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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hāna(禪) 개념 연구
— '마음에 담음'과 선정(禪定)으로의 전개 —
【초록】
본고는 빠알리 경전에 나타나는 `jhāna`(및 동사형 `jhāyati`)의 개념적 의미를 육차결집본(Chaṭṭha Saṅgāyana)을 중심으로 니까야의 문맥별 용례에서 귀납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기존의 어원적 접근이나 주석서에 의존한 해석과 달리, 본고는 `jhāna` 및 그 파생어들이 사용된 구체적인 경전의 문맥을 분석함으로써 이 개념이 관통하는 하나의 핵심 작용을 도출하고자 한다.
분석 결과, `jhāna/jhāyati` 계열의 단어들은 '응시'나 '숙고', 혹은 단순한 '선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넘어서, '대상을 마음에 담아 유지하는 작용'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초선의 尋伺(vitakka-vicāra)에서부터 제4선의 捨念淸淨(upekkhā-sati-pārisuddhi)에 이르기까지, 각 선정 단계에서 특정한 심리적 구성요소(심소, 心所)들을 안정적으로 적재하고 유지하는 행위로 일관되게 적용된다.
더불어, 본고는 `upanijjhāyati`, `atinijjhāyati`, `diṭṭhinijjhānakkhanti`,
`dhammanijjhānakkhanti`, `sunijjhāpito`/`dunnijjhāpito` 등 다양한 파생어들의 용례를 추적함으로써, 이 근원적 의미가 '가까이/깊이/지나치게 담음', '담음을 허용함(납득·이해)' 등으로 확장·변용되는 양상을 밝힌다.
이는 `jhāna`가 단순한 수행 기술이 아닌, 인식과 수용의 근본적 작용임을 시사한다.
Ⅰ. 서론
빠알리어 동사 `jhāyati`는 산스크리트어 `kṣāyati`(√kṣai, 태우다)와 `dhyāyati`(√dhyai, 명상하다) 두 어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를 후자와 연결 지어 '번뇌를 태우는 것이 禪'이라는 언어적 유희는 니까야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방법이나, 본고에서는 전자는 배제하고 후자 중심으로 살펴본다.
그러나 빠알리 사전에 나타나는 설명이나 어원으로는 경문에 나오는 禪의 어감이나 의미를 추적하기 어렵다. 또한 기존의 영어·한문·한글의 단순 나열된 번역어 또한 같으며, 학계의 이해가 확정적이지 않아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존재한다.
`jhāna`의 정확한 본질과 위상은 초기불교학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로, 특히 통찰(insight)과의 관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본고는 기존의 2차 자료가 아닌, 빠알리 경전에 나타나는 용례를 관통하는 의미를 경전 자체의 내적 논리로 귀납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jhāna`나 동사형 `jhāyati`의 용례는 정형적인 표현에서 나타나 다양한 접근이 어렵다. 이에 본고는 이 단어에서 유래한 다양한 파생어에서 그 의미를 역으로 추적하는 방법을 취한다.
`jhāyati`(`jhāna`)에 여러 접두어가 붙은 다양한 표현들이 경문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pajjhāyati`, `nijjhāyati`, `apajjhāyati`(MN)/`avajjhāyati`(AN) 등이 있고, 특히 다양한 용례가 나타나는 `nijjhāyati`를 중점적으로 분석한다. 그 결과로 '마음에 담음(적재·품음)'이라는 의미를 제안하고자 한다.
Ⅱ. 禪(jhāna)의 용례: 수행 일반으로서의 禪
2.1. 손가락 튀기기 품(Accharāsaṅghātavaggo, AN 1.51-60)
"accharāsaṅghātamattampi ce, bhikkhave, bhikkhu mettācittaṃ āsevati; ayaṃ vuccati, bhikkhave — ‘bhikkhu arittajjhāno viharati satthusāsanakaro ovādapatikaro, amoghaṃ raṭṭhapiṇḍaṃ bhuñjati’. ko pana vādo ye naṃ bahulīkarontī"ti!" (AN 1.53)
이 경문에서 세존은 손가락을 튕기는 찰나만큼의 짧은 시간이라도 자애의 마음을 닦는 비구를 'arittajjhāno viharati' (헛되지 않은[공허하지 않은] 선(禪)에 머무는 비구)라고 칭송하신다. 여기서 `aritta`(비어 있지 않은)는 `jhāna`가 공허하거나 무익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만하고 효과적인 상태임을 의미한다.
이 품은 `mettācittaṃ āsevati`(분류 53), `mettācittaṃ bhāveti`(54), `mettācittaṃ manasi karoti`(55)로 이어지며,
손가락 튀기기의 연속 품(Aparāccharāsaṅghātavaggo, AN 1.382-493-562)에서는 初禪을 修行한다면(paṭhamaṃ jhānaṃ bhāveti)으로 나타나고, 제2선, 제3선, 제4선, 慈悲喜捨, 四念處, 四正勤, 四如意足, 五根, 五力, 七覺支, 八正道, 八勝處, 八解脫, 十遍處 등 약 180여 가지 수행으로 확장된다.
여기에서 `bhāveti`(수행한다)라는 표현의 `bhāvanā`(수행/수습)는 √`bhū`('됨')라는 같은 어근에서 파생하였고, '(더 나은 상태로) 됨(becoming)'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jhāna`가 특정한 '상태'가 아닌 하나의 '작용'으로서, 수행자가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과정임을 시사한다. 거의 禪의 동의어처럼 사용되었지만 이어지는 용례를 종합하면 부정적 측면도 있고, 禪을 관통하는 의미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드러날 것이다.
2.2. 극단적 수행으로서의 禪: 삿짜까 긴 경(MN 36)
세존께서 보살 시절 중도가 아닌 극단 수행인 고행을 하신 경험담은, `jhāna`가 반드시 긍정적인 결과만을 보장하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tassa mayhaṃ, aggivessana, etadahosi —
‘yaṃnūnāhaṃ appāṇakaṃyeva jhānaṃ jhāyeyyan’ti."
이는 '호흡하지 않는 禪을 禪하리라'는 것으로, 극단적인 호흡 통제를 통한 禪의 시도였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āraddhaṃ kho pana me, aggivessana, vīriyaṃ hoti asallīnaṃ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 sāraddho ca pana me kāyo hoti appaṭippassaddho
teneva dukkhappadhānena padhānābhitunnassa sato."
정진(vīriya)과 기억(sati)은 확립되었으나, 몸(kāya)은 경안(輕安)하지 못하고 긴장된 상태였다. 이는 삿된 도닦음(micchāpaṭipada)에서도 바른 도닦음(sammāpaṭipada)과 같이 'upaṭṭhitā sati asammuṭṭhā(확립된 기억은 잊어버리지 않고)'와 정진(시작된 정진은 물러 남이 없고)이라는 표현이 동일하게 나타나나, 이것은 깨달음의 구성요소인 覺支가 아님을 보여준다.
이상의 용례에서 보듯이 禪은 (비록 부정적일 수도 있지만) 긍정적인 결과('됨')를 원하는 수행 일반을 지칭한다고 볼 수 있으나 여기서는 유보해 둔다.
Ⅲ. 禪의 파생어: `jhāyati`, `pa-`, `ni-`, `apa-`/`ava-`
3.1. 삿다 경(AN 11.9)
"assakhaḷuṅko hi, saddha, doṇiyā baddh ‘yavasaṃ yavasan’ti jhāyati. ...
so doṇiyā baddho ‘yavasaṃ yavasan’ti jhāyati.
evamevaṃ kho, saddha, idhekacco purisakhaḷuṅko araññagatopi rukkhamūlagatopi
suññāgāragatopi kāmarāg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kāmarāgaparetena uppannassa ca kāmarāgassa nissaraṇaṃ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so kāmarāgaṃyeva antaraṃ katvā jhāyati pajjhāyati nijjhāyati avajjhāyati."
이 경문에서 길들여지지 않은 망아지는 마차에 묶인 채로 '풀, 풀'이라고만 `jhāyati`한다. 이는 그가 자신을 조련할 말 조련사의 훈련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탐욕의 대상(풀)에만 마음이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purisakhaḷuṅko)은 비록 숲이나 나무 아래, 빈 방으로 간다 할지라도, 감각적 욕망에 사로잡힌 채 그 벗어남을 알지 못하고, 그 감각적 욕망 자체를 장애물 삼고서(/품고서, antaraṃ) `jhāyati pajjhāyati nijjhāyati avajjhāyati`한다.
3.2. 고빠까 목갈라나 경(MN 108)
"idha, brāhmaṇa, ekacco kāmarāgapariyuṭṭhitena cetasā viharati kāmarāgaparetena,
uppannassa ca kāmarāgassa nissaraṇaṃ yathābhūtaṃ nappajānāti;
so kāmarāgaṃyeva antaraṃ karitvā jhāyati pajjhāyati nijjhāyati apajjhāyati."
이 경문은 "어떤 종류의 禪을 세존께서 칭송하지 않으셨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다.
감각적 욕망에 압도되고 그 벗어남을 알지 못하는 자가, 그 욕망을 장애물 삼아/품고서 행하는 `jhāyati` 등의 행위는 칭송받지 못한다.
3.3. 마라 견책 경(MN 50)
"‘ime pana muṇḍakā samaṇakā ibbhā kiṇhā bandhupādāpaccā
“jhāyinosmā jhāyinosmā”ti pattakkhandhā adhomukhā madhurakajātā
jhāyanti pajjhāyanti nijjhāyanti apajjhāyanti.
seyyathāpi nāma ulūko rukkhasākhāyaṃ mūsikaṃ maggayamāno
jhāyati pajjhāyati nijjhāyati apajjhāyati."
삭발한 사문들이 '우리는 禪을 닦는 자다'라고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올빼미가 나뭇가지 위에서 쥐를 찾듯 `jhāyanti pajjhāyanti nijjhāyanti apajjhāyanti`한다고 조롱한다.
3.4. 소결: 접두어의 어감과 '담음'으로의 독해
세 가지 경문을 비교하면 MN의 `apa-`와 AN의 `ava-`는 전승의 차이로 볼 수 있다. `pa-`, `ni-`, `apa-`/`ava-`라는 접두어의 어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pa-`는 강세, `ni-`는 아래로(깊이)라는 더 강한 강세를, `apa-` 내지 `ava-`는 그보다 더한 강세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망아지나 올빼미가 먹이를 `jhāyati`, `pa-`, `ni-`, `apa-`/`ava-`한다는 것은 우리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禪의 의미(그 의미가 무엇이든)와는 많이 괴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jhāna`가 단순히 '생각한다'거나 '명상한다'는 의미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본고는 이러한 용례들을 '마음에 담음'으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망아지가 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풀이라는 대상을 마음에 집중적으로 '담아' 두는 것이며, 올빼미가 쥐를 '찾는' 행위 또한 쥐라는 대상을 마음에 담아 추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비구가 감각적 욕망을 장애물 삼아/품고 `jhāyati`하는 것 또한 그 욕망을 마음에 담아 버린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
Ⅳ. `nijjhāyati`의 파생어:
`upa-`, `ati-`, `diṭṭhi-`/`dhamma-`(`nijjhānakkhanti`), `su-`/`dun-`
4.1. `upanijjhāyati`의 용례
음행(淫行) 경(AN 7.50)
"mātugāmassa cakkhunā cakkhuṃ upanijjhāyati pekkhati"
범망 경(DN 1) / 빠티카 경(DN 24)
"te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ntā aññamaññamhi cittāni padūsenti."
세기 경(DN 27)
"itthī ca purisaṃ ativelaṃ upanijjhāyati puriso ca itthiṃ. tesaṃ ativelaṃ aññamaññaṃ
upanijjhāyataṃ sārāgo udapādi, pariḷāho kāyasmiṃ okkami."
이상의 경문에서 `upanijjhāyati`는 '가까이 (마음에) 담다'로 읽을 수 있다. 적대심으로 마음을 더럽히거나(padūsenti) 혹은 남녀가 서로를 `upanijjhāyati`할 때 탐욕(sārāgo)이 생기고 열병(pariḷāho)이 몸에 들어간다. 즉, 대상을 마음에 가까이 담는 행위 자체가 번뇌의 발생 조건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4.2. `atinijjhāyati`의 용례
오염원 경(MN 128)
"atinijjhāyitattaṃ kho me rūpānaṃ udapādi,
atinijjhāyitattādhikaraṇañca pana me rūpānaṃ samādhi cavi."
여기서는 수행 중에 형상들(rūpānaṃ)에 대한 `atinijjhā`(지나치게 담음)가 생겨서 삼매(samādhi)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담음'이 적절한 균형을 유지할 때는 선정으로 이어지지만, 지나치게(ati-) 한쪽으로 치우치면 오히려 삼매를 해치는 장애가 됨을 보여준다.
4.3. `diṭṭhinijjhānakkhanti`와 `sunijjhāyitaṃ`
짱끼 경(MN 95)
"saddhā, ruci, anussavo, ākāraparivitakko, diṭṭhinijjhānakkhanti —
ime kho, bhāradvāja, pañca dhammā diṭṭheva dhamme dvedhā vipākā. ...
sunijjhāyitaṃyeva hoti, tañca hoti rittaṃ tucchaṃ musā;
no cepi sunijjhāyitaṃ hoti, tañca hoti bhūtaṃ tacchaṃ anaññathā."
이 경문은 다섯 가지 인식 수단 — `saddhā`(믿음), `ruci`(취향), `anussavo`(구전),
`ākāraparivitakko`(맥락에 의한 추론적 생각), `diṭṭhinijjhānakkhanti`(견해에 의한 이해) —
은 현생에서도 두 가지 결실(dvedhā vipākā)을 맺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diṭṭhinijjhānakkhanti`는 '견해에 의한 담음을 허용함'으로 읽을 수 있다.
즉, 특정 견해를 마음에 담는 것을 용인하는 상태 즉 납득 내지 이해이다.
`sunijjhāyitaṃ`은 '잘 담아진(잘 이해했다고 여긴 것)' 것도, 이것이 공허하고(rittaṃ) 헛되고(tucchaṃ) 거짓된(musā) 것일 수도 있고, '잘 담아지지 않아도(dunnijjhāyitaṃ 이해되지 않아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오히려 사실이고(bhūtaṃ) 진실이고(tacchaṃ) 다르지 않은(anaññathā) 것일 수도 있다.
'잘 담음(쉽게 받아들임)'이 항상 진리를 보장하지는 않으며, '잘 담지 못함'이 항상 거짓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이는 `nijjhāna`(담음)라는 작용이 인식 주체의 조건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상대적·과정적 성격을 가짐을 시사한다.
꼬삼비 경(SN 12.68) / 방법이 있는가 경(SN 35.153)
"aññatreva, āvuso musila, saddhāya aññatra ruciyā aññatra anussavā
aññatra ākāraparivitakkā aññatra diṭṭhinijjhānakkhantiyā
atthāyasmato musilassa paccattameva ñāṇaṃ —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이 경문은 앞의 다섯 가지(信·好·聞·思·見解에 의한 容忍)가 아닌 본인 스스로의 앎(paccattameva ñāṇaṃ)을 강조한다.
즉, `diṭṭhinijjhānakkhanti`를 포함한 간접적 인식 수단들은 궁극적 진리를 증득하는 직접적 앎과는 구별된다.
4.4. `dhammanijjhānakkhanti`
끼따기리 경(MN 70)
"katamo ca, bhikkhave, puggalo dhammānusārī?
idha, bhikkhave, ekacco puggalo ye te santā vimokkhā atikkamma rūpe āruppā
te na kāyena phusitvā viharati, paññāya cassa disvā ekacce āsavā parikkhīṇā honti,
tathāgatappaveditā cassa dhammā paññāya mattaso nijjhānaṃ khamanti,
api cassa ime dhammā honti, seyyathidaṃ —
saddhindriyaṃ, vīriyindriyaṃ, satindriyaṃ, samādhindriyaṃ, paññindriyaṃ. ...
idha, bhikkhave, saddhājāto upasaṅkamati, upasaṅkamanto payirupāsati,
payirupāsanto sotaṃ odahati, ohitasoto dhammaṃ suṇāti, sutvā dhammaṃ dhāreti,
dhatānaṃ dhammānaṃ atthaṃ upaparikkhati,
atthaṃ upaparikkhato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
dhammanijjhānakkhantiyā sati chando jāyati, chandajāto ussahati, ussāhetvā tuleti,
tulayitvā padahati, pahitatto samāno kāyena ceva paramasaccaṃ sacchikaroti,
paññāya ca naṃ ativijjha passati. ayaṃ vuccati, bhikkhave, puggalo dhammānusārī."
여기서 `dhammānusārī`(법을 따르는 자)의 수행 과정이 체계적으로 제시된다:
1. 믿음에서 생겨남 (`saddhājāto`)
2. 스승을 친견하고 가까이 모심 (`upasaṅkamati`, `payirupāsati`)
3. 귀를 기울이고 법을 들음 (`sotaṃ odahati`, `dhammaṃ suṇāti`)
4. 법을 受持함 (`dhammaṃ dhāreti`)
5. 수지한 법들의 의미를 숙고함 (`atthaṃ upaparikkhati`)
6. 법들이 `nijjhānaṃ khamanti` — 법들이 (마음에) 담는 것을 허용함
7. 법에 대한 `nijjhānakkhanti` 때문에 의욕이 생김 (`chando jāyati`)
8. 용기 내고, 저울질하고, 정진함 (`ussahati`, `tuleti`, `padahati`)
9.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증득하고 지혜로 꿰뚫어 봄
(`kāyena paramasaccaṃ sacchikaroti`, `paññāya ativijjha passati`)
여기서 복수형의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는 문자 그대로 '법들은 (마음에) 담는 것을 허용들 한다.'는 의미로, 수행자가 법을 억지로 외우거나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자신의 마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받아들여지는 상태를 뜻한다.
이는 `dhammanijjhānakkhanti`(법의 담음을 허용 = 납득/이해)가 의욕(chanda)를 생기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 됨을 보여준다. 法隨者란 붇다의 말씀을 알아듣고 실천하는 자이다.
짱끼 경(MN 95)에서도 동일한 과정이 확인된다:
"atha tamhi saddhaṃ niveseti, saddhājāto upasaṅkamati ...
atthaṃ upaparikkhato dhammā nijjhānaṃ khamanti,
dhammanijjhānakkhantiyā sati chando jāyati ...
kāyena ceva paramasaccaṃ sacchikaroti paññāya ca naṃ ativijjha passati."
4.5. `sunijjhāpito` / `dunnijjhāpito` (밀린다왕문 경, KN Mil)
밀린다왕문 경(KN 19, Mil 4.1.10/Mil 5.2.1)에서는 문맥으로 읽으면 이 두 단어가 질문과 해결의 대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ayampi ubhato koṭiko pañho gambhīro sunipuṇo dunnijjhāpayo ..."
(이 질문은 양날의 검과 같은 난제로서, 깊고, 예리하고, 납득하기 어렵습니다[이해시키기 힘듭니다].)
"sunijjhāpito, bhante nāgasena, pañho..."
(존자 나가세나여, 그 질문은 잘 납득되었습니다[명쾌히 이해되었습니다].)
여기서 `dunnijjhāpayo`는 '납득되기 어려운, 이해시키기 힘든' 상태를, `sunijjhāpito`는 '잘 납득된, 명쾌히 이해된' 상태를 뜻한다. 이는 각각 `nijjhāna`(담음)의 '어려움'과 '잘됨'을 대비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su-`(잘)와 `du-`(어렵게)라는 접두어가 `nijjhāpita`(담아지게 함/이해시키게 함)에 결합하여 '이해/납득'이라는 파생적 의미를 생성했음을 알 수 있다.
Ⅴ. 용례 종합 및 해석
5.1. 禪으로 한역된 `jhāna`의 기본 의미
`jhāna`의 용례들은 수행 일반을 통칭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bhāvanā`(수행/수습)와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며,
'(더 나은 상태로) 됨(becoming)'이라는 과정적 성격도 가진다.
5.2. 파생어들에 나타난 '마음에 담음'의 작용
접두어에 의한 파생어들에서 먹이를 `jhāyati`하는 것과 비구가 `jhāyati`하는 것이 병치되어 나타난다. 두 경우 모두 같은 의미로 보아야 하며, '생각'이 아닌 '담음'으로 읽을 때 이 평행성이 설득력을 얻는다.
- 망아지가 풀을 `jhāyati`한다 → 풀이라는 대상을 마음에 담음
- 올빼미가 쥐를 `jhāyati`한다 → 쥐라는 대상을 마음에 담음
- 비구가 감각적 욕망을 장애물로(/품고서) 삼아 `jhāyati`한다 →
욕망이라는 대상을 마음에 담음
- 초선의 비구가 尋伺喜樂을 `jhāyati`한다 → 선정의 심소들을 마음에 안정적으로 담음
이러한 독해는 초선의 禪支인 尋伺(vitakka-vicāra)를 '담음'의 내용물로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제2선 이상에서는 尋伺가 사라지지만, 각 선정의 고유한 심소들(제2선: 喜·樂, 제3선: 樂·念·同時知, 제4선: 捨·念· 心一境性은 공통)이 새로운 '담음'의 대상이 된다. 즉, '담음'이라는 작용은 지속되되, 그 내용물이 단계에 따라 질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5.3. `upanijjhāyati`와 `atinijjhāyati`: '가까이/지나치게 담음'
- `(ativelaṃ) upanijjhāyati`는 '가까이 (마음에) 담음'으로 읽을 수 있다. 악의적이든 감각적 욕망에 의하든, 대상을 마음에 가까이 담는 행위 자체가 번뇌의 조건이 된다.
- `atinijjhāyati`는 '지나치게 (마음에) 담음'으로,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삼매를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5.4. `nijjhānakkhanti`: '담음을 허용함'에서 '이해·납득'으로
見(`diṭṭhi-`) 혹은 法(`dhamma-`)과 합성된 `nijjhānakkhanti`는 '담음을 허용(용인)한다'는 의미에서 '이해되고 납득된다'는 의미로 확장된다.
- `diṭṭhinijjhānakkhanti`: 견해에 의해 마음에 담는 것을 허용함 → 특정 견해를 수용(받아들이고 = 담고)하고 납득하는 상태
- `dhammanijjhānakkhanti`: 법은 마음에 담는 것을 허용함 → 법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지는 상태
`sunijjhāyitaṃ`(잘 담아지더라도)은 그 결과가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담음'이라는 작용 자체는 진리를 보장하지 않으며, 그 결과는 담는 주체의 조건과 담는 내용의 진위에 좌우됨을 시사한다.
5.5. `sunijjhāpito` / `dunnijjhāpito`: '잘 납득됨/납득되기 어려움'
밀린다왕문 경의 용례는 `nijjhāpita`(담아지게 하다/이해시키다)에 `su-`와 `du-`가 결합하여 '잘 납득됨'과 '납득되기 어려움'이라는 대비적 의미를 생성함을 보여준다.
이는 `nijjhāna`(담음)의 작용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이해'와 '납득'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
Ⅵ. 결론
이상의 용례를 종합하면, 禪으로 한역된 `jhāna` 및 그 파생어들을 관통하는 근원적 의미는 '마음에 담음(적재·품음·받아들임)'으로 제안될 수 있다.
이 '마음에 담음'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가진다:
1. 수행 일반으로서의 禪: `jhāna`는 대상 혹은 특정 심리요소를 마음에 담아 유지하는 근본적 작용이다. 이는 `bhāvanā`(수행/수습)와 동의어로 기능하며, 일반적으로 '(더 나은 상태로) 됨'을 지향한다.
2. 선정(禪定)으로서의 禪: 초선에서 제4선까지, 각 선정은 고유한 심소들(尋伺喜樂 → 喜樂 → 樂念동시知 → 捨念·心一境性)을 안정적으로 담아 유지하는 상태로 설명될 수 있다.
이는 '담음'의 내용이 변화할 뿐, 그 작용 자체는 일관되게 유지됨을 보여준다.
3. 번뇌로서의 禪: 감각적 욕망이나 악의와 같은 번뇌 또한 '마음에 담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경우 그것은 바른 선정이 아닌, 그릇된 집착의 상태로 기능한다. 망아지가 풀을, 올빼미가 쥐를 '담듯'이, 중생들은 번뇌를 마음에 담고 산다.
4. 인식과 수용으로서의 禪: `nijjhānakkhanti`(담음을 허용함)는 '이해하고 납득함'으로 확장된다. `sunijjhāyitaṃ`(잘 담아짐)은 반드시 진리를 보장하지는 않으나, `dhammanijjhānakkhanti`를 통해 법이 마음에 받아들여지게 되면 의욕(chanda)이 생기고 궁극적 진리의 증득으로 나아갈 수 있다.
5. 양면성으로서의 禪: `su-`(잘)와 `du-`(어렵게)라는 접두어는 '담음'이 잘 될 수도, 어렵게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sunijjhāpito`(잘 납득됨)와 `dunnijjhāpayo`(납득되기 어려움)는 이 양면성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본고는 기존의 어원적 접근이나 주석서에 의존한 해석을 넘어, 니까야 경전 자체의 용례에서 귀납적으로 도출된 '마음에 담음'이라는 의미를 통해 `jhāna` 개념의 일관된 해석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는 `jhāna`가 단순한 '명상 상태'나 '생각'이 아닌, 인식과 수행의 근본적 작용임을 환기시키며, 초기불교의 선정론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1차 자료 (빠알리 경전, 6차 결집본 CSCD 기준)
- Aṅguttara Nikāya (AN): Accharāsaṅghātavaggo (AN 1.51-60),
Aparāccharāsaṅghātavaggo (AN 1.382-562), Saddha Suttaṃ (AN 11.9), Mātugāma Suttaṃ (AN 7.50)
- Dīgha Nikāya (DN): Brahmajāla Suttaṃ (DN 1), Pāṭika Suttaṃ (DN 24), Aggañña Suttaṃ (DN 27)
- Majjhima Nikāya (MN): Māratajjanīya Suttaṃ (MN 50), Cūḷasaccaka Suttaṃ (MN 36),
Gopaka-Moggallāna Suttaṃ (MN 108), Canki Suttaṃ (MN 95), Kiṭāgiri Suttaṃ (MN 70),
Mahātaṇhāsaṅkhaya Suttaṃ (MN 38), Anupada Suttaṃ (MN 111)
- Saṃyutta Nikāya (SN): Kosambi Suttaṃ (SN 12.68), Upaya Suttaṃ (SN 35.153)
- Khuddaka Nikāya (KN): Milindapañha (KN Mil)

첫댓글
오타 몇자 수정했습니다. 논지는 동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