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이야기 (소해 장건상)
해마다 3월괴 8월이면 우리나라가 일제로 부터 저항과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 달로 기억되는 달이기도 하다
지난 일요일이다.
문중 모임의 전국 청장년회 회장님과
독립운동가 이며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 이셨던 소해 장건상 선생의 후손되는 광복회 경남 지회장님 해서 셋이 창원에서 만나 식사를 하게 되었다.
특별히 의미를 둔 만남은 아니었고 오랫만에 친교를 겸한 식사 자리에 더하여 국학 진흥원에서 개최한 인동장씨 남산파 유물 기탁 전시회에 전시했던 소해 장건상 선생의 유품을 돌려 드리기 위한 자리 까지 겸해서 이루어진 자리다.
흔히들 하는 이야기가 틀린 이야기는 아닌듯 하다.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리며 살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거지로 산다는 이야기...
굳이 일일이 열거된 고생담은 아니 었지만 한마디로 함축된 대를이은 고생담은 살기가 어려워 배우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툭 하면 2~3일 굶는 것에 익숙해 있었다며 쏟아내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직도 친일 저항 세력에 의해 선조님의 거룩한 업적과 애국정신이 폄하되고 훼손되고 있는 것이 다반사고 툭하면 빨갱이나 용공세력으로 몰아 붙여 친일을 정당화 하고 독립운동의 숭고함을 평가 절하 시키는 일이 적지않단다.
몰론 이 나라에도 누구도 그러했듯이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무일푼으로 시작해서 누구의 도움이나 배경없이 대기업을 이룬 입지전적 기업가나 이나라 경제에 전설을 이룬 사람이 적지 않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 어디 처자식을 챙길 여력이 있었으며 어디 한 곳에 정착해서 경제적 자립의 기반을 닦을 여력이나 여유가 있었겠는가? 떠돌이에 남의 눈을 피하 다니는 것이 전부 였을 것이며 도망자에 극도의 긴장감과 함께 생존의 절박함을 늘 가슴에 담고 살았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이 된다.
그리고 친일파의 경제적 기득권 선점과 배움의 독점은 해방후 이나라 정권 수립과 정권을 유지 지탱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철저히 외면 당하거나 배척을 당했다는 것이다.
출발선이 다른 경쟁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경기와 같은 것이다.
배운자와 못 배운자 기득권을 가진자와 못가진자 그리고 경제적 으로 기반을 깆춘자와 못 갖춘자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을 한디고 가정을 하면 절대로 경쟁이 되지않는 게임인 것이다.
같은 능력과 체력 조건을 갖춘 마라토너가 마라톤 경기를 하게되면 1km 먼자 출발한 사람은 당연히 결승점에 1km의 시차를 두고 먼저 도착 하게 되어있다.
가난을 유산으로 물려 받은 사람과 부를 유산으로 물려 받은 사람의 출발점 부터가 다르다.
이 나라 광복을 위해 온몸으로 싸우시며 독립운동을 하신 선조님이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은 것은 후손된자 누구나의 이야기 이지만 그동안의 고통과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늦었지만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이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하신 분들의 숭고하고 고귀한 뜻을 기리고 아직 발굴되지 않은 많은 분들의 숨은 헌신을 발굴하여 세상에 드러내고 또 힘을 모아 업적도 선양하고 추모 사업을 하는등 많은 일을 하고 있다니 참 다행 스러운 일이다.
잊혀져 가고 기억되지 않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 중 백범 김구 선생이나 이승만 박사 안중근 의사 김좌진 장군 홍범도 장군 김원봉 선생 등등 일부의 이름은 알려지고 기억할지 모르지만 상해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자금을 모아 조직적 독립운동을 하는데는 그분들 만의 힘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늘의 이야기는 독립운동가 이자 민족주의 정치가 소해 장건상 선생이다.
한학과 신학을 두루 공부 하였고 미국으로 건너가 신식 교육을 받았고 상해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참여하여 독립 운동을 주도 하였으며 스탈린을 비롯한 미국이나 유럽 중국등 해외 정치권에서 더 많이 알려지고 인정 받았으며 해방후 귀국하여 민족주의 정치 노선의 길을 걸었던 인물
해방후 남북 협상 남한측 대표로 참석하여 북에 억류 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그의 정치적 소신과 생명을 지켰고 자유당 정권 하에서는 장관직을 권유 받았으나 정치적 노선과 맞지않다 하여 거절 하기도 했으며 자유당 시절 부산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옥중에서 당선 되기도 하였고 이후로도 굽히지 않는 정치적 소신 때문에 정적의 견제를 받아 구속과 풀려 나기를 반복 하였다고 한다.
사후 그의 동상이 부산 시민들의 성금으로 부산 중앙공원에 세워져 그의 뜻을 기리고 추모를 해오고 있으나 지금은 세대가 바뀌어 생소한 이름이 되어 가고 있다.
이나라 독립과 건국 과정에서 그의 업적이나 활약상은 지대했으나 그가 지닌 상징성 보다 세상에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독립운동가 이자 이나라 진보 정치가 소해 장건상 선생을 오늘의 내 이야기속에 담아 본다.
이하 내용은 소해 장건상 선생으로 검색하여 인터넷에 올라온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내용이다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독립유공자, 정치인이다. 1986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882년 경상도 인동도호부 읍내면 신곡리(현 경상북도 구미시 신동)에서 월포(月浦) 장현도(張顯道)의 10대손인 아버지 장운원(張雲遠)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성학(李聖鶴)의 딸 사이의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집이 경상도 동래부로 이전하면서 동래부에서 자랐다. 좌천재에서 한문을, 육영재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공립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가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이후 미국 발프레이조 예비 학교, 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16년 신규식의 요청으로 상하이에 건너가 동제사에 참여한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발족에 참여하여 외무부 차장을 지냈다. 그러나 뒤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탈퇴하였다. 1920년 말 베이징 시로 건너가 국민 대표자 대회, 고려공산당 등에 참여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노선에 비판적인 인사들과 함께 군사 통일 회의를 조직했다.
1926년 10월 한국 유일 독립당 촉성회 집행 위원이 되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영사관 경찰에 체포된 뒤 송환, 일제로부터 김원봉을 유인할 목적으로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건너 갔다가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재 입각, 국무 위원, 학무 부장 등을 역임 하였다.
8.15 광복 후 1946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탈퇴, 근로인민당 부위원장과 민족주의 민주 전선 등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여운형이 죽자 근로 인민당을 이끌었다. 1948년 남북 협상에 참여하였다. 남북 협상 기간 중 북한 측의 일방적 협상 결정에 반발하여 감금당했다가 홍명희, 김두봉 등과의 인연으로 풀려났다.
1948년 7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이승만 대통령으로 부터 내각 입각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부산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원내 자유당에 입당하였다가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반발하여 호헌동지회에는 참여했으나 민주당 창당에는 불참했다.
1957년 11월 박정호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되었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1958년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입건되었다가 풀려났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사상범으로 투옥되었으나 박정희의 특별 배려로 석방되었다.
사후 1986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3. 기타[편집]
야인시대에서는 이병준이 연기했다.
여운형, 조소앙, 조봉암 등과 함께 한국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고려 상장군 장금용의 후손으로 인동장씨 남산(南山)파 16대손 상(相) 항렬. 인동 장씨 31세. 인동장씨대동보 15권 남산파 269쪽에는 1883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인근의 오태동 구평동 황상동 인의동 양호동 구포동 임수함께 인동 장씨 집성촌이다.
12.12 사태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장태완 장군과 장세용 구미시장도 이 마을 출신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서울에서 미쳐 탈출 하지 못하여 여운홍과 함께 북한과의 악연이 다시 시작됐고 납북당할 뻔 했지만 가까스로 따돌리는데 성공하여 납북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입각 제의는 먼 친척인 장택상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장건상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이 자리를 받을 경우 민족 분열이 가속화될 수 있다고 판단하여 당시 같은 자리에 있던 장택상에게 정중히 거절했고 장택상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그러한 거절을 전달했다고 한다.