검사 정도의 건강 검진은 계산해보니까 50번정도 했을 것입니다. 목걸이 빼라는 것만 빼고 속사포로 잘 끝나서 말쑥이 닮은 담당 간호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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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다고 립서비스를 했더니 미소로 화답해줍니다. 나이스 위크앤드! 돌솥밥 두 그릇 후딱 비우고 꽃집에 들려 첫 가을 채집을 소국으로 했습니다. 국화는 고삐리 때 수채화 오브제로 한 3년 동안 그렸을 것입니다. 예주야! 국화 어찌 그리는 줄 아니? 국화는 예도 때 자주 쓰이기 때문에 저는 국화향기가 그리울 때면 소국을 가끔 삽니다. 작년에도 이맘때쯤 소국 한 그루를 샀다가 2월까지 뽕을 뺐을 것입니다. "한송이의 국화 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나 보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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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립고 아쉬움에 가슴조이던 머언먼 젊음의 뒤안 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 잎이 필라고 감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아싸, 이 정도 암송을 하면 잉글리시 완전정복도 멀지 않았다고 보는데 동의해 주시라! 필자는 신앙 생활 40년 동안 용비어천가를 불렀지만 인간에게는 에예공이 유일합니다. 웬만하면 이대통령에게 태클을 걸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번 인사는 빵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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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혜인은 김승원을 위해 버리는 카드다" 포커를 할 줄 아시나요? 초구에 카드 4장을 받으면 1장 오픈 1장을 버립니다. 나는 J K A가 오면 원 페어도 버립니다. 2구에 포 풀이면 J를 버립니다. 3구 받고 노 메이드, 히든을 기다리는 게 맞나요, 죽는 게 옳을까요? 불과 100년 전만 해도 치질이나 종기를 치료하지 못해서 중국이나 조선의 왕들이 일찍 죽었어요, 지치득거는 치질을 핧아 수레를 얻다는 사자성어로 진나라 왕이 치질로 고생하다가 치질을 핧아서 치료해 준 사람에게 재물을 가득 담긴 수레를 내려준데서 유래했다고 해요. 우리는 대관절 무엇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낮아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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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클 적에는 학교에서 신체검사라고 해서 몸무게도 재고, 키도 재고 기생충 검사까지 했어요. 국민 학교6년 간 '불주사'라는 것을 맞았는데 제 주사포비아가 그때 생긴 것 같아요. 음지에 오랫동안 몸담은 내게 문신은 없고 대신 왼쪽 팔 외벽에 각종 주사의 상흔이 3개가 또렷이 남아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주사인지도 모르고 그냥 맞았어요. 아마도 결핵, 장티푸스, 파상풍, 홍역 이딴 것들일 것입니다. 양호실에 비치된 내 몸 정보 ‘건강기록부’는 고등 학교까지 따라다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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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보우하사 이 나이가 되도록 어지간해서 병원을 안 가고 살고 있는데 다 늙어서 예고된 치통 때문에 진통제와 소염제를 먹은 지 한 달이 되어갑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19’가 시작될 때부터입니다. 예방주사를 맞는 이유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면역항체를 만들어서 바이러스가 침투를 했을 때 내 몸이 싸워 이기도록 하는 원리입니다. 제 24시간은 잠5시간, 근로8시간, 11시간을 영화, 독서, 글쓰기, 요리, 운동을 하며 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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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로서 이것이 최상이라고 여기고 있지만 종종 신념이 흔들릴 때가 생기기 마련인데 이번에도 심한 ‘앓이’를 하면서 배운 것은 고난이나 고통이 주는 유익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새 창조입니다. 이 '고난의 신학'을 신앙의 최고봉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만 이번 앓이를 통해 새롭게 다가온 것은 내가 새로워지려면 불청객으로 맞은 고통이라고 할지라도 도망치지 말고 나를 정확히 분석하고 로드맵을 짜서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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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고난이 터닝 포인트가 될 뿐 아니라, 고통의 횟수만큼 어지간한 통증은 견딜 만 해지더이다. 인간은 누구든 살면서 많은 일들에 불안감을 느낍니다. 경제가 무너질까봐, 소외되고 낙오될까봐, 불확실한 미래, 기득권이 흔들리거나 없어질까 봐 그리고 성큼 다가온 죽음이 나를 엄습해 오는 것 등등으로 말입니다. 물론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지만 고난을 통해 익숙해질 수는 있다고 봅니다. 생로병사는 신이 내린 숙명입니다. 이 생로병사는 행복과 불행의 바로미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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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드 보통은 “우리의 삶은 불안을 떨쳐내고 새로운 불안을 맞아들이고 또 다시 그것을 떨쳐내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합디다. 우리가 살아있는 내내 불안의 포비아가 내 등 뒤에 거북이 등껍질처럼 매달려 그 속으로 움츠릴 것을 권하더라도 나는 고통을 즐기며 한발 더 발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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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어디까지 낮아지는가? 국가 건강검진 D-day. 전날 저녁부터 금식하고 물까지 끊느라 욕봤습니다. 그래도 검진 자체는 30분 만에 속전속결로 끝났습니다. 피 뽑고 소변 검사하고, 목걸이 빼라는 말에 순순히 따르고 나니 끝입니다. 살아오면서 이런 건강검진을 족히 50번은 받았을 것입니다. 말쑥이 닮은 담당 간호사에게 “수고하셨어요. 나이스 위크앤드!” 했더니 미소로 화답합니다. 인간은 피 한 번 뽑고도 웃음을 주고받는 존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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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진이 끝나자 돌솥밥 두 그릇을 후딱 비우고 꽃집에 들러 첫 가을을 채집했습니다. 소국입니다. 고삐리 시절 3년쯤 수채화 오브제로 그렸던 꽃이라 국화를 보면 오래전의 내가 따라옵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아직도 이 정도 암송한다면 잉글리시 완전정복도 아주 허황된 꿈은 아니라고 우겨봅시다. 그런데 국화와 건강검진과 정치 이야기를 지나 뜬금없이 ‘지치득거(舐痔得車)’가 등장합니다. 장자의 일화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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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 왕의 치질을 핥아 치료해 주면 수레를 얻는다는 이야기로, 권력자의 환심을 얻기 위해 인간이 어디까지 비굴해질 수 있는가를 풍자합니다. 중요한 것은 치질이 아니라 ‘수레’입니다. 무엇을 얻고 싶은 욕망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엇까지 하게 만드는가? 그래서 지치득거는 오늘날에도 살아 있습니다. 권력 가까이에 가기 위해 신념을 바꾸고, 자리를 얻기 위해 침묵하고, 돈을 벌기 위해 모욕을 견디며, 인정받기 위해 자기 자신을 깎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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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는 ‘에예공’이 유일하다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떠받듭니다. 왕의 치질은 사라졌지만 수레를 나누어주는 권력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포커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J, K, A를 들고도 다음 패를 기다립니다. 노 메이드인데 히든 한 장을 기다릴 것인가, 지금 죽을 것인가. 인간은 가능성 때문에 버티고 가능성 때문에 무너집니다. 정치도 사업도 사랑도 인생도 어쩌면 아직 뒤집히지 않은 히든카드에 의미를 부여하는 게임인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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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건강검진실에 들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왕도 대통령도 필자도 결국 피를 뽑고 소변을 받아야 하는 몸입니다. 어린 시절 양호실의 건강기록부에서 오늘의 국가건강검진까지 몸은 평생 나를 따라다녔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정신과 신념과 철학을 이야기해도 치통 하나가 시작되면 존재론은 순식간에 어금니 한쪽으로 몰려듭니다. 그래서 고통은 인간을 겸손하게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는 비판하고 싶습니다. “고난은 인간을 성장시킨다”는 말을 너무 아름답게 만들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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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자체에는 교육적 목적이 없습니다. 어떤 고통은 인간을 성숙시키지만 어떤 고통은 인간을 망가뜨립니다. 가난, 질병, 상실, 폭력이 자동적으로 사람을 깊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고통의 횟수가 아니라 고통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이번 ‘앓이’를 통과하며 발견한 것도 바로 이것 아닐까요. 고통이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것을 회피하지 않고 내 상태를 분석하고, 원인을 찾아보고, 로드맵을 만들고, 생활을 다시 조정하는 과정이 중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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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고통은 운명에서 ‘사건’으로 바뀝니다. 사건 이전의 나와 사건 이후의 내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니체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니체의 ‘운명애(amor fati)’는 고통을 좋아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삶까지 자기 삶으로 긍정하는 태도에 가깝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라는 질문에만 붙잡혀 있으면 고통은 원한이 되지만, “이것을 통과하면서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고통은 새로운 가능성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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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이 말하듯 인간의 삶에서 불안 하나가 사라지면 다른 불안이 찾아옵니다. 돈 걱정이 해결되면 건강이 걱정되고, 건강이 괜찮으면 자녀가 걱정되고, 그것마저 잠잠해지면 노화와 죽음이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불안 없는 삶을 목표로 삼는 것 자체가 잘못된 목표인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불안을 제거하는 능력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움직이는 능력입니다. 불안을 등에 짊어진 채 걷는 것입니다. 거북이에게 등껍질이 있다고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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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는 제거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생로병사를 대하는 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즐기며 한발 더 발전하겠다”는 마지막 문장도 조금 바꾸고 싶습니다. 굳이 고통까지 즐길 필요는 없습니다. 아픈 것은 그냥 아픈 것입니다. 치통은 철학적이지 않고 주삿바늘은 여전히 따끔합니다. 그럼에도 도망치지는 않는 것. 고통을 미화하지 않으면서도 고통 때문에 삶 전체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통과한 뒤 이전보다 조금 다른 인간이 되어 있는 것.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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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치득거와 오늘의 건강검진은 정반대 방향에서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장자의 인간은 수레 하나를 얻기 위해 자신을 낮추지만, 병원에서의 인간은 아무리 많은 수레를 가지고 있어도 결국 늙고 아프고 죽는 몸이라는 사실 앞에서 낮아집니다. 전자는 욕망 때문에 낮아지는 인간이고 후자는 유한성을 깨닫고 낮아지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얻은 최고의 건강검진 결과는 혈압이나 혈당 수치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나는 아직 살아 있고, 그러므로 아직 달라질 수 있다.”
2026.9.5.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